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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9/17 19:18:57
Name 새강이
Subject [일반]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우리는 각기 계산하기 위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한 사내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곁에서 술잔을 받아 놓고 연탄불에 손을 쬐고 있던 사내였는데, 술을 마시기 위해서 거기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불이 쬐고 싶어서 잠깐 들렀다는 꼴을 하고 있었다. 제법 깨끗한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엔 기름도 얌전하게 발라서 카바이드의 불꽃이 너풀댈 때마다 머리칼의 하이라이트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선지는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가난뱅이 냄새가 나는 서른 대여섯 살 짜리 사내였다. 아마 빈약하게 생긴 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유난히 새빨간 눈시울 때문이었을까. 그 사내가 나나 안(安) 중의 어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그냥 우리 쪽을 향하여 말을 걸어 온 것이다.

  “미안하지만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 있습니다만……”
이라고 그 사내는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힘없는 음성으로 봐서는 꼭 끼워 달라는 건 아니라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와 함께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는 것 같기도 했다. 나와 안은 잠깐 얼굴을 마주 보고 나서,
  “아저씨 술값만 있다면……”
이라고 내가 말했다.
  “함께 가시죠.”
라고 안도 내 말을 이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그 사내는 여전히 힘없는 음성으로 말하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안은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유쾌한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술좌석에서 알게 된 사람끼리는 의외로 재미있게 놀게 되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이렇게 힘없는 목소리로 끼여드는 양반은 없었다. 즐거움이 넘치고 넘친다는 얼굴로 요란스럽게 끼여들어야만 일아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갑자기 목적지를 잊은 사람들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전봇대에 붙은 약 광고판 속에서는 예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쓸쓸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떤 빌딩의 옥상에서는 소주 광고의 네온사인이 열심히 명멸하고 있었고, 소주 광고 곁에서는 약 광고의 네온사인이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황급히 꺼졌다간 다시 켜져서 오랫동안 빛나고 있었고, 이젠 완전히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돌덩이처럼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고,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이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중략)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말하기 시작했다.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오늘 낮에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젠 슬프지도 않다는 얼굴로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네에에.”
  “그거 안되셨군요.”
라고 안과 나는 각각 조의를 표했다.
  “아내와 나는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아내가 어린애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몽땅 우리 두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돈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돈이 생기면 우리는 어디든지 같이 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딸기 철엔 수원에도 가고, 포도 철에 안양에도 가고, 여름이면 대천에도 가고, 가을엔 경주에도 가보고, 밤엔 영화 구경, 쇼 구경하러 열심히 극장에 쫓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무슨 병환이셨던가요?”
하고 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성 뇌막염이라고 의사가 그랬습니다. 아내는 옛날에 급성 맹장염 수술을 받은 적도 있고, 급성 폐렴을 앓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만 모두 괜찮았는데 이번의 급성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죽고 말았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떨구고 한참 동안 무언지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안이 손가락으로 내 무릎을 찌르며 우리는 꺼지는 게 어떻겠느냐는 눈짓을 보냈다. 나 역시 동감이었지만 그때 그 사내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계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눌러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는 재작년에 결혼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친정이 대구 근처에 있다는 얘기만 했지 한 번도 친정과는 내왕이 없었습니다. 난 처갓집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었어요.”
  그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입을 우물거렸다.
  “뭘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후에 다시 고개를 들고 마치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사천 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째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환이 다쿠앙과 양파가 담긴 접시를 갖다 놓고 나갔다.
  “기분 나쁜 얘길 해서 미안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의논해 보고 싶은데,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버리고 싶은데요.”
  “쓰십시오.”
  안이 얼른 대답했다.
  “이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주시겠어요?”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함께 있어 주십시오.”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승낙했다.
  “멋있게 한번 써 봅시다.”
라고 사내는 우리와 만나 후 처음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여전히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새강이입니다 추석도 지나고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날이 서늘해졌네요 군대다녀와서 늦은 나이에 다시 한번 수능을 공부하고 있는데 문제를 풀다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지문이 있어서 올립니다. 이 소설의 배경인 1964년 겨울은 아내를 잃은 사내에게 엄청 추웠겠지요.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올해, 다가올 겨울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이웃들이 따뜻하게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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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돌이
14/09/17 19:39
수정 아이콘
그 뒤 내용이 남자가 같은방을 쓰자고 하지만 사내가 각방을 쓰자고 하고 결국 남자가 자살한다는이야기죠. 마침 저도 김승옥 소설을 보는중이어서
王天君
14/09/17 19:44
수정 아이콘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어릴 때도 뭔가 서늘했는데 나이 먹으니까 그 서늘함이 정말 감당치 못할 정도의 시린 느낌입니다.
14/09/17 20:18
수정 아이콘
제가 저 시절 살지도 않았는데도 그림이...너무 선명합니다...
문학소년~*
14/09/17 20:22
수정 아이콘
수능공부하면서 읽었던 문학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입니다.
14/09/17 21:55
수정 아이콘
고등학교 때인가, 여름방학 내내 집에 있는 단편문학 선집을 읽었는데 충격을 받았던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공책에다 몇몇 단편들을 적어 놓았던 기억이 나네요. 문학사적으로 정말
가치 있는 명작들인데... 수능 공부하던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되니 맥이 확 빠지더군요.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무진기행'
- 한무숙 '돌'
- 최인훈 '국도의 끝'
- 조세희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 조선작 '영자의 전성시대'-->표현이 너무 적나라해서 충격을 받음.

