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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24 21:42:05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21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예정된 한 달이 다 지나 마침내 마누엘의 생일이 다가왔다. 그 날은 마누엘의 황태자 책봉식이 있는 날이기도 했기에 무척이나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현 황제인 일레키우스가 무척이나 고령이기 때문에 마누엘은 황태자가 되는 동시에, 공동 황제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여느 황태자 책봉식보다 더욱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었다.



“우리 동생, 이제 드디어 어엿한 황태자 전하가 되시네?”

“그러게요, 아직도 아기 같은데 벌써 제국을 다스릴 정도로 크다니.”

“아, 아니에요. 저 아직도 한참 어린걸요.”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몸단장을 하고 있는 마누엘은 지금 당장에라도 시종들을 치워 버리고 자기들이 직접 마누엘을 꾸며주고 싶다는 눈빛을 전투적으로 뿜어내는 누나들에게 빙그레 웃어주었다. 비록 심하게 삐져나온 주걱턱 때문에 멋진 미소는 아닐지라도, 안나와 아그네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생의 미소였다.



“아드리아 공작 전하께서 드십니다.”



노는 건지 옷매무시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의 끝에, 의전관의 알림이 전해져 오자 세 사람의 눈동자가 모두 문으로 향했다. 공작위를 수여 받고 잠시 궁을 비웠던 요안네스가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얼마간 못 본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으나, 미소만은 여전했다.



“오라버니! 오셨군요!”

“공작 전하를 뵙니다.”



호들갑을 떨며 달려가는 아그네스와 달리 안나는 살짝 치마를 들어 올리며 예를 올렸고, 요안네스의 목에 매달리려던 아그네스는 그제야 아차, 하며 자신도 똑같은 포즈로 인사를 했다. 달려오다가 갑자기 포즈를 취한 터라 매우 엉거주춤한 모습이었기에 요안네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너무 그렇게 격식을 따지지 않아도 돼.”

“역시, 오라버니!”



아그네스는 폴짝 뛰어서 요안네스에게 매달렸다. 마누엘은 아그네스를 저렇게 쉽게 안아 줄 수 있는 요안네스를 부럽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곧 연회가 열릴 텐데 어째 준비가 좀 덜 되어 보이는데?”



시종들이 제 말이, 하고 가슴을 두드리는 듯한 행동을 취하자 아그네스는 역시 그렇죠? 하며 그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 이러시면 우리는 죽은 목숨, 어쩌고 하면서도 방에서 쫓겨 나가버린 그들의 비명은 뒤로한 채, 안나와 아그네스는 직접 마누엘의 단장을 주도했다. 이미 십 년 넘게 그를 돌봐주었던 그녀들이었기에 시종들이 부산을 떠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완성되어 갔다.

놀라울 정도로 변해가는 마누엘의 모습을 요안네스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어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저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신체의 결함만 아니었어도,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는 남자였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으나 이내 지워버렸다. 이제 그는 황태자에 책봉될 것이고, 아버지인 일레키우스 황제와 함께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동황제가 될 것이었다. 자줏빛의 가호를 받는 그에게 신체의 결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 드디어 다 됐다.”

“우리 동생 너무 멋지다. 일곱 가문의 영애들이 한눈에 반할 정도야. 하지만 나보다 더 사랑하진 않겠지.”



방정맞게 입을 놀리는 아그네스에게 마누엘은 헤헤, 웃어준 뒤 고개를 돌려 요안네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에, 늘 사용하던 휠체어 대신 특수 장비를 달고 두 다리로 직접 걸을 것이었다. 그랬기에 평상시 올려다보던 형의 얼굴이 조금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제 오늘 연회가 끝나면 너는 이 제국의 황태자이자 공동황제가 될 것이다. 모두가 너에게 의지하고 있다. 잘할 수 있지?”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그거면 됐다.”



