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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5/13 02:16:56
Name endogeneity
Subject [일반] 독후감 - "유럽 우파의 4중주단"



0.

보통 독후감 하면 책 한권 읽고 써야 되는 것이 정석인데 이 독후감은 딱 한 챕터에 대한 독후감입니다.

유명한 좌파 지성인 페리 앤더슨의 저작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영어 원제는 "Spectrum, from right to left in the world of ideas")의 제 1장 '완고한 우파 - 마이클 오크숏, 레오 스트라우스, 칼 슈미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이 그것입니다.


1.


사실 여기 언급된 4명 중 3명, 그러니까 스트라우스, 슈미트, 하이에크는 어떤 식으로든 한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임(각각 네오콘의 대부, 나치의 하수인, 신자유주의의 태두로 악명이 하늘을 찌릅니다;)에 비해 마이클 오크숏은 최소 한국에서는 일반인들에게나 지식인들에게나 대단히 생소한 인물입니다.(앤더슨에 의하면 의외로 그의 고국인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의 위상이 드높다고 합니다.) 하지만 앤더슨의 저술 목적은 기본적으로 오크숏을 나머지 3명과 함께 20세기 서구 보수 사상의 계보 상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소위 '유럽 우파 4중주단'인 것입니다.

페리 앤더슨은 이미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라는 저작을 통해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대단히 인상적인 소개 및 개관(결코 우호적이라곤 할 수 없었던)을 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위대한 보수 사상가 4명을 개관한 이 글의 매력은 여러모로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앤더슨은 결코 길지도 않은 지면 속에서 '우파 4중주단'의 방대한 학문세계를 성공적으로 개관하면서, 그들 전체를 엮는 하나의 맥, 그리고 그들 각각의 관계, 마지막으로 좌파 사상가로서 마땅한 소임인 야유와 조롱까지 잊지 않으며 맛깔나는 리뷰를 성공시킵니다.


2.


(1)



앤더슨은 각 사상가들을 따로따로 다루지 않고 시대 순서대로 글을 써내려갔지만, 이 독후감은 '4중주단'을 소개하는 성격도 있느니만큼 사상가들을 따로따로 다루고자 합니다. 순서는 칼 슈미트, 레오 스트라우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마이클 오크숏 순입니다.


(2)



헌법학 교과서 초장에 잠깐 나오는 '헌법의 수호자 논쟁'이라든가 '결단주의' 같은 '공염불'(절대 시험에 나올 일이 없으리라는 의미에서)로 명성이 드높은 칼 슈미트는 나치 참가 경력, 그리고 그 이상으로 졸렬한 인성 때문에 '4중주단' 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사상가입니다. 그리고 그의 저작으로부터 풍겨나오는 불길함이나 섬뜩함은, 나머지 3명의 '심오한' 사상가들조차 범접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앤더슨의 글에서 칼 슈미트는 가장 적은 비중으로만 다뤄지는데, 나머지 3명이 슈미트를 잘 알고 어떤 식으로든 그를 참조하였음이 명백해보이는 서술들을 보면 약간 의아스런 면도 없지 않습니다. 결국은 앤더슨 자신의 마음 속에서 슈미트의 비중이 적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앤더슨은 여러모로 이질적인 '4중주단'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소명'을 슈미트로부터 발견해냅니다.


"반복적으로 그는 묵시록적 텍스트 가운데에서 가장 수수께끼같은 텍스트인 데살로니가후서를 인용부호 없이 언급하고 있다.
(중략)
'사실 그 악의 세력은 벌써 은연 중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자를 붙들고 있는 자가 없어지면 그 때에는 그 악한 자가 완연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가 다시 오실 때에 당신의 입김과 그 광채로 그 자를 죽여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중략)
붙들고 있는 자 - 구원자가 오시기 전까지 지상에서 배회하는 악을 억제하는 카테콘-는 누구인가? 슈미트의 저작에서 이 모호한 인물은 여러 시대에 걸쳐 정치적인 억제자 또는 사법적인 억제자로서 다양한 역사적 외관을 걸치고 등장한다. (중략) 종국에 가서 그들이 억제하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위험성이었다. (중략) 즉 아노미의 미스터리, 무법의 미스터리였다."(57~58pp.)


