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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25 22:01:54
Name 콩콩지
Subject [일반] 헨리키신저의 신작, 세계질서
World Order, Henry Kissinger (2014)

키신저가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몇달전에 신문에 헨리키신저가 새 책을 냈다길래 기억해두고 있었다가 이번에 시간이 나서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ISIL, 우크라이나, 중국, 시리아 등등 국제정치의 최신소식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할아버지가 90살이 넘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 부지런함이 놀라운편이다. 제목 '세계질서'가 암시하는 바대로, 이 책은 현재 세계질서에 대한 키신저 나름의 생각에 대해서 쓰고 있다. 책은 크게 유럽중세사부터 시작해 EU의 성립까지 돌아보는 1,2장, 이슬람과 중동을 다루는 3장, 이란을 다루는 4장, 아시아와 중국을 다루는 5,6장, 미국의 외교사를 미국의 성립당시부터 살펴보는 8장과 정보기술과 핵무기 시대의 국제정치 균형을 서술하는 9장, 마지막 결론 부분 10장으로 있다.

1,2 장에서 키신저는 국제정치를에 대해 판단하고 고찰하는 구체적인 준거지점을 17세기에 일어난 30년전쟁 이후에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에 두고 있다. 현재 서구가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은 상호주권인정, 상호간섭금지에 바탕을 둔 힘의 균형추구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30년전쟁의 극심한 폐해를 겪은 각국 정치인들이 맺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근거해온것이다. 하지만 유교적인 유사가족위계를 나라들간의 관계에도 적용하는 중국이나, 종교적 이분법성과 순수성을 추구하는 이슬람국가들의 국제체제 인식은 이러한 베스트팔렌 조약에 근거한 세계질서와 충돌한다. 키신저는 이러한 충돌과 모순을 설명하면서, 평화로운 세계질서는 힘(Power)과 정당성(Legitimacy) 사이에서의 적절한 균형을 찾을 수 있을 때 세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키신저의 책은 역사가 이러한 힘과 정당성 사이에서의 교묘한 줄타기를 해 온 과정은 각국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준다. 사실 국제정치에 관한 뉴스는 하루에도 수백개, 수천개가 쏟아지지만 그 중에서 제대로 기억에 남는 기사는 많지 않고 대부분 조각조각 난 사실의 파편들에 그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키신저의 이 책은 외교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역사책을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난 세계사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인데, 아주 잘 정리된 세계사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세계사에 대해 잘 몰랐거나 부정확하게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유럽국가들에 미친 영향이라든지, 빈체제의 메트르니히라든지,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상반되는 점, 윌슨적 이상주의, 베트남 전쟁, 냉전 과정 등등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봤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알지 못하는 유명한 사건들도 역사적 흐름속에서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줘서 굉장히 좋았다. 세계외교사에 대한 통합적인 생각을 한번 엿보고 싶은 사람은 읽어볼만 한 것 같다.

나는, 어떠한 사실에 대해 모두가 생각하는 통념이나 상식과 다르게 어떠한 사실을 새롭게 해석하고 서술해내는 책이나 의견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데 이 책이 바로 이 기준에서 굉장한 수작이다. 사실 키신저가 책에서 하는 얘기중에 새로운 얘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적 외교적 사실들을 설득력있고 일관성있게 서로 연관시키고 해석해낸다. 다른 기발한 상상력이나 발명보다 이게 진정한 창의성이고 천재성이라고 느껴졌다. 임진왜란과 이순신부터 고대 인도의 경전과 종교, 사우디아라비아의 부족역사까지 이 할아버지의 박학다식함이 빛난다. 키신저는 미국외교사의 실수나 치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에서도 거침이 없다. 미국건국과정에서 주변국들을 불법적으로 침략한것이라든지, 베트남전에서 (자신이) 범했던 오판이라든가 개입 등등이 그것이다.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키신저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평양원산 라인에서 북진을 멈췄다면 통일을 이룰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근거는 마오쩌뚱이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 정치국에 했다는 얘기인데, 마오쩌뚱이 '미군이 압록강까지 올라온다면 즉시 반격할 수 밖에 없지만, 평양-원산 라인에서 북진을 멈춘다면 우리는 즉시 반격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개입에 대해 생각해봐야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향후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조금 원론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 중국은 중국이 그 설계과정에 끼지 못한 2차대전이후 성립된 미국중심의 세계질서에 불만을 갖고 있으며, 청나라부터 최근까지의 기간을 '수모의기간'이라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아시아로의 회귀 같은 정책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취하는 베스트팔렌적 관점을 중심으로한 '힘의 균형'을 중국은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 오해의 근거에는 정당한 근거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세계질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1강대국에 대해 제2의강대국이 떠오르고 패권경쟁을 한 역사상 15번의 선례에서 10번이 전쟁으로 이어졌음을 경고하면서 키신저는 서로 구체적인 대화를 해나가면서 합의점을 찾고 힘과 정당성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결론 전 9장부분에서 키신저는 인터넷 등 정보기술이 국제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면서, 잠깐 곁가지로 새어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SNS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이 재미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지지받고 유포되는 의견들은 과거 등의 역사적 맥락이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점을 고려하기보다는, 그 즉시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동의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국내정치, 나아가 국제정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2012대선에서 각정당들이 SNS등을 통한 밀착선거운동을 펼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다. 정치인들이 아주 동시다발적이고 즉각적인 대중들의 피드백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부응해서 정책을 펼쳐나간다면, 단기적으로는 거센 반발을 살 수밖에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꼭 필요한 국제정치학에서의 어렵고 외로운 결정들을 내리기 힘들어질 것이다.

