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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3/17 05:41:03
Name 王天君
File #1 robocop.jpg (105.7 KB), Download : 56
Subject [일반] 로보캅 보고 왔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실 전 폴 버호벤의 로보캅의 거의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웅 치킨 웅 치킨 하고 브레이크 댄스를 추듯 과장된 연기를 보여주던 꽁트 프로그램들이 더 먼저 떠올라요. 어쨋든 다른 시대에서 오는 인식의 차이나, 같은 소재에서 다른 걸 뽑으려는 감독의 의도를 반영한다면, 원작의 무거움을 감상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요는, 재미있으면 되는 거니까요. 문제는 어지간한 특수효과와 액션으로는 흥행을 절대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관객들의 눈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훌륭한 SF 영화의 리메이크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무난하다’는 소리를 듣는데 그치기 마련입니다.

근미래, 치안의 대부분은 인공 지능 로봇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국내에서는 로봇의 치안 유지가 여전히 금지되어 있으며, 군수 업체 옴니코프는 일종의 마케팅 전략으로 인간다운 로봇을 출시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저돌적으로 사건을 쫓다 보복성 테러에 휘말린 경찰관 머피는 인간적인 로봇의 모델로 발탁되게 됩니다. 머피의 부인은 신체가 크게 훼손된 그를 로봇으로 부활시키겠다는 동의서에 어쩔 수 없이 서명하고, 본격적으로 로보캅 프로젝트는 시작됩니다.

개조 후 머피가 인간으로서 남아있는 자신의 육체를 확인하는 장면은 예상 외로 불편합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머리와 손 하나 그리고 꿀렁이는 폐 뿐입니다. 이 장면의 충격은 인간에 대한 질문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일깨우기에 충분합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육체의 온전함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 어쩌구 저쩌구… 온 몸의 80% 이상이 기계 부품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과연 인간이란 말입니까? 기계의 도움 없이는 생명유지조차 안되는데? 작중 옴니코프 사장의 말처럼 로보캅이란 존재는 사람에 기계를 덧씌운 게 아니라 기계에 사람을 심어놓은 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후 머피에 대한 통제가 심해질수록 그를 인간으로 정의내리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로보캅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머피는 육체에 대한 의지를 상실했고, 자유의지 역시 통제당하고 있으며 이후에는 감정마저 박탈당하니까요. 이런 점에서 영화가 인간성의 근본으로 보는 것은 ‘자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되려 영화는 조금 유치해기 시작하죠. 인간이란 뭘까? 이거지 이거!! 하고 영화가 황급히 대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영화가 내내 던지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도 약간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영화가 인간다움의 화두로 삼고 있던 것은 ‘감정’입니다. 의원들이 옴니코프 사의 로봇을 민간치안에 도입하는 걸 반대하는 큰 이유는 ‘그들은 감정이 없다’ 는 것이죠. 영화 초반 노튼 박사가 환자에게 의수를 제공하고 시험하는 장면에서 기계가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로보캅은 감정을 제어하는 부분에서 큰 오류를 일으켜 별수 없이 그의 도파민을 극도로 떨어트리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하구요. 그런데 이 장면들이 사실 뭘 묻고 있는지는 모호합니다. 기계문명의 위험을 경고하는 건가요 아니면 로보캅이란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인가요? 선악과 존재론적인 질문 사이에서 영화는 오락가락하는 것 같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기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효율성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영화는 궁극적으로 도덕에 관한 질문에 이 논리를 끌어들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기계가 감정이 없으니 나쁘다거나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굳이 사람 모양을 한 안드로이드를 제쳐두고라도, 이미 경비와 보안에서 기계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의원들의 논리는 알맹이 하나 없는 껍데기뿐이라서 논파할 가치도 별로 안느껴집니다. 홍채인식을 하는 기계는 감정이 없으니 그걸 쓰지 말자!! 라고 할 건가요? 초반 아랍 계열 국가에서 무자비한 로봇의 진압 장면은 그냥 선동에 불과합니다. 로봇은 자비가 없다!! 그러니 나쁘다!! 막 말로 로봇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렇게 프로그래밍을 한 인간이 나쁜 거지. 똑같은 짓을 지금도 인간 군인들이 하고 있는 실상에 저런 비난은 무의미하죠.

어설프게 기계문명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이끌어 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차라리 로보캅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고 드는 데에 영화는 집중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영화는 사유 대신 멜로에 기대서 정답을 내려버립니다. 로보캅은 인간이다! 왜? 아직 그에게는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마음이 남아있으니까! SF에 불가사의나 기적을 마음대로 끌어오면 어떡합니까. 이건 장르의 정체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행위잖아요. 머피가 별안간 어떻게 감정을 회복하고 의지를 되찾게 되었는지는 영영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파로 대충 얼머부리는 서사가 너무 유치해서 잠깐이라도 고민했던 게 아까울 지경이었어요.

