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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8/24 02:51:26
Name quickpurple
Subject [일반] [리뷰] 경주 - 오리배는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보인다
써놓고 보니 줄거리를 줄줄줄 스포일러가 매우 많습니다. 그것도 두편이나. 생활의 발견, 경주를 아직 감상하지 못하신 분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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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부터 하나. 경수는 선배를 찾아 춘천으로 간다. 거기서 자신의 팬이라는 명숙을 만난다. 경수와 명숙 사이에는 이내 불꽃이 튀는데, 사실 선배는 남몰래 명숙을 좋아하고 있었다. 선배는 경수에게 우리 인간은 되기 힘들어도 짐승은 되지 말자고 부탁한다. 다음 날 비 내리는 호숫가, 경수에게 선배와 같이 있던 명숙에게 전화가 온다. 경수는 불장난을 치는 명숙에게 선배에게 배운 말을 요긴하게 되풀이한다. 원주에 가서 경수는 부산행 기차를 탄다. 우연히 앞에 앉아 있던 선영에게 이끌린 경수는 경주에서 무작정 내린다. 다짜고짜 찾아간 선영도 알고 보니 자신의 팬이다. 달마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오해도 받고 점쟁이도 마주치고 이러쿵 저러쿵 마침내 경수는 목표를 달성 꿈 같은 시간을 보낸다. 같은 책을 읽었는지 공교롭게도 선영은 명숙의 말과 비슷한 것을 쪽지에 적어두고 간다. 경수가 낭패감에 담배를 태우며 창 밖을 보니 소양호에서 탔던 오리배가 둥둥 지나간다. 선영의 집으로 들어가는 가늘고 긴 골목길에서 며칠을 서성이던 경수는 별안간 쏟아지는 비를 맞는다. 경수는 흠뻑 비에 젖어가는 채 제 손의 손금을 내려다보며, 청평사에 놀러 가는 길에 갑판 위에서 선배가 들려준 회전문에 얽힌 천년도 더 묵은 상사뱀 설화를 떠올린다.

다소 거칠게 말하는 게 허락된다면, 홍상수의 모든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비슷한 시퀀스의 반복은 결국 (찌질한) 남자(인간)을 냉소하기 위한 장치의 역할로 기능한다. 대개 홍상수가 찍은 영화들은, 즉 홍상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초지일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은 애들 하는 짓 하던 지숙과의 강원도에서의 추억을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는다. 오! 수정에서 영수의 창피한 일면(구타당함)을 기억하는 것은 영수 본인이 아니라 수정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우리 인간은 되지 못 하더라도 짐승은 되지 말자는 선배의 말을 짐짓 고스란히 따라한다. 극장전에서 영실은 영화 속 인물을 무심코 흉내내며 수작을 부리는 동수에게 영화 잘못 보셨다면서 비웃는다. 홍상수가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대로 상투적인 고정관념, 일상적인 반응은 유치하게만 보인다. 이미 타인의 언행을 되풀이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희극적이기에 충분한데, 더욱이 그 반복은 복제와 달리 완전히 같을 수 없는 모방의 반복이다.

테가 가는 안경. 면도를 하지 않아 지저분하게 돋은 콧수염과 턱수염. 부시시하게 정돈 안 된 머리. 결국 주인공 최현은 홍상수다. 혹은 경수가 최현이다. 최현은 아는 선배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간다. 7년 전 경주의 한 찻집에서 자신이 찍어준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된 덕택에 최현은 그 찻집에서 본 춘화를 다시 기억하고는 무작정 경주로 내려 간다. 역전 안내소에서 경주는 중국인으로 오해받지만 굳이 풀지 않고 내버려둔다. 그리고 자전거를 빌려 찻집에 찾아가는데, 춘화는 위에 벽지가 발린 채다. 3년 전 새로 주인이 된 주인 윤희는 최현의 청에 따라 황차를 내준다. 황차는 하필 스님들이 좋아한다고 덧붙이며, 윤희는 흔히 다도라 말하는 과정으로 차를 내려 준다. 와중에 일본인 관광객에게는 배우로 오해도 받으며 엉겁결에 사진도 찍힌다. 일본인 관광객은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지만 또 낯익기도 한 말을 반복하는데, 최현은 나중에 밝혀지듯 일본말을 할 줄 모르는 체 군다. 이상하게도 그 뒤로도 계속 최현은 자꾸 그가 아닌 타인으로 오해 받는다.

후배 여정을 불러다가는 어디선가 봤던 수법인지 무언가 써먹으려다 성사를 못본다. 여정은 점쟁이에게서 얻은 불쾌한 점괘만 하나 가지고 이내 서울로 되돌아간다. 최현은 오리배가 한 떼 묶여 있는 호숫가를 거닐다 불현듯 찻집으로 돌아간다. 생각난 듯 다시 찌질한 변태처럼 춘화에 집착하는 최현에게 윤희는 춘화가 미모의 전 주인을 흠모하던 화가가 그려준 것이라고 알려준다. 무언가 호감을 느낀 윤희는 최현을 밤 술자리에 초대하고, 그들은 어울려 술을 마신다. 술자리가 파한 뒤 최현은 윤희를 뒤따라 고분에도 올라가보곤 하다가 마침내 윤희의 집까지 입성한다. 하지만 윤희가 일부러 벌려둔 방문 앞에서 최현은 망설이다 그만둔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길었을 하루가 끝나고 새벽녘 최현은 중국인 아내와 통화를 한다. 아내는 전화로 모리화차라는 제목의 전통 민요를 불러준다. 사랑을 고백하는 이 아름다운 노래는 청나라 때부터 양자강 이남에서 널리 불러진 연가라 한다.

