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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5/02 08:30:09
Name Andromath
Subject [일반] 8인의 반역자 (2) - 페어차일드
1부:

이들 8인 중 후에 인텔의 공동 창업자가 되는 로버트 노이스를 보면 그가 어느 정도로 쇼클리와 일하는데에 열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로버트 노이스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그는 8인 중 어찌보면 유일하게 학위 과정 중 반도체에 관해서 연구를 한 인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노이스는 아이오와에서 자랐고, 그린넬 칼리지에서 1949년에 물리학과 수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의 은사인 그랜트 게일 (Grant Gale) 물리학 교수를 만나는데, 게일 교수가 그가 벨 연구소에서 갓 발명된 트랜지스터들 중 두 개를 받았던 것을 그의 수업에서 선보인 것이 노이스를 반도체 분야로 이끄는 큰 계기가 됩니다. 또한 게일 교수는 노이스가 MIT로 박사 학위를 받으러 가는 것을 추천해주었고요. 노이스는 MIT에서 1953년 박사 학위를 받고, 필라델피아에 있던 Philco라는 회사에 입사합니다. Philco에서 일하던 중 노이스는 쇼클리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쇼클리는 자신이 팔로 알토 지역에 세울 쇼클리 반도체에 입사시킬 인재를 찾고 있었습니다. 노이스는 그 후 쇼클리 반도체와 면접도 하기 전에 아예 온 가족을 이끌고 팔로 알토 지역으로 이주를 해 버립니다. 그 후 그가 원하던대로 입사할 수 있었긴 했습니다만.


로버트 노이스를 반도체의 길로 이끈 그랜드 게일 교수. 한 번은 노이스가 학교에서 하는 루아우 (땅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쪄서 먹는 하와이식 바베큐)를 준비하겠다고 이웃집에서 돼지를 훔쳐다가 교정에서 도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퇴학당할뻔한 노이스를 게일 교수가 도와줘서 정학으로 그치고 맙니다.



재앙이 되어버린 쇼클리의 매니지먼트


"사실, 쇼클리는 어떻게 매니지먼트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

"재앙에 가까운 나쁜 경영자,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나쁜 상사"

우스갯소리로 직장 상사를 평할 때 두 개의 척도로 판단한다고들 들었습니다. 그가 멍청하냐/똑똑하냐, 그리고 부지런하냐/게으르냐로요. 마찬가지로 어느 회사의 경영자를 판단할 때도 비슷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에 쇼클리 반도체가 세워진지 10년만에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그 결과만 놓고 돌이켜보면, 경영자의 지식 수준이나 그 분야에서의 명성 같은 것은 한 개인이 조직의 수장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똑똑함과는 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심지어 그가 노벨상 수상자였다 할지라도요.
사실 쇼클리가 그가 만든 회사를 떠난 것은 그가 세운 회사가 문을 닫기 한참 전이었고, 경영상 판단 착오 (일례로 쇼클리 다이오드)를 한 것은 1950-60년대의 반도체 업계가 급격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쇼클리가 과연 경영자와 상사로서 '똑똑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이유로 어느 정도 변호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결과를 놓고 객관적으로 따지면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두번째 척도인, '부지런했는지'에 대해서는 무척 부지런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것도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요. 하지만 나중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나서는 역시 안 좋은 방향으로 '게을러'지게 됩니다.

