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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8/05 18:54:25
Name leeve
Subject [일반] 나의 왕따 이야기 - 2
반에서 가장 힘이 세던 아이가 날 보며 코 후비던 손으로 머리카락을 꼰다고, 더럽다고 놀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로 모두가 나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벌게졌다. 창피했다.

그제야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들이 전혀 위생적이지 않은 행동임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코를 후비는 행위가 더럽다는 것을 알 기회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정말 나의 위생관리에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즈음에 외가 쪽 사촌 누나의 결혼식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 식장에서 무의식적으로 코를 후비던 나를 형이 밖에서 그러지 말라고 제지한 기억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왜 하지 말라는지 알 수 없었던 그 이유를
왕따가 된 이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큰아버지네가 물려준 구형 컴퓨터로 할 수 있던 게임들만이 친구였다.



왕따가 되고 나니 유치원부터 왕따였던 여자애가 떠올랐다.

그 애는 순전히 못생겨서 따돌림을 당했다.

누런 피부에 얼굴엔 주근깨가 가득했던 그 아이는 이름 대신 양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나도 왕따가 되었지만, 나에게도 그 아이는 여전히 왕따였다.

단지 내가 그 아이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게 서러웠다.



학교 교실과 복도 바닥은 목재로 되어있었고, 주기적으로 왁스 칠을 했다.

그래서 학교 건물의 바닥은 미끄러웠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은 복도에서 슬라이딩하며 놀았다.

나는 그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슬라이딩에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 넘어졌다.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어느 그릇판매회사의 영업직이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살게 된 아파트는 여전히 은행 것이었지만 그래도 급한 빚은 어머니의 노력 끝에 거의 다 갚았던 것 같다.



이제는 한숨 놓나 했는데 이번엔 IMF가 우리 집을 덮쳤다.

IMF가 나에게 직접 입힌 손해라고는 매년 학교에서 주던 어린이날 선물을 못 받은 게 전부였지만 아버지는 일순간에 직장을 잃고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아직도 거실 방바닥에 앉아 벼룩시장을 보던 아버지의 힘 없이 굽은 등이 잊히지 않는다.

다행히 아버지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음료수 중간 도매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만성적인 가난을 해결할 방법은 이제 없었다.



나의 왕따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위생관념이 생긴 것은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다.

그건 왕따가 되는 이유로는 충분했지만 일단 왕따가 된 다음에는 그딴 건 아무렴 관계없었으니까.

한번 찍힌 인식표가 저절로 사라지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학교생활이 마냥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던 게 5학년 때는 짝사랑하던 아이와 짝지가 되었다.

그 애도 날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날 괴롭히지 않았을뿐더러 간혹 같이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학교에 다닐 이유가 되기엔 충분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땐 소박한 내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던 여자애와 반이 갈리고, 물건 고르기를 통해 덩치 큰 여자애가 내 짝지가 되었다.

나름 반에서 서너 번째로 키가 큰 나였지만 그 여자애는 나보다 더 컸다.

나로 짝지가 정해진 그 순간 찌푸려진 그 여자애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어째서 하필이면 나는 형형색색의 중성 펜이나 귀여운 액세서리가 아닌 이상하게 생긴 쇳덩이를 골랐던 걸까.



새 짝지는 나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실내화 안에 압정이 있다거나 실내화가 사라지기도 했다.

누가 한 짓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그때 즈음부터 싸움도 더 자주 하게 됐다.

아니, 다툼을 가장해서 많이 맞았다.

나의 싸움 실력은 반에서 뒤에서 셈하여 다섯 손가락 안이었으니까.



그 무렵 내가 받던 용돈은 일주일에 이천 원이었다.

용돈을 받으면 보통 불량식품을 사 먹는데 썼다.

씨씨나 아폴로 같은 불량식품은 백 원이니까 비교적 여러 번 사 먹을 수 있었다.

같은 백 원이라도 비교적 양이 많던 논두렁 같은 걸 특히 좋아했다.

아무래도 과자 용량 비교해 가며 고르는 버릇은 그때부터 들인 것 같다.



그때는 스타크래프트가 대유행하고 있었다.

게임잡지였는지 텔레비전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연히 본 스타크래프트의 유닛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러커 한 부대가 버로우 해서 쏘는 가시 공격은 정말 기가 막혔다.
보이지도 않는데 숨어서 공격하다니.

그전까지 하던 삼국지 4, 대항해시대 2, 랑그릿사 2 같은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래픽에 정말 한순간에 홀렸다.

해보고 싶었지만, 당시 피시방의 한 시간 이용료는 천오백 원이었고 스타크래프트는 우리 집 구형 컴퓨터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내 용돈은 일주일에 이천 원이었다.



아버지는 돈 버는 방법을 몰랐다.

더욱이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영세한 자영업자라 결제를 위해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녔는데, 그 돈을 그냥 주머니에 통째로 넣고 다녔다.



스타크래프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나는 궁리를 하다가 한가지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가 욕실에 씻으러 간 사이에 몰래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려 있던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집어 꺼내 들었다.

반으로 접혀서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폐뭉치를 펴니 아래쪽엔 만 원짜리가 있고 위쪽에는 영수증이 있었다.

그리고 영수증 밑에는 천 원짜리가 몇 장 있었다.

그 중 천 원짜리 석 장을 꺼내 후다닥 내 주머니에 집어넣고 안방을 나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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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짧은 분량으로 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짧게 쓰기가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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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픽미드갑니다
15/08/05 18:58
수정 아이콘
아..절단신공.. 길게좀 부탁드립니다
15/08/05 19:01
수정 아이콘
쓰다보니 생각보다 길어져서... 얼른 마저 쓰겠습니다.
비둘기야 먹자
15/08/05 19:02
수정 아이콘
좋네요. 적절히 절단 해주는것도 맛이죠.
가을방학
15/08/05 19:18
수정 아이콘
잘읽고 있습니다.
짧은 호흡이 글의 완성도를 높인다거 생각합니다!
tannenbaum
15/08/05 19:23
수정 아이콘
필력이 부러운 분들이 참 많아요.
잘 보고 있습니다.
스위든
15/08/05 20:08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고학년때 즐기셨던 게임 리스트를 보니
비슷한 연령대인 것 같네요.
글 잘읽었습니다~~
Vicfirth
15/08/05 21:53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 6학년 때 스타가 대유행이면, 저랑 비슷한 연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88) 크크
저도 어머니 화장대에 있는 100원짜리, 500원짜리 몰래 몰래 가져가서 피시방가서 게임하곤 했거든요.
길게좀 부탁드립니다..(2)
15/08/05 23:32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 때, 투석기와 포교 할아버지로 학교 컴퓨터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를 제패하고 또 뭐가 없나싶어 스타 저글링 블러드를 하던 기억이 나네요. 라이벌리였나, 그런 맵에서 터렛 지으면서 혼자 뿌듯해 하기도 했었는데, 확실히 여긴 게임 사이트인가봅니다. 헤헤.
허니띠
15/08/06 10:04
수정 아이콘
저는 그당시 일주일에 700원받았습니다.
빨리 다음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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