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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24 11:29:22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20



“그런데, 요안네스는 보이지가 않는구나.”

“아, 오라버니는…… 언니는 아세요?”

“아니,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그네스의 말에 안나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오라버니야 워낙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늘 시간을 잘 보내시니 별일 있겠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황가 대대로 내려오는 전형적인 미남의 얼굴을 가진 그는 생긴 것만큼이나 뛰어난 언변과 사교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친절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의 주변으로는 귀족, 관료 할 거 없이 늘 사람이 붐볐다. 혼기가 지나칠 정도로 지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혼인하지 않은 그의 처지 때문에 여자들이 특히 많이 몰리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 여인이나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줏빛 출생이 아니긴 하지만, 라티움 제국의 첫 번째 황자인 그였다. 제국에서 명문으로 손꼽히는 일곱 가문의 영애 정도는 되어야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구나. 알았다. 그럼, 좋은 시간들 보내거라.”

“벌써 가시려고요? 같이 놀아요, 아버지.”



아그네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황제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어이쿠, 하면서도 날름 당겨져 온 황제는 간드러지게 웃는 아그네스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지금은 안 되겠구나.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단다.”

“아, 네에…… 어쩔 수 없지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아그네스는 조금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염집의 아낙이 아닌 제국의 공주였으며, 자신이 아버지의 시간을 잡아먹을수록 아버지께서 침수 드시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이내 빙긋 웃은 그녀는 황제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일레키우스 황제는 사랑스러운 그녀와 안나, 그리고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황자 마누엘을 모두 다정하게 끌어안아 준 뒤 방을 나섰다. 나서자마자 뒤에서 아그네스의 웃음소리와 함께 안나와 마누엘의 흥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흡족해하며 시종들과 함께 집무실로 향하던 일레키우스 황제는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 수석 내의가 아닌가.”

“폐하를 뵈옵니다.”



검은색의 옷을 입은 노인과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 한 명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올렸다. 황제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어찌 보면 마누엘이 이토록 잘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수석 내의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비잔티노플에서 남쪽으로 몇 시간 배를 타고 가면 당도할 수 있는 작은 섬에서 의술을 배웠다는 그는, 신묘한 능력들을 보여주며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는 마누엘을 치유해왔다. 그를 몇 년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이레네 황후를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었을 것으로 생각할 정도의 뛰어난 능력이었다.

하드리안이라는 이름의 그는, 마누엘을 위해서 특별한 장치를 고안해냈다. 안타깝게도 기묘하게 휘어져 있는 발 자체를 치료하지는 못했으나, 다리에 고정하여 정상적으로 설 수 있게끔 하는 장치를 만들어 마누엘에게 처음으로 직립보행의 기쁨을 맛보여 주었고, 아들이 더 이상 엉금엉금 기지 않고 똑바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본 황제는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마누엘의 체력이 원체 약했기 때문에 특수 장치를 사용하여 오래 걷는 것에 무리가 따르자, 그를 위해 휠체어라고 불리는 바퀴 달린 의자를 만들어 왔다. 그전에도 비슷한 것은 존재했으나 바퀴가 너무 쉽게 의자에서 이탈한다든가 가파른 경사에서 멈출 수가 없어 타고 있던 사람이 떨어져 죽거나 하는 일이 있었기에 타게 되면 죽는 불길한 것으로 여겨져서 아무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하드리안은 보다 견고한 휠체어를 만들어냈고, 경사에서도 멈출 수 있도록 정지장치까지 매달아 휠체어에 탄 사람이 쉽게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냈다. 황자가, 장차 황제가 탈 휠체어였기에 위엄이 넘치게 디자인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마누엘의 휠체어를 밀어줄 영광스러운 직책이 새로 탄생하기도 하였다.



“그대에겐 항상 고마워하고 있네. 앞으로도 노력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겠네.”

“망극하옵니다, 폐하.”



잠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한 황제는 바삐 집무실로 향했다. 사라져 가는 황제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드리안은 뒤에 있던 남자를 향해 말했다.



“가자, 칼리스토.”