1956년에 쇼클리 반도체를 창업한 이후, 1년 동안 그가 벌인 행적 중심으로 적어봅니다. 요약하자면, 그는 부하 직원들을 차별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 또한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기를 원했고, 더군다나 남을 믿지도 못했습니다. 쇼클리의 명성에 이끌려 입사한 직원들은 그의 실체를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956년 쇼클리가 전 직원을 선발하고 우선적으로 한 일은 쇼클리 반도체 모두의 연봉을 목록화해서 회사 벽에 공고한 것이었습니다. 쇼클리는 자신의 행동이 본인이 벨 연구소에서 해왔던 대로 - 경쟁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를 포함한 모두와의 끊임없는 경쟁, 이건 본인을 더 돋보이게 해 줄 벨 연구소에서의 비밀스러웠던 접합 트랜지스터 연구를 포함한 - 경쟁을 유도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만, 글쎄요.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바로 옆 직원들이 본인의 연봉을 다 알고 있다고 상상해보시면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실 겁니다. 쇼클리는 또한 직원들이 본인들의 성과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도 막았습니다. 그런데 쇼클리 반도체가 위치했던 건물의 크기를 참고하시면 (제 첫번째 글 참조), 이게 얼마나 직원들에게 부담이었을지는 상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쇼클리는 누군가 본인을 음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의 명성을 깎아내리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한 번은 그의 비서가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었는데, 쇼클리는 이 것은 본인을 깎아내리기 위한 누군가의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거짓말 탐지기를 주문하여 전 직원에게 테스트를 받기를 종용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직원들 중 아무도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비서가 손을 베인 것은 다름아닌 구부러진 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쇼클리의 의심증은 커서 (쇼클리의 행적을 볼 때 편집증으로 의심된다고도 합니다 - 위키피디아 출처) 몇몇 인물들을 제외한 직원들과의 모든 대화를 녹음했고, 가끔은 직원들과의 대화에 자신의 부인을 동석시켰습니다. 게다가 직원들의 연구 결과를 믿지 못해서, 이들 결과들을 본인이 속했었던 벨 연구소에 보내 검사를 받게하기까지도 했습니다.. 본인이 뛰쳐나온 벨 연구소에다가요.

쇼클리가 벌인 일화들은 여러 기록으로 잘 남아있고, 배신자 8인이 뛰쳐나오게 된 일로도 어느 정도로 형편이 없었을지 잘 설명이 되겠습니다만,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이들 배신자 8인이 쇼클리에 대해 직접 평한 것이 있나 궁금해서 찾아보았지만 그다지 적나라한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유야 여러모로 짐작이 갑니다만... 쇼클리 반도체에서 일했던 다른 사람들도 쇼클리 본인에 대해서 언급하기 보다는 쇼클리 반도체라는 회사가 계가가 된 실리콘 밸리의 중흥에 대해 더 이야기고픈 인터뷰들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쇼클리는 경영자로서 실패를 겪은 후엔 스탠포드 대학에 장기간 재직했는데, 그가 죽은 직후 스탠포드 대학에서 내놓은 공식적인 비망록의 평가가 다소 적나라한 편이라 옮겨봅니다.

"돌이켜보면, 쇼클리가 벨 연구소에서 보여준 뛰어난 지적 능력이 뛰어난 기업 경영 능력으로 연결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쇼클리의 잘못된 경영 판단


쇼클리의 경영에서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두 가지였는데, 첫번째는 그가 벨 연구소에서 발명한 게르마늄 기반의 접합 트랜지스터를 발전시킨 형태의 4-layer 다이오드, 소위 '쇼클리 다이오드'라고 불린 소자의 상업화에 집착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실리콘 대신 게르마늄 기반의 소자를 상업화하고자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왜 실착이 되어있는지는 좀 더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940년도 후반에 진공관을 대체할만한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이후 벨 연구소뿐만이 아니라 많은 기업들이 잇달아 트랜지스터 연구에 투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에 따른 1950, 60년대의 군수산업의 수요 증가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 회사들 중 하나가 지금도 건재한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Texas Instruments, 줄여서 TI)입니다. TI는 1951년에 설립된 이후 주목할만한 성과를 내 놓았는데, 이 중 하나가 실리콘을 기본으로 만든 트랜지스터였습니다.

사실 트랜지스터 초창기 연구에서 게르마늄이 실리콘보다 선호된 것은 간단힌 이유였는데, 녹는 점이 낮아서 결정화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게르마늄 기반의 반도체는 곧 난관에 부딪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불안정성이었습니다. 특히 트랜지스터가 외부에 노출되는 경우 변화하면서 그 특성이 변화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에 얇은 피막 (film)을 입히는 것이 필요했고 또한 필수적으로 절연이 되어야 했습니다.