곳곳에 아무데서나 솟아있는 고분, 그 사이사이에 무질서하게 놓여져 골목길들과 길 양 켠에 자리 잡은 근본 없는 한옥 주택들. 천년 전에 망한 천년 왕국 신라의 도읍지 고도 경주의 풍경이다. 장률은 두만강과 이리 등의 전작에서 줄곧 표면적으로는 공간을 찍었(다고 오해받아 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목 그대로 경주라는 공간에 집착하기 쉽다. 그러면 최현과 최현의 하루를 쫓아가는 이 영화는 찌질하고 변태적인 홍상수 영화식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그것도 흉내와 반복으로 거칠게 나누어지는 홍상수식 영화를 통째로 다시 흉내내고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단순히 홍상수의 인물과 홍상수의 연출을 모방하는 이런 자질구레한 알레고리들 간에 인과는 없다. 왜냐하면 장률은 스스로를 비웃으려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홍상수가 그의 영화들 속에서 지금껏 드러내왔던 생각들에 별로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 장률이 일상 속에 숨겨진 인간의 부조리함을 냉소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반복시키고 그 차이를 대조시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10년 전 영화를 구태여 다시 반복하는가. 선배, 역전에서 마주친 모녀, 윤희의 남편, 점쟁이 할아버지. 서두에서부터 시작해 영화 내내 곧곧에서 느껴지는 죽음을 최현을 마침내 코앞에서 처참한 광경으로 목격한다. 처음 자살을 한 선배는 7년 전에 찍어준 사진으로만 기억된다. 죽은 선배와 미망인 사이로 향한 의미심장한 의심은 3년 전 자살한 남편과 사별했던 윤희에게 반복된다. 최현은 환각 속에서 형수와 윤희를 혼동하고, 윤희와 찻집의 7년 전 주인을 동일시한다. 찻집 아리솔의 주인은 7년 전처럼 7년 뒤에도 언제나 윤희일지 모른다. 이미 최현은 영정 사진을 찍혔다. 구슬픈 민요를 불러주는 아내가 7년 뒤에는 이 찻집의 주인이 되는 일도 상상할 수 있다. 최현과 죽은 선배는 춘화 속 연인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 살아가고 사랑하는 것은 몇백년 전 중국 땅에서나 지금의 경주에서나 다를 게 없다. 선택하려는 의지가 사라진 채, 누구를 흉내내고 따라하는데 급급해서 행동이 닮은 것이 아니다. 새 날, 여정에게 전화가 온다. 여정은 자신의 남편이 최현을 쫓아 경주에 따라 내려갔다고 알려준다. 최현은 아직 그 남자를 실감할 수 없을 텐데도 갑자기 별안간 무언가에 쫓겨 부리나케 뛰쳐나간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온 경주를 헤매 뛰어다닌다. 그리고 우연히 돌다리를 중간쯤 건너다, 이 다리가 바로 다시 찾을 수 없었던 7년 전 기억 속의 그 것임을 느끼고 멈춰선다. 심한 가뭄인지 환상인지 매말라 쩍쩍 갈라진 강바닥 위를 최현은 뛰어간다. 그리고 동시에 스콜인지 환청인지 폭우 소리를 듣는다. 하긴 경주에서는 대낮의 천둥 소리가 북한에서 쏘는 대포 소리로도 들린다. 최현을 쫓던 화면은 이윽고 암전된다.

다행히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된다. 마침내 다시 카메라는 원래 몇백년 전에 주로 그려지던 춘화를, 아니 그 춘화를 삼키고 있는 벽지를 비춘다. 카메라는 느리게 방에서 방 밖으로 집 밖으로 그리고 춘화 속 배경을 찾아 달려가는 듯한 최현을 쫓아 이동하며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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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3일) 저녁에 개봉일 보다 훨씬 때늦게 장률 감독님의 경주를 보고 왔습니다. 물론 저는 다음주에 개봉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팬 중의 하나이고, 장률 감독님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꾸준한 존경심을 느끼고 있는 팬입니다. 그렇기에 광고와 마케팅으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장률의 홍상수를 보기 혹은 장률의 홍상수로 보기식의 영화라 더욱 놀라웠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감독님과의 대화까지 뒤풀이로 곁들어진 상영이었는데, 영화 자체와 감독님과의 대화로 느낀 감동을 전파하고 싶어서 심각하게 황당한 감상문을 하나 적어보았습니다. 편의상 반말체로 작성하였는데, 양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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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天君
14/08/24 08:39
수정 아이콘
아이고내가 리뷰 쓸려고 미뤄놨는데 ㅠㅠ 그런데저랑 관점이 다행히 다르군요
quickpurple
14/08/24 12:00
수정 아이콘
다행이네요. 리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John Swain
14/08/24 09:08
수정 아이콘
홍상수식 작법을 답습한 모방작이라고 보셨군요. 전 그보다 더 나아간 수작이라 보았는데..
듀나게시판에서 봤던 공감가는 평론이 있어 첨부합니다. 저는 링크의 평론이, 감히 얘기하자면 영화의 본질을 완벽하게 꿰뚫은 평론이라 생각합니다.

http://www.djuna.kr/xe/index.php?mid=breview&page=1&document_srl=11344808
quickpurple
14/08/24 12:06
수정 아이콘
제가 오해받게 글을 잘못 쓴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의 골자는 장률 감독이 단순하게 생활의 발견을 반복한 것에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구조를 되풀이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다시 냉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마련해주는 지평이었다고만 생각합니다. 링크해주신 글 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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