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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1/15 13:54:33
Name 스칼
Subject [일반] 비겁자의 변
옛날 일이다. 한창 반찬 재활용 이슈로 시끄러울 때, 식당에서 한 청년이 일행에게 하는 말이었다.

"반찬 재활용하는 관습을 막으려면, 나부터 일단 반찬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는 거야.
사람들이 그렇게 해나가다보면 재활용할 수가 없어지고 그러면 악습이 끊기지 않을까?"

나와 같은 생각을 해본 사람이 있었다니, 반가워라. 그러나 나는 희생양이 될 것을 예상하며 이내 접었었기에 자신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당당하게 공언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일행의 반응도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하지만 너만 그러고 말걸? 괜히 헛수고하지 말거라

나는 한 때 대의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고 스스로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라면 독립운동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불안하고 어리숙하고 어설픈데 뜨거운 청소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적당히 차가워지고 상당히 안정되었으며, 편차가 심했던 역량은 낮아지고 높아지고해서 균형을 이루었다.

드디어 나는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아직도 세상은 진일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이 늘 쉽지 않으므로 생기게 되는 누군가의 고통이나 불합리에 대해 쉽게 수긍해버리게 된다. 어쩔 수 없지-어디든 갖다붙일 수 있는 마법의 말.

인터스텔라를 보고 픽션 속의, 잃을 것 없는 안전한 영웅이 되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던 나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만 발걸음 하나 내딛지 않으면서, 현실에서는 될 수 없고 되지도 않을 환상 속 희생을 꿈꾸는 안일함.
10대 시절의 나는 누구였을까. 그 마음은 사실 이타주의가 아니고 감상주의나 소영웅주의라도 되었던 건지. 그래서 이렇게 뜯어낸 상처만 남고 사라진건지.

누군가를 도와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것만은 여전한 성격적 특성인 것 같다.
그러나 안전한 범위 내에서, 내 살점이 뜯기지 않아야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 되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공동체를 위한 봉사지 라고 합리화를 시전하면서 오늘도 나는 굳어진 마음으로 겉으로만 성토를 잠깐 해본다.
누군가는 원래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라 하고 누군가는 사실 비겁함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학가 식당이었기에 내 또래 같았던 그 청년은 지금쯤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나는 잃어버린 감정을 이름도 모를 그 누군가는 아직 지니고 있기를 바라본다.

이렇게 또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며 오늘도 나는 세상의 송곳들을 응원만 한다. 아주 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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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天君
15/11/15 14:45
수정 아이콘
저도 저걸 늘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반찬의 재활용을 막을 수 있을까. 저는 안 먹는 반찬도 많고, 안 먹는 반찬 때문에 돈을 내는 것도 싫거든요. (일본처럼 좀 합리적으로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식당에서 반찬 추가 할 때 일부러 돈 더 드린다고 먼저 말씀을 드리기도 하고 안먹는 반찬은 미리 갖다줄 필요 없다고 해요)

그렇지만 저 하나가 아낀다고 해서 세상의 큰 부조리가 다 사라지진 않겠죠. 그래서 구조적으로 접근해보곤 합니다. 반찬 재활용 같은 것도 공급, 유통의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세상 문제가 다 어떤 제도와 체재에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거시적인 개혁에서 개인의 힘은 미약하죠. 참 서글픕니다.
15/11/15 15:23
수정 아이콘
답글 감사합니다 제 첫 자유게글에 첫 리플을 달아주셨어요! 저도 일본처럼 반찬을 따로 구매하거나 아니면 안먹는 반찬 미리 배제할수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저도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구조적인 고민을 해보고 또 다시 한계를 느낍니다 밑에 회색분자라고 글쓰신것까지 비슷 크크 씁쓸하지만 이 포지션에 있게된 소회를 적어보았습니다
15/11/15 16:06
수정 아이콘
전 재활용된 반찬도 괜찮습니다.

깨끗하고 인테리어 좋은 대신 비싸고 내용물 부실한 프랜차이즈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재벌 뭐라하고 정부 뭐라고 하는 것처럼 그냥 내가 대하는 자영업자들한테 좀만 더 관대해지면 안되는 건가.. 생각하고요.
15/11/15 18:23
수정 아이콘
네 그말씀도 맞아요 개성있고 인심좋은 식당이나 시장대신 적당하고 동일한 서비스 수준을 약속해주는 프랜차이즈만 살아남는 게 여러원인이 있지만 안타깝긴 합니다 흑 저는 그래서 그냥 먹을만큼 미리 담을 수 있는 곳이 좋더라구요 크
우와왕
15/11/15 17:35
수정 아이콘
예전의 나의 모습들, 생각들은 소영웅주의에 불과했던 것인가..하는 고민들에 공감합니다. 무기력을 학습한 기분이에요. 송곳들에게, 수많은 이수인들에게 말없은 응원밖에 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구요.
15/11/15 19:11
수정 아이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무기력이 학습되었다는 말 공감가네요 응원이 너무 작아서 가닿지도 않을 거 같아서 슬퍼요 뜬금없지만 닉네임이 귀여우십니다 우와왕 크크
우와왕
15/11/15 20:46
수정 아이콘
크크 초딩때 바람의 나라 할때부터 사용하고 있는 아이딥니다
-안군-
15/11/15 17:58
수정 아이콘
개인은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 시스템이 개인을 바꿀 뿐이다... 라고 늘 생각하고 있는 1인입니다.
요새 '응답하라 1988'을 하고 있던데, 제가 기억하는 쌍팔년도의 서울 거리는 쓰레기가 넘쳐나는 거리였습니다.
매일같이 환경미화원들이 쓸어담아도, 리어카 한 가득 싣고 가도... 내일이면 똑같이 더러워지는 그런 거리였죠.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서울 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합니다. 물론, 동경 등에 비하면서 아니라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 이유가... 쓰레기 종량제 실시, 쓰레기 무단 투기시 벌금... 을 제도화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그 때 보다 시민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는 1%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예전 무한도전 가요제때의 일만 봐도 딱 보이지요.
15/11/15 19:23
수정 아이콘
그렇군요 저도 90년대를 경험해본 세대이긴 하지만 그게 좀 정신이 없을 때라 가끔 지금과의 차이점이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만 덕분에 한가지를 더 알게되었네요
焰星緋帝
15/11/15 21:46
수정 아이콘
저는 안 먹는 반찬은 아예 도로 드립니다. 뷔페식인 경우 정말 먹을 만큼만 가져 오고요. 가져 온 건 무조건 다 먹고요...음식물 쓰레기 남는 거 너무 싫어요.
나루호도 류이치
15/11/16 06:32
수정 아이콘
아예 손도 대지 않은 반찬이라면 재활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리저리 손대고 그래서 침도 뭍고 그랬으면 x. 물론 손님 입장에서는 그걸 구분할 방법이 없기에 찬 재활용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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