현재 생산되고 있는 칩의 경우 패키징이 된 상태로 판매됩니다


이 점에서 실리콘은 굉장히 편리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리콘 산화물인 SiO2가 절연체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실리콘 기반 트랜지스터를 생산하는 경우, 순수한 실리콘 (Si) 으로 이루어진 웨이퍼 (wafer)가 트랜지스터를 형성하는데 기반의 역할을 하는 substrate의 역할을 하고, 그 위에 impurity로 doping을 해서 n 혹은 p-type 트랜지스터를 형성하고 나면, 이 후에는 단순히 실리콘 산화물인 SiO2을 형성함으로써 그 아래 형성된 트랜지스터를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그에 반해 게르마늄 산화물인 GeO2는 다 좋지만 '물에 녹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습기에도 취약한 것은 물론이고, 불과 몇 년 후에 산업 표준이 되는 트랜지스터 공정 방법인 photolithography를 이용한 planar method - 역시 페어차일드의 작품입니다 - 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현재 널리쓰이는 트랜지스터인 MOSFET의 공정 과정입니다. 실리콘 substrate위에 SiO2를 형성시키고, 트랜지스터들을 연결시키는 interconnect로 구리 (copper)를 쓴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만 초창기에는 구리 대신 알루미늄을 대신 재료로 사용했는데, 여기엔 노이스의 공이 큽니다.

게다가 게르마늄 기반 트랜지스터는 고온에서의 동작이 실리콘보다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단점도 있었고요. 결정적으로, 실리콘은 모래에서 나옵니다. 모래야 무한정하고요. 실리콘으로 트랜지스터를 만들게 되면 순수 '재료' 비용은 웨이퍼를 만드는데 드는 비용과 interconnect를 만들기 위한 금속과 doping 재료에 거의 한정됩니다. 요즘이야 스케일이 줄어들면서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긴 합니다만, 순수 재료의 비용만 따지만 게르마늄은 실리콘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 초창기에는 실리콘의 높은 녹는 점 때문에 순수한 실리콘 boule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었으나, 이 마저도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라집니다.



여담이 길었는데, 이처럼 실리콘은 여러모로 게르마늄보다 가능성을 갖고 있던 물질이었습니다. 쇼클리도 이를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경쟁사라고 할 수 있을 TI가 실리콘 기반의 트랜지스터를 개발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머리도 좋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또한, 쇼클리는 좀 더 복잡한 형태의 다이오드를 개발하고자했고 이 새로운 소자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네 개의 layer로 이루어진 pnpn형태의 다이오드, 후에 일컬어지기를 쇼클리 다이오드라 불린 것입니다. 쇼클리 다이오드는 그가 벨 연구소에서 발명한 npn 형태의 트랜지스터에서 비롯된 다이오드보다 하나의 layer가 더 많은 pnpn 형태입니다. 이렇게 기호로 보면 단순히 하나의 layer가 더 추가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아래 그림처럼 pnp와 npn이 합쳐진 그보다 더 복잡한 형태입니다.



쇼클리 다이오드는 분명 하나의 소자 안에 하나의 layer를 더 추가한 만큼 좀 더 다양한 동작이 가능했고, 그로 인해 하나의 회로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소자의 숫자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트랜지스터를 형성하는 것과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수작업으로 많이 이루어졌고, 트랜지스터를 개당으로 팔던 시기라, 트랜지스터 하나를 복잡화하는 대신에 회로 안에 들어가는 전체 트랜지스터 개수를 줄이는 시도가 비용과 성능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이스를 비롯한 쇼클리 반도체의 직원들은 그들이 추구해야할 방향은 게르마늄 기반의 쇼클리 다이오드가 아닌 실리콘 기반의 기존 접합 트랜지스터라고 보았습니다. 실리콘이 가진 여러 장점과 경쟁사의 발전 방향을 보건데, 쇼클리가 이를 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회사를 차린 후 쇼클리 다이오드에 관한 연구 이외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기서 그의 버릇이 또 한 번 등장하는데, 쇼클리 다이오드를 연구하는 비밀(...) 팀을 만들어서 몇몇 직원들을 이 팀에 배속시켜 연구시킵니다. 이런 처사에 불만을 가진 직원들은 많았고, 몇몇은 회사가 생겨난 해인 1956년에 쇼클리 반도체를 떠납니다.

