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4/03/25 23:40:05
Name yangjyess
Subject [일반] 예수 out ! <사람의 아들> & <대심문관>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진실로 카인의 죄를 믿으십니까?
아버지께서는 하수인과 교사자 중에서 어느 편을 더 벌하시겠습니까?


그야 물론 교사자지.


그럼 하수인은 항상 무죄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하수인이라도 자기가 하는 일의 악성 혹은 결과의 그릇됨을 알고 있거나 알 수 있었다면 그 또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럼 하수인의 감정과 의지가 모두 그 교사자의 지배 아래 있거나 교사자로부터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강요받은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야 없지. 그럼 카인이 그런 하수인이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는 야훼의 하수인. 그것도 교사자의 배신으로 바로 그 교사자에게서까지 포상 대신 저주를 받은 가련한 하수인입니다.


이해할 수 없구나. 무슨 말인지.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피조물의 의지가 창조주의 의지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니다. 우리 몸의 터럭 하나 숨결 한 갈래도 그 분께서 주시지 않은 게 없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모두 야훼 하느님의 의지 안에 있다.


그럼 카인의 살의는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갑작스럽지만... 그분 ---- 모든 것의 출발이신 야훼께서 주셨겠지. 그러나 금지와 함께였다.


그럼 그 금지를 어기고 감히 살인으로 나아간 그 의지는 어떻게 됩니까?


까다로운 경전 해석이군. 하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별로 깊이 생각하실 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두 가지 뿐이니까요. 첫째는 하늘에 계신 그 분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저 페르샤인들처럼 그 분의 지배를 벗어나는 인간성의 일면이 있다는 것과 함께 그 부분을 지배하는 다른 어떤 강력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야훼의 말씀이나 계율은 월권이거나 자기과신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야훼의 전지전능, 절대완전, 유일무이를 믿고 받드시는 아버님께서는 그걸 인정할 수 없을 겁니다.


당연하다. 그 다음은?


인간성의 모든 면이 야훼로부터 온 것이란 결론입니다. 이 경우 카인에게는 결코 죄를 물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야훼에게서 받은 도구로 야훼의 예정을 실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의 그 분께서 아벨이 눈앞에서 맞아 죽는 걸 그대로 보아 넘긴 것은 카인의 살인을 용서한 것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카인의 살인을 교사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카인의 살인을 통해 살인이라는 범죄의 유형과 악성을 보여주고 그 처벌을 통하여 잠재적인 범인이라고 할 수도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심리적인 강제나 위하를 준다든가 하는. 따라서 그 일을 모범적으로 수행한 카인은 처벌받기보다는 포상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카인에 대한 야훼의 숨겨진 호의도 내비쳐지고 있는데 비록 카인의 호소가 있었다고는 하나 야훼께서는 그를 박해하는 자에 대해 그 일곱 배의 보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카인을 몹쓸 죄인으로만 단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너는 지금 금지규범과 명령규범의 본질을 고의로 혼동시키고 있다. 카인에 대한 너의 변호는 카인이 하느님의 명령규범을 수행했을 때나 들어맞을 뿐이다. 너는 왜 인간성에 숨어 있는 악성만을 강조하고 그것에 대항해 이길 선한 의지는 무시하느냐. 그 두 개의 의지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행동의 동기로 정하는 것은 우리들의 자유다. 따라서 선한 쪽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감히 금지된 행위로 나간 카인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럼 아버지께서는 아담 이래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그 자유의지를 믿으십니까?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고 중에는 창조주의 포괄적인 예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부분이 있다는 겁니까? 우리의 모든 것이 창조주의 의사대로 만들어졌고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그 분과 대등하게 될 수는 없다는 걸 아시면서도?


그렇다. 최후의 심판을 예고하신 한...  선에 대한 보상과 악에 대한 징벌을 약속하신 한...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그 분의 무책임한 방임입니다. 두 개의 상반된 의지 틈에서 인간들이 피흘리며 투쟁할 때, 그리고 끝내 패배하여 타락과 멸망의 길을 갈 때조차 침묵하고 계시던 그 분에게 그 결과물인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고 벌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럼 너는 자유를 어떻게 보느냐.


애초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자유 자체가 이미 그 분의 예정의 일부이며 우리의 구원과 몰락도 그 예정에 따를 뿐입니다.


그럼 우리가 지상에서 바치는 성의와 노력은?


그 분의 예정 속에 구원되기로 선택된 소수의 표지일 뿐입니다. 선택되지 못한 다수에게 슬픔과 절망을 주는... 그리고 그나마 언제 철회될지 모르는... 만약 우리의 신이 자비롭고 사랑에 넘친 분이었다면 그런 애매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아담은 감히 선악과를 따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원죄의 굴레를 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 그 자유가 꼭 주어져야 했다면 금지규범을 만들지 않아야 했지요. 그랬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땄더라도 죄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훼는 그 두 개의 무거운 짐을 우리의 나약한 의지 위에 얹어놓고 선택의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려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는 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에게.


얘야... 내가 젊었을 적에 네가 한 말과 비슷한 주장을 하던 무리들이 있었다. 카인 종파나 사탄을 지혜의 영으로 보고 이브를 유혹한 뱀을 숭배하는 이교도가 있다고 들은 적도 있는데 너의 주장도 그 두 편 모두와 바탕이 같다. 어디서 그걸 들었느냐? 요즘 세상에도 그런 이단자들이 있단 말이냐?


누구에게서 들었거나 읽은 게 아닙니다. 피상적인 경전 해석에서 벗어나고 이 시대에 유행하는 편견과 오류에서 빠져나오면 반드시 부딪히게 될 의문일 뿐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일생을 지금의 믿음과 경건으로 사셨습니까?