조금 전 황제에게 대답할 때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차갑게 식어있는 목소리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칼리스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드리안은 앞서 걸어나갔고, 칼리스토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 그들은 잠시 황자와 공주가 있는 방에 들린 뒤, 다시 나와서 복도를 걷고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에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어둠이 뒤덮인 곳에 일렁이고 있는 횃불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늘도 오셨군요.”

“그래, 쓸만한 놈이 있을까 해서 왔다.”



하드리안은 품에서 묵직한 꾸러미를 꺼내 간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은 간수는 히죽거리며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하드리안은 안을 둘러본 뒤 꾸러미에 있는 것들을 감상하는데 여념이 없던 간수에게 손짓을 했다. 혹시 풀어주는 건가 하고 기뻐하던 죄수는 간수가 휘두른 방망이에 뒤통수를 처맞고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칼리스토는 말없이 다가와 그의 코밑에 뭔가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의식을 잃은 줄 알았던 남자가 말없이 일어났다. 눈은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또 오겠네.”

“저야 뭐, 언제나 감사하죠. 근데, 이놈들은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좋은 곳으로.”

“좋은 곳이요? 혹시…… 그런 곳입니까?”



호기심이 가득한 간수의 눈을 보며 하드리안은 피식 웃었다.



“지나친 호기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자네가 입이 무겁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에요. 헤헤, 그럼 이쪽으로.”



괜히 물어봤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자 머리를 긁적이던 간수는 서둘러 안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하드리안이 앞장서자 눈이 풀린 죄수가 그 뒤를 느릿느릿 따라 걷기 시작했다. 칼리스토는 문을 잠그는 간수 너머로 사라져 가는 그 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이 여기서 할 일은 이제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언제나처럼, 하드리안은 흡족한 얼굴로 올라올 것이고, 오늘 하루 정도는 자신에게 그 빌어먹을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손목에는 사슬 같이 생긴 것이 채워져 있었다. 하드리안의 뜻을 거역할 때, 언제나 불타오며 칼리스토를 고통스럽게 하는 족쇄였다.



‘언젠가…… 때는 반드시 올 거야.’



힘을 얻는 순간, 박차고 나가리라 다짐하며 칼리스토는 눈을 감았다. 간수가 심심한지 수다라도 떨려는 듯 보였으나, 근무 태도가 불량한 것을 상관이 매우 즐거워하겠다고 말해주자 그대로 입을 닫아 버렸다.

소리가 모두 죽어버린 공간에 횃불만이 춤을 추며 들리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으음? 이곳에 있었느냐?”



집무실에 들러 각종 사안을 처리하고 밤이 돼서야 침실로 향한 황제는 요안네스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푸근하게 웃어주었다. 허리를 숙여 깊이 예를 올린 요안네스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어 올렸다.



“갑작스레 찾아와 존엄하신 분의 시간을 빼앗는 것을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허허, 녀석 참, 아버지라고 부르라는데도.”



유일하게 자신을 아버지가 아닌 폐하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그였다. 성인식을 치룬지 십 년이나 지났건만 혼인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이 다스릴 영지를 달라고 하지도 않고, 그저 황제의 가신처럼 행동해 온 그였다. 황자에겐 정말로 별다른 소망이 없는 것일까?

황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탓일지도 몰랐다. 자줏빛 출생이 아닌 그였기에, 그는 요안네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면서 그에게 끊임없이 황제는 자줏빛의 가호를 받는 자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저는 자줏빛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건가요?”



