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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0/02 02:19:03
Name 눈시BBv3
Subject [일반] 임진왜란 해전사 - 4. 한산섬 달 밝은 밤에


간단요약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 93년(전쟁 2년차) 2월 22일 난중일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려고 하지 않는다" - 94년 9월 3일, 선조의 비밀 유지


"후배님 고생 많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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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이후, 다뤄볼 해전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93년 초의 웅포 해전, 93년 7월의 2차 당항포 해전, 94년 9~10월의 장문포 해전이죠.

우선 정유재란 전까지 이런저런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이 해전들을 천천히 얘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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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하지 않은 건 적들 뿐
겨울이 오면서 수군이 활동하긴 힘들어집니다. 이순신은 더 이상의 출동을 하지 않고 겨울을 보냈죠.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명군이 내려오면서 일본군을 압박, 철수하는 적을 치겠다는 거였죠. 4차 출동에서 이미 적이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들은 상태였고, 이순신은 육군이 적을 압박하고 수군이 퇴로를 끊는 수륙협공을 주장했습니다. 조정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구요. 이후 전쟁이 끝날때까지 이게 된 적은 없지만요.

그 동안 이순신은 전력 증강을 계속 시도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삼도 수군을 다 합해 250척(전라좌도 60, 우도 90, 경상우도 40, 충청도 60)에 이르는 대함대를 구상했죠. 하지만 그대로 될 순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이 수군에 닥쳐왔기 때문이었죠.

문제는 역시 물자 부족이었습니다. 3차 출동이 끝날 때부터 이미 군량이 부족해진 상황이었고, 화약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임진년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었죠. 일본군이 지나던 곳에 있던 군량들은 일본군이 다 썼고, 백성들은 도망쳤으며, 전라도가 아무리 곡창지대라도 그 부족분을 메울 순 없었습니다. 여기다 명군이 오면서 명군에 군량을 대는 게 최우선이 됐구요. 군량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었고, 화약이 없으면 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약의 재료는 다 수입품이었죠. 이순신은 이것들을 지원을 받기는커녕 보내야 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여기다 있는 것도 계속 뺏기게 됩니다. 육군과 수군의 힘겨루기였죠. 수군 소속의 고을이 계속 육군에 넘어갔고, 그 때마다 병력과 쌓아놨던 군량, 장수들까지 빼 갔습니다. 해당 고을에 군량을 쌓아놔 봤자 육군에 넘어가면 다 뺏기는 거였죠. 여기엔 고종후 등이 이끄는 의병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특히 전라우도가 심했습니다. 전라좌도의 5개에 비해 14~15개의 고을을 가지고 있었죠. 때문에 뺏길 때도 가장 많이 뺏깁니다. 특히 이순신과 대립각을 세운 건 연안성 전투의 영웅 이정암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바다에 접한 19개 고을을 모두 수군에 전속시켜달라고 싸웠습니다만, (늦어도) 93년 말에는 전라우도 소속 역시 불과 5관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이러면서 전라우도는 50척이 채 안 되는, 임진년 4차 출동 때 정도밖에 동원하지 못 하죠. 임진년 때 이억기는 전라도의 위기가 모두 끝난 4차 출동에서야 대군을 이끌고 오는데, 임진년 초반에도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5차 출동 웅포 해전 때는 4차 출동 때보다 더 적은 병력만 끌고 오거든요. 종친인 이억기에 대한 견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징병은 더 큰 문제였습니다. 백성들은 도망갔고, 남은 이들은 육군과 수군의 힘겨루기로 등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육군에서 징병하거나 물자를 뜯어갔고, 수군에서도 그랬죠. 이러니 더 도망가구요. 이런 상황에서 끗발이 센 건 육군이었고, 백성들 역시 육군을 선호했습니다. 수군에 가 봤자 신병은 격군에 투입될 거였으니까요. 싸우려 하는 이들은 수급을 얻기 쉬운 육군을 택했고, 싸우기 싫어하는 이들은 바다에 빠지면 시체도 찾을 수 없는 수군을 꺼렸습니다. 수군은 양인이지만 천민 같은 인식을 받은 힘든 직업 중 하나, 아무리 수군이 승승장구 해도 육군을 택할 수밖에요. 마침 전쟁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구요.