그렇게 되묻는 아들의 어조에는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려는 의지보다는 괴로운 의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다행이다.. 나는 네가 사악한 이단에 홀려 있는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그 분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밤새워 번민하던 젊은 날이 있었지..


그럼 아버님께서는 그 모든 의문들을 극복하셨습니까?


어떻게든... 했다고 볼 수 있지... 지금까지 네가 말한 것과 비슷한 의문도 기억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걸 몇 마디 말로 너에게 전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친은 확실히 곤혹을 느끼고 있었다. 불문과 타성으로 지나쳐버린 지난날의 신앙적인 난제가 말할 수 없는 무게로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

이상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 중 랍비 집안의 율법사 아버지와 그의 총명한 아들 아하스 페르츠와의 대화입니다.

아하스 페르츠는 결국 새로운 신을 찾아 고향을 떠나고 오랜 방황 끝에 광야에서 '신의 아들' 예수와 만나 설전을 벌입니다.

저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성당을 다니고 저 자신도 유아세례를 받은 모태천주교 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었으나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점차 의심이 많아지고 미사와 주일학교를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인간에게 있어 선과 악의 문제란 항상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숨겨진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그에 대한 온갖 망상들이 사춘기 소년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죠.

대략 10여년동안 중2병적인 자문자답을 반복한 결과 어느정도 뭉게구름 같은 형상이 잡히긴 했는데 그건 절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고 실제로 사람사는데에는 쓰잘데기 없는 문제들이라 언제나 그런 망상들이 떠오르면 덮어 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우연히 읽은 사람의 아들.

신기했습니다.

나 혼자 미친놈처럼 이런 생각 하는줄 알았는데 나 말고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신기했던건

아니 이게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거였구나... 이걸 이렇게 글자로 쓸 수 있구나...

라는 점이었죠.

그래서 사람의 아들을 참 대단한 소설이다.. 하고 또 살아가고 있었은데

어느 블로그에서 도서리뷰를 읽었는데

사람의 아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한 챕터인 '대심문관'을 한국의 '수사반장' 스타일로 대충 버무린 것에 불과하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문열의 소설 속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와 대심문관에 대한 언급을 읽은 기억도 나고 언젠가 인터뷰에서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4대 장편중 하나만이라도 비슷하게 쓸 수 있다면 다음날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한것도 있어서 새삼 카라마조프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읽었죠.

와...

그렇군요.

백 몇십년 전에도 있었군요. 이런 미친 생각을 하는 인간이. 그리고 그걸 글로 적어낼 수 있는 인간이...? 인간 아닌거 아닌가? 이거 쓴사람 인간인가?


처음 읽는 순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럼 카라마조프는 어떤 소설이냐.

최근 국내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언급되기도 했었는데요.

간단히 말하면 방탕한 아버지에게서 난 네 아들이 있는데 그중 맏이가 평소에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그리고 맏아들과 아버지와의 갈등이 극에 달하는 시점에 아버지가 죽고 맏아들은 바로 체포되어 재판이 열립니다. 그 재판이 끝나면서 소설도 마무리되죠.

이 소설은 미완성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구상한 전체의 초반 부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미친 완성도입니다 ㅡㅡ)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완성되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까운데,

그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전 대작들에서 항상 보수적인 입장에서 합리주의자들과 혁명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신을 믿자' 는게 보였죠.

그 유명한 죄와벌에서도 로쟈가 하느님을 믿는 소냐에게 감화되어 새 삶을 살아가게 되구요. (이것때문에 죄와벌 결말을 싫어하는 독자들도 많지요. 로쟈의 살인동기에 큰 매력을 느꼈다가 갑자기 하느님 때문에 뉘우친다니 말이 되냐고. 여기에 대해선 저는 죄와벌의 결말을 두둔하는 쪽입니다)

그런데 카라마조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심 깊은 알료사에게 그의 스승 조시마 장로는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들어가라' 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나온 알료사는 그때까지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세속적인 '혁명'의 지도자가 될 예정이었다고 하니.. 저는 과연 도스토예프스키가 구상한 혁명이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한 겁니다.


참... 대심문관 얘기 해야죠...

아까 네 아들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가 아버지 죽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드미트리

둘째가 '이성의 화신' 이반입니다. 지적인 탐구에 몰두하고 인간의 논리와 부합되지 않는 것은 배격합니다. 무신론자이지만 인류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속세 인간의 고통에  큰 동정심과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셋째가 알료사.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해당 소설의 궁극적인 주제를 대부분 구현합니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모든 사상을 이 알료사를 통해 드러내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대심문관 파트는,

둘째 아들 이반이 동생인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한 서사시 입니다.

소설속에 소설, 즉 액자소설로도 볼 수 있고 이 대심문관 파트만 따로 분리해 내도 단일 작품으로서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부분만 떼어서 출판된 책도 있습니다)

참 읽으면 읽을수록 신기한 놈입니다.

이건 분명 도스토예프스키가 예수를 공격하는 논리를 비하하는 의도로 쓰여진 겁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면 이반(대심문관)의 논리가 너무 멋있고 논리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가슴 깊이 와닿는 겁니다...

또한 무신론자 입장에서는 이 이상 통쾌하게 예수를 공격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보이거든요?

그런데 다 읽고 책을 덮으면 어쩐지 예수가 승리한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ㅡ.ㅡ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그러냐구요?


종교재판이 절정에 달한 16세기 스페인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거리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즉각 알아보고 주위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병자와 절름발이 몇 명을 고쳐주고 있는데

늙은 추기경이 나타나 경비병에게 체포하라고 명령하고 그리스도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날 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찾아옵니다.

대심문관입니다.

그가 예수에게 묻습니다.

성경에 위대한 정신(악마)이 광야에서 너를 '시험'한 걸로 나오는데 정말 그러냐?

