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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2/12 23:26:19
Name 캇카
Subject [일반] 자유론 서평
자유론은 인상 깊게 읽은 책 중에 한 권인데요.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볼 겸 정리해 봤습니다.
반말투인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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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은 스튜어트 밀의 자유에 관한 저서이다. 스튜어트 밀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공리주의자로서, ‘자유론’에서도 그의 논의는 공리주의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공리주의는 타당성과는 별개로 빈부격차를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될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공리주의에 사상적인 기반을 둔 '자유론‘에 대해서도 그러한 이유로 동조하지 않거나 혹은 관심조차 두지 않을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연유로 공리주의가 이론적으로 불완전하더라도 ’자유론‘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1. 공리주의는 사회의 공리라는 양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개인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가지나, 자유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는 소수의 사람이 설령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 자유를 보장하는 편이 질적으로 더 낫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회와 개인이 분리되어 대립하지 않아 공리주의의 일반적 문제점을 갖고 있지 않다.

2. 공리주의가 실제로 역사에서 위력을 보였던 이유는 공리를 근거로 충돌하는 개인을 희생시킬 명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리주의가 그 정당화에 기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희생을 직접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희생은 자원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한 것이지 공리주의가 그 희생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수가 행복해짐을 근거로, 즉 공리를 유일한 근거로 하여 너무나 쉽게 소수를 억압하고 희생시키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복리를 누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공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공리는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그 불완전성을 근거로 공리에 대한 판단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론은 비록 그 논리의 가반이 어느 정도는 공리주의에 있다고 하더라도 공리주의와는 별개로 이해될 필요가 있는 책이며 이하에서 ‘자유론’에 대해 살펴보겠다. 자유론에서 밀은 자유의 영역을 양심의 영역과 행동의 영역으로 나누어 최대한의 자유를 확보한다. 2장에서는 양심의 영역, 즉 의견과 토론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장하며 3, 4장에서는 개인의 개성이 발현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며 어떠한 경우에 그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이와 같은 분류는 한 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지 여부, 제한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제한할 수 있는지 여부, 상대방의 선택을 조작하여 악용할 수 있는지 여부 등에서 차이점을 갖기 때문에 자유와 그 제한에 대해 논의하고자 했던 밀이 취했던 탁월한 분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와 같은 분류에 따라 내용 전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밀이 무엇을 위해서 자유의 원칙을 정립하고자 하였는지를 파악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자유론은 1859년에 출간된 책으로 현재와는 그 시대적 간격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이론은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 논리가 전개되기 마련인데 그러한 까닭에 1)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므로 그 진단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2) 그 시대에 논의된 것을 넘어 현재까지 전해진 책이라면 그 내용이 사실상 현재의 우리사회에 부분적으로 기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 내용이 식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당연한 이야기를 왜 어렵게 하냐 혹은 이미 극복된 이론인데 왜 시간을 투자하느냐 등의 비판을 많이 하고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여 기술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내용을 쉽게 전달함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하지만 고전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글쓴이가 실현하고자 했던 생각을 일시적이나마 남들에게 전하고 인정받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뜻한다. 글쓴이가 달성하려는 목적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설명을 했는지는 오히려 몇몇의 표현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부수적인 부분에서 파악되기도 한다. 밀이 이론을 통해 자유를 어떻게 확립하려고 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자유론을 한 때의 이론으로서 감상하지 않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아보겠다. 필요한 경우 원문을 가능한 덜 요약된 형태로 인용할 것이다.


밀은 무엇을 경계하고, 왜 이런 주장을 하였을까?

과거에 시민의 자유는 통치 권력으로부터 자신들의 생활 영역을 지키는 문제였고 투쟁을 통해서 확보하여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통치 권력을 자신들의 손으로 선출하는 현재에도 자유의 중요성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알게 되었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권력행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항상 같다고 할 수 없으며  다수파 또는 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다수파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밀은 이에 더해 다수의 전제는 다른 종류의 전제와는 다르게 공적 당국의 행위를 통하여 지배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각각의 개인에 대해 사회 그 자체가 전제자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생각이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전제는 정치적 억압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처벌에 의해 뒷받침되지는 않지만 정치적 억압에 비해 회피의 수단을 덜 남기고, 삶의 세세한 부분에 더 깊이 침투하며 정신 자체를 노예화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정치적 억압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따라서 위정자의 전제로부터 개인이 보호될 필요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으로부터 개인이 강요받는 것도 보호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유가 중요하다는 일반론에 공감한다. 그러나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의 통제 사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에 대해서, 통용되는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밀은 이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즉 가장 명백한 밀의 집필 동기는 개인의 독립성과 사회의 통제 사이에 적절하다고 보이는 경계선의 설정이다. 하지만 밀 본인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러한 행동규범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항상 달라지는 것으로, 우리한테도 그 선이 적절하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오히려 강조해야 할 부분은 대다수의 사람이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상태임에도 밀은 자유가 억압되는 것을 경계하여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즉, 자유를 억압하고자 하던 통치 권력과 획득하려고 했던 시민들과의 대치 구도가 아니라 누구나 자유가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밀은 짚은 것이다.