(3)



'네오콘의 대부'라는 유명한 책 때문에 이제 한국에서도 제법 악명이 자자한 레오 스트라우스는 칼 슈미트와 밀접한 학문적 교류를 주고받았습니다. 스트라우스와 슈미트가 민주주의의 위험성, 그 이상으로 '인간의 위험성'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였음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스트라우스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계보를 잇는 '근대 철학자'로서, 그리고 유대교의 전통을 잇는 '랍비'로서 아예 근대성 자체를 관조 대상으로 바라본 점에서 슈미트보다 심원한 면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또 살기 좋은 원시시대로 돌아가잔 소리인가?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좀더 섬뜩한 인간관과 세계관을 그 지평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이론에는 두 개의 주요한 주제가 있다.  (중략) 철학은 망설임없이 정치질서의 필수 조건들이 인민의 편견이 되지 않도록 하면서 이 필수조건을 응시할 뿐 아니라, 우주의 무질서라는 좀 더 끔찍한 현실도 응시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무질서는 어떤 신적인 권위도 부재하며, 어떤 공통의 도덕성도 환상이며, 지구와 거기에 사는 종들이 무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종교가 부정해야만 하는 통찰이며, 사회가 견뎌낼 수 없는 통찰이다."(32~33pp.)


따라서 스트라우스의 사상에서 철학과 사회는 충돌합니다. 끝까지 관철된 철학은 끝끝내 무질서에 도달하고야 말지만(그런데도 스트라우스는 철학하기를 포기하자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목적지 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꼴이 되더라도 철학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일까요?), 사회는 질서가 한 조각이라도 있어야만 존립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질서, 아니 전쟁과 갈등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철학도 존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철학은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의 유지에 기여하면서, 그러나 절대 사회와 섞이지 않으면서 존립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트라우스가 말하는 '정치철학'의 소임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회를 유지시키면서, 사회를 철학과 차단시키는 장벽.



(4)



앞서 살핀 두 명이 도저히 고등학교 정치교과서에서 흔히 볼 법한 '보수주의'의 정의에 도저히 포섭되지 않는 강렬한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면, 하이에크의 이름은 자유시장, 작은 정부, 법치 같은 전형적인 보수의 특성들과 함께 운위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는 거지만 심지어 하이에크조차도 자유시장, 작은정부, 법치 같은 뻔한 캐치프레이즈 안에 갖히는 소인배가 아닙니다. 앤더슨조차 2차대전 후 하이에크가 시도한 지적 작업은 '전후 우파 대열에서 나온 가장 야심차고 완성된 종합'(40p)이라고 평할 정도였습니다.


하이에크는 근대 문명의 토대가 되는 개념인 '자유'에 대한 두 개의 대립되는 지적 노선(경험주의/구성주의)을 '발견'해낸 뒤, 이런 지적 노선과 결부될 수 있는 두 개의 대립적인 '제도 유형'(자생적 질서/목적적 조직)의 차이를 이해할 것을 주지시킵니다. '자생적 질서'로 유지되는 자유 사회의 우월함은 궁극적으론 그 '생존'에 의하여 증명될 것이었습니다. 자유사회가 탁월한 생존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계획사회에 비해 진화 과정 속에서의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인데(하이에크에 따르면, 이러한 탁월한 적응력은 사회 전체를 계도하는 '목적'이 없는데서 비롯된 자명한 결과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사회 진보'에 관해 보수와 진보를 떠나 현재 존재하는 설명 중 가장 유력한 설명인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불행히도 사회 진보에 대한 하이에크 이론의 강력한 설명력이, 그가 진짜로 주장하고 싶었던 것들의 설명력을 담보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앤더슨의 평을 인용하면