이순신은 경상도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격군을 보충하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이걸론 부족했습니다. 의병과 승병 수백여를 편입시켰지만 이것도 역시 부족했구요. 이중으로 징병당하는 것을 알기에 수군 소속은 수군에 전속시켜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죠.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구요. 결국 아전들을 끝없이 족치고, 도망간 자는 친척과 이웃들까지 끌고 갔으며, 나중에 병력부족에 시달릴 때는 길 가는 사람들까지 다 묶어서 끌고 갑니다. 윤두수 등이 크게 비판했고, 조정에서도 여러 차례 '대충 징발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던 일이죠. 이순신의 대답은 '어쩔 수 없다. 대충 징발하겠다'였습니다.

육군의 상황도 이해가 갑니다. 자원은 한정됐고, 병력은 많을수록 좋았으니까요. 부족하다 부족하다 하지만 수군은 93~94년 동안 최소 110척, (충청도 수군 10여척을 합치면) 최대 140여척의 규모를 이룹니다. 그 수도 만칠천여명으로 통제사가 된 후에는 정식으로 이 대군을 지휘하게 됐구요. 도원수 권율도 이 정도 병력을 거느리진 못 했을 겁니다. 거기다 93년 말에는 명군의 요청으로 전라도에서 3만명을 추가로 징병하는데, 좌우도 각각 2천명을 징병하려 했는데 이것도 반대했거든요.

이렇게 이순신 밑에 대군이 있는 상황, 그럼에도 수군의 규모를 줄이는 걸 반대하고 계속 늘리려고 했던 상황, 여기에 임진년 이후 수군이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조는 이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은 94년부터 닥칩니다. 아니 93년부터 시작됐죠. 93년 여름 이순신은 전라좌수군 6천명 중 600명이 전사 혹은 병사했다고 보고합니다. 수군 전사자의 수가 극히 적은 걸 생각하면 대부분 병사자입니다. 전염병은 계속 유행해 94년에 만팔천여명으로 추정되는 삼도수군 중 1904명이 병사했고 3759명이 병에 걸려 있었죠. 이 때는 이순신의 핵심 장수였던 광양현감 어영담이 병사했습니다. 이순신 자신도 병에 걸려서 큰 고생을 했구요.

92년, 93년, 94년 동안 흉년이 계속됩니다. 있는 것도 계속 털어갔죠. 94년 3월 이순신은 만칠천여명이 먹을 식량이 5월 중순으로 동 난다고 보고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뭐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죠.

"호남 지방을 들어 말하자면 주사(舟師)가 소속되어 있는 지방의 수군은 모두 흩어지고 없어 수령이 결복(結卜)에 따라 인부를 차출하여 스스로 식량을 준비하도록 하여 격군에 충당하고 있는데, 한 번 배에 오르기만 하면 교대할 기약도 없고 계속 지탱할 군량도 없어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한산도에는 백골이 쌓여 보기에 참혹하다 합니다" - 선조실록 94년 10월 3일

먹은 게 적으니 병에 걸리기는 더 쉬워집니다. 있는 수군도 계속 놔둘 수 없었습니다. 교대로 휴가를 보내야 했고, 농사를 짓게 해야 했죠. 군량이 부족하니 입을 덜기 위해서 보내야 했구요. 한 번 입대하면 섬에서 몇 개월이고 있어야 되니 수군을 더 기피하게 됩니다. 병에 걸리면 죽거나 육지로 보내야 했죠. 섬이라 탈출하기 어려운데도 탈영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1595년 2월, 권율은 수군의 상황을 파악해 장계를 올립니다. 여기서 수군은 작은 배들까지 합쳐서 84척, 병력은 4천 1백 9명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마저도 절반 이상 병들어 있다면서요. 난중일기에는 8월 27일 이원익이 한산도에 와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이 때의 병력은 5480명이었습니다.