그가 너에게 세가지 물음을 던졌고 너가 거부한 그것,

성경에서 '유혹'이라 명명한 그 세 가지보다 더 참된 게 있냐?

예를 들어서 이 세 가지 물음이 흔적도 없이 성경 속에서 소실되어서 그것들을 복원해야 하는, 성경에 다시 삽입하기 위해 고안해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그걸 위해 지상의 모든 현자들 - 통치자, 성직자, 학자, 철학자, 시인 등등 - 을 불러서 그들에게 과제를 내 주고

함께 머리를 짜 내어 세 가지의 물을을 만들되,

세계와 인류의 역사 전체를 표현할 만한 그런 물음이어야 한다고 말야.

자, 이렇게 지상의 지혜를 모두 합쳐 짜내어 봤자 그 옛날 광야에서 너에게 던져졌던 그 물음들과 힘과 깊이에 있어 겨룰 수 있는게 나오겠냐고.

너가 직접 누가 옳은지 결정해 봐.

너야, 아니면 그때 너한테 질문을 던진 그자(악마)야?

첫 번째 질문.

활활 타오르는 저 매마른 광야의 돌덩이들. 이것들을 빵으로 바꿔 봐. 그러면 인류가 온순한 양떼처럼 네 뒤를 따를 거라고.

하지만 넌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부했지.

복종이 빵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슨 자유냐고 넌 생각했겠지.

너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알고 있어?

바로 이 지상의 빵의 이름으로 지상의 정신이 너한테 반기를 들고 너와 싸워 이길 거라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 어떤 학문도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해.

자기네들끼리는 그것을 분배할 능력이 없는 족속이야.

그래. 그들은 나약하고 하찮은 반역자들일지도 모르지.

너는 그들에게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

하지만 그것이 약하디 약한 인간 종족의 눈에 과연 지상의 빵에 비길 수 있어?

그리고 만약 천상의 빵의 이름으로 수천, 수만 명의 인간들이 너를 따른다 해도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멸시할 힘이 없는 수백만, 수억 명의 인간들은 어떻게 되?

너에게는 고작해야 수만 명에 불과한 위대하고 강한 자들이 더 소중하고

나머지 수백만 명, 약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바다의 모래알 같은 무수한 인간들은 그저 위대하고 강한 사람들을 위한 재료가 되어야 해?

천만에.

우리에게는 약한 사람들도 소중해.

그들은 우리가(대심문관,지도층) 그들의 선두에 서서 그들의 자유를 대신 견뎌 줌으로써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경외심을 가질 거고 우리를 신으로 간주할 거야.

우리는 너에게 복종하고 있으며 너의 이름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노라고 말할 거야.

그래. 거짓말인거 우리도 알아.

우리는 그들을 기만하는 거지.

하지만 그들에게 자유란 결국에 가서는 끔찍한 일이 될 거라고!

인간은 자유를 얻고 나면 어서 빨리 자신이 '누구를, 무엇을 경배할 것인가' 라는 끊임없는 고통에 직면하게 돼.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 대상이 확실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경배할 수 있는 그런 것이길 원해.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요구조건이야말로 개인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 온 주된 문제였던 거야.

그놈의 '공통적으로'를 위해서 인간들은 서로서로를 검으로 박멸해 나갔어.

그들은 신을 만들었고 서로서로에게 '너희의 신을 버리고 우리의 신 앞에 경배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라고 호소했어.

이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심지어 신들마저도 사라져 버릴 그때까지 계속 그럴 거야.

너는 알고 있었어.

알고 있으면서도 너는 모든 인간들이 확실하게 네 앞에 경배할 수 있게 만들도록 너에게 제안된 절대적인 깃발 - 지상의 빵이라는 깃발을 거부했어.

그렇게 인간들을 고통스러운  자유 속의 싸움으로 몰아넣었어.

어쩌면 너는 옳았을지도 몰라.

빵을 주면 인간은 경배할 것이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그의 양심을 지배하게 된다면 인간은 빵을 버리고 자신의 양심을 사로잡는 그자를 따를 거야.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에 대한 확고한 관념이 없다면 인간은 설령 그의 주위가 온통 빵 천지라도 동의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너는 !

이 문제에 있어서 또다시 인간들의 자유를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자유를 주었어!

인간에게 양심의 자유보다 매혹적인 것은 없지만 동시에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고!

인간의 양심을 단번에 영원히 안정시킬 확고한 근거들 대신 너는 아리송하고 애매모호한 것, 즉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마치 그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 되어버렸어.

바로 두 번째 질문.

그 무섭고도 현명한 정신이 너를 사원의 꼭대기에 세워 놓고 말했지.

네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다면 아래로 뛰어내려 보라고. 그럼 천사들이 너를 받아 데려갈 것이고 너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 증명될 거라고.

오, 너는 물론 신처럼 훌륭하게 행동했어.

그 제안을 거절하고 뛰어내리지 않았지.

하지만 인간들은 어떤데.

인간들이 어디 신이야?

너는 인간들이 이와 유사한 유혹을 단 일 분이라도 견뎌낼 힘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거야?

너가 십자가형을 받고 떠난 지 15세기가 지났으니 어디 한번 봐 보라고.

맹세코 인간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게 창조되었어.

인간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너는 마치 인간들을 동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 게 되어버렸어.

인간을 덜 존경했더라면, 그래서 인간에게 더 적은 것을 요구했더라면 이것이 사랑에 더 가까웠을 텐데.

우리(대심문관,지도층들)는 너보다 인류를 더 사랑했어.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어기고 그들이 믿고 따를 만힌 신비를 너의 이름으로 만들었어.

너의 위엄을 수정하여 그것을 기적,신비,권위의 근거로 삼았어.

인류는 양떼처럼 우리를 따랐고 자기들에게 그토록 끔찍한 자유의 고통을 거두어 주었다고 기뻐했어.

