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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7/06 05:24:31
Name 王天君
File #1 therese1.jpg (146.2 KB), Download : 58
Subject [일반] (스포) 테레즈 라캥 보고 왔습니다.


원작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테레즈 라캥을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비교하는 것은 썩 좋은 접근법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뿌리가 같더라도 거기에 열리는 열매는 감독의 의지와 담고자 하는 정서의 차이에서 사과와 복숭아만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전 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도, 1953년 마르셀 까르네의 테레즈 라캥을 보지도 않았으니  박찬욱은 이랬는데  찰리 스트레이턴은 이랬네 하고 왈가왈부하는 건 섣부른 아는 척에 그치고 말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뼈대와 인물들의 행동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만 짚고 넘어가면 충분할 겁니다.

테레즈는 부모 대신 고모 라캉의 손 아래에서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함께 살게 됩니다. 자신을 고모에게 맡기고 외지로 떠났던 유일한 혈육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테레즈는 뒤이어 반강제로 까미유와 결혼하게 되며 지긋지긋한 라캉 집안에 얽매이는 운명이 됩니다. 까미유가 새로이 얻은 직장이 있고, 이제 어머니가 된 고모 라캉 부인이 새로운 가게와 집을 마련할 곳인 파리로 가족이 거처를 옮긴 파리에서 테레즈는 까미유의 오랜 친구인 로랑을 만나고 이상한 격정에 휩싸이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억눌린 삶을 살던 테레즈의 비밀스러운 욕망을 눈치챈 로랑이 남자로 그녀에게 접근해오는 순간 테레즈의 삶은 이전의 지리멸렬한 삶과는 완전히 뒤바뀐 자극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테레즈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모든 비극의 원천이  테레즈의 성적불만, 바로 여성의 성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까미유와 결혼하기 전부터 테레즈는 풀밭 너머에서 상반신을 드러내고 낫질하는 남자를 보며 욕정을 느낄 정도로 자신의 여성성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장 가까운 남자인 까미유를 통해 풀어보려고 하지만 그녀를 만족시켜주기에는 까미유는 몸도 마음도 어른이 되지 못한 상태였죠.  결혼 후에도  그녀의 성이 무시당하는 비극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녀를 로랑은 압도적인 기세로 유혹하고 그녀와 관계를 갖습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고 여성으로서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로랑은 테레즈에게 오늘날의 불륜처럼  일탈, 혹은 또 다른 행복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녀에게 유일하고 절실한 도피처죠. 로랑이 없으면 그녀는 해소되지 않는 욕정을 껴안고 다시 식모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로랑 덕분에 지고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자동차를 타본 사람에게 걸어만 다니라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일까요? 가족이라는 방패도, 지식도 재력도 없는 천애고아 여자에게 평생 남의 수발만 들면서 살라고 말하는 것은 실로 잔인한 일입니다. 테레즈는 로랑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 그녀의 생을 가장 뚜렷하게 실감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테레즈가 로랑과 저지르는 불륜은 쾌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실존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그녀는 빛이 드는 대낮에만 로랑과 사랑을 나눕니다 이는 막 파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암울함을 보여주는 실내의 어둠과는 대비되는 면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테레즈가 전통적인 신파의 희생양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녀를 둘러싼 라캉 가족은 공교롭게도 다들 선합니다. 비록 테레즈를 졸지에 아내이자 며느리로 붙들어놓기는 했지만 그들은 나름 테레즈를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 때문에 테레즈가 로랑과 나누는 사랑은 점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용도에서 남편과 시어머니를 기만하는 형태로 변해갑니다. 이들 커플은 의도적으로 아슬아슬한 애정행각을 펼치며 라캉 가족의 어리숙함 위에서 스릴을 즐깁니다. 이런 점에서 테레즈의 각성을 재고해 볼 여지가 생깁니다. 여성성의 해방이 과연 가정을 내팽개칠 만큼 우선이 될 수 있을까? 그녀가 삶의 전부라 믿고 있는 그것이 단순히 금기 아래의 쾌락에 대한 착각은 아닐까?  영화는 테레즈를 완전히 변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욕망이 어떻게 죄로 발전되어가는지를 그리는 연결고리로 볼 수 있겠죠.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말에 절망한 테레즈는 까미유를 물에 빠트려 죽이자는 로랑의 계획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라캉 부인의 절망감도 희석되고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그 둘은 마침내 정식으로 부부가 되지만 그들은 전혀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부터 이 영화는 테레즈 라캉의 이야기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테레즈 라캉의 포인트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성을 매개로 거듭나는 여성이고, 하나는 죄의식이죠. 그런데 이 영화는 까미유가 죽은 이후부터 이 두가지 주제를 모두 보여주려고는 하나, 그 깊이가 얕고 그것들이 영화 속에서 의미있게 연결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 스릴러 구성까지 얽히면서 영화는 더욱 더 산만해집니다.