식량 확보를 위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서 팔았다는 것 역시 95년에 나옵니다. (이 전부터 했을 가능성도 높지만) 최악의 상황에 처했고,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쓴 것이죠. 둔전 등도 지속적으로 해서 효과를 본 모양입니다만, 군량 부족과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엔 역부족이었구요. 그나마 95년 가을부터는 상황이 호전됐고, 조정에서도 전라도의 바다에 접한 고을에서 노비들을 격군으로 투입하게 합니다. 일본의 재침가능성이 나오고 있었으니 수군을 강화하긴 해야 했죠.

이렇게 호전되었음에도 97년 2월, 이순신이 출동했을 때 이끈 병력은 63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원균이 통제사가 되면서 두 배로 불어나는 기적을 볼 수 있구요.

이런 일련의 일들이 바다에서만 일어난 건 아닙니다. 군량 부족과 전염병은 육군은 물론 일본군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니까요. 최대한 많은 병력이 필요했던 건 육군도 마찬가지였죠. 이순신이 둔 무리수 역시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순 있어도 마냥 잘 했다고 할 수도 없구요.

문제는 이런 문제점들을 계속 겪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지원 없이 수군을 악착같이 지켜내고 있었는데 겁쟁이라느니 욕하는 것이겠죠.

+) 군량, 병력 문제 때문에 제대로 다루지 못 했는데 화약 문제도 심각했죠. 다행히 이봉수가 염초 만드는 법을 알아내서 양산에 성공합니다. 그래도 유황을 구하지 못 해 조정에 요청해야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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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포 해전
http://panzercho.egloos.com/viewer/11115506
이글루스 팬저님의 블로그입니다. 왜성 카테고리가 따로 있고 일일이 다 답사를 하신 모양이네요.

임진년, 일본 수군의 피해는 컸습니다. 그냥 수군만의 문제가 아니었죠. 가령 시마즈군은 육군 외에 뱃사공, 격군 등 수송에 쓸 인원 이천명을 투입했는데, 93년 봄에 이들 중 과반수가 죽어 본토에서 충원해와야 했습니다. 모리군도 마찬가지였죠. (이전에 말했던, 조선 수군이 상대한 건 일본 수군만이 아니라 육군 수송함대라는 게 이런 쪽에서 볼 수 있는 거죠) 여러 해전들에서 조선인들을 붙잡아 격군으로 동원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격군이 그저 천한 일이었기에 한 건 아닐 겁니다. 조선 수군의 활약과 전염병,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것이죠.

조선 수군과 맞서 싸울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그만두긴 아직 일렀습니다. 어떻게든 수송은 해야 했고, 수송선단을 지켜야 했습니다.

왜성은 경상도 곳곳에 지어집니다. 바닷가는 물론 낙동강 곳곳에 지어지죠. 이 중 특기해 볼 부분이 거제도 북쪽부터 웅천, 김해, 가덕도 등에 집중적으로 지어진 왜성들입니다.

만은 항구를 짓기에 좋은 곳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있으니 파도가 덜하니까요. 방어에도 좋죠. 조선 수군이 들어오면 육지에서 맞서면 됩니다. 웅포의 경우 판옥선 7~8척 정도만 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들어갈 수 있는 수도 적고, 들어가면 육지에서 포위공격하는 거죠. 좌초의 위험도 있습니다. 여기다 썰물이 들어오면 그대로 뻘에 박히는 거죠.

위치들도 문제였습니다. 판옥선은 연안용이고, 외해에서 활동하기 힘들었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푹 쉬려면 괜찮은 곳에 정박해야죠. 물과 나무도 보급해야 되구요. 그 좋은 곳들을 다 일본군이 장악했습니다. 위 포스팅에서 다루는 명동왜성의 경우 수군이 한 번 정박한 곳에 지었다고 추측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부산포로 가기 힘듭니다. 중간중간 쉴 곳을 일본군이 다 장악했으니까요. 웅천에선 왜선 백척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고, 이들을 놔두고 가면 뒤가 위험했습니다. 부산포로 가려면 웅천을 공격해야 했고, 일본군은 웅천을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무려 한 달 이상 지속된 웅포 해전이 시작되죠.

92년 말까지 명의 대군이 도착했고 1월 초부터 평양성을 공격, 탈환에 성공합니다. 명군은 한양 탈환을 위해 진격했고, 권율 역시 북상하고 있었죠. 분위기만 보면 일본군을 경상도 끝까지 밀어버릴 기세였습니다.

