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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4/12 07:58:52
Name OrBef
Subject [일반] 컴퓨터에게 졌던 테테전 이야기.
1.
아직 배틀넷이 뭔지도 모르고 컴퓨터와 일대일로 승률 50% 의 사투를 벌이던 시절, 그러니까 거의 10년전 이야기입니다.

맵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아마도 헌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컴퓨터가 맵을 거의 다 장악한 상황에서, 저는 자원이 바닥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믿을 것은 ( 그니까.. 정말 그게 좋은 생각이었다는게 아니라, 당시 실력의 저로서는 ) 제가 개발하고 있었던 뉴클리어 사일로뿐이었습니다. 바로 옆 섬에 컴퓨터가 만들어놓은 멀티를 핵미사일 두방으로 날려버리고 드랍십 두대로 탱크 4기를 내려놓은 뒤, 그 드랍십 두대를 다시 (당시의 저는 드랍십을 2개이상 만든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 가져와서 일꾼 8마리와 마린 8마리를 보내 벙커도배를 한다는 너무나도 '원대하고 장대한 스케일'의 작전을 세운 저는 이윽고 얼마남지 않은 자원으로 핵미사일 2개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리고 적 터렛 방어선을 '교묘하게' 돌파한 제 드랍십은 한마리의 고스트를 마침내 적진에 떨구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스트로 적 커맨드에 분노의 빨간점을 찍으려는 찰나,

열심히 미내랄을 캐고있는 열몇기의 일꾼들이 보였습니다.

'아.. 전투원도 아닌 비 전투원인 그들을 학살해도 되는가'
'그들도 다 집에 처자식이 있는 몸인데'
'애초에 핵병기를 전쟁에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비도덕적인 일인가'

등의 온갖 상념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적 컴퓨터가 2~3 마리씩 보내오는 탱크의 '파도'를 막느라 수리비는 계속해서 나가고 있었고, 적 일꾼을 핵병기로 학살할 것인가, 아군의 패배를 감수할 것인가를 전 계속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가치관과 실제 이득이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핵병기를 발사하지 못한 저는, 돈이 다 떨어져서 마침내 컴퓨터에게 패배하고야 말았습니다. 흑흑흑

2.
시드 마이어의 '문명'을 플레이하다보면, 몇개의 세력이 하나의 세력을 '다구리' 놓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공격의 수준도 다양해서, 무역봉쇄부터 연합침공까지 가능하죠.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난이도를 높여서 플레이할 경우에는, 자국과 비슷한 수준의 몇개의 세력을 전략적으로 선택해서 배타적인 동맹체를 형성한 후에, 그들과의 뒷거래를 통해서 나머지 순진한 세력들을 하나씩 없애나가는 것이 가장 강력한 국가정책이 되곤 합니다. 물론 그들과의 동맹도 맨 마지막에는 파기하고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만, 그마저도 적절한 순서로 하나씩 하나씩 파기해나가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결국은 배신할 것이 정해진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 게임의 시작인 셈이되는데요, 전 그것을 못하겠더군요. 엄밀히 말하면, 동맹은 맺겠습니다만, 파기를 못하겠단 말입니다.

근데 컴퓨터라고해서 배신을 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좋은 타이밍에 제쪽에서 배신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저쪽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어있습니다. 이역시 가치관과 실제 이득이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전 문명은 항상 초급에 마추어놓고 합니다. 뭐 안한지 꽤 됐습니다만.

3.
제 분야에서 일을 하다보면,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러명이 같이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과도 공유하게 되죠.

뭐 머어얼리서 쳐다볼 때에는 보기좋은 협동일 수도 있지만,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협동의 내면에는

'시간 많이 써야하는 일은 내가 다 했는데 결과는 반반 먹네'
'아이디어는 내껀데 저놈은 몸만 굴리고 공저자라고 우기네'

등등의 지저분한 생각들을 서로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근데 그런 지저분한 생각들을 내놓고 말하는 경우는 당연히 거의 없고, 대부분 겉으로는 웃는 낯으로 서로 대하고 삽니다. (가끔 조직 자체가 운명공동체에 가깝게 운영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이런 일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솔직하지 않다고 해서 교활한 것은 아니다'

라는 점입니다.

제가 A 를 내심 싫어하지만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할 때, 끝까지 A 에게 해꼬지하지 않으면, 그걸로 된 겁니다. 제가 가면을 쓰고 살던 말던, 남이 뭐라할 문제는 아니죠. 다만 앞에서는 웃었으면서 뒤에서 칼을 찌르는 일을 한다면, 그건 교활한 사람 되겠습니다.

뭐 하여튼.

제 뒤에서 제게 칼을 찌르려고 했던 것을 알기에 내심 싫어하지만 제게 너무나도 필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웃는 낯으로 대했고, 제가 썼던 가면에 걸맞는 대우를 그동안 그에게 해줬습니다. 근데 이제 필요가 없군요.

하지만, 1,2 에서 말씀드렸던 이유로 인해 용도폐기처분은 못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가치관과 실제 이득이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문제가 크군요.

아예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아예 교활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인생이 조금 편했을 것 같은데, 어정쩡한 사람으로 태어났군요.

댓글 1. 일기는 일기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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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12 08:34
수정 아이콘
그 놈의 정이 뭔지... 그리고 바람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추가하자면, 일기는 일기장에.
08/04/12 08:46
수정 아이콘
헉. 일기장 댓글이 달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자폭한 것인데 ㅠ.ㅠ
망고샴푸
08/04/12 08:47
수정 아이콘
일단 저도..
일기는 일기장에. (2)

너무 마음이 여리시군요.. 그들도 다 집에 처자식이 있는 몸인데..
여기서 왠지 저도 찡한 감정이..
바트심슨
08/04/12 09:20
수정 아이콘
일기는 일기장에... 라고 하기엔 너무 동감가는 글이군요. 저도 그 어정쩡한 사람이라서요. ^^;;;;;
Zakk Wylde
08/04/12 12:43
수정 아이콘
저는 뒤에서 칼로 찔려 봤습니다. 그런데도 전 아직도 어정쩡한 사람이군요.
교활한 사람은 못 되겠습니다. 이건 기쁜일인건지 슬픈일인건지..
08/04/12 16:02
수정 아이콘
일기는 훔쳐보는게 스릴이..

전 대놓고 칼들고 협박하는 스타일이라,, 솔직한 사람이군요.
근데 그게 썩 좋은게 아니라서,
교활하진 않아도, 배려를 위한 거짓쯤은 보여야 하는데..
08/04/12 17:07
수정 아이콘
다들 비슷한 경험들이 있으시군요. 푸헐헐헐헐 역시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08/04/12 17:56
수정 아이콘
저는 왠만해서는 사람을 안 미워하는 성격이지만, 딱 한가지, 제가 죽어라고 미워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제 앞길을 막는 사람'이죠.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뒷담화를 하며, 종국에는 뒤통수를 치는.
사회 생활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몇몇 만날수가 있었는데... 다들 뒤끝이 좋지 않더군요.
교활한 사람은 당장에는 성공하는 듯 해 보이지만, 결국은 끝이 좋지 않습디다. 적어도 제가 겪어본 바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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