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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08 00:26:49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8
홀에 있는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왕의 즉위식이 끝나고 오랜만에 큰 연회가 열려 진탕 먹고 마시며 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중대한 사안이 있다며 모두 모이라 했기 때문이다.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연회가 열리는 그랜드 홀에서 공표할 것이었으므로 딱히 뭔가 준비할 것은 없었으나, 그래도 즉위한 날에 갑자기 긴급 발표가 있다고 하니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 문제를 먼저 매듭짓고 싶으신가 보군요.”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더는 후사를 보실 수 없으니 재위기간 내내 불거질 문제가 아닙니까. 차라리 모두 모인 지금 빠르게 처리해 버리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급하게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뭐,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아, 우리가 뭐 압력을 가한 것도 아니고, 폐하께서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리하시겠다는데 어찌합니까?”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은 옆에서 떠들던 사람들의 화제를 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숙덕거렸다. 게 중에는 국왕의 즉위식이 1년만 더 빨랐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칼레인이 성년식을 치르고 아르켄 공작이 되자 나이시아 12세는 혼인하기로 약조를 맺은 이웃 아르고나 왕국으로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든 고향을 떠나 이곳 아키엔 왕국에 당도한 아르고나 왕국의 공주를 맞이하는 환대 행사가 열렸고, 모두의 축복 속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이 치러지게 되었다. 특히나 둘 다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들이었기에 2세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부 생활은 그리 축복이 넘치지 못했다.

금슬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아르켄 공작의 직속 시종장이 엄히 단속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끊임없이 입방아를 찧던 시종들의 말에 따르면 일과를 마친 공작은 늘 공비의 처소에서 시간을 보냈고 특히 어디 사냥이라도 가서 며칠 성을 비웠다 돌아온 날에는 공비의 침실이 무척이나 후끈하게 달아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본 듯, 마침내 공비는 임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유산해 버리고 말았다. 실망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은 꺾이지 않았기에 두 번째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과 이 아이는 꼭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아 공비는 자는 도중 하혈해 버리고 말았다. 그날 무척이나 구슬픈 울음소리가 공비의 처소에서 흘러나왔다고 시종들은 안타까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이시아 12세와 칼레인은 궁중 내의들을 들들 볶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비의 체력을 보충하고 각별히 건강을 돌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의 보호와 관심이 집중되게 될 경우 마음의 부담감이 더욱 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칼레인은 아이는 언제든 낳을 수 있으니 당분간은 공비의 안위만을 생각하자며 다정하게 그녀를 위로했다.

그 뒤로 한동안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여전히 공비의 처소에 칼레인이 자주 찾아가기는 했으나 그것은 공비와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지 합궁을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연히 관계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 날, 공비는 자신의 몸에서 이상을 감지했다. 그녀를 자세히 진찰한 내의는 기쁜 마음으로 임신을 경하하였다. 왕실 가족들이 모두 기뻐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뒤로 공비는 여느 때보다 더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를 드렸다. 부디 이 아이만큼은 낳을 수 있기를.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부디 이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신은 그 기도를 들어주었다. 다만, 원치 않은 방향으로 들어주었기에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시련이 닥쳐왔다.

아이는 그녀의 바람대로 태어났다. 게다가 왕자였다. 손이 귀한 왕실에 더할 나위 없는 큰 축복이었다. 그러나 채 여덟 달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는 몹시 약했다. 행여 힘주어 만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짓눌려 부서져 버릴 것처럼 약해 보였다. 공비는 누구보다도 부드럽고 자애로운 손길로 아들을 끌어안았으나 출산 후 심한 산욕열에 시달리는 바람에 아이에게 젖 한번 물리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죽어도 좋다던 그녀의 기도가 있었기에 아이 대신 그녀를 대신 데려갔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고난은 모두 끝난 것일까. 그녀의 기도를 어렴풋하게나마 들었던 칼레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잃은 아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눈물은 얼마 뒤에 통곡이 되어 들어 줄 사람 없는 성을 가득 메웠다. 태어날 때부터 약했기에, 내의들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보랏빛 출생이라는 지위를 채 한 달도 누리지 못했던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며 뇌까리는 칼레인의 모습에 장례 미사를 집전했던 대주교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그다지 신심이 깊지 않은 왕자가 이 일로 인해 더욱 냉소적이 되지 않을까 우려됐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불과 1년 전이었다. 그들 사후 칼레인은 종종 굉장히 폭력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괜찮아졌기에 아무도 왕위 찬탈과 같은 일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공비와 공자가 모두 살아 있었다면 칼레인이 반역을 시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극형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없었고, 국왕은 거세된 상태였다.