그렇다는 대답을 들은 요안네스의 눈빛을, 황제는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애써 잊으려 했다. 담아두면 오히려 독이 될 것이었으니까. 그를 단념시키기 위해서 황실의 족보까지 꺼내 들며 실제 역사가 그러하라는 사실까지 알려주었던 자신이 아닌가. 황제의 장자로서, 장차 자신이 이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 될 거라는 생각을 당연히 했을 법한 사람에게, 너는 주인의 자격이 없다는 말처럼 잔인한 것은 없을 테지만, 황제는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다행히 요안네스는 수긍하는 듯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뒤에도 재차 그 잔인한 현실을 요안네스에게 떠올리게 했고, 그럴 때마다 요안네스는 황제에게 흡족한 답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미래까지 바꿔 버릴 줄은 몰랐다. 황제는 그가 혼인하고 아이를 낳으면 적당한 시기에 아드리아 왕에 봉하려 했다. 비록 데 쥬레(de jure) 봉신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기에 실제로 지배하는 영토는 없었지만, 니케포로스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황실로 반환된 서쪽의 방대한 영지도 함께 수여할 예정이었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비록 차기 황제가 되지 못하리라는 예정된 운명 때문인지 일곱 명문 가문 모두가 앞다투어 경쟁적으로 혼인 요청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세 가문에서 황실과의 혼인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요안네스가 거절했다. 그는 혼인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놀라운 것은 그때 수도에 방문한 가문의 영애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그녀들은 가문으로 복귀한 뒤 극심한 상사병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마음을 접고 다들 수녀원으로 들어가 속세를 등졌다고 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들이 동성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에게 찾아갔던 황제는 어딘가에서 데려왔는지 모를 여인과 숨 가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를 보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얼마 뒤 그녀는 궁중 환관에게 돈을 먹이고 몰래 궁 안으로 들어온 명문가의 영애라는 것이 밝혀졌다. 황제는 드디어 요안네스가 혼인을 마음먹었구나 생각하며 기뻐했으나 그녀조차 수녀원으로 들어가 버리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는 폐하를 섬기는 데에만 전념하겠습니다.”



계속해서 혼인을 요구하는 황제에게 요안네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황제의 아들로서 황제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신하로서 섬기겠다는 뜻이었다. 지금의 황제에게도, 그리고 장차 황제가 될 자신의 동생에게도.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어떠한 영지도 원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에만 집중했다. 능력이 있어야 황제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군사와 외교, 행정까지 그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제국의 재무관에 임명된 요안네스 덕분에 제국의 국고에는 금이 넘쳐나고 있었다. 전대 황제들의 치를 떨게 할 정도의 사치와 정복 전쟁에서의 패배 때문에 텅 비었던 국고가 이렇게 으리으리할 정도의 보화로 가득 찬 것을 본 일레키우스는 순간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저 신하로서 당연한 소임을 했을 뿐이라 말하는 황자의 앞에서 황제는 그가 자줏빛 출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제국의 동쪽 변경에서 일어난 신흥 세력이 감히 황실에 반항하려 했을 때도 요안네스는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였다. 당시 제국은 서쪽과 북쪽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멸망해 버린 왕국의 부흥 운동을 진압하느라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동쪽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황제는 신임 재상으로 임명된 요안네스에게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 잠시 휴전을 요청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사신으로 찾아가 세 치 혓바닥을 놀린 요안네스는 그들을 다시 제국의 품으로 복속시킨 뒤 돌아왔다. 그리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그들의 지도자와 차기 지도자를 암살해서 신흥 세력을 완전히 와해시켜 버렸다.

실로 아타나시우스의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천 년 제국의 기틀을 닦은 명군 황제께서 환생하셨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랬기에 일부에서는 요안네스 황자를 안나 공주와 혼인시킨 뒤 차기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나왔다. 자줏빛의 가호를 받지 못한 자들 중, 아내의 자줏빛 가호를 빌려 제위에 오른 황제들도 몇몇 있었기에 나온 말이었다. 이레네 황후가 낳은 자줏빛 출생의 황자가 심각한 주걱턱과 내반족이라는 신체 결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레키우스 황제도 그 의견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다. 적어도 마누엘 황자가 서서히 자신의 진가를 발휘해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은, 폐하께 감히 청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요안네스의 말에 오랜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황제는 꿈에서 깨어나듯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서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누엘의 생일이 곧 다가옵니다. 이번 생일에 폐하께서 마누엘을 황태자로 책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황제는 그 뒤에 나올 말이 궁금해 어서 말해 보라 재촉하였다. 인제 와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따위의 말이 나오면 뭐라 답을 해줘야 할지 곤란했다. 그러나 지금껏 아버지의 눈에 조금도 어긋남 없이 행동하던 요안네스는 그런 걱정은 접어두라는 듯 말을 이었다.