마누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던 요안네스는 이내 팔을 뻗어 그를 안아 주었다. 가볍게 들어 올려 허공에서 두어 바퀴 빙 돌려주었다. 어릴 적부터 자주 해 주었던 것이기에, 마누엘은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조금 더 남매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지만, 아까 노닥거리느라 너무 시간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연회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안 그래도 어서 가셔야 한다고, 어느새 나타난 시종장이 두 눈을 우아하게 부라리며 문 앞에 소리 없는 재촉을 하고 있었다. 마누엘은 형과 누나들에게 한 번씩 가볍게 안긴 뒤 시종장과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가 지나면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그레이트 홀에 황제가 입장할 것이고 그의 부름에 응해 마누엘이 입장할 것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자.”

“네, 오라버니.”



연회장은 귀족들로 꽉 차여 있었다. 대관식이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지방의 잡스러운 귀족들까지 모조리 몰려 온 느낌이었다. 황제로서 정식 즉위하는 대관식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통치할 다음 황제가 임명되는 날이기에 얼굴을 비춰서 나쁠 것은 없었다.

황자이자 이제는 아드리아의 공작인 요안네스와 공주들이 입장하자 귀족들의 머리와 어깨가 물결쳤고 여기저기에서 그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대귀족이라고 해도 먼저 황자와 공주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귀족들의 성의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말을 걸어 주어야만 했다. 의례적인 이야기, 시시콜콜한 이야기, 입에 발린 찬양이 담긴 말들이 오고 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연회가 무르익자 팡파르가 울리며 의전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퍼져나갔다.



“영주님들이시여, 니케아와 트레비사의 공작이시고, 트라키아와 헬라스와 갈릴리의 대공이시며, 아드리아와 아나톨리아와 테살로니카와 에피로스와 아르메니아와 안티오케이아와 트리폴리와 필리오케의 왕이신, 대 신성 라티움 제국의 수호자, 일레키우스 데 콤네노스 폐하 드십니다!”



숨이 넘어갈 듯 길게 길게 이어지는 작위들의 행렬을 한 치의 실수 없이 주욱 뽑아낸 의전관이 숨을 몰아쉬는 동안, 그레이트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홀의 정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 어느 때 보다도 화려한 복장을 하였으나 두르고 있는 휘장의 무게에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처럼 보이는 일레키우스 황제는 그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서 홀을 지나, 붉은 카펫의 길을 건너, 높은 단상 위에 마련된 옥좌에 앉았다. 황제는 이 자리에 모인 자들에게 감사의 말과 의례적으로 하는 말들과 몇몇 사람들의 공을 크게 추켜세워주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곧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마누엘 황자가 언제 등장 하는지 눈여겨보았다.



“……오늘, 이렇게 짐의 치세를 지나 다음 황제에게 성령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간청하고, 짐과 그대들 모두의 마음을 담아 축복할 수 있게 됐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짐에게 그랬듯이, 다음 황제가 될 자줏빛의 가호를 받는 나의 아들, 마누엘에게 충성을 다 바쳐 주길 바란다.”



황제가 눈짓하자 의전관이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쉰 뒤 마누엘의 입장을 알렸다. 아직 작위가 없는 그였기에 길고 긴 작위의 행렬 같은 것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짧게 내뱉어진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줏빛 출생의 적통 황자이신 마누엘 데 콤네노스 전하 드십니다!”



마누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게 서 있었다. 휠체어가 아닌 특수 장치를 사용하여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귀족들은 오랜만에 직립을 한 황자의 모습을 본다고 수군거리면서도 끝없이 손뼉을 쳐댔다. 황제가 있는 곳까지 길게 이어진 붉은 카펫을 따라 걸으며, 마누엘은 그들 모두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아직 열 살 뿐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으나, 제왕의 교육을 받은 자답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품위가 흘러넘쳤다. 누나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한없이 뿜어지는 애교와 유치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위대하신 아타나시우스께서 대 신성 라티움 제국을 수호할 다음 황제께 은총을 내려 주시길 간청하며,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신 사도 안드레아의 후계자로서 두 손 모아 이 제관을 드리오니, 주님, 부디 성령을 보내시어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끝없이 이어지는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찬미 찬양을 지나 축복의 기도가 올려진 뒤 대주교들은 준비해 놓은 휘장을 마누엘의 어깨에 두르며 홀과 보주를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총대주교 크리소스토모는 황태자의 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공동황제에 동시에 임명된 마누엘이었기에 여느 황태자의 관과는 달리 더욱 화려하게 치장이 되고, 황제가 쓰는 관과 매우 흡사하게 생긴 관이었다. 천천히 씌워지는 황태자이자 공동황제의 관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갖춰 입은 마누엘이 모두를 향해 돌아서자 그제야 소리 내고 싶었던 것을 참느라 힘들었다는 듯이 함성을 질러댔다.