따라서 왕이 도착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후사 문제이거나 비록 후사는 볼 수 없으나 그래도 왕후의 자리가 비어 있기에 형식적이나마 혼인은 해야겠으므로 왕실 결혼에 관한 것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에 해당하는 대사와 반응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준비를 해 놓았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그들이 온갖 망상을 끝마치고 대충 정신을 차릴 즈음, 칼레인이 그랜드 홀에 당도했다.



“나의 영주님들이시여, 아키엔의 수호자이시며 아르켄과 하르헬의 공작이신 나이시아 폐하이십니다!”



의전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랜드 홀을 메웠고, 이내 문이 열리며 칼레인이 등장하자 모두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울리며 그를 환영하였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박수 세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온 칼레인은 단상 위에 놓인 왕좌 앞에 서서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점차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사그라지다가 이내 조용해지자 칼레인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경들이 연회를 즐기는 데 방해를 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로 공표할 것이 있기에 부득이 그대들의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이미 예상한 분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짐의 후사에 대한 문제를 매듭짓고자 합니다.”



역시, 하고 여기저기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칼레인의 손짓에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 수군거림은 의문을 가득 담은 침묵으로 바뀌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으니 두려울 만도 한데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리고 칼레인이 지나갔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장아장 걷는 것만 제외한다면 조금 전에 칼레인이 등장하는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마침내 단상에 오른 아이를 부드럽게 끌어안은 뒤, 칼레인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제야 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인사하시지요. 짐이 5년 전, 성년식을 마치고 얻게 된 아들입니다.”

“네?!”

“폐, 폐하……?”



예상했던 대로 여기저기에서 술렁임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칼레인은 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름은…… 칼리스토입니다. 칼리스토 폰 나이시아. 지금 이 시간부로, 짐의 아들 칼리스토는 왕자로서 아르켄 공작에 봉해지며, 또한 짐의 정통 후계자임을 선언합니다.”



칼리스토라고 불린 아이는 모든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까지 살짝 숙여 가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였지만, 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너무나 놀랐기에 이제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봉신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빙을 하고 있던 하인들까지도 모두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모두 멍하니 왕을, 그리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잡스러운 것이, 하는 눈빛으로 그 앞에 있는 칼리스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또한, 짐의 아들은…… 오래된 종교의 사제로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대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오래된 종교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받을 것을 권고하는 바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허나, 오래된 종교의 품으로 귀의하는 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혜택이 있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침묵은 이내 깨어졌다. 멈췄던 수군거림이 번지며 이내 소란이 일었고 다들 저마다 뭔가 말하기 위해서 입을 벌려댔으나 왕을 향해 직접 말을 하기보다는 저들끼리 이 느닷없는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기 때문에 칼레인은 그런 그들을 느긋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큰일이다!’



그런 와중에, 홀에 있던 한 사람이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칼레인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러나 칼레인은 그를 잡지 않았다. 아마도 대성당에 있는 대주교를 향해 이 엄청난 소식을 들고 갔을 것이리라. 어차피 한번은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그의 역할은 자신의 대관식까지였다.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다면 받아줄 것이었으나, 그렇지 않다면 부서지는 일만이 남았다.

칼레인은 시선을 내려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무릎을 꿇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비췻빛이 연하게 담긴 눈을 바라보자 그제야 기억이 확실해졌다. 어둠 속에 보였던 동생의 하나 남은 눈동자도 이렇게 빛나고 있었다. 이름 없이 살아온 그 오랜 기간의 한이라도 담긴 듯,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랬기에 스무 해 만에 알게 된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냐…… 칼리스토?”



아이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생각이 칼레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네, 폐하. 폐하의 몸에서, 폐하와 함께 살기로 했으니, 저의 의지는 폐하의 의지이고 폐하의 의지는 저의 의지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제게는 몸이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폐하께서 가끔은 제 몸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그 정도는, 이 동생에게 양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 몸 가지고 이상한 짓 했다간 죽는다.”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는 칼레인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채 그들을 바라보던 가르멜 백작은 사생아를 후계자로 선포한 것으로도 부족해 그 후계자가 믿고 있는 이교까지 전파하려는 국왕의 모습에,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악마에게 빙의된 자의 형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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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시아 님, 은별 님, 댓글 감사합니다. ^^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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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08 11:15
수정 아이콘
힘드실텐데 매일 한 편씩 올리시는군요...
이제 들어오면 이 글부터 찾게 되네요. ^^
가브리엘대천사
14/11/08 16:47
수정 아이콘
아직 비축분이 있어서요^^ 비축분 떨어지면 그땐... 음...^^;; 오실때 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셔요^^
가브리엘대천사
14/11/09 00:26
수정 아이콘
아 근데 화욜까진 못 올릴 것 같아요. 잠시 자릴 비워서리... 다녀와서 올릴게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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