"그러나 그의 이론은 그 이론이 찬양한 자연발생적인 사회 메커니즘에서 분명하게 나온 제도적 결과물과 관련해서 심각한 난관에 직면해 있다. 외관상 부인할 수 없는 복지국가의 성장과 같이 탁시스와 코스모스 간의 차이가 지속적으로 허물어지는 현상은 그 자체가 현저한 진화론적 과정이 아닌 것인가? 하이에크의 새로운 처방에 따르면 이러한 사태를 되돌리기 위해서 국가 구조를 철저하게 재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략) 그의 이론이 일소하고자 해왔던 구성주의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이었다."(44p)



칼 폴라니가 미제스 등 19세기 후반 이래의 자유주의자들에 퍼부은 냉소적인 비판과도 일맥 상통하는 이러한 비판은 소위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빠진 패러독스를 잘 보여줍니다.


정부개입이 필요최소한으로 억제된 자유 사회의 창건을 위하여, 강력한 정부개입이 필요한 것입니다.



(5)



지금까지 등장했던 사상가들이 논거야 어찌됬든 결론 면에서는 진보 쪽 정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역겨움을 주는 면이 있었다면 마이클 오크숏은 '시민 결사체'라는 대단히 구미 당기는 개념을 사상적 중핵으로 삼습니다. 오크숏의 가장 위대한 저작이라는 '인간 행위에 관하여'(루드비히 폰 미제스도 거의 비슷한 이름의 대저작을 냈던 것을 기억하면, '인간 행동'이 보수 사상가들에게 주는 특이한 영감 같은게 있는지도 모릅니다)에선 '시민 결사체'와 '기업 결사체'의 대립이 핵심적으로 다뤄집니다.


시민결사체는 '절차'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형식이라면, 기업결사체는 '목적'(아마도 '이익'이겠죠?)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형식입니다. 오크숏에 의하면 바람직한 국가는 시민결사체의 형식을 취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구분으로부터 절차민주주의적인 냄새도 느껴지고(가령 하버마스 같은), 한편으론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하나의 목적이 수립되는 것을 경계한 하이에크의 냄새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앤더슨에 의하면, 오크숏의 시민결사체에 '목적이 부재'하다는 점을 좀더 깊이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결사체에 목적이 부재하다면, 개별 행위자들은 왜 공적 권위를 인정해야 하는가? (중략) 오크숏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인간 행위에 대하여'에서 형식적으로는 좀 더 발전되었지만 실제로는 터무니없는 또다른 유추를 가지고 대답하려 했다. 시민결사체에 가입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 도구적이다. 비도구적 실천 - 이면의 목적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수행하는 행동 - 이 도덕적 행위의 정의였다. (중략) 오크숏이 도덕성과 동일시하고자 한 것은 (중략) '구어적인 관용구'였다."(47~48pp.)



