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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8/20 10:57:27
Name 쉬군
Subject [일반] 남겨진 사람은 그렇게 또 살아간다.
삼오제가 끝났다.

지지난 주말 건강한 모습으로 식사까지 하시고 손주며느리 예쁘다며 용돈까지 주셨으며 맛있는 저녁까지 사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여기저기 숨겨두신 비상금을 모두 모아 할머니 치과치료 하시라며 용돈 증정식까지 하신후,

지난주말 주무시듯이 돌아가셨다.

어린나이에 시집보낸 큰딸대신 3년가까이 나를 키워주신 할아버지셨다.

나뿐만이 아니라 손주들은 모두 할아버지 손을 거쳐갔다. 단 한명도 할아버지 손을 안탄 손주가 없다.

할아버지뵈러 출발한다고 연락드리면 5분에 한번씩 내다보시다가 저 멀리 도착하는게 보이면 방에 들어가셔서 귀찮은데 왜 왔냐며 괜히 툴툴대시던 그 모습이 벌써부터 아른거린다.


사람이라는게 참 신기하다.

호흡은 끊어졌지만 심장은 뛴다.

안정제를 맞으셔서 의식은 없으시지만 자식들의 사랑한다는 속삭임에 호흡이 잠깐씩 다시 돌아오시고,

의식이 없으신 와중에도 사랑한다는 말에, 보고싶었던 식구들의 도착소식에 눈물을 흘리셨다.


병원에서 한달간 치료를 받으시면서도 예전 당신모습 그대로 대소변 수발한번 들지않게 하시고, 식구들에게 화한번 내지않으시고 묵묵히 고통을 참으셨다.

돌아가시기 하루전인 금요일, 수원에 있는 이모한테 보고싶으니 일요일에 내려오지말고 오늘 내려오라며 그렇게 닥달하시고 마지막밤을 함께 지새우신건 매일보지 못하는 작은딸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있으실때 보고싶으셔서 그러셨으리라..


토요일 아침 오늘을 넘기기 힘들거란 소식에 서울에서 대구까지 날아가듯 내려갔다.

이미 안정제로 인해 의식은 없으시고 옅은 호흡으로 주무시던 할아버지는,

뒤이어 차례차례 내려온 손주며느리, 사위, 외증손주까지 모두 맞이하시고서야 그렇게 주무시듯 돌아가셨고 우리는 당신을 보내드렸다.


폐암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리면 약해지실까 그저 폐쪽에 염증이 생기셨다고, 염증만 치료하면 새로사신 옷을 입고 온 식구들과 함께 여행을 가신다며 들떠계시던 할아버지는 먼저 떠난 큰아들과 함께 멀리멀리 여행을 가셨다.

먼저 떠났던 큰아들을 못잊어 항상 가슴에 묻고 가슴아파하셔서 그랬던가..이렇게나 일찍 큰아들을 만나러 가셨다.


정신없던 장례식이 끝나고 발인식때 할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시고 미소띈 얼굴이셨다.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그렇게 납골당에 모시고 돌아왔다.


그렇게 오열하고 슬퍼하던 식구들은 할아버지 이야기에 웃음짓고 또 눈물 흘리며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용돈이라며 자식 손주들에게 고기도 사주시며 그렇게 또 웃었다.


남겨진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이번 추석 할아버지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게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명절 음식을 먹고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그렇게 웃고 울고 이야기 할것이다.


두달전쯤 이사를 하시고 이제 방에 해도 잘들어오고 겨울에 연탄안떼고 보일러 틀어서 뜨끈뜨끈하게 보내실수 있다며 좋아하셨던,

몇일 계시지도 못하고 병원으로 가셔서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하신 그 방을 하염없이 쓸고 또 쓰시며 하셨던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계속 가슴에 남는다.

"다시 올줄 알았지...그렇게 흥을 내더니...내 몇년만 더 우리 새끼들 보듬다 갈터니 큰아들놈이랑 좋은데 구경하고 내 가거든 데리고 다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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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20 11:08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큰 일 치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PoeticWolf
14/08/20 11:08
수정 아이콘
그렇습디다...
전화번호를 없애도 카톡 계정이 남아 있어서 자꾸만 여행가신 분에게 메시지를 날리게 되더이다.
그 카톡 대화창에 찍힌 1이 없어지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혹시나 확인하게 되더이다.
다시 올 줄 알았다고 다시 올 줄 알았다고 후회만 하게 되더이다..
peoples elbow
14/08/20 13:17
수정 아이콘
본문과는 상관없지만 울프님 글 안쓰시나요? 크크
PoeticWolf
14/08/21 10:06
수정 아이콘
흐흐;; 안녕하세요;
워낙에 요즘 잘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깨갱거리고 있습죠 ㅜㅜ
루키즈
14/08/20 11:22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례식때 담담했었는지 아예 넋이 나가서 감정조절이 안된건지 멍하게 있다가
다 끝나고 집에 들어왔는데 "왔어?" 하면서 집에서 반겨줄 사람이 없어지니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터지더군요.
1달여동안 감정조절이 안돼서 집이 8층인데 여기서 어떻게 뛰면 죽을까 생각도 했고
가만히 있다가 괜히 눈물도 나고 헛것이 들려서 눈물나고 뭐 그랬었는데
아직도 감정조절은 힘들지만 그래도 어떻게 살고는 있네요.
에프케이
14/08/20 11:35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슬프고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담담하게 극복하신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종종 한번씩 생각나고 슬프고 눈물도 나겠지만 힘내시길..
지금뭐하고있니
14/08/20 11:42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담담히 잘 읽어가다가 할머니 말씀에 울컥했네요. 할머니 말씀에 '희열'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는 듯 합니다. 심지어 잔잔한 미소까지도 그려지는 듯 하네요. 한 때 사람은, 그리고 나는 두 팔, 두 라리, 완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죽음'을 대하고 보니, 사람이란 한 팔이 떨어지고, 한 다리가 나가고, 마음에 공허가 찾아와도 서로가 서로를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지더군요. 그치만 우리와 세계를 달리 하신 분들이 바라는 것이 '살아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불완전하더라도 '살아가는' 것을 보여줘야겠죠. 힘내시길 바랍니다.
사악군
14/08/20 12:37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식 손주는 그저 열심히, 자기가 잘사는게 최고의 효도죠. 먼훗날 야단맞지 않게 열심히 살아야죠.. 힘냅시다.
종이사진
14/08/20 12:46
수정 아이콘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alchemist*
14/08/20 12:51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견우야
14/08/20 14:30
수정 아이콘
첫 부분 글 읽는데.. 눈물이.. 끝까지 다 읽기 힘들었다는.. 힘내시길..
주여름
14/08/20 14:36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을독백
14/08/20 16:51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할아버님은 행복하셧을거예요.
카푸치노
14/08/20 22:35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빕니다...
솜이불
14/12/24 17:14
수정 아이콘
전에도 읽었던 글인데...
이상하게 오늘 다시 읽고 눈물이 막 나네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14/12/24 17:20
수정 아이콘
아...덕분에 정신없어 잠시 잊고지냈던 할아버지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올해가 가기전에 못 찾아뵈어서 죄송하다고 꿈에서라도 인사드려야겠네요.

다시금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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