1월 22일, 수군에도 출동 명령이 내려옵니다. 명군의 남하에 맞춰 도망가는 적의 퇴로를 끊고 섬멸하라는 것이었죠.
1월 30일, 전라좌수군이 집결합니다.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려 2월 6일 출동했고, 7일에 견내량에서 원균과 합류하죠. 다음날에는 이억기가 합류합니다. (이 때 이억기가 늦는다고 원균이 화내고 이순신이 달래는 상황이 나옵니다. -_-; 그리고 전라우수군이 40척밖에 안 돼서 실망한 모습도 보이구요) 이렇게 89척의 연함함대가 만들어집니다

날씨가 다시 험해졌고, 맑기를 기다려 출동하니 10일이었습니다. 이 날과 12일, 수군은 계속 적을 유인하려 했지만 나오지 않습니다. 일단 칠천량으로 돌아갔고, 18일에야 8척 정도가 유인에 걸려서 깨뜨리고 목을 하나 베었죠. 20일에 다시 나갔을 때는 거센 바람으로 배들끼리 부딪혀서 4척이 깨집니다. =_=;

2월 22일, 수군은 단독으로 수륙협공을 시도합니다. 앞서 육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명군 대접에 바쁘고 남은 병력도 없어서 곽재우에게 창원을 공격한 후 웅천으로 가라고 지시했다는 답만 들었거든요. 이에 13척을 뽑아 바다로 공격하고 의병, 승병과 김완 등이 이끄는 수군을 10척에 태워 상륙시킵니다. 서쪽과 동쪽, 바다로 삼면에서 협공하는 모양새를 보이자 적이 혼란에 빠졌고, 공격해서 괜찮은 성과를 거둔 모양입니다.

하지만 분위기에 취해 판옥선 두 척이 멋대로 돌격, 좌초돼서 전복되고 적에게 공격받습니다.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가 지키고 있었는데 좌초된 배를 습격하는 게 애초의 작전이었다고 하죠. 여기서 구키군이 판옥선에 건 줄을 와키자카군이 방해하려고 끊었다고 합니다. (...) 얘네들도 재밌게 놉니다. 아무튼 이렇게 2척이 탈취당했고, 이어 진도의 상선 역시 포위당합니다. 다행히 (전라좌도?) 우후가 구출했지만 근처에 있던 경상우수군은 모른 척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맨 위의 '모두 원균 때문이다'가 나오는 거죠. 원균에게 욕을 한사발 퍼부어준 모양입니다. 일기에서 원균을 대놓고 욕한 게 나오는 게 이 때부터죠.

+) 위의 2척 중 1척이 전복된건지 2척 다 전복된건지는 뭔가 애매하네요. 일단 장계의 말미에는 발포 (나머지 하나는 가리포 소속) 소속 통선의 전사자만 얘기하고 있습니다. 협판기에는 2척 다 잡은 걸로 돼 있구요. - 오류네요. -_-; 1척 전복돼서 사망자 많다는 장계가 따로 있네요.

28일과 3월 6일에 비격진천뢰도 써 가면서 육지의 적들에 맞섰고 역시 제법 사살한 모양입니다만 거기까지였습니다. 1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장기간 작전을 해서 물자도 떨어졌고, 무엇보다 군사들을 쉬게 해 줘야 했죠. 고향으로 보내서 농사도 짓게 해 줘야 했구요. 이렇게 웅포 해전은 끝이 납니다.

+) 그리고 농사 짓게 보낸 군사들은 육군에서 뺏어가고 수군에 안 가려고 도망가고 전염병으로 죽고 해서 친척이나 이웃들이라도 끌고 가서 수를 채우고... 위의 상황이 나오는 거죠. -_-;

웅포 해전으로 수군의 한계와 수륙협공의 중요성이 나타났습니다. 육군이 나서지 않으면 수군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하지만 육군은 올 생각을 안 했습니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명군은 벽제관 전투로 한 발 물러섰고, 다시 강화회담에 나섭니다. 웅포 해전이 협상 테이블에 선 일본군에게 꽤나 큰 압박이긴 했을 겁니다만.

