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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2/27 20:58:23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일반] 동서양의 소위 "예의"에 대해서
사실 말만 동서양이라고 퉁쳤지 한국과 영미권이라고 써야 더 정확한 명제가 되겠습니다.

한중일이 서로 다른 종류의 예의문화를 가지고 있듯 영미권은 대륙 각국과 다른 예의 코드가 있으니까요.

흔히들 한국의 위계질서와 존댓말, 토론문화등을 지적하면서 [서양]과 다른, 어떤 강력한 상하질서 때문에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예의차림] 문화가 있다는 말들을 합니다.

이에 반해 서양은 할 말 시원하게 다 하고 신나게 한 판 뜨는 활극형 문화의 전범으로 제시되곤 하지요.

그런데, 정말 그래요?



1. 서양 예의


서구권, 아니 사실 영미권에서 살면서 가끔 해괴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시아 학생들은 무례(rude)]



헐헐

팔짝 뛸 노릇이죠.

동방예의지국 및 그 이웃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무례하면 뭐 너희 양오랑캐들은 사람이기는 한거니?

라고 대답하지는 않고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되물어보면 나오는 말들이

"너희는 보면 공동실(common room)에 들어올 때 모르는 사람에게 hi~ 라고 인사해주지 않잖아"

라든가

"너희는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지 않잖아"

라든가

"너희는 자전거 타고 지나갈 때 우리가 길을 살짝 비켜주면 Thank you 라고 큰소리로 인사하지 않잖아"

등등

허허허허허허허

뭐 그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례했을까요?




2. 동양 예의


처음 지도교수를 만났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네요.

예컨대 지도교수의 성명이 James Lewis 라고 합시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안녕하세요 Prof. Lewis" 라고 인사하게 마련 아닌가요?

어딜 대놓고 교수님 이름을 찍찍 부를 수 있겠어요.

그런데 요 교수님이 그럽니다.

"에이 왜그래, Jay라고 불러"

????

입이 안떨어지더군요.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요 교수를 부르는 꼴을 가만 지켜봤는데 정말 Jay~Jay~ 하는거에요.

뿐만 아니라 그냥 교수 이름 부르는게 생활화되어있더군요.

타이틀도 안붙이고 성도 안불러줍니다.






3. 인간 본성(?)으로서의 예의


인류학자들이 좋아하는 단어 탑 10을 뽑아보라면

분명 아주 높은 순위에 질서(order)가 들어갈거라고 확신합니다.

규범질서(normative order), 정치 질서(political order), 사회 질서(social order) 등등.

그런데 그 중 좀 낯설지만 역시나 많이 사용되는 질서 중 하나가 전례 질서입니다 (ritual order).

인간 사회(그것이 어디서 발생해서 어떤 역사를 거쳤는지를 막론하고)라면 어디에나 이 전례 질서가 있습니다.

만나면 손을 어떻게 흔들 것인지, "잘먹겠습니다"는 꼭 해야 하는지와 같은 사소한 전례는 물론이고

피아는 어떻게 구별해서 각각 어떤 다른 제스쳐와 말씨로 상대할 것인지, 우군에 대한 비판과 적군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구분되는지와 같은 보다 쌈박한 전례들도 알게 모르게 규정되어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맥락에 더 가깝게 써보자면

정모, 모금, 후원 등과 같은 각종 규모의 행사들이 모두 이 전례에 해당합니다.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죠.

이 전례를 익히고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우리는 보통 [낭창낭창하다] 라든가 [사회생활 잘하다] 와 같은 수식을 붙여줍니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서양이요? 교수 이름 찍찍 부르면서도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게, 그래서 학위과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꾸준히 조심하고 관심 갖는 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방법과 그런 행위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를 뿐이죠.

학회나 보다 작은 발표회에서 막 대놓고 비판하고 그런 거요?

그것도 가만 보면 [나]의 장래 커리어에 모종의 영향을 행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발표자에겐 그렇게 쌍욕 못합니다.

예컨대 과 내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발표회 같은 데서 우리 지도교수가 페이퍼를 발표했다고 합시다.

제자들이 물론 발표 끝나고 이런 저런 질의를 하죠.

