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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4/30 20:43:29
Name 王天君
File #1 Lone_Survivor.jpg (200.4 KB), Download : 57
Subject [일반] [스포] 론 서바이버 보고 왔습니다.


2005년 미 해군 네이비 씰은 탈레반의 부사령관 ‘샤’를 체포하기 위해 파키스탄에 밀접한 지역에 침투작전을 결행합니다. 네 명의 특수부대 요원으로 이루어진 부대원들은 감시와 통신을 위해 매복에 적절한 위치를 탐색하던 중 파키스탄의 민간인 양치기들과 마주치게 되지요. 이들을 그대로 내려보낸다면 그들의 작전 자체가 노출될 가능성이 거의 100%에 가까웠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죽이자니,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을 군사작전의 성공을 위해 희생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결국 그들은 이 양치기(염소치기)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하고, 탈레반 군인들의 추격을 맞이합니다. 통신도 안되는 상태에서 몸을 숨길 곳도 찾지 못한채 산에서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상태로 말이죠.

일찍이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실렸던 이 이야기는 도덕적 딜레마를 품고 있는 실화입니다. 나의 생명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킬 것이냐, 아니면 정의의 대원칙을 끝까지 따를 것이냐? 단 두 개의 선택만이 존재하는 이 물음에서 지혜와 양심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답변을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요. 그리고 현실이란 언제나 비정한 법입니다. 그들은 선의를 베푼 댓가로 지옥 같은 추격전을 겪게 되고, 그나마 거의 전원이 종국에는 죽고 맙니다. 유일한 생존자 러트렐 중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후에 그는 이 결정을 미친 듯이 후회했으며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무조건 자신의 생명을 우선시할 거라 했습니다. 일반적 영화와는 딴판인 이 비극의 무게는 정의, 양심, 생명, 도리 등의 이야기를 훨씬 더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기반으로 깔려있지요.

그러나 영화가 이 딜레마의 본질을 충실하게 파고 들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영화는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는 대신, 인물들의 모험과 귀환을 그려내는 데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생존자 러트렐 중사의 구조 장면입니다. 저렇게 만신창이가 됐다니, 불쌍해라! 로 시작해 그래도 저 사람이라도 살았어, 다행이다! 로 영화가 귀결됩니다. 글쎄요. 레드윙 작전에서 중요한 것이 한 사람이라도 살려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까? 이 영화는 생존이 중요한 재난 영화가 아니죠.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도덕적 선택을 했지만 그것이 결코 의미있는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았어요. 이는 철학적 사유의 단초인 동시에 굉장한 비극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가려 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에게 최선이라는, 공리주의에 기반한 믿음이 그 근본인데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것을 통째로 부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영화는 조금 단순하고 우직하게 느껴집니다. 인간을 고찰하는 대신 상황 자체를 그려내는 데만 열심인 것 같아요.

이제 동료를 다 잃고 궁지에 몰린 러트렐 중사는 빈사상태에서 헤매다 다른 아프간 주민들의 구조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러트렐을 간호하고, 탈레반으로부터 그를 숨겨주며, 미군 기지로 생존 신호를 알리는 편지를 전달해주지요. 그리고 마침내 발각된 러트렐 때문에 탈레반과 아프간 주민들은 서로 총격전까지 벌이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미군이 도착하고 상황은 수습이 됩니다. 내러티브의 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생존자에게 그 초점을 맞췄다고 하지만, 그의 생존에 이런 식의 의미부여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살리고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영화는 안이한 태도로 정답인 척 러트렐 일행의 선택을 변호하는 게 느껴지거든요. 러트렐은 자신의 양심적 선택 때문에 죽을 뻔 했지만, 그와 똑같은 양심적 사람 덕에 결국 목숨을 구했다! 선행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라는 식의 사필귀정식 결론은 너무 짜맞춘 티가 나지 않습니까? 문제는, 영화의 이 클라이맥스가 많은 각색을 거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러트렐이 아프간 주민들에게 구조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러트렐 때문에 그들이 탈레반과 서로 죽이는 상황까지 치닫지는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영화의 주제는 지극히 단순해져버립니다. 목숨을 바쳐 미군의 명예와 원칙을 사수한 영웅들 이야기로 귀결되죠. 오히려 실화 그대로 갔다면 영화 속의 비극은 더 와닿았을 겁니다. 개죽음을 맞이한 동료들과 홀로 남겨져 산 러트렐의 고뇌가 허구의 전투 속에서 다 날아가버린 느낌이에요.