“황태자 전하 만세!”

“공동황제 전하 만세!”

“전하의 치세가 세세토록 영원하소서!”



홀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마누엘이 화답하듯 단상에서 내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내딛으며 앞으로 자신이 통치할 수많은 귀족들에게 향했고, 차례로 물결치는 그들의 예를 받으며 살며시 눈을 돌려 자신의 형을 찾았다. 가장 먼저 형에게 다가가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황태자이든 공동황제이든, 자신은 언제까지나 형의 동생이라고.

그러나 요안네스는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성벽의 난간에 팔을 올리고 하염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던 요안네스는 뜬금없이 들려오는 안나의 목소리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몰래 빠져나온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녀에게 뒤를 잡힌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마음은 알아요. 좋지만은 않으시겠지요.”



그녀는 마치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려 요안네스의 눈가를 매만졌다.



“……봤느냐.”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욕심을 갖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십 년도 더 넘게 체념하고 단념하고 의식적으로 욕구를 억눌렀다. 생각하지 않으니 마음도 멀어졌고, 한때나마 안나와 혼인하여 그녀의 자줏빛 가호를 받아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욕망은, 동생이 점점 뛰어난 인재로 자라남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동황제에 임명된 그의 모습에 요안네스는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의 성격상, 분명히 자신에게 먼저 다가올 터인데, 이런 상태로는 그를 축복해 줄 수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다가온 황태자와 그런 그를 축복해 주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는 형의 모습은, 군중들에게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상상을 하게 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홀에서 나왔다. 아니, 도망쳐 나왔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조금이라도 동생에게 누가 되는 모습은 원치 않았기에.

예를 올리는 근위병들과 경비병들의 시선조차 피한 채 정처 없이 걷던 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바다가 보였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석양과 불어온 바람에 휘말린 바다는 붉은 금빛 물살을 일으키며 넘실거렸다. 언젠가, 상념에 잠길 때면 자주 찾던 곳. 그랬기에 지금도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향한 것일까.



“오라버니께서 종종 이곳을 찾으시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요안네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안나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저편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첨탑에 닿아 있었다. 자신이 태어났던 곳이었다. 아그네스와 마누엘 역시 탄생한 곳. 오직 요안네스만이 태어나지 못했던 곳…… 바로 자줏빛 방이 있는 탑이었다. 그 탑에서 나와 대황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들이 딛고 서 있는 성벽을 지나야만 했다. 자줏빛 가호를 받으며 탄생한 자들과 미천한 이들이 존재하는 세상을 잇는 단 하나의 다리. 그곳에 요안네스는 종종 찾아왔었고,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 생각했건만 그것은 미처 안나 공주까지는 헤아리지 못한 듯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는 괜찮으니 어서 들어가거라. 마누엘이 그토록 좋아하는 누나가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하겠느냐.”

“그 아이는 오라버니 역시 좋아하지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 오라버니도 함께 들어가요.”

“……나는 조금 더 이따가 들어가겠다.”

“그럼 저도 여기에 있겠어요. 마침 석양도 아름답네요.”



안나는 성벽에 기대며 저물어 가는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안네스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문득 무엇인가가 떠올랐는지 안나를 다시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아직 내게 마음이 있느냐?”