캐릭터들의 활용에서도 이 영화는 정말 꼬집을 게 많습니다. 편파적이다 싶을 정도로 평면적인 인물들은 일단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가장 거슬리는 건 입체적인 인물들, 머피, 노튼 박사, 레이몬드 사장입니다. 아마 이들의 묘사가 이상한 건 시나리오의 실패로 봐야겠죠. 머피의 경우, 그에게 인간적 고뇌와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정을 표현하는데 영화는 철저히 실패합니다. 대신 억울해 미치기 직전인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하나 있을 뿐이죠. 왜 사건의 당사자에게 고뇌를 부여하지 않았을까요. 대신, 이 고뇌를 떠맡고 잇는 것은 노튼 박사입니다. 그렇다고 이 캐릭터가  철학적 질문을 대신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그냥 이래도 되나 싶은, 찜찜함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어느 순간을 지나면 노튼 박사는 놀랄 정도로 머피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데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런 주제에, 나중에서야 머피가 옴니코프 사에게 반항하도록 돕는 것은 어딘지 좀 치사해 보입니다. 오히려 이 인물을 자기보전에 급급한 사람으로 그렸다면 이야기가 더 그럴싸했을 거에요. 레이몬드 사장 역시 이 모든 이야기의 원흉으로 그려지기에는 많이 부족한 인물입니다. 특별한 악인이라기보다는, 그는 이익을 뒤쫓는 전형적인 사업가일 뿐이죠. 지금도 살아있는 노동자들을 천대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비윤리적 경영자들은 차고 넘칩니다. 그렇기에 로보캅이 최후의 적으로 그를 대하는 것은 그렇게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너가 날 감히 죽일려고 해? 라는 로보캅의 개인적인 분풀이는 되겠지만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사회에 혼란을 가져온 자에 대한 도덕적 심판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거든요.

이런 거 다 떠나서 액션영화로 즐기기에도 로보캅은 그리 큰 쾌감을 주지 못합니다. 일단, 히어로로서 로보캅은 고유의 매력이 거의 없어요. 견고함과 냉혹함의 이미지를 내세우기에는 터미네이터와 아이언맨에 비해 임팩트가 너무 적습니다. 오히려 여기저기 깨져나가는 연약함에 안타까울 정도죠. 뭐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거라면 총격전에서 벌이는 정확성 정도가 핀포인트가 될 수 있을텐데, 그마저도 이 영화는 발롱 일당과의 전투에서 무식하다 싶을 정도의 돌진으로 다 깎아먹습니다. 이 영화의 액션은 카우보이와 람보를 적절히 섞어놓은 20세기 식의 구닥다리 느낌이 너무 많이 나요.

결국, 이 영화 역시도 다른 SF 영화의 리메이크 범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발전한 CG의 힘을 빌어 조금 더 매끄럽게 재현한 미래 기술의 화면 말고는 감상할 것이 거의 없네요. 오로지 기획만이 보일 뿐, 감독의 야심도 오마쥬도 보이지 않는 이 작품을 전 그리 옹호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요즘 나오는 히어로 영화들의 녹록치 않은 성찰과 고뇌의 메시지를 볼 때, 저연령 대상 영화로 바꾸느라 그랬다는 핑계는 너무 궁색하지 않습니까?

@ 팀 버튼의 배트맨과 놀란의 고든 경사가 히어로를 만들 계획을 하는 게 좀 재미있더군요.

@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이보그에게 경찰의 업무를 대신 맡기는 건 너무 근사한 아이디어인데요. 기계가 못 미더우면, 사람이 조종하게끔 만들면 되는 거 아닐까요? 인질범 같은 위험한 상황에는 범인 살상 모드로 인질범만 정확히 죽일 수 있으니 더 편할 것 같고. 옴니코프 사도 바보 같은 게, 그냥 살상용 로봇의 화력을 낮추고 인간이 조종 가능하도록 리뉴얼해서 제품을 출시하면 되잖아요.

@ 국회의원이 정의를 부르짖는 직업군으로 적합할려나요? 차라리 시민단체 대표쯤으로 설정했으면 그럴싸 했을텐데.

@ 로보캅의 제조 국가가 어디였을려나요? 중국? 동남아시아의 어딘가?  

@ 어쩌면, 이 영화는 로봇처럼 일해야 하는 경찰의 애환을 그린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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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사냐건웃지요
14/03/17 06:38
수정 아이콘
역시 액션 영화는 스포보고적당히 걸러야죠 크크 리뷰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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