오크숏의 도덕성 개념은 마치 칸트를 방불케 하는데, 그 결과 칸트 윤리학이 갖는 심각한 난점(그것에 실체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유사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크숏의 저작으로부터 그 '실체적 내용'을 찾아보면 문제는 좀 더 심각해집니다. 시민적 결사체는 '비 도구적 실천', 그러니까 '시민 결사체에 가입하는 행위'에 근거하여 성립하고 '시민결사체의 조건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에 의하여 존속합니다. 이쯤 되면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오크숏이 '기업 결사체'적 성격을 갖는 국가의 문제를 어디서 찾는지 살피는게 더 나은지 모릅니다. 오크숏에게 있어 '결정적 시기'는 중세말에 최초로 '개인'이 등장하던 순간입니다. '개인'의 대두는 한편으론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제도들을 낳았고, 다른 한편으론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함으로서 사악한 결과를 야기합니다. 아직 '개인'이 감수해야 할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한 위험천만한 인간들의 무리, '실패한 개인들'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국가가 기업결사체처럼, 하나의 목적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발상은 '시기, 질투, 적의로 가득찬 '도덕적으로 실패한 집단'인 열등한 대중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앞에서도 어렴풋이 암시했지만 '우파 4중주단'의 영향력은 결코 책이나 논문 속에서 머물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후기와 나치 초기에 베를린을 누볐고, 하이에크는 대처-레이건의 시대와 소련의 붕괴 속에서 최고의 영광을 맞이하며 세상을 떠났고,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은 미국 우파에서 가장 독특한 분파로 정가에 꾸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오크숏은 영국과 미국 우파들에 강렬한 영감을 주었습니다.(그리고 아마 영국 좌파들의 복장을 자주 터지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앤더슨이 오크숏에 대한 글을 쓴다는 말을 듣고 한 동료는 '호되게 한방 먹이라'고 주문했고, 실제로 앤더슨은 이 글에서 오크숏에 핵폭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짧지 않은 독후감을 읽으신 분들 중에는, 이들 사상가들의 사조 중 몇가지는 도저히 조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가령 개인의 자유를 사회질서의 기초로 삼으려는 하이에크나 오크숏의 신조는, 인간은 사악하여 그 본성을 '결단'으로 억제하지 않는 한 파멸의 길을 피하기가 어려우리라는 슈미트의 믿음과 도저히 어울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슈미트에 대한 장에서 언급했듯, 이 모든 사상가들이 근대성과 민주주의의 결과로(아마 스트라우스와 슈미트에겐 '자유주의'의 결과이기도 한) 세상에 풀려난 '아래로부터의 아노미'를 제압하는 것만은 소명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주지할 만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헌법에 반하고, 천부인권의 이념에 반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건전한 신념에 반한다고 속편하게 웃어넘길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를, 갈등을, 자유나 권리를 '적절히 제한'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비록 그 기원은 다를지언정 소위 '사회 상식' 속에도 숨어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우파 4중주단'의 논조에 빨려들어갈 필요도 없는지 모릅니다. 다만,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전선이 우리가 흔히 시사 문제의 쟁점으로 여기는 자유 대 평등, 시장 대 정부, 강성 외교대 온건 외교 같은 문제들보다 심원한 곳에 있는 것일 수 있음을, '우파 4중주단'으로부터 상기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이 산만한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바로 이 점을 상기해보자는 데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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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jyess
14/05/13 02:29
수정 아이콘
빨려들어갈 필요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경계할 필요도 못느낍니다. 말씀하신대로 민주주의의 해악과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성은 상식 안에서도 인정되는 거니까요. 그건 절대 나쁜게 아니고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중용을 이루어야 하는 겁니다.
endogeneity
14/05/13 03:06
수정 아이콘
'중용'으로 끝날 걸 양쪽이 뻔히 아는 대립은 사실 요식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사회의 평화는 '대립하는 와중에' 이뤄졌다기보단, 오히려 대립이 시작하기도 전에 도래해버린 것이죠. 반대로 이 대립이 진퉁이라 '중용'으로 끝날 보장 같은게 없는 경우, 그 끝이 어떻게 날지는 다른 요인에 토대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페리 앤더슨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런 식의 언급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롤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목표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확고하게 자리잡은 확신과 전통에 내재적인 정치적, 사회적 정의라는 개념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을 할 때 요점은 우리의 최근 정치사에 있는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 그러니까 기본적인 사회제도들이 시민과 인격의 자유와 평등에 순응하려면 그 제도들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동의가 없다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지이다.'