안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눈동자 가득히 그의 얼굴이 채워져 왔다. 사랑해 마지않았던 사람. 오빠이지만 한때는 오빠가 아닌 남자로서 사랑했던 사람. 그러나 그 시기는 지나가 버렸고, 더는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자줏빛 출생이 아닌 남자가 자줏빛 출생의 공주와 결혼하는 순간, 제국에 대한 계승권은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편에게도 주어지게 된다. 물론 허접스러운 남자라면 애초에 위험이고 뭐고 있을 리가 없으니 남편 될 사람이 요안네스처럼 유능한 남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마누엘이 점차 제대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위험을 없애기 위해 둘의 혼담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고 그랬기에 마누엘은 현존하는 정통 후계자로 홀로 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요안네스가 혹시 모를 분란을 없애기 위해서 스스로 제국 변방의 방위를 전담하러 궁에서 떠났기에 계승권 분쟁에 대한 얘기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정치일 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갈라놓을 수 있는 장벽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안나는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을 하고 있는 당사자밖에 없었으므로.



“아뇨, 이제 더는 아니에요.”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요안네스는 슬며시 웃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들어 올려 안나의 얼굴을 살며시 움켜잡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너는 늘 거짓말에 서툴구나.”

“…….”

“내 마음도 그대로다. 그래서, 나는 조금 고민 중이다.”

“무엇을…… 말씀인가요? 오라버니? 눈 돌리지 말고, 저를 보면서 말씀해 주세요.”



지금 여기서 제위에 대한 계승권 이야기라도 나오면 안나는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랐다. 오라버니가 그 오랜 기간을 거치며 완전히 단념하신 줄 알았는데, 역시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인가? 하지만 요안네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혼인 말이다. 폐하께서는 내가 영주가 되었으니 영지를 물려 줄 아들을 갖기를 원하신다. 아직 직접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으나, 눈빛만 봐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고민이다.”

“저…… 때문인가요? 하지만 저는 더는 오라버니를…….”

“우리가 함께한 게 몇 년인 줄 아느냐? 네 진심이 무엇인지는 떨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요안네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안나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너도 혼기가 찼으니 적당한 사람을 찾아야 할 터인데,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은 있느냐?”

“……그런 사람 없어요.”

“하하, 시선은 왜 피하느냐. 예전에 보니 눈여겨보던 사내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정말로 제가 혼인을 하길 원하신다면, 저보다는 오라버니께서 먼저 혼인을 하셔야지요. 아버지께서도 오라버니께서 아직도 혼자시니 저희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시는 걸 아시잖아요? 물론 저와 아그네스 역시 모두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 거에요. 하지만 그 전에, 저는 오라버니께서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요안네스가 자신이 아니라면, 아무도 선택하지 않고 혼자 남기를 바라는 배덕한 마음이 들었기에, 안나는 더욱 요안네스가 어서 혼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완전히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거라 믿었기에.

먼 옛날, 라티움 제국이 세워진 이래, 근친 간의 혼인은 당연한 일이었고, 남매간의 결합은 특히 신성한 결혼으로 칭송받아왔다. 다른 가문과 결합을 이룬 황족도 많았으나, 상당수의 황족은 사촌과 조카와 남매와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생겨났고, 그렇게 번창한 콤네노스 황가였다. 비록 제국의 서쪽과 동쪽을 다스리던 콤네노스 가문은 대를 잇지 못하고 끊어졌지만 천 년 넘게 이어 온 제국의 주인은 오직 콤네노스 가문뿐이었다. 자랑스럽고도 자부심 넘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콤네노스 가문이 아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안나였다. 그렇다면 이런 고민도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신은 무슨 생각으로 요안네스와 자신을 남매로 태어나게 한 것일까.



“네 마음은 잘 알겠다. 나는 네 바람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말아라.”



안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진심이 담겼으나, 정 반대의 진심 역시 담겨 있었기에 무척이나 묘한 미소였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바람이 제대로 전달됐을 거라 믿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요안네스의 눈에는 사랑스러운 동생의 미소로 보였다.



“자, 그럼 들어가거라. 나는 잠시만 더 바람을 쐬다 들어가겠다.”

“같이 들어가요, 오라버니.”

“어허, 남자는 원래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내가 허튼 말 하는 것 보았느냐? 금방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거라.”