키신저는 9장에서 인터넷시대의 정보,지식,지혜의 차이점을 언급한다. 인터넷의 시대에서, 정보는 그 어느때보다 넘치고 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크게 높아졌지만, 정보가 반드시 지식과 지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경고한다. 정보가 지식이나 지혜로 이어지려면 그 특정한 정보를 과거와의 연속적인 흐름속에서, 그리고 미래에 미칠 영향과 결과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인데, 인터넷의 즉각성과 신속성이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게 된다. 지식을 얻는 방법중에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는 책을 통한 것인데, 책은 상대적으로 인터넷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얻는 절대적 지식의 양도 인터넷에 적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개념적인 사고를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사고가 좀 더 성숙되고 숙고된 의사결정과 상황판단에 유효하다고 말한다. 잘려진 사실들만 전달하는 국제정치 뉴스나 피상적인 현상만 다루는 책들이 '정보'에 영역에 갇혀있다면, 키신저의 책은 지식을 넘어 지혜에 영역에 도달한 것같이 느껴진다.

책의 결론부분에서 키신저는 하나의 고백을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만해도 자기는 '역사의 의미'를 선언할 수 있다고 단언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지금 돌이켜볼때 역사의 의미라는 것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공개적인 토론과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고찰속에서 단지 '발견해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소회한다. 키신저의 이러한 태도변화가 미국의 절대패권의 시대를 지나 중국의 부상을 염려하게 된 지금의 상황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책은 올해 9월에 나와서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읽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고 다만 모르는 단어를 찾으면 고어(古語)라고 되어있는 단어들이 꽤 있어서 애를 먹을수도 있는데, 100페이지정도 읽으면서 저 단어들에 대해 익숙해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계속 반복해서 나오기때문에 수월해진다. 1923년생인 걸 감안하면 이해해야하는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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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25 22:19
수정 아이콘
이 할아버지 아직 정정하신가보군요....

역사의 주역으로 사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중에 한 명인데

시간 되면 꼭 읽어봐야겠네요
정육점쿠폰
14/11/25 22:26
수정 아이콘
노엄 촘스키는 28년, 하버마스는 29년생인데 이 분들도 아직 정정하고 활발하게 활동중이시죠.
이런 거 보면 건강하게 장수하는 분들은 타고난 뭔가가 있나 봐요.
포프의대모험
14/11/25 22:27
수정 아이콘
번역 금방 되겠죠? 헤헤
swordfish-72만세
14/11/25 22:43
수정 아이콘
뭔가 70년대 흑막 같은 느낌은 잇지만 정말 이 사람이 대단했던 게 이거죠. 50년대 미친 핵전략에 대한 콜럼부스의 달걀을 달성한 인물.
그리고 저나이 먹고 꾸준히 공부하고 저술한다는게 대단하군요.
endogeneity
14/11/25 23:29
수정 아이콘
본문의 모택동 이야기는 정확히는 1950년 10월 14일 모스크바 방문 중인 주은래에게 보낸 전문에서 언급된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면 참호를 계속 증강하여, 6개월 내에 적이 평양과 원산을 고수한 채 나아가지 않으면 아군 역시 평양과 원산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6개월 후에 공격 문제를 재론하는 것이다."('중공군의 한국전쟁사', 18~19pp)

중공군 참전이 10월 19일이니 불과 며칠 만에 참호전에서 섬멸전으로 전략이 전환된 것이죠.
콩콩지
14/11/26 07:17
수정 아이콘
아 책에는 이정도로는 안나와있었는데, 이런 상황이었군요
소개 감사합니다.
원달라
14/11/26 00:20
수정 아이콘
힘겨루기에서 승리를 해본 사람이 이제 정당성을 얘기하고 있군요.
과연 석학은 석학입니다.
14/11/26 09:35
수정 아이콘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듯, 패권승리자가 역사 기술의 자격을 얻는 전형적인 패턴이죠.
14/11/26 00:53
수정 아이콘
영감님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요. 개인사를 보아도 그렇고 한 일을 보아도 그렇고....
SugarRay
14/11/26 01:35
수정 아이콘
디플로매시는 먼저 번역한다는 얘기 듣고 상당 부분 진행된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안 나왔죠? 아마?

이 책은 언제 나오려나... 회복된 세계는 잘 읽었습니다만.
콩콩지
14/11/26 07:17
수정 아이콘
네 저도 나온다 나온다 하고 안나오는것 같네요. 하긴 잘 팔리지 않을것 같긴 해요
14/11/26 01:49
수정 아이콘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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