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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23 14:57:31
Name aura
Subject [일반] <단편> 13군단 - 2
2편 입니다.


- - -

협곡성이 무너지자 지프니 왕성으로 가는 길은 일사천리였다.
제국이 지프니의 왕성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만병제에게 학살자라는 또 다른 칭호가 붙었다.


그 압도적이고 놀라운 무위.
아군에게는 경외감을, 적군에게는 공포와 절망을 안겨줬다.


"허허허."
"폐하..."


지프니왕은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그와 독대 중인 재상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국왕을 바라봤다.
지프니는 분명 강력한 군사국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프니왕은 단 한 번도 전쟁에 대해 간과하지 않았다.
영토확장에 대한 욕심은 없을 지라도 최소한 산맥을 끼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왕국의 땅만큼은 지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군단때문에 지프니의 노력은 허무하게 스러졌다.
지프니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피난은 없소."
"폐하."


재상은 솔직히 어느 정도, 국왕이 마지막 분전을 선택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결단이 어떠한 마음에서 나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재상은 차마 왕을 만류할 수 없었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일개 어린 아이와 아녀자들도 전방에서 싸워줬다. 그들은 모른 체하고 어찌 왕만 제 몸을 보전한다고
도망갈 수 있을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소. 내가 무엇이 진정 두려운지 아시오?"
"무엇입니까?"
"제국에 의해 수탈당할 백성들과 이 나라의 대가 나로 인해 끊긴다는 것이오.
이 것은 이 나라와 백성이 이 못난 왕을 만났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


침통해하는 지프니왕을 보며 재상은 고개를 저었다.
어찌 이 사태가 지프니왕의 잘못이겠는가.


"재상 그대는 이 지프니를 버리시오."


이어지는 지프니왕의 말에 재상의 눈이 커졌다.
지프니를 버려라. 이 비루한 한 목숨을 연명하겠다고 나라도 국왕도 팔라고 한다.


"그대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일찍이 선왕을 보필할 때부터 봐았기에 잘 알고 있소.
그대라면 어느 곳을 가더라도 낭중지추일 터겠지."
"하오나 폐하. 어찌 저에게 그런..."
"왕명이오."


감정을 비추지 않기로 유명한 지프니의 늙은 재상도 이번 만큼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내 일찍이 어린 나이부터 왕노릇을 함에도 뻣뻣한 대신들에게 맞서 그나마 내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재상의 덕분이오. 그대의 덕과 공은 이미 선대부터 시작된 바. 그대만큼은 살았으면 좋겠구려.
어쩌면 재상을 내 분신쯤으로 내가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지프니왕이 키득거렸다.


"폐하.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이 늙고 비루한 몸보다 살아야할 자들은 많습니다. 왕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왜 하필 자신인가.


"왕명은 거두지 않소. 아니 국명(國命)하겠소."


재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국명은 거절할 수 없다.
지프니에서는 왕의 일생에 왕명보다 더 높은 명을 딱 세 번할 수 있었다.
국명. 왕이 내리는 명령이 아닌 왕국이 내리는 명령이다.
그 명령을 어긴 대신은 그 자리에서 왕이 죽음을 사사해도 반대명분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국명을 받은 재상은 요동치는 가슴을 고요하게 재우고 대답했다.


"허나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청이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처도 일찍이 죽어버린 마당에 제 피붙이라고 있는 못난 아들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몸도 허약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인지 연무장에 틀어박혀 검술만을 익혀왔습니다. 이 아이를 참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 아이가
전쟁에서 바라는 한 가지를 들어주십시오."


일찍이 지프니왕은 재상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아들이 날때부터 용의 저주라는 지병을 앓고 있는 것도.
또한 그가 모든 일을 제쳐두고 검에 미쳐있다는 것까지도.


그러나 큰 기대는 없었다. 용의 저주가 걸린 자가 검술을 아무리 연마해봐야 소울 블레이드나 쓸 수 있겠는가.
다만 국왕은 재상이 얼마나 그 아들을 아끼는지 알았다.
그래서 쉽게 허락해줄 법한 재상의 마지막 부탁을 선뜻 승낙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재상의 결연한 눈빛을 본 지프니왕은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 알겠소. 내일 아침 재상의 아들의 알현을 윤허하겠소."
"감사합니다. 폐하."
"나가보시오."


그 말을 끝으로
늙은 재상은 물러나고, 젊은 왕은 남았다.


***


재상은 왕성을 빠져나오는 데로 아들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아들은 연무장의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재상은 구태여 아들을 부르지 않고 그 스스로 검무를 멈추길 기다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를 잇지도 않은 채 검에 미친 검치아들.
자신이 보기에는 못나게 낳아준 것이 미안하기만 한, 사랑스러운 아들.
이미 중년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자신의 눈에는 어리고 연약한 소년이었다.


중년이자 소년인 그의 검무는 검을 모르는 재상이 언뜻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비와 벌이 추는 춤이 저러할까.


"쿨럭. 쿨럭."


재상의 아들이 각혈함과 동시에 그의 검무가 끝났다.
재상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용의 저주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보이지만, 시도때도 모르게 저런 각혈 현상이 찾아온다.
그리고 각혈한 만큼 자신의 생명력은 고갈되어 간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자신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아비를 반겼다.
사실 재상은 자신의 아들이 불혹에 가까운 나이까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다.
보통 용의 저주에 걸린 사람들은 약관을 가까스로 넘기고 단명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 되었다. 내일 이 패를 받고 폐하를 알현하거라."


사실 애초부터 아들은 참전에 대한 강한 의사가 있었다.
그렇지만 재상은 반대했었다. 하루라도 이 못난 아비 대신 아들이 살아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 누가 만병제가 날뛰는 제국과의 전장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고 싶겠는가.


하지만, 이 지프니왕국의 많은 백성들이 자신의 아들을 그 전쟁터로 보냈다.
아니 재상인 내가 보냈다. 이제와 그들에게 내 아들만큼은 전쟁에서 빠지겠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제 자신은 왕국을 버리고 망명을 가는 무쓸모한 늙은이일 뿐이었다.
왕국에게 마지막으로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은 참전하고 싶어하는 아들을 허락하는 것. 그뿐 이다.


재상은 못내 그게 마음에 걸렸다. 이 못난 아비의 죄를 아들이 대신 씻는 것은 아닐까.
아들에게도 죄를 지은 아비인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죄스러운 마음으로 재상은 아들에게 알현패를 건넸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덥썩 그 명패를 받아갔다.


"괞찬겠느냐?"


괜찮을리가 있겠느냐.


"모르겠습니다. 허나 어차피 제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자로 태어나서 저도 뭐 하나는 해봐야겠지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요즘들어 아들의 각혈이 빈번해지고 그 양이 많아졌다는 것을.
용의 저주로 인해 죽기 전 증상이었다.


아들은 다시 무심하게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재상에게 검무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슬펐다.



- - -


흑흑. 절단신공 본의 아니게...
연재는 3편으로 흘러 갑니다.
갑자기 연재중 일이 생겨서 죄송합니다.

3편은 역시 이야기가 대충 짐작이 가시겠죠.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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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14/11/24 09:03
수정 아이콘
재밌는데...... 무플이네요..

3편 기대하겠습니다 :)
14/11/24 18:17
수정 아이콘
왜죠
왜 늘어가죠
이참에 더 길게 쓰시죠
궁금하잖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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