우리가 이렇게 한게 잘못된거야?

말해 봐!

인간의 무력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사랑으로 인간의 부담을 덜어 준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어디 말해 봐!

도대체 이제 뭣 하러 우리를 방해하러 왔어!

게다가 왜 그리 유순한 눈으로 말없이 나를 꿰뚫듯 바라보는 거야?

화를 내 봐! 나는 너의 사랑 따윈 바라지 않아! 나 역시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너가 아니라 '그(광야의 정신-악마)'의 편이야.

우리는 이미 8세기부터 그와 함께였어.

네가 격노하면서 그에게 거부했던 것, 그가 지상의 모든 왕국들을 너에게 보여 주면서 제안한 마지막 선물을 이제 우리는 취했어.

그래.

그것이 세 번째 질문이었지.

그에게서 로마와 카이사르의 검을 취했고 오로지 우리만이 지상의 유일한 황제라고 선포했어.

비록 지금까지도 우리의 과업을 미처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넌 우리를 죄인이라 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시작했어.

우리의 목표를 이루려면 아직 오래 기다려야 하고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겠지만 우리는 전 세계의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 나아갈 거야.

너는... 너는 왜 이 마지막 선물을 거부한 거야?

너는 알고 있었고 할 수 있었어...

사람들을 확실한 조화로운 세계에 결합시킬 수 있었는데 넌 그렇게 하지 않았어..

너가 저버린 그 목표를 향해 티무르들과 칭기즈칸들은 이 땅을 회오리처럼 휩쓸고 다녔지만 그들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더욱 불행해졌어..

하지만 우리는 만들 거야.. 우리들의 왕국을 만들 거야..

너가 준 그 잔인한 자유를 고통스럽게 누릴 때와는 달리..

더 이상 서로를 박멸하지 않고 모든 인간들이 행복해질 그런 왕국을..

그 왕국에서 우리(대심문관,지도자들)만이 불행할 거야.

우리는 그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그들을 속였다는 걸.

그렇게 예언의 날에 너가 오면 너와 너의 선택받은 자들은 승리하겠지.

하지만,

너의 선택받은 자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구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죄인이 되어 모든 약한 사람들을 구원했노라고 말할 거야.

너가 신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죄를 묻는다면,

나는 그때 분연히 일어나서 너에게 죄라는 것을 몰랐던 수십억의 행복한 갓난애들을 가리켜 보일 테야.

그들의 행복을 위해 죄를 스스로 떠맡았던 우리는,

네 앞에 서서 말할 거야.

할 수 있다면 해 보라고. 감히 그럴 용기가 있다면 우리를 심판해 보라고.

알아 둬.

나는 네가 두렵지 않아.

나도 한때 광야에 있었고

메뚜기와 풀뿌리로 연명했으며

나도 네가 사람들을 축복해 주었던 그 자유를 축복했었어.

너가 '선택한' 그 강한 자들의 대열에 얼마든지 합류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돌아서서 겸손한 자들의 행복을 위해 겸손한 자들에게로 돌아왔어.

내일이면 너는, 내가 손가락을 까딱하기가 무섭게 너를 장작불에 태워 버리기 위해 달려들 저 온순한 양떼들을 보게 될 거야.

========================================================================================

이 대심문관 파트에서 말하고 있는 인물은 대심문관 한 명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대심문관과 예수가 인간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불꽃튀는 논쟁을 벌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 똑같은 주제를 놓고 아하스 페르츠와 예수가 갑론을박을 하는 것과는 달리,

카라마조프의 예수는 아무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대심문관의 입술에 조용히 키스를 하고 끝납니다.

조금은 엉뚱한 얘기인지 모르겠는데요,

슬램덩크.

슬램덩크의 잊을수 없는 명승부 중 하나인 해남과 북산의 경기는 종료직전 강백호의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북산의 패배로 마무리됩니다.

만화가 연재된 이래 '나는 천재야!' 라면서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해온 강백호는 처음으로 실의에 빠져 불꺼진 탈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요.

서태웅이 들어오죠.

무시무시한 긴장감이 들었습니다.

평소 서태웅의 성격이라면 여기서 절대 강백호를 위로해 줄 리는 없을거고.. 강백호 또한 그 위로를 받지도 않겠지만..

그럼 그렇다고 서태웅이 강백호의 실수를 타박할 것인가? 아아...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ㅜㅠ 이건 꿈과 희망을 주는 소년 스포츠물이라구... ㅜㅠ

조마조마하면서 숨죽이고 있는데 서태웅은 그냥 나가죠.

뭐지...?

저도 강백호도 의문이었을 겁니다.

강백호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서태웅이 왜 경기의 패배에 대한 책임추궁을 하지 않는 걸까요?

답은 모두들 보아서 알고 계시다시피

북산에서 기대했던 강백호의 역량은 매우 낮은 정도였고... 강백호는 그 기대치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했으며 마지막 패스미스는 실수도 뭣도 아닌 이미 예상범위 내에 있는 플레이였다는 겁니다.

와우! 서태웅은 만화 내의 본 캐릭터 설정을 해치지 않고 매우 충실하게 강백호를 깔아뭉겠습니다!

너 때문에 졌다고? 풉!  너는 그정도 선수 아냐.

그런데 이 서태웅의 질타가 뜻밖에도 강백호를 절망에서 끌어내 줍니다.

실수하면 그 경기에 진 책임을 지고 괴로워해야 하는 선수 = 그 팀의 에이스급.

라는 공식이 성립되면서

그때껏 '내 책임이야... 나 때문에...' 하며 괴로워하던 강백호의 자존감을 단숨에 회복시켜 준 거죠.