얼마나 조심조심 질의하는데요 -_-;;

행여라도 지도교수 마음 상하지 않게 수사적 칭찬과 감사의 표시를 꼭 곁들이고

또 그(혹은 그녀)의 학문적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므로 비판할 경우 받아들일만한 부분(예컨대 오타라든지)과 받아들일리가 없는 부분(보다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부분)을 재치있게 구별해서 비판하곤 하죠.

아마 서양인 학자들이 학회에서 거침없이 비판하고 질의하는 모습이 우리 학회와 다르다는 인상을 받으셨다면 그건 문화의 차이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학계의 체급차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계가 충분히 크면 나랑 별 상관 없는 학자의 발표에 대해 얼마든지 대차게 깔 수 있습니다. 거리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학계가 작아서 누구나 다 얼굴 보고 지내는 올망졸망한 사이즈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말을 함부로 못하게 되죠.

한국식 [예의바름]이 한국적 특징이라는 동어반복적 명제가 나름 효용이 있는 건 이 주장이 실제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례 질서를 뭉술하게 퉁쳐서 묶어주는 설명력이 있기 때문이지

실제로 이 한국식 예의바름이 한국 특유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어쩌면 소규모 공동체에서 서로 척을 질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 아닐까요

[척을 져도 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한국인들이 얼마나 거칠고 격정적으로 상대를 대차게 까대는지 여러분 모두 아시지 않나요?





4. PGR의 사례


예컨대 일베 회원과 키배가 터졌다고 합시다.

예의차림이 어디있나요, 물어 뜯느라 바쁘죠.

하지만 PGR회원끼리 키배가 터지면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면서 토론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을 합니다.

왜냐하면, 척 질 사이가 아니니까요.

척 질 사이가 아닌 사람 간의 토론이 벌어졌다는 건 그 곳은 바로 이 전례 질서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뜻이고

전례 질서가 실제로 그 공동체의 유지에 도움이 되는, 접착제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게 사실이라면

그 전례 질서 자체를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의가 중요합니다.

아니, 이 예의라는 단어가 여전히 불편하시다면 표현법을 바꿔보죠, [무례하지 않]게 말할 줄 아는게 그래서 중요합니다.



5. 결론



글은 창작-매개-수용의 3요소로 이루어집니다.

누군가가 창작하고, 그것이 어떤 매개를 거쳐(자게라든가, 종이라든가, 아니면 음성이라든가) 누군가에게 수용됩니다.

그래서 온전히 창작자의 것이 아니고, 다른 많은 요소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할 말을 다 할 줄 아는 것과 그 말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요, 누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것이냐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좋은 글쟁이는 이 모든 요소를 적당히 참작해서 밀고 당길 줄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더 많은 [소통]을 달성합니다.

[적당한 참작] 안에 [무례하지 않]게 말할 줄 아는 능력이 포함된다는 건 불문의 사실이구요.



금명간에 벌어진 다양한 사태들을 보면서 소소한 소회를 남겨봅니다.

다른 커뮤니티도 아니고 피지알이잖습니까?

무례하지 않은 글쓰기, 배려 있는 댓글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3분 뒤에 수업 시작이라 퇴고 없이 올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피드백도 2시간 뒤에나 가능할 것 같으니 역시 미리 양해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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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zzatura
14/02/27 21:19
수정 아이콘
술술 읽히네요 잘 봤습니다
프리템포
14/02/27 21:19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최근 분쟁(?)에 이 글이 시금석이 되었으면 하네요
14/02/27 21:26
수정 아이콘
토마스 아퀴나스를 발표시간에 토미라고 불렀다가 교수의 온건한 지적을 받았던 유학생이 있었는데 풀네임으로 고쳐불렀죠. 그거 싸우러 유학간 것 아니니까.

