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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1/25 20:28:45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자장면 네 그릇
자장면 네 그릇



​"우리 오늘은 중국집 가자. 내가 너네들한테 자장면 한 그릇씩 쏠게!"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던 나는 의아한 눈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자장면? 근데 갑자기 왜?"

영관이는 말했다.

"지난 한달 동안 내가 학원에서 시간강사로 알바 대타 뛰었잖냐. 오늘 알바비 들어와서 내가 너네들한테 밥 한번 살려구!"

영관이는 그렇게 씩 웃고는 학교 도서관 밑에 있는 중국집으로 성큼성큼 걸어내려갔다. 그렇게 중국집 테이블에 앉은 우리들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까만 자장면 네 그릇이 놓여졌다. 삼천오백원짜리 자장면 네 그릇, 도합 만사천원. 따지고 보면 얼마 안 되는 액수이고 평소 누구나 충분히 주변 친구들에게 쏠 수 있는 금액이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자장면 네 그릇을 바라보는 내 기분은 복잡미묘했다.

생각해보면 학창시절부터는 나는 누군가에게 사주기보단 얻어먹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다고 호주머니에 돈이 있음에도 습관처럼 얻어먹으려드는 양심 없는 녀석은 아니었고 그냥 그 시절의 나는 돈이 별로 없었다. 학창시절 용돈을 정기적으로 받는 일이 없던 나는 교통비, 수학여행비 등 학교를 다니며 꼭 필요한 경비들을 제외하곤 되도록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학교 행정실 수납처에 직접 급식비 등을 내는 날이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평소 등교를 하는 내 주머니는 두둑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사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친구들을 사주기보다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나 메추리알튀김꼬치 등을 얻어먹는 일이 더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런 내 마음도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친구들에게 몇 번 얻어먹다보면 나도 한번쯤은 사야할 타이밍이 오곤 하는데 그런 때에도 호주머니에 여윳돈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항상 염치없이 얻어먹는 그런 친구가 되는 것 같은 기분에 (친구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도) 괜히 나 혼자 떡볶이를 먹는 내내 찜찜하고 맘에 걸리곤 했다. 그렇다고 오늘 자기가 쏜다는 친구 앞에서 정색을 하며 "아냐, 오늘은 나 먼저 갈 테니까 너네들끼리 먹어."라며 엄하게 분위기를 깰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저래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아도 속으론 괜히 겸연쩍고 미안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내 기억 속의 학창시절 학교 앞 분식집은 나에게 유쾌하고 즐거운 공간이기보다는 난감하고 미안한 공간인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속으로 '나도 돈이 좀 생기면 친구들한테 크게 한번 쏘면서 체면치레 좀 해야지.'라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그런 기회가 자주 생기진 않았다. 또 막상 생일이나 명절날 등 손에 몇만원에서 몇십만원씩 큰 액수의 돈이 쥐어지는 날이면 친구들한테 무얼 사줄까 하는 생각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동안 내가 갖고 싶었지만 갖지 못했던 물건들을 떠올리며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했다. 친구들에게 쏘긴 쏘더라도 일단 내가 꼭 필요했던 것들, 그동안 내가 갖고 싶었는데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들부터 우선 고민한 후에 남은 돈으로 여유에 맞게 사주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낸 내 눈 앞에 놓여진 자장면 네 그릇. 그 친구가 사준 따뜻한 자장면 한 그릇을 맛있게 뚝딱 비우면서도 나는 문득 무언가 부끄러워졌다. 사실 그 시절 그 친구는 전라도 남원에서 올라와 홀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교 앞의 높은 시세 탓에 대중교통으로 30여분 걸리는 남영역 부근의 좁은 원룸에서 자취를 하며 버스로 등하교를 했다. 더불어 알바로 풍족하게 돈을 벌기보다는 학교수업과 공부, 그리고 동아리 활동에 충실하며 학교생활에 우선순위를 두고 착실하게 생활하는 친구였다. 그렇게 정기적인 수입원이 없다보니 경제적으로 항상 빠듯한 경우가 많았고 그런 친구의 뻔한 살림살이를 모를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시 그 친구가 하게 됐다는 아르바이트도 사실상 다른 친구의 소개로 잠깐 하게 된 파트타임 대타에 불과했다.