저는 이 장면을 슬램덩크 궁극의 명장면으로 꼽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여러가지 의무나 책임감들은 때론 무거운 짐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존엄성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대심문관의 깊은 이해와 연민에 감탄하면서도, 끝내 잠자코 있었던 예수 또한 어쩐지 인간을 저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든건 그 때문이었을 테구요.

앞서 카라마조프의 장남이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고 그 재판결과에 대해 보이는 태도도 그와 연관이 있습니다(스포가 될테니 자세한것은 본 소설을... 킄)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불건전PGR아이디
14/03/25 23:52
수정 아이콘
비온 뒤 땅이 굳어진다고 좋은글들이 쏟아지네요..최근
아하스페르츠
14/03/25 23:58
수정 아이콘
......
14/03/25 23:59
수정 아이콘
선과 악같은건 없고 단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일 뿐인걸까요..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책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쿨 그레이
14/03/26 00:04
수정 아이콘
요즘 PGR에 시간 들여 생각해야 할 양질의 글이 봄날이라 그런지 속속 올라오는 것 같군요. 흐흐.

이문열의 책이 확실히, 본인에게는 정치적인 구설수에 오르는 등 문제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빠져들게 하는 맛이 있기는 한가 봅니다. <젊은 날의 초상>은 영 아니었는데, 이 부분이나 이문열 삼국지(아 물론, 국내 삼국지 중에서 가장 심하게 까이는 게 이문열 삼국지이겠습니다마는) 같은,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랄까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우수한 필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나면,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소설도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많은 소설가가 그렇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인간성을 찌르고 들어가는 데는 한 필력 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보면... 저 역시 모태신앙이었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교회 외부에서 교회의 썩은 면을 보기 시작하면서 철저한 반기독교로 돌변했습니다(구심점이 목사뿐인 교회의 시스템 자체와 근본주의적인 그 교리를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제가 평소에 이 문제로 입을 열었다면 문자 그대로 극단적인 기독교 안티라고 봐도 할 말은 없었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이었던가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심판하는 신을 자기는 상상할 수 없다고 했던 게 말입니다. 그 말에 크게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다들 비슷한 것 같습니다. 계기가 되는 것은 다르죠. 누구는 책으로, 누구는 교계의 현실을 보면서(제가 들었던 목사의 설교 중에서 믿지 않는 자는 모조리 지옥에 간다며 하나하나 들먹였던 게 제가 기독교를 빠져나오게 된 가장 큰 계기였다고 제가 아마 몇 번 이야기했을 겁니다), 또 누구는 반기독교적인 내용을 인터넷에서 접하면서 그렇게 빠져나오게 되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똑같을 겁니다. "그 신이라는 게 있다면 대체 왜 우리 삶을 이 따위로 만들어놓고, 혹은 왜 인간이란 존재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가 정해 준 길로 안 가면 정죄하겠노라고 강짜를 부린다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그리고 교계는 절대로 어떠한 속시원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20년 동안 교회를 다녔던 제가 아는 한으로서는. 물론 좋은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현명하게 행동해라. 잠언만 봐도 제 조카에게 들려줄 좋은 구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저는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다"라는 말은 들었을지언정 "왜 순종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하는가", 나아가서 "왜 순종하고 안 하고 그런 자유를 신은 우리에게 주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주로 칼을 들이대는 쪽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어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라는, 현 대한민국의 개신교계의 근본주의적인 모습과 그로 인한 숱한 사회적인 추문, 그리고 나아가서 소위 목(牧)사, 신도들을 이끈다고(牧) 자부하는(이게 교리에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실망스럽고 더러운 모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사실, 이 점만 보면 "그 사람들이 믿는 걸 보면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넘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목사들의 사회적 문제를 넘어서서 종교의 교리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입장이고, 그러다 보니 이 글을 그리 쉽게 넘길 수는 없군요.
14/03/26 00:37
수정 아이콘
정확히는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다"는 기독교 교리와는 좀 다릅니다..
쿨 그레이
14/03/26 01:18
수정 아이콘
다름은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만,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일 년에 너다섯 번은 나오는 이야기더군요.
14/03/26 01:26
수정 아이콘
뭐 모든 목사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30분 동안 모든 걸 말해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모든 걸"을 "제대로"라고 바꿔도 무방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주뭐함
14/03/26 00:51
수정 아이콘
통쾌하게 예수와 기독교를 공격했는데 다 읽고 책을 덮으면 어쩐지 예수가 승리한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제가 사람의 아들을 다 읽고나서 느낀 것과 정확히 일치하네요.
프리온
14/03/26 01:05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소개하신 두책다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카인의 죄에 대하여 세속인으로써 가볍게 흥미로운점을 피력하자면
만물의 창조주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은 하셨는데 카인의 제물은 열납을 안하셨다는겁니다
딱히 어떤 이유가 성경에 설명되있지 않습니다. 단지 제물의 종류가 달랐을뿐인데
이것때문에 편애하시기엔 스케일이 너무크신 분이시고
그렇다면 카인을 시험에 들게하셨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아벨은 놔두고 카인에게만 이렇게 심한 운명을 주셨을까가 전 의문이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것처럼 카인의 죄도 자유의지를 벗어난차원에서 어쩌면 희생양처럼 예정되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카인이 찍힌 이유를 나름대로 구상해보았는데
비신도입장에서 하는 소리니 재미삼아 너그럽게 불경스럽지않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카인의 모친인 하와는 일전에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부끄러운곳을 가리는데 왜 입을 가리지않는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그곳을 가리게 되었는지
생각하게됬습니다
이점은 뱀의 유혹은 정말 성적인 유혹이었고 뱀과의 그런 관계를 통해서 그곳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성경을 왜곡하는 정도가 되겠지만
선악과 자체를 비유로 본다면 저에겐 그렇게 억지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꾸 그런식으로 제가 시나리오를 짜는 이유중 하나가
카인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성립되기 때문일 겁니다
바로 카인이 야훼에게 미움 혹은 시험 아니면 가혹한 운명을 받거나 짊어져야 했던 이유는 그가
바로 뱀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겁니다 .
한동안 제 머리속에 자리잡았던 이 얼토당토한? 시나리오가 본문을 읽자 불현듯 떠올라 댓글 달아봅니다
불건전PGR아이디
14/03/26 08:13
수정 아이콘
뱀과 하와의 동침설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걸 주장한 목사는 이단으로 찍혔죠
서늘한바다
14/03/26 09:51
수정 아이콘
사회학적 성서 해석의 입장에서 아벨이 양치는 사람이고 카인이 농사짓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핵심이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신에게 추궁을 당하고 나서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이 너무 중하다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사실
추방령입니다. 떠올아 다니라는 것인데 카인은 그 형벌이 너무 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벨은 양치는 자라서 유목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고 이미 떠돌아 다녔을 겁니다.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있던 카인이 상징하는 농경사회가
유목민족을 상징하는 아벨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바친 제물에서 드러나는데 성경의 스토리상 아직 육식을 하지 않았던 터라 아벨이 상징하는
유목민족은 농경민족에게 도움을 받지 못해서 신에게 드릴 제물마저 양을 드려야 했다는 점에서 명확해 집니다.
그것에 대해서 성경에서의 신은 준엄하게 책임을 묻습니다.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신에게 버려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풀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죠.
14/03/26 10:05
수정 아이콘
육식전에 가인과 거래가 없었으면 아벨은 뭘 먹고 산건가요.
서늘한바다
14/03/26 10:25
수정 아이콘
매우 단순화 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거죠.
일반적으로 신에게 드리는 제물은 좋은 것으로 바치게 되는데 먹을 수도 없는 제물을 바치는 아벨의 환경이 혹독했음을 보여주는 거고
가인에게 의존해서 살 수 밖에 없었는데 가인은 그 책무를 등한시 했기 때문에 신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의 스토리상이라고 했지 실제로 육식 자체를 하지않았다고 했습니까?
그만큼 정착민들에 비해서 유목민들의 삶이 힘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측은지심조차
품지 않는 정착민들을 향한 성경의 경고였다고 해석하는 거죠.
리니시아
14/03/26 14:13
수정 아이콘
카인과 아벨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와 잠깐 적어봅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앞으로 피땀흘려 땅을 일구어도 곡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류의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카인과 아벨 두 후손에게도 마찬가지였죠