“마누엘은…… 그 아이는, 좋은 황제가 될 것입니다. 머리도 좋을뿐더러, 사려 깊고 친절하며 착한 아이입니다. 백성들의 고통까지 어루만져 주는 존경 받는 황제가 될 것입니다. 마치 폐하처럼.”

“…….”

“그러므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폐하께서 오래전, 제게 주시려 했던 영지 중 일부를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하면 서쪽 변경 부근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네가 받아야 할 것이기에 전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한데, 왜 이제야 그런 결심을 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요안네스는 궁금한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마누엘이 황태자에 책봉되면, 제가 아무리 가신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황위 계승권자로서 저의 존재가 부담될 것입니다. 마누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폐하께서 저를 믿어주신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저를 지지하는 세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뛰어난 능력과 각종 눈부신 활약으로 수많은 귀족들에게 차기 후계자로 부족함이 없다고 인정을 받은 그였다. 비록 적장자임에도 자줏빛의 가호를 받지 못하기에, 정통성 면에서는 마누엘에게 밀리지만, 그의 천재성이 그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황제조차 그것을 인정했고, 그랬기에 안나 공주와의 혼인을 추진해 그를 차기 황제로 지목하려고도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제가 수도에 계속 머무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제가 뜻이 없다 하더라도, 군중이 엄한 뜻을 가지고 멋대로 움직이면 저 또한 휘말릴 수 있습니다. 폐하께, 그리고 마누엘에게 누가 될 만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오니, 그들과 저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제가 수도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굳이 서쪽의 영지를 택한 것은 무엇이냐? 물론 너에게 주기로 했던 영지가 그쪽 부근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저 요사스러운 서방 교회가 제멋대로 앉힌 자칭 황제라는 자가 서방 세계를 거의 평정하고 제국으로 눈을 돌리고 있지 않으냐. 서쪽 영지는 너무 위험하다. 굳이 수도에서 나가려 함이라면 안전한 동쪽 부근에 영지를 마련해 줄 터이니 그쪽을 통치하는 것이 어떠하냐?”

“폐하께서 저를 그토록 염려해 주심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서쪽 영지를 요청한 것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다소 민망하지만, 적어도 제국에서 저를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폐하 외에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폐하는 제국의 지존이자 수호자로서 마땅히 수도에 계셔야 합니다. 따라서 폐하의 아들이자 충직한 신하이며 국토방위의 임무를 누구 보다 잘 수행할 수 있는 제가 서쪽을 담당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됩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십시오.”



말을 돌려서 길게 했지만, 황제는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냥 보고 있기 힘들겠지.’



모두에게 인정받은 뛰어난 자신이 이렇게 눈 뜨고 있는데, 자기보다 어린 동생이 황태자로 책봉을 받고 차기 황제로 지목되다니. 아무리 욕심이 없는 요안네스라고 해도 참고 보기 힘든 일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도피하는 것이리라. 자신을 위해. 그가 아끼는 마누엘을 위해. 제국을 수호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서.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명분이 있는 일이었고, 요안네스에게도 자신에게도, 그리고 마누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또한 영지를 하사한다면 머지않아 요안네스도 영지를 물려주기 위한 아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당연히 아내를 얻은 뒤 후계자 생산에 힘쓸 것이다. 그가 자식 없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황제로서는 그다지 거절할 제안이 아니었다.



“너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황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마누엘의 생일까지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으니, 그 전에 네게 영지를 하사하겠다. 아드리아 공작령과 테살리아 공작령을 하사하고, 아드리아 왕으로 봉하려 하는데, 어떠하냐?”

“망극하오나, 아드리아 왕에 봉하는 것은 거두어 주십시오. 황제의 명예직인 아드리아 왕은 트라키아 대공위와 함께 다음 황제인 마누엘이 가지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겁니다. 저는 공작 위에 만족합니다.”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야심 없이 살아온 그였다.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인 일레키우스 황제를 돕고 제국을 위해 봉사하였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손에 쥔 작은 것들만 있으면 될 뿐, 그 외의 더 많은 것은 원치 않는다던 그였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왕으로 봉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그의 뛰어난 언변에 휘말려 결정을 뒤집을 것이 분명했기에 황제는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모든 절차를 갖춰 너를 공작으로 봉하겠다. 그러니…….”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오늘은 부자지간에 못다 한 대화나 해 보자. 정무에 시달려 그간 사사로운 얘기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잖느냐. 그렇다고 네가 담소를 나누러 찾아온 것도 아니고. 무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망극합니다, 폐하.”

