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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22 01:11:42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19



2. 라티움









천 년의 수도, 영원의 도시 비잔티노플은 눈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오랜만에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보며 시민들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투명하리 마치 하얀 눈이었고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눈의 축복 속에서, 대궁전의 자줏빛 방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 이레네 황후는 떨리는 입으로 간신히 내의를 향해 물었다.



“아들…… 인가?”



내의는 땀으로 뒤덮인 얼굴로 만면에 웃어 보였다. 하아, 하는 한숨과도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참아왔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황후는 부르르 떨리는 팔을 내밀었다.

얼마나 고대하던 자줏빛 출생의 아들인가. 이미 십수 년도 더 전에, 첫 번째로 아들을 낳아서 황후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던 그녀였건만, 첫째 아들을 출산하기 얼마 전 자줏빛 궁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산모가 아이를 낳기에는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에서 해산해야만 했고, 태어난 것이 아들인 것을 확인하고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녕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황제 일레키우스 데 콤네노스는 황후가 두 번째 아들은 자줏빛의 가호를 받으며 태어날 수 있게 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자줏빛 오오라를 뿜어내는 고귀한 출생의 아들만이 대 신성 라티움 제국의 정통 후계자가 될 수 있으며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후가 자줏빛 방에서 둘째를 낳았을 때 황제는 실망했다. 아들이 아닌 딸이었기 때문이다. 황후를 쏙 닮은, 이제 막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딸이었으나 황제는 점점 늙어가는 자신의 운명 때문인지 기뻐할 수 없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아내였다. 사혼은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고 길길이 날뛰던 아타나시우스의 총대주교에게 온갖 설득과 회유와 협박을 동원해 간신히 허락을 얻어 낸 결혼이었다. 다섯 번째 결혼할 경우 파문도 불사하겠다는 총대주교였기 때문에,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황제는 조급해졌다. 서두르지 않으면 자신의 대에서 자줏빛 출생 황제의 대가 끊어질 수 있었다.

황제가 그토록 자줏빛 출생에 목을 매는 것은, 점점 황제의 권위가 떨어져 가는 이때에 그나마 황제로서 남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바로 고귀한 혈통, 고귀한 자임의 증표인 자줏빛 출생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공인된 타이틀인 만큼 이것을 가지지 못한 황제는 잠시 제위에 머무를 수는 있을지라도 결국은 쫓겨났고 아무리 어린 황제라도 자줏빛 출생이라는 배경을 가진 황제는 기필코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년이 되어 친정을 선포할 수 있었다. 황제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자줏빛으로 빛나는 오오라의 힘이 그 모든 것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이 그를 버리신 듯, 다음에 탄생한 자줏빛 출생 역시 딸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셋째를 낳을 때 산고를 크게 치른 황후는 수년이 넘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궁중 의사들이 모두 달라붙었으나 도통 알 수 없는 쓸데없는 말만 했을 뿐 그녀를 고치지 못했다. 황후는 하루하루 말라갔고 이제 곧 죽을 날만 받아놓은 것 같았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임신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병든 아내의 위에 올라탄 황제를 손가락질하면서도 황후의 처지를 동정했다. 병든 몸으로 아이를 가져봤자 어차피 같이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남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힘을 냈다. 조금이나마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려 했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 했다. 지금의 그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 송장처럼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한 그녀가 아니었다. 물론 이미 오랫동안 병에 굴복당해 있었던 황후였기에 그 모든 것이 순탄치는 않았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이나 혼절했으며 그때마다 궁중 의사들은 자신들의 목이 온전한지 수시로 점검해야만 했다. 마침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위기가 왔을 때, 그때조차도 그녀는 이겨냈다.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오로지 자신만 믿고 자라나고 있는 아기를 위해. 그런 아기에게 세상의 빛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보낼 수 없었기에…….

그랬기에 더할 나위 없이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부디 아들이기를. 그래서, 자줏빛 출생의 타이틀을 가진 아들을 낳아서 마침내 황후의 진정한 의무를 다하고, 거룩한 선조들이 계신 하늘로 올라갔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위기와 죽음과 삶 속에서 그녀는 아기의 안위를 바라며 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아아…….”



그동안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레네 황후는 자신의 품에 안긴 아들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어머니의 배 속에 있다가 추운 세상에 나와서인지 아들의 얼굴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듣기에 구슬픈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지듯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부풀어 올랐던 황후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디, 축복을…….”



그렇게 황후는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자줏빛 가호 속에서 진정한 후계자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으나 황후의 죽음을 알고는 비통에 빠졌다. 국장이 선포되었고 비잔티노플의 시민은 물론이고 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이레네 황후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다. 젖 한번 먹여보지 못하고 떠나 버린 그녀의 아들을 위한 마음이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들에게 축복이 되어 내리길 빌며.

그러나, 그것은 시작부터 어그러진 듯싶었다.