이때 카인의 제물은 받아주지만 아벨의 제물은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중 하나가 아벨과 카인 두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만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 '너희가 땅을 일구어도 곡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지만 카인은 땅을 일구어 곡식을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벨은 가축을 기르며 살아갑니다.
땅에서 곡식을 얻는것이 하나님의 말에 거역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정확한지 모르지만 주워들은 이야기라 몇글자 적어봅니다~
Acecracker
14/03/26 02:17
수정 아이콘
대심문관:
생물로서의 욕구를 이겨내기 어려운 약한 인간에게
감당못할 것이 뻔한 자유를 주고
그 책임을 묻는 것이 어찌 사랑이 되느냐?

예수:
그럼에도 자유를 준 것이 사랑이다.

크리스찬이 아닌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됩니다.
만약 자유의지가 생물로서의 욕구를 만났을때
한없는 시간이 흘러서라도 반드시 선에 이른다면,
그리고 생물로서의 욕구를 없애주었을 때
오히려 그것이 자유가 선을 향하는 경향성을 없애버린다면
그럼 막연히 '힘든 자유가 우리안의 가축보다 존중이며 사랑'이라는 관점을 넘어 더 분명하게 예수의 사랑은 성립합니다.
느리지만 전진vs만년 제자리, 전자가 사랑이라는 면에서.

'만약~'이하의 가정이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만 사람을 고찰한 또 다른 근거들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가정입니다.
14/03/26 08:49
수정 아이콘
비슷한 질문을 에굽을 탈출해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던집니다.
14/03/26 08:50
수정 아이콘
광야사건 이후 예수는 벳세다 들녂에서 빵을 줍니다.
14/03/26 10:19
수정 아이콘
시간내서 다시 한번 읽어 봐야 겠네요. 글이 길기도 하지만 쉽게 들어 오지 않아서리..
카라마초프의 형제들은 명작이라는 이유로 한번 읽었었는데 그 등장인물 이름이 잘 들어 오지 않아서
정말 정말 힘들게 그냥 읽기만 했던 기억이 있네요.
좋은 책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이글을 보니 언제 시간내서 다시 한번 도전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4/03/26 14:53
수정 아이콘
구어체와 문어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네요^^;;;