유교의 예말고 예의 즉 문화 이데올로기는 읽거나 듣는 사람 입장에 따라 양보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절름발이이리
14/02/27 21:27
수정 아이콘
서양은 예의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건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죠. 말 그대로 질서는 어디서나 각각의 방식으로 따지고, 그게 예의로 이어집니다. 다만 그 질서가 국내와 해외에 있어 수직적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봐도 무방할 겁니다. 양적인 차이는 몰라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얘기지요.
Waldstein
14/02/27 21:29
수정 아이콘
동 서양 둘다 나름의 질서가 존재한다고 해도 개인적으론 동양의 그것이(정확히 한국) 제일 역겹네요.
노련한곰탱이
14/02/27 21:55
수정 아이콘
소위 예절의 방식이 다를 뿐 그것을 엄격하게 적용하느냐 마느냐는 문화적요소와 개체의 성향에 달린바가 큰 거 같습니다. 거기에 동서양이 정도의 차는 없죠. 오히려 보수적인 서양문화권이 예절을 따지는 걸 보면 뭐 유생들 저리가라 수준이니까요.

실례로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실내에서도 복색을 완전하게 갖추는게 예의라 갓을 벗지 않았지만 서양에선 실내에서 모자 쓰고 있는게 거의 방바닥에 신발신고 들어간 수준으로 여기죠. 여행가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지적이 모자 벗으라는 거였네요.

다만 서양이 근대를 거치며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이러한 권위적 예절이 합리주의적 사고에 의해 먼저 허물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의 인식이 굳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에선 허례허식이나 부조리가 아닌 수준에선 예절은 지키는 것이 공동체와 구성원 객체에 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타인에 대한 존중이니까요. 다만 가부장제를 위시한 부조리는 혁파되어야죠..
영원한초보
14/02/27 21:56
수정 아이콘
오늘은 PGR이 문자의 홍수로 뒤덮혔는데
그래도 그만큼 얻어가는 것도 많네요
예의가 중요한 것은 예의로 꼬투리 잡히지 않기위해서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의논쟁으로 가면 또 그만큼 시간손해니까요
14/02/27 22:0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넷상의 예의에 있어서의 문제는, 안 보인다는거죠ㅠ 닉으로 Prof니 Dr니 쓴다고 해도 믿기지도 않고, 설사 믿는다면 모든 닉이 Sir로 가득찰지도 모르고..;;

그래서 보통 어투에서 느껴지는(?) 느낌으로 화자의 이미지를 재단하는 듯 합니다...
"학자타입이다" "아저씨네" "이건 회사원" "아 초딩" "덕내나네 크크" 뭐 이렇게요..
특히 질서나 예의는 어느정도 소위 "위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저도모르게 속으로 "이 어린노무..."라던가 "지가 뭘 안..."이런 생각이 들면 말이 거칠어지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최소한의 예의만 갖고가는거죠. '하대'에도 나름의 룰이 있잖아요?

이런 태도의 차이가-상대에게 바라는 태도와 상대의 태도의 차이- 키배판을 더 키우는 경우도 꽤 본거같고 뭐 그렇습니다..
피아노
14/02/27 22:17
수정 아이콘
좋은글이네요.
어니닷
14/02/27 22:26
수정 아이콘
추천드립니다.
미카엘
14/02/28 01:45
수정 아이콘
추천 드립니다.
Polar Ice
14/02/28 05:00
수정 아이콘
요즘 PGR오면 정말 불편한 코멘트들이 너무 많더군요. 예의라는 건 정말 무엇인지..
과거에 이모티콘을 금지햇더니 요즘엔 코멘트에 크크 다시는 분들이 너무너무 싫어요.
이곳저곳 에서 그렇게 까이는 일베나 오유같은 사이트에서 이런저런 막말로 낄낄거리는것처럼
전 PGR에서 보는 크크도 그런 느낌이더군요.

정말 크크 거릴정도로 우스운 일인가 싶은일에도 크크 거리시는 분들도 많고...
특히 얼마전 올라왔던 섬노예 관련해서도 심각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댓글로 크크거리시는 분들은 정말 역겨웠어요.
꽃보다할배
14/02/28 07:43
수정 아이콘
존대말이 존중과 다르다는 것...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언젠가 제가 써 보고 싶던 주제였어요
은수저
14/02/28 09:09
수정 아이콘
푸닥거리가 끝나니 좋은글이 홍수처럼 터지네요. 크크 잘 읽고 갑니다.
오스카
14/02/28 23:56
수정 아이콘
한국식 예의는 진짜 체면치레식, 나이로 위아래 서열 매기기식이라.. 나이 많은 분에게 인간대인간으로 존중 받는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별로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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