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얘기만 주구장창하려다 다른 얘기하려니 갑자기 쑥쓰럽네요. 사실 시계 연재하던 중에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몇 번
글을 접은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연재도 쉬고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써 봅니다. ^^
"현대미술 런웨이를 걷다"는 저희 동네에서 하고 있는 전시회입니다.
딱히 전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말에 가까운 곳에서 하길래 마실삼아 다녀왔습니다.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을 오마주하여 런웨이 형태로 구현해낸 작품입니다.
낸시랭의 작품도 있네요. 캘린더 걸 연작입니다.
전시 관련 정보 링크:
이것을 무엇이라 하면 좋을까요. 분명 나와 같은 생물학적 학명의 존재이겠지만 바라봄의 권력 관계에 의해 그것들은 자신 이하로
격하됩니다. 여러 영상이 있지만 위의 영상 제목은 "면접"입니다. 이 작품의 원초적인 재미는 나와 같은 존재를 나의 시선, 일종의
권력관계 하에 둘 수 있음을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전시 영상 중 하나입니다. 쭈뼛쭈뼛하는 피사체들, 옷매무새를 다잡는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분명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 어두운 공간을 나서 보면 특별한 예술적 감성과 관련없이 나 또한 옷매무새를 다잡고 쭈뼛쭈뼛할 수 밖에 없는
동일한 사회적 정체성을 갖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몸으로 체화하고 있었으나 잊어버리고 살아가던 우리의 습관을 각가지 형태로
흔드는 것이 현대 예술의 오랜 공식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조금 심했고 또 유쾌했습니다.
"상품으로서 노동을 다루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현실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여기에서 패션은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패션과의 연결성을 찾아보려는 팜플릿의 설명은 다소 조악하네요.
역시 예상대로 이 작품은 김정현의 과거 전시를 다시 내보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은 무엇보다 '바라봄'의 의미를 문제삼고 있지요.
전체 전시와는 다소 겉돌 수 있지만 제게는 이거 하나만으로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사실 위의 와이셔츠도 일반 와이셔츠 서너배의 우악스러운 확장을 통해 기능적 정체성을 잃고 형태만을 남김으로써 외려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고 이러한 논법은 김정현의 작품과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낯설게 하기의 일종이겠지요.
하지만 김정연의 작품에서 저의 울림이 더 큰 것은 역시 와이셔츠보다는 피사체로서의 나의 모습이 가깝기 때문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당연한 지점을 '지금 여기'에서 어떤 형태보다 확연히 확인시켜 주는 것이 요즈음 예술의 가장 큰 강점이자 재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