영화 중간 중간 러트렐 일행을 영웅으로 그려내려는 시도는 좀 껄끄럽습니다. 먼저, 러트렐 부대와 대치하는 탈레반들이 완벽하게 타자화 되고 있어요. 그들은 그냥 잔인무도한 ‘적’으로 그려집니다. 이를테면, 탈레반들이 적을 참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그냥 이들의 비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한 허구적 장치이지 영화 내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부분이에요. 이들에 맞서는 미국 군인을 상대적으로 정의롭게 그려내기 위한 얄팍한 수단이죠. 이들의 총격전 역시도 정치적으로 불공정하게 그려집니다. 서로 죽이는 전투의 장면 속에서 영화는 미군들이 느끼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담아내려 애씁니다. 그들이 느끼는 통증과 절박함을 화면에 실어 자연스레 연민을 유도하죠. 그렇다면 탈레반은요? 그들은 다른 sf 영화 속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처럼 그려집니다. 한방에 죽여야 하거나 아니면 살아남아서 주인공들을 괴롭히거나. 탈레반 따위 아프건 말건 알 게 뭔가요.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미 해군이 온갖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인데요. 그래서 마이클 대위가 빗발치는 총알세례를 뚫고 고지로 올라가 전화를 거는 장면은 조금 우스꽝스럽습니다. 플래툰의 패러디가 아닌가 할 정도로 영화는 정확히 예상되는 지점에서 슬로우 모션과 비장한 음악을 통해 그의 희생을 강조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미군들이 탈레반들을 사살하고 러트렐을 구해내는 장면 또한 그렇습니다. 미군은 아직도 최강이며 일단 등장하면 모두 정리해 버린다!! 는 일종의 명예 회복을 위한 서비스 컷의 느낌이 강하죠. 다시 말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총격전은 실제로는 없던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액션 영화로서 정말 탁월한 생동감이 있습니다. 이들이 벌이는 총격전은 너무나 급박하고 위기감이 가득합니다. 은폐와 엄호가 안되는 공간에서 러트렐 일행이 벌이는 전투는 보는 내내 몸을 움찔하게 만들어요. 다른 멍청한 헐리우드 영화처럼 적들은 발바닥 주위만 쏘아대는 사격수들이 아닙니다. 중간중간 총알은 온몸을 스쳐가고 러트렐 일행은 낑낑대며 후퇴를 거듭합니다. 상황은 절망적이고 이들은 정말 몸을 던져가며 살 궁리를 찾아요. 이 가혹한 상황을 연출하는 데 영화는 봐주는 거 하나 없이 배우들을 굴려버립니다. 러트렐 일행이 추격 끝에 절벽에서 추락을 감행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지경입니다. 낙하와 착지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고막을 자극하고 이도 모자라 굴러떨어지는 그들을 자갈과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할퀴어 놓습니다. 인간이 겪는 육체적 고통이 이 영화에서는 거의 촉각 수준으로 그 실체를 갖추고 있습니다. 장담컨데, 이 영화를 보는 그 누구라도 보는 도중에 무의식적으로 신음 소리를 내게 될 겁니다. 이런 식의 묘사는 전쟁의 끔찍함을 알리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구석은 있지만, 여러모로 가볍게 볼 수는 없는 영화입니다. 우리 미군은 훌륭하려고 애는 쓰지만, 만능이나 최고는 아니라고 인간적인 하소연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신파를 제거하고 조금 더 냉철한 시각을 유지했다면, 이 영화는 전쟁 체험의 재미 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안겨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총격전의 미학만큼은 제대로 잡아내고 있으니, 어지간한 액션 영화보다 훨씬 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영화인 건 확실합니다.

@ 배틀쉽의 얼간이에서 이제 좀 벗어나나 싶었는데, 테일러 키취는 여전히 멍청하게 보이는군요. 어떤 점에서는 군인 역할에 제격이다 싶지만.

@ 레드윙 작전의 실패로 목숨을 잃은 부대원 중에는 한국계 대원 James E Seo 하사도 있더군요.

@ 전장에서 통신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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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30 20:48
수정 아이콘
전쟁을 밖에서 바라보는게 아니라 안에서 바라보는 느낌. 전 신선했고 좋았습니다.
다만, 그 양치기들 풀어줄때 그 손목 묶는걸로 가장 건장했던 사람 다리를 묶어버리면 노인/아이가 그 사람을 데리고 가기에 힘들어지니, 시간을 더 늦출 수 있었을 텐데...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르카디아
14/04/30 21:11
수정 아이콘
론서바이버의 원작이 되는 책(전기)부터가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가지고, 그런 상황에서 했어야 했거나 하면 좋았을 선택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 전쟁은 이런거야?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논란이 되는 전투교범은 옳은거고, 민간인 희생가져다가 용감한 미군을 채찍질하는 좌파미디어는 좀 입다물어'라는 내용이었으니 영화도 별로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그 소년때문에 발각된게 확실시 되는 듯 하지만, 결국 풀어준 소년이 일러다 바쳤는지 아닌 지는 추정일 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자전거도둑
14/04/30 21:42
수정 아이콘
전 이영화 보면서 움찔움찔 했어요.. 진짜 전투씬이 쩔더군요..
오크의심장
14/04/30 21:59
수정 아이콘
한국에선 P999K들고 다니니 더 암울...
14/04/30 22:03
수정 아이콘
아무래도 초기다 보니 미군 작전의 갖가지 오류가 눈에 띄는 영화였죠
어느 나라건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만 죽을맛인가 봅니다

그리고 씰은 해군소속이예요
똥꼬쪼으기
14/05/01 01:18
수정 아이콘
막 보자마자 한마디 남깁니다.
근래에 본 전쟁영화중에 상당히 흡입력 있게 본 영화네요.
전투의 리얼함이 상당하네요.
14/05/01 03:15
수정 아이콘
어쩌다보니 두번 보게 된 영화인데 또 봐도 몰입감만큼은 최고더군요.
말씀하신대로 미국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지나치게 미국을 영웅화하려는 면모는 저역시 아쉽긴 했네요.
한가지 궁금한점은 이 작전이 결국 샤를 제거하는게 아니라 생포하는게 목적인건가요?
같이 봤던 분은 샤를 제거하는게 목적이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초반부에 저격명령도 못받았다고 한 부분이 납득이 가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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