사실 일주일에 두어번 나가는 파트타임 학원 알바로 한 달에 벌어봤자 얼마나 벌까. 모르기 몰라도 그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본인 자취 살림에 좀 보태고 그동안 못 샀던 옷 몇 벌 사고 필요한 전공책 몇 권 사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런 액수였다. 아니, 하다못해 평소 갖고 싶었던 조그마한 전자기기라도 하나 사면 언제 통장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게눈 감추듯 없어질 그런 돈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그 알바비 몇십만원이 손에 쥐어지자 가장 먼저 친구들을 떠올렸다. 영관이는 그 돈으로 제일 먼저 우리들에게 밥을 사고 싶다고 했다. 평소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생활하며 선심 쓰듯 동기, 후배들에게 비싼 술이나 밥값을 턱턱 잘 쏘는 선배나 동기들도 물론 고마웠지만, 그보다 나는 영관이가 사준 삼천오백원짜리 자장면 한 그릇이 더 맛있고 좋았다. 그냥 그 마음. 없는 살림에도 고작 수중에 몇십만원이 생겼다고,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친구들 밥을 먼저 사주고 싶어 하는 그 작지만 따뜻한 마음이 기특했고, 또 한 편으론 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날 그 자장면을 먹으며 나 또한 주변 친구들에게 이런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날의 자장면 맛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 후 사회에 나와 수험생활 끝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직장인이 된 후에 가장 기뻤던 점 세 가지를 종종 친구들에게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첫째, 적은 액수라도 부모님께 다달이 용돈을 드릴 수 있게 된 점. 둘째, 노량진 수험생 시절이랑은 다르게 이젠 주머니 사정 개의치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사먹을 수 있게 된 점. 그리고 셋째, 내 친구들에게 맘 편히, 즐겁게 밥을 사줄 수 있게 된 점. 실제로 그랬다. 나는 돈을 벌 수 있게 되고나서 이 세 가지가 가장 기뻤다. 그래서 직장인이 된 이후로는 되도록 주변 친구들에게 밥을 많이 사려고 노력했고 그때마다 대학 시절 영관이가 사줬던 삼천오백원짜리 자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그 친구 덕에, 나도 나 스스로에게 조금은 덜 부끄러운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나는 수험생활을 마치고 직장인이 되었고 그 친구는 고향인 전라도로 내려가 교사 임용시험 공부에 홀로 매진하며 한동안 서로 연락이 뜸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른을 갓 넘긴 나이의 어느 날, 영관이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5년간의 오랜 노력 끝에 교사 임용시험에 최종 합격한 그 친구가 수험생 시절부터 어려움을 함께 해준 여자친구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됐다는 반가운 결혼 소식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결혼식을 전라도 광주에서 한다고 했을 때 '조금 멀긴 하구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일 생각에 서둘러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함께 내려가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갑작스레 급한 일이 생기면서 나 홀로 광주에 내려가게 됐다.

그렇게 광명역발 KTX 기차표를 한 장 예매하고 결혼식 당일 광주송정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결혼식장에 도착해 하객들을 둘러보니 식장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대부분 서울과 그 인근에 사는 대학교 동기, 선후배들이다보니 아무래도 이 친구가 미안한 마음에 정말 친한 동기 몇 명을 빼곤 아예 연락을 안 돌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우리학교 대표로 온 것 같다."며 농담을 던지고는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오랜만에 만난 신랑을 꾹 끌어안아줬다. 오랜 노력 끝에 합격과 결혼까지. 그 순간만큼은 내 친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예식은 시작됐고 홀로 식장 뒤에 서서 친구의 결혼식을 흐뭇하게 지켜보고는 예식이 끝난 후, 시끌벅적 떠드는 낯선 신랑 친구들 사이에 조용히 끼어 쑥스러운 얼굴로 결혼사진을 찍고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에 예약 시간에 늦지 않게 역으로 돌아와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갑작스런 여정에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한결 가벼웠다. 그렇게 광명역에 도착해서는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먼 길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니가 어디서 결혼을 하든 그땐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겠다며 거듭 고마움을 전하는 친구에게 "뭘 당연한 걸 가지고 그러냐. 알겠으니 신혼여행이나 잘 다녀와라."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도 괜히 마음 한 켠은 뿌듯하고 훈훈해졌다.

"사실 우리 같이 학교 다닐 때 니가 사준 자장면 한 그릇 때문에 간 거다. 넌 기억도 안 나지?" 라는 말을 해주려다가 그냥 속으로 웃어 삼키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 혹시 또 만나게 되면 "삼천오백원짜리 자장면 한 그릇으로 결혼 축의금 벌었으니 넌 제대로 남는 장사 한 거다."라며 뜬금없는 농이라도 쳐야겠단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하긴, 따지고 보면 자장면 한 그릇으로 그 친구에겐 나 같은 친구가, 나에겐 영관이 같은 친구가 생겼으니 결국 서로에게 평생 남는 장사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우리 둘 다 쌤쌤으로 치자.' 그렇게 픽 웃으며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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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5 20:34
수정 아이콘
친구들이랑 짜장면 한그릇 하고싶네요.
이직신
15/01/25 20:37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15/01/25 20:43
수정 아이콘
자장면은 역시 입에 안붙네요.

역시 짜장면으로 해야...
azurespace
15/01/25 20:53
수정 아이콘
국립국어원도 항복했죠. 짜장면으로 써도 맞춤법에 맞습니다 크크
15/01/25 20:56
수정 아이콘
얼마전에 다큐보니 원발음도 짜장이 맞다하더라구요
역시 입에 착착 달라붙는 짜장을 씁시다
마스터충달
15/01/25 21:08
수정 아이콘
먹고싶은거 주머니 사정 눈치 안보고 살면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 세상에는 먹고싶은 게 왜이리 많은지 ㅠ,ㅠ
Lightkwang
15/01/25 21:3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드라마 펀치 뒤늦게 정주행하다 김래원 짜장면 먹는 거 보고 이번주에 짜장면 시켜먹었어요!!
RookieKid
15/01/25 22:0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광개토태왕
15/01/25 22:08
수정 아이콘
짜장면 먹고 싶다..........
웰시코기
15/01/26 01:04
수정 아이콘
글쓴이나 친구분이나 두 분 모두 멋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켈로그김
15/01/26 09:15
수정 아이콘
바로 그 때, 다른 테이블에서 마지막 남은 단무지 하나로 다투다 절교선언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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