대학졸업할 때 졸업논문 소재로 작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잡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사회적인 이슈에 민감한 작가를 선택하는데 반해 정말 고전적이고 별 이슈가 없어
보이는 오영수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교수님도 한마디 하시더군요.
오영수는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요람기'의 저자이자 '갯마을'이란 중편 소설로 유명합니다.
주로 전원생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썼지요.
하지만 오영수의 진정한 대표작은 "메아리"이며 저는 위의 작품들을 존경하지만 "메아리"는 사랑합니다.

문학의 힘은 위대하더군요.
이혼하려는 부부에게 중앙도서관에서 복사해온 "메아리"를 나눠주어 이혼을 막은 적이 있습니다(?!)
yangjyess
14/09/18 12:29
수정 아이콘
해순이의 컴백이 참 감동적이었던... 갯마을.. 흐
14/09/17 22:13
수정 아이콘
이 소설 앞부분에서 '나'와 '안'이 보여주는 '자기' 이야기는 1964년의 시대상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더 알아보시면 재밌으실 거에요. 한국사 선택하시는 분이라면 이미 아실지도.
라라 안티포바
14/09/17 22:29
수정 아이콘
예전에 김승옥 단편집 보고 충격과 공포였죠. 뭐 이런 시대에 글이 이렇게 세련될수가 있지? 하구요.
헥스밤
14/09/18 12:58
수정 아이콘
'서울, 1964년 겨울'과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진짜 당장 어제 어떤 작가가 써냈다 해도 믿겨질 만한 세련됨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다른 단편들도 정말 위대하지만.

하지만 김승옥의 엽편은. 음. 쩜쩜쩜..한 느낌입니다.
구밀복검
14/09/17 22:41
수정 아이콘
김승옥이 재능은 대단한데, 그에 걸맞는 역작을 써낸 건 없긴 하죠. 결국 이름을 남긴 것은 모두 단편..
행복한남자
14/09/17 23:45
수정 아이콘
오늘은 단편집 한번 다시 보고 자야겠네요..
DEMI EE 17
14/09/18 00:03
수정 아이콘
살아계신 작가님인지 몰랐네요..
14/09/18 00:42
수정 아이콘
일전에 EBS에서 단막극으로 방영한걸 보고 바로 글로 찾아봤었습니다. 싸한 느낌이 참 묘했던 기억이 납니다.
14/09/18 11:53
수정 아이콘
김승옥 선생 소설 중 가장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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