“……알겠어요. 다른 이들한텐 오라버니께서 잠시 두통이 있으셔서 쉬러 가셨다 했으니 어디 다른 데로 가시면 안 돼요.”



안나는 신신당부한 뒤, 그제야 발걸음을 돌렸다. 천천히 시야에서 멀어지다가 성벽 문 너머로 사라지자 요안네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태양이 침몰했고 하늘은 빠르게 빛을 잃어갔다. 창백한 하늘의 끝에서 어두운 장막이 물감이 스며들 듯 소리 없이 펼쳐지는 것이 보였다.



‘네 바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요안네스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그녀의 바람, 혹은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 오랫동안 참아 온 자신의 마음을, 그저 살짝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 그래서 잊으려 했다. 그저 없는 사람처럼 살려고 했다. 동생의 즉위식을 바라보는 이 순간에도 아무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정말 그대로 한 명의 신하로서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마침내 이 시간이 올 것을 예견했기에 모두에게 자신의 본심을 그토록 필사적으로 숨겨왔던 것인지도 몰랐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을 뒤바꿔 버릴 무서운 생각을.



‘콤네노스 황제의 치세는…… 영원할 것이다.’



그 콤네노스 황제는, 요안네스 데 콤네노스가 될 것이었다.





--------------




혹시 궁금하실까봐 말씀드리면.... 1부의 시기는 주후 1187년이고, 지금 진행되는 라티움 파트는 주후 1186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칼리스토는 1부에 나오는 칼리스토가 맞습니다. 1부에 살짝 언급이 됐을 거에용. 칼레인이 대관식 후 칼리스토와 얘기를 나눌 때, 궁중 용어들을 제국에서 배웠다.... 라고. ^^

이번 편으로.... 이제 2부가 어찌 진행될지 대충 감을 잡으셨을런지요...? 흐흐....

23편을 쓴 뒤로, 0편을 쓰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거세(;;) 되었고 왕자의 반역에 대한 정당성이 잘 드러나지 않아, 초반에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힘들다... 라는 평이 있어서, 1편의 앞에 0편을 추가해서 쓰고는 있는데.... 언제 완성될지는 미지수네요 ;; 0편이 추가되면 그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씩 수정을 할 예정입니다. 몰래몰래.... 그치만 공성전은 손을 대봤자 이 모양 이 꼬라지(;;)일 것이 분명해서 그 부분은... 아마 그냥 둘지도......... 흐흐...

다시 정주행하신 은별 님과 어제 정주행 하신 파울 님께서 보시기엔 어땠나욤? ^^;;
그라시아 님,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도 안 달아주셔서 담편을 올려야 하나... 하고 있었어요. 흐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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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시아
14/11/25 11:20
수정 아이콘
글 쓰기가 힘드시겠지만 꾸준히 보고있으니 계속 연재해주셨으면 감사합니다~글이란게 연속성이 있어야 좋자나요 흐흐...계속 다음글을 기다리고있어요.
가브리엘대천사
14/11/25 13:03
수정 아이콘
흐흐... 그렇긴 한데..... ㅠㅠ 지금처럼 자주는 못 올릴 거에요. 뗨뗨 올라오더라도... 넘 노여워 마시고... 늘 건강하시길 ^^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_+!!
14/11/25 11:33
수정 아이콘
1부에서 언급되었던 제국내전의 시초가 되는 부분인거 같은데.. 맞나요 ? 흐흐.. 저도 다음 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1/25 13:08
수정 아이콘
넹. 곧 어떤 사건이 터질테고(!!) 제국은 혼란에 휩싸이겠지만, 아직 거기까지 진행도 안 된 상태라......;; 흐흐... 이제 곧 연재 주기는 매우 길어집니당....;; 비축분이 두개 밖에 없답니당..... 흐흐흐흑흑흑....;;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댓글도 감사합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가브리엘대천사
14/11/25 14:09
수정 아이콘
참, 정주행을 하시면서 초반부터 뭔가 좀 미흡하다든가 이상하다든가 하는 부분은 많이 없었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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