줄거리를 압축해서 이야기하듯 전달하시는 능력은 매우 탁월하신데 사실 글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 out'이 글의 주제인 거 같지는 않고 마지막에 얼핏 주제 같은 문장들이 보이기는 하는데 막상 그 문장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달려온 느낌은 아니고 말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평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 하고자 하신 말이 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전달하고자 하시는 말이 뭔지 몰라서 적절하게 반응하기는 어려울 거 같고 글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을 적어보자면, 어제 저녁에 올라온 몇개의 글들이 묘하게 공통적으로 '깨어있는 자'와 '각성'에 대한 글이네요. 직접적으로 언급한 글은 이 글이 아니라 길게 쓸 일은 아니지만 무엇이 묘하게 몇몇 분들의 감수성들을 자극했을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네요. 저 역시 엘리트와 대중이라는 화두(!)에 매우(?) 몰두하고 있는 사람인지라, yangjyess님의 글을 포함하여, 모든 글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잘 정리해주신 대심문관 이야기를 읽으면서 라깡의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생각 났습니다. 얼마든지 빵과 자유를 교환할 수 있는 대중들은 상상계에 있고 그들의 자유를 위해 그들을 속이고 있는 대심문관은 상징계에 있고 그 대심문관에게 입을 맞추는 예수는 실재계의 '사물 그 자체'인 셈이겠죠. 대심문관이 예수의 입맞춤에 어떤 생각을 했을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물론 소설과는 다르게 현실의 사람들은 '사물'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람의 아들>에는 상상계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상징계에 속한 등장 인물은 있지만 실재계의 사물 그 자체는 결여되어 있네요. 왜 이문열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젝은 끊임없이 실재계를 언급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철학가지만 동시에 정치가이기도 하지요. 지젝의 라깡 읽기가 이 시대의 정치 철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상 라깡에 접근하는 것이 그 문체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세상(사람이라고 바꿔도 되겠죠?)이 어려운 데 이론이 어렵지 않을 수 있겠냐'는 알튀세르의 변명 아닌 변명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지적 경험을 하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들 잘 소개해주세요~
yangjyess
14/03/26 16:00
수정 아이콘
저도 어제 쓰면서 지금 내가 뭘 얘기하는 거지? 에이 망했다 -_-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ㅜ 원래 의도는 똑같은 주제인듯 하면서도 묘하게 입장차이를 보이는 (이문열은 인간 쪽을 두둔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를 두둔하는 듯한) 두 소설을 소개하고, 어째서 두 작가는 그런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어떤 장치를 통해 그런 태도를 표현했는지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조차 정리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쓰다 보면 어찌어찌 풀어 나가겠지 하고 질렀다가 망글이 되고 말았네요 크ㅜ 그래서 기왕 올라간 글만 놓고 요약하자면, '인간의 일은 우리 인간들이 알아서 할 테니 당신 예수는 좀 빠져 주라. 신의 아들인 당신이 전달하려 하는 야훼식의 자유와 책임은 어차피 우리가 감당 못한다' 라는 두 소설을 차례로 놓고 인간을 편들고 있는 아하스페르츠와 대심문관의 주장이 어째서 인간에 대한 자기비하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지 슬램덩크를 예로 들어 알리고 싶었습니다. 대심문관의 주장을 예수가 수용하여 그래... 너희 약한 인간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마... 라고 한다면 그것은 서태웅의 '경기 진건 너 책임 아니야. 니 그릇은 그정도가 못돼' 라는 응대와 똑같아 진다고 보았습니다. 말씀하신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는 솔직히 거의 이해가 안되네요 ㅜ 몇년 전부터 많이 보이는 단어들인데 알아먹질 못하니 참 우울합니다 ㅜ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라크 전쟁을 예로 들어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상상계, 미국이 지키는 세계질서가 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 실재계라고 설명한게 그나마 조금 가닥이 잡히긴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예수가 실재계라고 하시면 제가 뭔가 잘못 받아들인거 아닌가 싶네요.
yangjyess
14/03/26 16:34
수정 아이콘
참... 예수의 입맞춤을 대심문관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궁금해하시니 그 부분을 소설에서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 대심문관은 말을 마치고 예수가 무슨 대답을 해 주길 얼마 동안 기다렸다. 그는 상대방의 침묵이 괴로웠다. 예수는 대심문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반박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듯 그의 마음을 조용히 꿰뚫고 있었다. 씁쓸하고 무서운 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예수는 말없이 노인(대심문관)에게로 다가와 아흔 살 먹은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노인은 몸을 떨었다. 입술의 양 끝도 어쩐지 파르르 떨렸다. 노인은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예수에게 말했다.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두 번 다시 오지 말란 말이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예수는 떠나고 입맞춤은 노인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지만 그래도 그는 예전의 이념을 고수했다. ###

사람의 아들에서는 예수가 신의 힘으로 아하스페르츠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카라마조프에서는 조용히 키스를 하구요. 이문열의 예수는 반항하는 인간을 제압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수는 모든 인간을 포용하고 특히 전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기를 불사한 대심문관을 격려합니다. 개인적으로 대심문관의 속마음을 추측해 보건데, 그는 스스로의 주장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었고 예수가 그걸 지적해주길 바라며 짐짓 도발적으로 추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보면 '순교자'와도 같은 자신의 역할을 이제 대신 맡아달라고 사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의 답은 '그래 너가 고생이 많구나 계속 그렇게 열심히 해 봐' 이에 대심문관은 분노하면서도 고마움을 함께 느끼지 않았을까 합니다... 킄
14/03/26 17:13
수정 아이콘
예를 들어 하나님(상상)을 인간(실재)에게 어떻게 설명(상징)할 것인가는 익숙한 문법입니다. 이 틀을 철학에서도 가져와 쓰는거죠.
14/03/26 17:16
수정 아이콘
아고, 답글을 달아주실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아마 제가 글쓰기에 대한 평 아닌 평을 해서 호출 아닌 호출을 한 셈이 된 거 같습니다. 위에도 말씀드렸지만 절대 글쓰기에 대한 지적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댓글로 정리해주신 내용을 보니 한결 이해하기가 쉬워지기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재계에 대해서는 제가 잘 설명할 방법은 없고 yangjyess님이 읽으셨던 내용도 맞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칸트적인 입장에서 절대 인식이 가서 닿을 수 없는 사물 그 자체고, 상징계에 끝내 포섭되지 않는 지울 수 없는 얼룩이기도 하고, 어차피 인식이 가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절대 무이기도 합니다만 실재계라는 이 모순적인 존재때문에 상징계가 무너너지 않을 수 있죠. '과학의 과학성은 절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든가 하는 것들이 실재계를 드러내주는 말들입니다.