선조는 임진년에 이순신의 품계를 정 2품 정헌대부로 올려 원균, 이억기보다 우위에 있게 했고, 여기서도 수군을 이끌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는 93년 중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으로 이어지죠. 선조는 이순신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대도 너무 컸죠. 한 척의 적도 돌려보내지 말라고 강하게 명령했지만 별 전과가 없었고,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집니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 선조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이순신의 고난은 더욱 더 커져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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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열이 뻗쳐서 - -

+) 맨 처음부터 썼던 옥포해전에 도도 다카토라가 있었는지 여부 문제. 김시덕 교수님이 여기에 의혹을 가졌다고 썼는데 아니더군요. =_=; 어디서 헷갈린 걸까요; 나중에 이 쪽 얘기 좀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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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02 04:22
수정 아이콘
글 감사합니다. 제일 열받기 직전에 열이 슬슬 올라오는 시기의 글을 써 주셨네요. 내용보니 담담하게 쓰시기가 좀 갑갑하셨을텐데...크크
그리고 5부는 당연히 연휴때 올라오는 걸로 알겠습니다. ε=ε=ε=ε=ε=ε=┌(; ̄◇ ̄)┘
눈시BBv3
14/10/02 14:32
수정 아이콘
크크 즐거운 연휴에 더 갑갑하고 열 받는 걸 보고 싶으신 건가요 +_+
앞으로 쓸 거 생각하면 막막합니다 =_=
Je ne sais quoi
14/10/02 07:59
수정 아이콘
와 정말 깝깝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눈시BBv3
14/10/02 15:09
수정 아이콘
그렇죠 ㅠㅠ... 옛날에 쓸 땐 대충 하고 넘어갔는데 팔수록 장난 아니네요. 감사합니다ㅠㅠ
14/10/02 09:17
수정 아이콘
총체적 난국이란게 이런거구나 싶은 상황이네요.
제가 충무공의 입장이었다면 정말 울면서 일했을 듯...
눈시BBv3
14/10/02 15:10
수정 아이콘
다음편에 시 한편 소개할건데...
정말 계속 운다는 부분이 있습니다ㅠ
PoeticWolf
14/10/02 10:09
수정 아이콘
에휴 ㅡㅡ ;; 왜 난 아침에 이 글을 읽었는가...
그래도 추천은 잊지 않겠다
눈시BBv3
14/10/02 15:11
수정 아이콘
으흐흐흐 왜 그러셨어요
감사합니다 ><
터치터치
14/10/02 10:27
수정 아이콘
정성스러운 글 잘 봤고 단박에 읽었다고 하기 미안할 정도네요. 드릴 건 추천 뿐...
눈시BBv3
14/10/02 15:28
수정 아이콘
^^ 크크 아닙니다. 감사합니다ㅏ~
뒹굴뒹굴
14/10/02 12:41
수정 아이콘
오 드디어 올라왔네요.
암걸리겠다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이었네요. 흐
제가 제일 신기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딱히 뭐 위에서 주는건 없는데 위에다가는 잘 뺐기고 적이랑은 또 잘 싸우고..;;;
터치터치
14/10/02 12:49
수정 아이콘
크크 그래서 회사에서 밑에 쪼고 마른 수건 다시 짜고 하나봐요. 이런 일화를 보면 정말로 그럴 듯 하네요. 역시 쪼니까 되네...
눈시BBv3
14/10/02 15:39
수정 아이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
그렇죠.
오히려 전투보다 저걸 더 높게 봐야될거구요. 명량 이후에도 폭풍재건한 걸 보면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그리고 영조 때 그 유명한 박문수가 배 만드는 거 지원해달라 하자 이순신은 혼자도 잘했다면서 거부당합니다ㅠ
14/10/02 13:37
수정 아이콘
깝깝해서 깝수육이 땡깁니다. 어휴 ㅠㅠ
눈시BBv3
14/10/02 15:40
수정 아이콘
크크 저도 사주세요 에휴ㅜㅜ
사랑한순간의Fire
14/10/05 14:31
수정 아이콘
추천뿐입니다! 잘 읽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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