후에 쇼클리 반도체는 쇼클리 다이오드를 개발하는데 성공합니다. 다만 그 때는 이미 페어차일드를 비롯한 회사들이 집적 회로 (integrated circuit)를 생산되던 시대였고, 트랜지스터들과 기타 소자를 하나의 기판 위에서 형성해버리는 기술이 등장한 이상 개개의 소자를 복잡하게 만들어 판매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트랜지스터를 생산해서 회로를 조립하는 회사에 판매하는 시대가 아닌, 집적회로를 만들어 팔던 시대였습니다. 쇼클리 다이오드는 상업화 후 역사 속으로 급속히 사라집니다. 1960년에 모회사인 벡맨 인스트루먼츠가 쇼클리가 떠난 쇼클리 반도체를 매각하였고, 1968년 쇼클리 반도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쇼클리 반도체가 존재했던 건물. 사진을 잘 보시면 기념비가 보입니다. 지금은 할랄푸드 마켓으로 변했네요



캘리포니아 그룹


1956년은 쇼클리에게는 바쁜 한 해였습니다. 쇼클리 반도체를 열었고, 나름 바쁘게 경영을 했으며, 연말에는 그와 벨 연구소에서 함께 있었던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합니다. 하지만 바쁜 일정 속에 쇼클리는 무기력하거나 신경질적일 때가 잦아졌고, 그의 행동과 판단을 보고 난 후 그를 보고 따라왔던 많은 직원들 중 일부는 선택을 하기 시작합니다.


쇼클리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 파티 사진. 많은 수가 이듬해에 회사를 떠납니다

그들 중 후에 캘리포니아 그룹이라고 불리게 된 일곱이 배신자 8인 중 일곱 명에 해당하는 줄리어스 블랭크 (Julius Blank), 빅터 그리니치 (Victor Grinich), 진 호에니 (Jean Hoerni), 유진 클라이너 (Eugene Kleiner), 제이 라스트 (Jay Last), 고든 무어 (Gordon Moore)와 샐던 로버츠 (Sheldon Roberts)입니다. 로버트 노이스는 아직 빠져있는데, 그 당시에만 해도 쇼클리와 다른 직원들의 불화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나름 노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쇼클리가 그 당시 남긴 기록들만 보아도, 노이스와 대화하라, 노이스를 통해서 하라는 식의 표현이 많이 보입니다.

1957년 3월, 이들 중 유진 클라이너는 다른 캘리포니아 그룹 멤버들의 후원을 받아 비밀스럽게 부모가 있던 뉴욕을 방문합니다. 그는 Hayden, Stone & Co라는 투자 회사에 속해있던 아서 락 (Arthur Rock)과 알프레드 코일 (Alfred Colye)을 접촉해 쇼클리 반도체를 나와 차릴 새로울 회사에 투자할 회사를 찾기 시작합니다.

1957년 5월, 이들 일곱명은 쇼클리 반도체의 모회사인 벡맨 인스트루먼츠의 CEO인 아놀드 벡맨을 만납니다. 이들은 쇼클리를 대신할 전문 경영자를 찾아줄 것을 요구하였고, 가능하다면 쇼클리에게 걸맞는 교수직을 찾아주기를 요구했습니다 (거의 일선에서 손을 떼줄 것을 요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벡맨은 난색을 표했고, 쇼클리를 유지하는 대신 그의 권한을 일부 줄이는 것으로 설득하고자 합니다. 아놀드 벡맨은 이 때 자신의 이런 선택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이들 그룹 (일곱명)이 나에게 찾아와서 쇼클리냐, 우리냐를 선택하라고 할 당시 쇼클리가 어떤 식이였는지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만약 그 당시에 지금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면, 난 기꺼이 쇼클리에게 작별을 고했을 것이고 아마도 지금은 반도체 산업에 한창이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쇼클리와 나는 얼마 간 사업을 계속했지만, 결국엔 쇼클리가 이 사업을 하는데에 부적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57년 6월, 벡맨은 쇼클리와 직원들 사이에 위치할 새로운 매니저를 찾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들 일곱명은 이미 쇼클리 반도체로부터 마음이 떠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참여하지 않았던 노이스를 그들이 스스로를 일컬었던 용어인 '캘리포니아 그룹'에 참여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총 여덟명이 된 캘리포니아 그룹은 그들을 도와 투자자를 모집하던 락과 코일을 만나 기념비가 될 만한 '1달러 계약'을 체결합니다. 코일은 그까지 포함한 총 열 명에게 각각 1달러 지폐를 건냈고, 그들 각각은 이 위에 서명했습니다. 이 열 명 - 투자자 둘을 포함한 - 은 그 후로 한 배를 타게 됩니다.