라깡의 이론 자체가 일반적인 과학 이론이나 사회과학 이론들과는 다르게 과도하게 '문학'적이라서 이건 이거다 이렇게 결론이 떡하니 나오는 내용이 아닙니다. 실재계 자체도 처음부터 중요하게 다뤘던 개념은 아닌데다 사실 실재계를 꾸준히 재호출하는 건 라깡 자신보다는 지젝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지젝 역시 럭비공 같은 아저씨라서 제가 뭔가를 설명해드릴 내용은 아닌 듯 합니다만, 쓸데없이 '나는 잘 몰라서 할 말이 없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늘여 쓰는 이유는 실재계의 존재가 아마도 대심문관과 아하스페르츠를 가르는 핵심적인 차이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엄청나게 길게 예수를 아낌없이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두둔하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예수의 입맞춤 때문이 아닐까 싶은 거죠. 논리나 언어로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저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입맞춤'을 한 예수는 상징계(대심문관의 논리)로 포섭되지 않는, 하지만 무시할 방법이 없는 절대적인 '사물 그 자체'의 출현인 거죠. 이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두 작가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yangjyess님의 논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강백호는 상상계(나는 천재)에 속한 주체가 '거울'(자신의 실력을 돌아볼 수 있는 시합)을 만나 상징계적 주체(사실은 피지컬만 훌륭한 농구 초초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두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겠죠? 상상계적 주체라면 현실을 도피해서 상상계의 주체성(결핍이 없다는 자기 환상)을 유지하고 싶어할테고 상징계적 주체성(나는 결핍되어 있지만 대타자를 통해서 결핍을 채우고 완전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받아들이면 현실 속에서 철저하게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농구를 그만둘 것인지, 아니면 뼈를 깍는 노력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본 지가 너무 오래전이라 슬램덩크의 그 장면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서태웅이 만약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입맞추는 예수의 역할을 감당했다면 강백호는 '생각할 수는 있지만 생각할 거리가 없는' 절대 무, 실재계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테고 상상계와 상징계 둘 모두에 속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향유하는 주체'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무력함이 나의 고귀함의 근거가 되는 그런 주체 말입니다.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가 '내가 천재'이기 때문인 그런 주체 말이죠.

각설하고, 좋은 글, 좋은 책 소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
yangjyess
14/03/26 19:17
수정 아이콘
음... ! 슬램덩크에 대입하니 확 이해가 되는군요 크 상상계랑 상징계는 딱 알겠고 실재계가 좀 어렵긴 한데 <사람에 아들과 카라마조프의 차이> 라고 하면 대충 짐작은 가는군요 사실 그걸 쓰고 싶었던 글인데 망해버렸죠 킄 ㅜ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4831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9 [4] 가브리엘대천사1782 14/11/12 1782 0
54803 [일반] 이단옆차기 작곡가 박장근도 발치의혹이 나왔습니다. [32] 마빠이13199 14/11/10 13199 0
54708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3, 4 [4] 가브리엘대천사1797 14/11/05 1797 0
54682 [일반] MC몽 신곡들 음원차트에서 엄청나네요. [143] B와D사이의C12304 14/11/03 12304 0
54104 [일반] [세월호] 박민규 - 눈먼 자들의 국가 [53] 쌈등마잉8580 14/10/02 8580 19
53853 [일반] 도스 창의 가로 길이는 왜 80글자일까? [58] 랜덤여신6040 14/09/18 6040 17
53198 [일반] 준호의 MV와 오렌지캬라멜/빅병/박재범의 티저가 공개되었습니다. [7] 효연광팬세우실3188 14/08/13 3188 0
52655 [일반] 사람들이 이단으로 손가락질하는 종교를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 [53] 삭제됨6335 14/07/11 6335 0
52492 [일반]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는 신학도의 주관적 비판. Part 2 - 성장과 결과 중심의 개신교, 희망의 신학 [38] 피에군5109 14/07/02 5109 8
52054 [일반] 메이저리그 함께 알아보기 1편: 메이저리그에 대하여, LA 다저스 [68] 화이트데이9131 14/06/01 9131 82
52025 [일반] 나는 왜 창조과학을 싫어하는가? [76] TimeLord6561 14/05/31 6561 0
51977 [일반] [신앙에세이] 후회: 적그리스도 교황과 아버지 [31] 쌈등마잉4673 14/05/28 4673 4
51784 [일반] 서태지, MC몽. 각각 웰메이드예당과 손잡고 하반기 컴백 예정 [109] 타나토노트8981 14/05/16 8981 2
51650 [일반] 정기고의 뮤직비디오와 G.NA/전효성/휘성의 티저가 공개되었습니다. [25] 효연광팬세우실5857 14/05/10 5857 0
51036 [일반] 왜 리버풀의 선전은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흥행보증수표가 되는가? [51] Ayew6665 14/04/14 6665 0
50892 [일반] 어릴때 말입니다. [24] 김아무개4384 14/04/05 4384 5
50704 [일반] 초보팬이 꼽은 체조 이단평행봉 명연기 10선 [12] 살앙하는차8787 14/03/27 8787 0
50682 [일반] 초보팬이 꼽은 체조 평균대 명연기 10선 [25] 살앙하는차9377 14/03/26 9377 3
50676 [일반] 예수 out ! <사람의 아들> & <대심문관> [24] yangjyess7093 14/03/25 7093 12
50629 [일반] 영영사전계의 이단아 - 콜린스 코빌드 어드밴스드 사전... [12] Neandertal18705 14/03/23 18705 5
49831 [일반] 자유론 서평 [6] 캇카5448 14/02/12 5448 6
49647 [일반] 몰몬교, 사우스 파크, 뮤지컬 '몰몬' [32] Alan_Baxter7912 14/02/04 7912 2
49638 [일반]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신정일체의 종교국가입니다. [35] 凡人5462 14/02/04 5462 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