태어난 아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황가의 가족들은 종종 희한한 상태로 태어나기도 했는데 아래턱이 너무 길어서 입을 자연스럽게 다물 수가 없는 경우도 있었고, 발목이 안쪽으로 꺾여서 제대로 걷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증상이 약한 경우도 있었고 심한 경우도 있었지만 유독 남자들에게서 많이 발생하고 그 정도가 심한 경우가 있어서 황제들은 늘 후사를 염려했었다. 그것이 선조 때부터 당연시되던 오랜 근친혼의 폐해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라티움을 건국하고 제국을 우뚝 설 수 있게 만든 세 명의 명군 황제들과 그들의 이백 년 치세 동안 태어났던 황실의 가족들이 모두 정상이었기에 그 주장은 그다지 힘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꾸준히 그런 문제들이 발생했고 가문에서 갈라져 나가 제국의 서쪽과 동쪽을 차지했다가 두카스 가문과 앙겔로스 가문에 왕좌를 내주게 되어 준 콤네노스 가문의 일부 형제들도 이러한 문제로 후사가 끊어졌기에 힘을 받지 못했을 뿐, 사라지지 않는 잡음처럼 그러한 소문은 끊임없이 떠돌았다.

게다가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주장을 뒤로하고서라도, 지금의 아이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아래턱은 주욱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늘어나 있었고, 덕분에 제대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유모의 젖을 빠는 것도 힘들었고 커서는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킬 수 없었다. 대부분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이 아이가 내반족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도가 가장 심했기에, 발바닥과 발등 사이로 직립할 수 있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걷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황제의 권위가 떨어져 가고 황제 직할령을 벗어난 다른 속주들에서 귀족들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는 해도 황제는 황제였다. 그것도 자줏빛 오오라를 뿜어내는 정통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제대로 서지고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기우뚱한 상태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침이 질질 흘러내리는 꼴이라니?



“아, 아버지!”



누나들과 놀고 있다가 갑자기 등장한 황제를 보자 아들은 반갑다는 표정을 만면에 띄어 올리며 그를 불렀다. 주걱턱 때문에 약간 발음이 새기는 했지만, 자신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던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크나큰 발전이었다.

자줏빛 출생의 아들, 마누엘은 평상시에도 침을 질질 흘렸고 덕분에 일견 천치 같아 보이기는 했으나 정말로 바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뛰어난 두뇌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인내심이 강했고 근면했다. 비록 몸이 약해 후계자 수업도 늦게 시작하기는 했으나 그는 그날 배운 것은 밤을 새우면서라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들을 닦달해서라도 어떻게든 알고자 했다. 오히려 그를 가르치던 선생들이 너무 시달려서 황제에게 사임을 요구하고 싶어 할 정도였다. 물론 정말로 그런 간 큰 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마누엘은 심한 주걱턱으로 인한 대화의 단절도 극복해냈다. 말하기 힘들고, 발음이 새고, 자꾸 침만 흐르는 특성상 소극적이고 대화를 피하고 은둔하게 되기 쉬운데 그는 그것을 이겨냈다. 끝없는 인내심으로. 자신이 이 거대한 제국을 통치할 차기 황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물론 그러는 데에는 이 예쁜 동생을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해줄까 나날이 궁리하는 두 누나의 공이 컸다. 동생과 노느라 정신이 없어서 황제가 등장하였는지도 몰랐던, 자줏빛 출생 타이틀을 거머쥔 둘째 안나 공주와 셋째인 아그네스 공주는 살짝 드레스를 들어 올려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오늘 우리 마누엘이 무엇을 했는지 아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안나를 대신하여 아그네스는 마치 제 자랑하듯이 열변을 토하며 우리 동생이 얼마나 예쁘고 장한 일을 했는지 늘어놓았다. 동생에 대한 누나들의 마음인 걸까. 아니면 죽은 아내의 마음이 딸에게 이어져 있는 것일까. 십 년 가까이 어린 동생이라서 단순히 귀여워하는 것일지도 몰랐으나 그녀들과 마누엘의 사랑이 넘치는 우애 어린 모습에, 늘 마누엘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왔던 황제도 이제는 웃을 수 있었다. 자신은 무엇을 걱정했던 것일까. 이레네 황후, 자신이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녀가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 낳은 아이인데. 왜 그리 걱정하고 근심으로 가득 찼었을까. 결국, 그는 이렇게 이겨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일진대.

황제는 자신의 사후, 마누엘의 치세는 그 어떤 때보다도 번영하고 평안하리라 믿었다.





-----------




오늘도 한 자도 못 썼지만.... 22편까지는 비축분이 있으므로 올리던대로 올립니다.

은별 님, 관심어린 댓글 늘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당.
그라시아 님, 올렸으니 미래에 여자친구가 생길까요? 흐흐, 댓글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세상만사다반사 님, 말씀하신대로 올렸습니다. 5일 뒤에 오셔서 긴 댓글을 남겨주셔야 합니닷+_+! 부디 몸 건강히 다녀오시길.

벌써 주말이네요... 한 것도 없는데... ㅠㅠ 다들 행복하고 기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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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시아
14/11/24 10:54
수정 아이콘
아 이제 3편남은건가요..빨리 더 비축하시기를...!! 즐겁게 보고있습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1/24 11:27
수정 아이콘
으엉~ 드디어 댓글이 달렸네요+_+!! 그라시아님께서 손수 댓글을 달아주셨으니, 다음 편 올리겠나이다. 흐흐... 참고로 엊그제 하나 더 써서 비축분은 23편이 됐습니닷!! 그 뒤는..... 음.......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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