반역


락과 코일이 이들을 도와 투자자들을 찾기 시작하긴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대로 당시 반도체 연구의 중심지는 동부였고, 캘리포니아 그룹은 그들이 위치한 서부, 팔로 알토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도중 1957년 8월, 이들은 동부에서 군수사업으로 유명해진 페어차일드 항공과 카메라 (Fairchild Aircraft and Camera)의 셔먼 페어차일드 (Sherman Fairchild)를 만나게 되고, 캘리포니아 그룹이 시작할 새로운 사업에 대한 투자 약속을 받습니다. 페어차일드는 이들이 서부에서 사업을 하는 것과, 새 사업의 이름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Fairchild Semiconductor)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이 새로운 회사의 주식 총 1325주 중 총 800주는 각각 100주씩 캘리포니아 그룹의 여덟명에게, 225주는 락과 코일이 속한 투자 회사에, 300주는 남겨놓는 것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다만 투자의 대가로 캘리포니아 그룹은 페어차일드 모회사에 자신들의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포기하는 것과, 300만불에 모회사인 페어차일드가 그들의 주식 전부를 살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합니다. 이는 후에 페어차일드 내에서 분란이 생김과 동시에, 이들 여덟명이 페어차일드를 떠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1957년 9월, 이들 여덟명은 쇼클리 반도체를 떠납니다. 그리고 이들은 - 누가 처음 명명했는지는 모르지만 - 반역의 8인 (traitorous eight)으로 불리게 됩니다.

여덞명이 떠나던 날의 쇼클리의 메모


그리고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성립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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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ctric
15/05/02 08:49
수정 아이콘
와 현재 한창 페어차일드랑 협업 진행 중인데 여기서 이름 들으니까 신기하네요. 페어차일드가 이렇게 역사 깊은 회사인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확실히 국내 업체에 비하면 페어차일드가 실력이 있더군요. 이번에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국내 업체랑 같이 했다가 하도 품질 문제 생겨서 업체 변경하는거라..
지게로봇정규직좀
15/05/02 09:14
수정 아이콘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선추천후 감상하겠습니다
곧내려갈게요
15/05/02 09:43
수정 아이콘
다른 얘기지만 MOSFET을 개발한 벨랩의 Kahng 이라는분이 한국 출신이시죠. 강씨의 철자가 지금 흔히 쓰이는 철자랑 달라서 낯설기는 한데 서울대 물리과에서 학사까지는 하셨답니다.
근데 이분이 만든 mosfet이 특성이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그게 이분이 실험을 할때 장갑을 안끼셔서 그렇다고 합니다. sodium contamination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고....
Andromath
15/05/02 09:55
수정 아이콘
Electric님 // 페어차일드가 창업자들이 다 빠져나간 후에 경영 문제로 다소 부침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좋은 회사입니다. 크기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럭저럭 잘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게로봇정규직좀님 // 감사합니다.
곧내려갈게요님 // 예 사실 벨랩 관련해서 제가 쓴 첫 글에 관련해서 답글을 달다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지웠었습니다. CMOS 관련 전공 서적 중에 kahng 교수님이 쓰신 책도 있고요. VLSI 분야에서는 뿌듯해질 정도로 유명한 분이시죠. 저도 처음에 철자가 익숙지 않아서 저자 이름보고 중국분인줄 알았었습니다... MOSFET 관련해서 말씀하신 일화는 처음 들었습니다, 흥미롭네요.
지게로봇정규직좀
15/05/02 11:13
수정 아이콘
전자회로시간에 저런 이야기를 중간중간에 들었으면 상당히 흥미롭게 공부했을거 같은데 아쉽네요 전자회로시간만 되면 머리가 지끈거리기만했는데
스위든
15/05/02 13:09
수정 아이콘
전자 전공에 반도체, 전자회로등에 관심이 많아
흥미롭게 읽었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리듬파워근성
15/05/02 22:00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전립선
15/05/03 03:1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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