중반부부터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애매해집니다. 이것이 만약 여성의 불완전한 각성과 실패를 그리는 영화라면 테레즈의 심리적 묘사에 더 치중했어야 합니다. 그녀가 로랑과의 사랑에서 느끼는 만족감이나 행복을 보여주며, 그녀가 최소한 라캉 가족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만큼은 쟁취했음을 보여줬다면 그녀의 살인방조가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겁니다. - 여기서 더 나아가 그녀가 로랑마저도 떠났다면 진정한 독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19세기의 프랑스 여인에게 이걸 요구하는 건 현대인의 무리한 요구겠죠 -  그러나 테레즈는 여전히 한 남자에게 종속된 여자일 뿐입니다. 단지 그 대상과 만족도가 다를 뿐,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합니다. 그녀는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했을 법한 괘씸하고 치졸한 여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죄의식이란 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지도 않습니다. 로랑과 테레즈는 기대한 것과는 달리 결혼 후 서로에게 극도로 히스테리를 부리며 결국 자신들의 범행을 라캉 부인 앞에서 터놓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렇지만 이건 에드가 엘런 포우가 잘 하던 강박적인 죄의식의 표현이 아닙니다.  로랑과 테레즈 사이에  살해당한 까미유를  빼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요. 왜냐하면 죄의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불안과 공포’ 대신 짜증만을 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불화는  오히려 바람 필 때는 좋았는데 실제로 사귀고 보니 실망스러웠다는 이야기는 아주 흔해 빠진 불륜 커플의 이야기처럼 보일 뿐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죄의식을 따로따로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들이 사랑하고 싶어서 죄를 저질렀으면, 그 죄의식을 이기는 방법은 자신들의 사랑에 더욱 몰두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이건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자연스러운 합리화이기도 하죠. 그런데 영화는 보란 듯이 이들의 갈등을 조장하고 싸움을 붙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의식을 함께 극복하려는 노력은 안해요. 이게 술자리 이야기라면 “그런데 행복할리가 있겠냐?” 하고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개연성이 그렇게 헐거워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재미로 하는 이야기라도 “물론 둘은 행복하려고 애를 써봤지” 라고 다음을 이어나갈 겁니다.

아들의 죽음의 진상을 라캉 부인이 눈치챈 이후부터는 영화에 스릴러의 분위기가 종종 감돕니다. 그렇지만 라캉 부인은 이 사건의 피해자이자 테레즈 로랑 커플의 심판자 혹은 그들의 죄와 단죄에 대한 목격자 정도로 놔두는 게 가장 좋았을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녀는 테레즈 로랑 커플의 파국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설령 그녀가 그들의 범행을 낑낑대며 바닥에 적어놓는 수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테레즈와 로랑은 어차피 죄의식을 못이겨 죽고 말았을 거에요.  

이렇게 이야기가 삐그덕거리는 통에 인물들의 묘사에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테레즈와 로랑은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라 마치 다중인격처럼 보입니다. 이들이 살인을 저지른 것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후에 감당해야 할 죄책감을 과소평가했고, 자신들이 저지를 짓이 나쁘다는 걸 인식한 상태였으며 살인은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범행을 저지르고 난뒤에는 그들의 성격 자체가 바뀌어버립니다. 사건 이후 이들은 뭔가 뻔뻔하고 근본적인 도덕의식조차도 결여된 인물처럼 보여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이들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사람처럼 보이니 이야기는 권선징악의 뻔한 스토리로 흘러가며 다소 따분해집니다.  그러니 결국 이들의 로맨스와 죄악 모두가 다 뭔가 너절한 이야기가 되버리고 맙니다. 이들이 자살을 택하고 서로 키스를 나누는 장면은 상당히 쌩뚱맞아 보이죠. 아니 서로 그렇게 헐뜯고 난리더니 왜 이제와서 갑자기 사랑한다고 하는거지?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죠. 뻔뻔하게 라캉 여사를 조롱할 때는 언제가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구요.

테레즈와 로랑이 자살로 속죄를 하는 장면에서는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각자 죄값을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하려는 나약함은 애잔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 마땅하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죽는 것은 당연하고 사랑은 변덕스러워보이니 이 영화는 이래 저래 갈팡질팡하다 끝나고 마는군요. 원작에 대한 지나친 성실함이 바로 이런 류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심증을 나중에 원작을 읽으며 확인해봐야겠습니다.

@ 오스카 아이작은 이번에도 여자를 못나게 하는 찌질이 남자를 맡았네요. 배역만 보면 얼굴값 참 못하는 배우인듯.

@ 엘리자베스 올슨은 이쁩니다. 그리고 이래저래 박찬욱 감독의 작품과 인연이 있네요.

@ 톰 페들은 정말 더럽게 못났습니다.

@ 19세기 파리인데 등장인물들이 죄다 영어를 쓴다? 뻔뻔하지만 눈감아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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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14/07/06 12:51
수정 아이콘
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혹시 최근에 나온(그래봤자 몇년 된) 폭풍의 언덕 보셨나요? 읽으면서 그영화 생각이 많이 나네요. 영상미와 심리 묘사가 무척 강렬했었는데... 내용도 비슷하고 비교해 보면서 봐야겠습니다.

저도 300 같은 영화에서 그리스 말인척 영어쓰기, 멕시코 배경으로 스페인어인척 영어 쓰기 이런 거 정말 싫던데;
여자친구
14/07/06 15:21
수정 아이콘
리뷰 잘보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오프닝(?)으로 여는 "그 뿌리가 같더라도 거기에 열리는 열매는 감독의 의지와 품고 있는 담고자 하는 정서의 차이에서 사과와 복숭아만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이 문장이 정말 마음에 드네요. 덕분에 확 빨려들어서 끝까지 내려읽었네요.흫
Eternity
14/07/06 17:09
수정 아이콘
라캉 부인에서 라캉 이라는 이름이
심리학자 라캉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죠?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王天君
14/07/06 18:00
수정 아이콘
아마 관련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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