“어허, 내 그리 일렀거늘. 자, 어서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폐하라고 부르는 것은 그다음이다. 내 오늘은 잠들기 전에 너에게서 꼭 아버지라는 말을 들어야겠다.”



이십 년 가까이 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는 요안네스였기에, 능변가인 그로서도 이때만큼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어땠을지 몰라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는 말.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스스로 그 말을 지워 버려 더 하기 힘든 말이었다. 일레키우스 역시 그 점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기에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가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는 요안네스의 손을 잡고 오래전의 이야기들을 기억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 보았다. 마악 걸음을 떼고 아장아장 기어 다니던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자기도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우고 싶다고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검을 허리에 찬 채 질질 끌면서 다녔던 얘기며, 밤 중에 나타난 거미가 무서워서 울고 있는 안나를 위해 불이란 불은 다 켜고 침실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거미를 찾아냈건만, 그 하찮은 미물조차 자신의 삶이 있을 것이라며 방생해 주던 모습까지, 하나 하나 조각을 맞추다 보니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장성했을까 싶기도 하고, 그간 요안네스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혼자 신 나서 떠들던 황제의 입이 점점 무거워졌다. 마침내 굳게 닫혀 버린 입은 열릴 줄 몰랐으나 꼭 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얘야.”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너무나 늙어 버린 황제였다. 여든을 넘긴 그의 몸은 생명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듯,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감정만은 온전했기에,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를 위한 눈물일까. 아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일까, 그의 기구한 운명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황제가 정신을 잃을 것처럼 보이자 요안네스는 그를 부축한 뒤 시종들을 불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그들은 일레키우스가 침수 들 수 있도록 이끌었다. 뭔가 아쉬워하는 황제를 바라보던 요안네스는 살며시 무릎을 꿇었다. 시종들은 들리지 않도록, 오직 황제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나지막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황제는 그제야 미소 지으며 잠들었다. 그날 밤, 그는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 엄청나게 큰 날개가 등 뒤로 뻗어 있었다. 그 위에 안나와 아그네스 그리고 마누엘이 타고 있었다. 즐거운 듯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함께 웃던 황제는 문득 요안네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그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들은 입을 모아 되물었다. 요안네스가 누구예요? 황제는 불안한 마음에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세상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요안네스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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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으셨다면 댓글로 흔적을 좀... ^^; 오타나 비문도 다 환영합니당~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

감사합니다. 꾸벅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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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시아
14/11/24 11:39
수정 아이콘
빠르게 올리시는군요! 이정도 속도로 비축분도 쌓아가시길 바랍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1/24 13:39
수정 아이콘
23편 하나 쓰는데 한달 걸렸답니당. :)
14/11/24 12:53
수정 아이콘
어젯밤 정주행했습니다.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가브리엘대천사
14/11/24 13:39
수정 아이콘
앗, 새로운 독자님이 오셨군욤. 감사합니다. ^^
14/11/24 17:40
수정 아이콘
아... 1부의 앞 이야기였군요...
스토리 정리하느라 처음부터 정주행을 한 번 했네요. 다시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
가브리엘대천사
14/11/24 21:36
수정 아이콘
우웅? 2부의 앞 이야기인데욤 ^^;;
어이쿠, 다시 정주행을 해 주시다니 이렇게 감사할 데가.... 굽신군십(__)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4/11/25 13:21
수정 아이콘
시간순으로는 1부보다 앞선 이야기 같은데요... (제국 내전 발생 전 이야기...)
혹시 동명이인이 다수 등장하는건가요?
가브리엘대천사
14/11/25 14:08
수정 아이콘
아아, 그 말씀이셨군요. 제가 잘못 이해했습니당. ^^;; 네, 1부의 앞 이야기 맞습니다. 다음편 작가잡담에 제가 썼듯이 1부는 1187년, 2부 시작은 1186년입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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