현대 국가가 서술대로 민주적인 확신과 전통이 깊다면 그 시민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에 드리워진 교착상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롤스가 빠져있는 이 패러독스는, 본문에서 그저 '상식'이라고만 표현했던 주류적 전통(로크나 밀, 매디슨 같은 사람들이 포함될) 전체에게 소급시킬 수도 있는 패러독스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제에 대해 별로 속편하게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14/05/1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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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네요. 아, 좀 편안한 마음으로 잘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커뮤니티는 PGR뿐이라서 여기에 여러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만 저는 엘리트주의, 혹은 엘리트와 대중이라는 개념쌍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자였다면 아마도 저 주제만 붙들고 살지 않았을까 (물론 돈벌기 위한 프로젝트는 해야만 했겠지만) 생각합니다. 학계에 있지 않은 지금도 여전히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사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파고들어가다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번역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편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아닌 무언가에서 인간이 된 사람들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열등한 저들과 우월한 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정당한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실제로 동일한 재생산 과정을 거쳐 생산된 동등한 대중이라는 존재는 인류의 역사를 펼쳐놓고 봤을때 극히 짧은 시간동안 존재했을 따름이니까요. 그마저도 다양한 방식으로 도전받고 있는 상황이고 말입니다.

사실 명칭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 같지만 무어라 이름하던 간에 '아래로부터의 아노미'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에 대한 감수성이 핵심적인 경계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기에 많은 수사들이 첨가가 되지요. 요새 사회 지도층들은 '감정적인'이라는 수사 붙이기를 참 좋아하시더라구요. 돼지처럼 울부짖었다던가,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미개하게 행동한다던가... 생각해보면 이제사 사회지도층들은 소위 근대적 이성과 합리성에 익숙해졌는데 대중들은 탈근대적인 감정에 충실하기 따위를 힐링으로 소비하고 있으니 참으로 압축성장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좋은 생각 좋은 책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사이 서구 좌파의 거장들이 한분씩 한분씩 운명을 달리 하시는 걸 보면서 묘한 감상에 젖곤 합니다. 그네들의 시대가 성공적이었든 그렇지 않든 자기 시대를 충실히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항상 묘한 울림을 주는 거 같아요. 시간은 늘 무심하고 말입니다.
endogeneity
14/05/13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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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인가' '인간과 세계는 어떤 관계인가' 같습니다. 그 점에서만큼은 레오 스트라우스가 옳은 것 같습니다. 설령 이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본 결과가 '인간은 우주의 먼지일 뿐이다' '인간과 다른 인간은 그저 먹고 먹히는 관계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세계와 맺는 관계같은 건 없다' 일지언정, 해도 없이 망망대해를 헤매듯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에선 언급을 안했지만, 사실 하이에크를 제한 나머지 3명에게 영감을 준 한명의 사상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시민사회와 질서의 기원을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찾았죠. 아마도 '공포', 최소한 '막연한 불안'이 보수의 기반을 이루는 근본 감정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꽤 많은 진보 성향의 사람들이 여기까진 생각을 해보고, 그 다음에 '결국 보수 지지층은 뭐 취향은 존중해줘야겠지만서도 다 비합리적 쫄보다'라는 식의 결론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내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불안과 떨림으로부터 자유로운가요? 인간의 밑바닥은 결국 불안의 바다인 것은 아닐까요? 전 이것도 잘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오늘은 편히 잠자기 틀렸습니다.
14/05/13 03:55
수정 아이콘
저는 덕분에 편히 잘 수 있게 됐습니다. 냐하하하...;;;

말씀해주신 것처럼 저는 개인적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름하는 경계선은 불안과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보수주의자에 대한, 정확히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심리 분석에 관한 책의 서평을 올리면서 그렇게 정리를 했었죠. 그리고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경계선은 '더 가자'와 '일단 좀 다져놓고 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우리나라에서는 큰 의미 없는 이름 붙이기기는 합니다만^^;

