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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4/25 13:47:43
Name 필리온
Subject [일반] 안 돌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저는 어릴 적 몸이 참 약했습니다. 감기라도 한번 걸리면 천식 때문에 쌕쌕거리며 호흡이 곤란해지곤 했죠. 그 감기를 365일 중 200일 정도 달고 살았습니다.
학업이 힘들 정도였던 저를, 어머니는 말 그대로 업어서 키우셨습니다. 저 200일 중 100일 정도는 어머니 등에 업혀 등교했습니다. 20kg이 넘는 8살짜리를 매일같이 500미터씩 업어서 데려다주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인 저를 정말 지독히도 예뻐하셨습니다. 공공연히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언제나 말하셨습니다. 모든 가족이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저라고 다들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대학 진학 때도 굳이 서울에 있는 대학 말고 근처에 있는 곳으로 가면 어떠냐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부모님이 점수를 낮춰 대학을 가라는 말을 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렇게 저를 예뻐하던 어머니는 3년 전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당시에는 수술은 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해도 종양은 크지 않다고 했고, 그래서 충분히 완쾌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년간 많은 일,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어머니는 작년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안 돌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계속 여위어가고 아파하셔도, 날씨가 따뜻해지면 좋아지실 거다, 병원을 바꾸면 좋아지실 거다, 공기 좋은 곳에 계시면 좋아지실 거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매일같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시고, 가끔씩 의식이 가물거리셔도, 저는 마지막까지 더 오래 사실 줄 알았습니다. 아내가 나중에야 당신께서 말라가시는 걸 보고 암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꼭 그랬다고, 회복이 힘드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얘기했지만 저는 정말... 안 돌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 전화를 받는 순간까지요.

제 결혼식 때 이미 많이 마르시고 쇠약해지셔서 가지 못할까봐 걱정하시던 모습, 의사가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했을 때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소화도 제대로 못 하시면서 결혼식에서 식사를 얼마나 즐겁게 하시던지... 그래도 가장 예뻐하던 막내 아들 결혼식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네요. 이왕이면 몇 달만 더 사셔서 그렇게 예뻐하던 막내아들을 꼭 닮은 손자 한번 안아보고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평생 어머니에게 해드린 최대의 효도가,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식들이 돌아올 줄 알고 계실, 그 많은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분들에게 최소한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슬퍼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평생 못 갚을 사랑을 주신 어머니께, 당신은 매일같이 제게 해주셨던, 그리고 저는 그렇게도 인색했던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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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페퍼
14/04/25 13:50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어요-
어머님도 작성자님도.
힘내세요!
14/04/25 13:51
수정 아이콘
삼가,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은수저
14/04/25 13:53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힘내세요
대한민국질럿
14/04/25 13:54
수정 아이콘
작년 겨울에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사신뒤 제게 카톡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사랑해"라고 딱 다섯글자 보내셨는데 보는순간 저도모르게 너무너무 울컥해서... 그날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했습니다. 아마 고등학생때나 갓 대학 들어왔을때였다면 울컥하기보다 민망함이 먼저 느껴졌을텐데.. 20대 중반이 되어가면서 부모님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는것 같습니다.
14/04/25 13:57
수정 아이콘
눈물나는 글이네요.. 마음이 아픕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Sempre Libera
14/04/25 14:02
수정 아이콘
가끔씩 이런 글들을 볼때마다 정말 무뚝뚝하고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는 말들을
표현하지 못하는 제가 참 한심하고 답답합니다.
크면서 어느순간부터 부모님과의 대화가 단절되고...
정말 부모님이 안계신다면? 이라는 생각을 해볼때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에서 웃으면서 지켜보고 계실겁니다.
잠잘까
14/04/25 14:0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14/04/25 14:08
수정 아이콘
글쓴이 어머니 명복을 빕니다.
비토히데요시
14/04/25 14:11
수정 아이콘
아, 3월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네요....
3년간 아프시고, 한해 한해..... 작아지시던 할머니.....

그래도 가족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시고 가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4/04/25 14:13
수정 아이콘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도 엄마의 존재가 굉장히 큰 생인지라, 남 일 같지가 않네요..
영원한초보
14/04/25 14:14
수정 아이콘
저도 부모님 건강에 점점 이상신호가 와서 걱정이 많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Amor fati
14/04/25 14:30
수정 아이콘
저도 듬뿍 사랑받고 자란 막내아들인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힘내세요..
종이사진
14/04/25 14:30
수정 아이콘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루사리
14/04/25 14:42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필리온님도 기운내시고 마음잘 추스리시기 바랍니다.
asdqwe123
14/04/25 14:4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14/04/25 14:50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가 해주지 못하는게 많은데,부모님이 점점 늙어가고 쇠약해져가는 모습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마빠이
14/04/25 14:52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봇을 빕니다..
코러스
14/04/25 16:13
수정 아이콘
사무실에서 글 읽고 눈물을 감춥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4/04/25 16:22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王天君
14/04/25 16:37
수정 아이콘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글 잘 쓰셨네요.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어요.
14/04/25 16:58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4/04/25 20:32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알카드
14/04/26 01:01
수정 아이콘
눈물이 흐르네요.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힘내셔서 어머님께 멋진 모습 보여드리세요!
해울림
14/04/26 01:18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 역시도 몇 년 전에 아직 한창 젊으셨던 어머니를 자궁암으로 여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일병 시절, 가장 힘들 때 갑작스런 통보라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여동생이 그렇게 우니까 오빠로서 울 수도 없더군요.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살아가면서 간신히 느끼는 점이 있다면 어떠한 흐릿한 의무감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고, 또 미래의 내 자식들에게 그 사랑을 잇는 것이 저희가 할 수 있는 남은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세대가 세대를 낳고, 세대가 다음 세대를 기억하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었듯이, 또 누군가가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이어지는 것,
그것이 삶이라는 걸, 전 이제야 깨달아갑니다...
Faker Senpai
14/04/26 14:05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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