어떨까요? 요 근래 제가 봤던 흥미로운 글은 호모 사피엔스의 돌아이성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50999) 불안을 이기는 돌아이정신이 있는 사람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흥미로운 생각거리네요.
yangjyess
14/05/13 04:53
수정 아이콘
음.. 뭔가 자꾸 딴지 거는 느낌이지만.. 오해는 말아주세요.. 이론적으론 저도 글쓴분의 의견에 99%동의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역시 글쓴분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들 또한 불안하다] - 이것이 좌파의 한계라고.. 결국 논리로 우파를 비웃어 봤자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는 거죠..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이런 문제로 글쓴분처럼 괴로워하고 잠 못들고 할겁니다.. 이것이 현실과 팽팽하게 맞서는 힘이고.. 그래서 그것이 중용을 이끌어 낸다면 이건 뻔해보여도 뻔한게 아니고 요식행위는 더더욱 아닌 것이죠..
소독용 에탄올
14/05/13 14:40
수정 아이콘
불안의 '유형', '인식', '대응' 세가지 모두에서 개인차가 있고, 이 개인차는 생각보다 큽니다.
인간의 밑바닥에 위치한 부분은 사실 다른 '생물'들과 공유하는 영역이라, '불안'으로 지칭되는 어떤 '반응기제'를 포함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 표출은 다른종류의 '기제'들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니까요.
즉 애초에 그 '불안'이라는 것이 개인마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더 크게느끼며, 더 중시하는데 비해, 다른사람들은 불안을 덜 느끼며, 덜 중시하죠.
endogeneity
14/05/13 17:08
수정 아이콘
결국 '불안의 문제는 정도의 문제다' 라는 취지로 읽힙니다.

사실 이 댓글에서 '불안'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의 의미는,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상가들이 생각했을 법 한 '존재론적 불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여러 심리기제중 하나라든가, 개인차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는 애초에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죠.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 경우에 '불안'이라는 건 결국 인간욕망과 자연자원 간의 함수관계의 한 종류일 따름이고, 그렇다면 엄밀하게 말하면 '불안의 문제'라는 건 잊어버려도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거나 자연을 다스리거나의 문제이니까요.

사실 이 부분은, 많은 점에서 닮은 홉스와 로크가 날카롭게 갈라서는 지점입니다. 홉스는 다른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로부터 출발했지만, 로크는 사유재산의 발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홉스의 정치학이 심리학을 전제로 한다면, 로크의 정치학은 경제학을 전제로 합니다. 둘 다 결국 인간, 특히 '개인'의 욕망을 다루는 한 방법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 기본적인 입장 차이가 존재합니다. 인간이 직면한 문제는 결국 '다른 인간'인건가? 아니면 '자연'인건가?

이런 점을 보면 어떤 사람은 불안을 더 크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작게 느낀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소독용 에탄올
14/05/13 21:39
수정 아이콘
존재론적인 '불안' 자체가 특정한 '불안'에 대한 해석이며,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불안의 문제가 정도의 문제 라는것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개념 자체에 사람마다 부여하는 맥락이 다를 수 있고,
이 맥락 각각은 그 사람이 타고난 사고도구들의 동작과 '삶의 경험'을 통해 구성해낸 서로다른 '기초'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불안의 '차이'는 이 맥락의 '차이'를 간접관찰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요.
endogeneity
14/05/14 14:19
수정 아이콘
'해석', '부여', '구성해낸 기초'. 거기에 윗 댓글에서 언급된 '불안에 대한 인식과 대응'까지.
이런 것이 바로 '인간 이해'의 한 예입니다.(좀더 첨언하면 로크와 칸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인간이해로 읽힙니다.)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일정한 관점입니다.

사실 그 점을 상기시키는게 이 글 및 댓글들의 목적이고, 딱 거기까지만 의의를 찾습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이다'까지 나갈 능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소독용 에탄올
14/05/1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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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사실 저같은 경우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로크와 칸트사이(혹은 다른 부분)을 떠도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있고, 그중 일부와 친숙함을 가지지만 항상 만족할만한(완벽한 것이 아니라) 설명력을 찾거나 만들어내는일에는 실패하고 있지요.
공부를 할때마다 모르는것만 늘어서 ㅠㅠ
14/05/13 08:23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추천드립니다.
14/05/13 09:24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Judas Pain
14/05/23 17:25
수정 아이콘
레오 스트라우스의 말을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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