이미 자유의 소중함이 인정된 사회에서 자유에 대한 침해는 자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그 영역의 구분을 통하여 발생한다. 행동이나 생각을 제약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방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행동은 어떠한 이유로 보호받을 수 있는 자유의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제약하는 것은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논리를 펼치게 된다. 근래에 문제시되었던 SNS와 일베 등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그 제한,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청소년보호법의 게임 셧다운제에 대한 문제에서도 이러한 논쟁의 초점은 그 해당하는 종류의 자유를 인정할 것인지가 아니라 그 개별적인 상황이 보호받는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가에 쏠리기 마련이다. 표현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허위 사실이나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글의 자유는 인정할 수 없다거나, 취미 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나 미성년자가 밤에 게임을 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자유에 대한 제한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제한에 대한 찬반 논쟁, 그리고 그 제한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밀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그대로 떠오른다.
[자유와 그 제한에 따라 인정되는 행동규범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는 인간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며, 어떠한 서로 다른 두 나라와 서로 다른 두 시대도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주제가 늘 일치해왔다고 생각하고 그 행동규범의 정당성에 의심을 품지 않는데 이것은 관습의 마법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원칙은 자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자기 또는 자기가 동조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각자의 마음 속 감정이다. 이에 대해 사회보다 사고와 감정에서 사회보다 앞선 사람들은 사회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왜 개인에게 법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고 사회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따라서 선호되는 관습은 시대에 따라 변했지만 결국 그 사회적 감정에 의해 행동규범이 정해지는 것은 여전하다. 정부의 통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통제에 대한 찬반은 일단은 나쁜 것을 정부가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가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이 구분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원칙에 따라 정부의 역할에 대해 일관된 자세를 지니는 사람은 많지 않고 자기의 감정이 내리는 대체적인 지시에 따라, 혹은 정부의 제안에 따른 자신의 이익에 따라, 자기가 선호하는 방식대로 정부가 일을 하는지 여부에 따라 어느 한 입장에 선다.]  

물론 무제한의 자유가 불가능하다면 적용 영역의 구분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적용영역의 구분은 사람 간의 인식차이를 발생시킨다. 어디까지가 자유의 보호 영역인지는 (어디까지 자유가 우선하는지) 개인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영역의 구분은 사실에 대한 가치 평가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정이라는 가치를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사실이 우정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다르다면 우정을 문제로 다툼이 발생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우정은 편안함이고 다른 이에게 우정은 신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정이 신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친구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기대했을 때 그 친구는 친구끼리 조금 더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우정이라고 판단한다면 신의를 지키라는 상대방의 구속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우는 우정과 자유 간 어떤 가치가 우선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이 우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한 쪽에게는 우정의 문제가 다른 쪽에게는 자유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단하거나, 혹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판단됨으로써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자유에 대한 문제를 다른 차원의 문제로 전환시킬 수 있다. 사실에 대한 가치평가를 비틂으로써 상대방의 행위를 보호받는 자유의 영역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행위는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므로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 단순히 국가 안보와 자유 중 무엇이 우선시되는지가 문제라면 이는 원칙적인 얘기에 해당하므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러한 합의가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은 개인의 성향이나 감정에 따른 행위에 대한 판단에 좌우된다. 국가안보가 자유에 우선시된다고 서로가 인정하더라도 해당하는 행위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부당하게 국가안보를 근거로 자유를 제약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 영역을 설정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부분을 만드는 것은 그 논의의 차원을 확장시켜 실질적인 자유에 대한 원칙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므로 매우 신중해야 한다.
밀도 이와 같이 사실에 대한 가치평가에 따라 실질적으로 자유의 원칙이 회피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각각의 사람이 그러한 판단을 하지 않는 원칙을 수립하고자 했던 것 같다. 밀이 2장에서 토론 및 사상의 자유를 주장할 때, 단순히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경우를 언급하며 다수 의견이 진리가 아닌 상태에서 자유가 확보되지 않는 경우의 부작용만을 강조할 수도 있었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부작용에 대해서만 서술하더라도 그것이 자유를 인정함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넘어서지만 않는다는 형량을 통해 토론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밀은 다수의 의견이 진리가 아닌 경우, 다수 의견이 진리인 경우, 서로의 의견이 진리의 일부를 공유하는 경우로 경우를 나누어 각각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어떠한 문제를 갖는지를 설명한다. 모든 경우에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각각을 정당화시킬 논리를 도출하기 어렵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긴 더 힘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장하는 범위가 넓어짐으로써 더 많은 약점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이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데 집중했던 것은 경우에 따라 자유를 인정할 필요성이 달라진다면 자유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는 사람이더라도 개별 사안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견이 진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견을 다소 억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판단을 할 것이고, 그로 인해 실질적으로 표현 및 사상의 자유에 대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도 자유의 문제를 판단하기에 앞서 이전에 자신의 인식이 올바르기 때문에 상대방을 자유의 보호 영역에서 제외하고 결국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앞서서 살펴본 문제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밀이 표현의 방식의 문제를 다룬 다음과 같은 문단에서도 그러한 밀의 판단을 엿볼 수 있다.

[ 의견이 자유라는 주제를 떠나기에 앞서 의견을 표현하는 태도가 절제된 것이어야 하고 공정한 토론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조건아래 모든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이 허용돼야 한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만약 양쪽 모두에 대해 욕설, 비꼼, 인신공격 등의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면 공감을 얻을 만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론 지배적인 의견에 대해서만 그렇나 무기의 사용을 억제하도록 요구될 뿐이지 지배적이지 않은 의견에 대해서는 그러한 무기를 사용해도 일반적인 불승인을 당하지 않으며 그러한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오히려 정직한 열정과 정의로운 분노를 보였다는 칭송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배적인 의견에 대해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심사숙고해 언어를 절제하고 불필요한 도발을 매우 신중하게 삼가는 것을 통해서만 발언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반면에 지배적인 의견 쪽에서는 과도한 매도를 동원하여 반대의견을 피력하지 못하게 하고 혹은 피력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여론은 한 사람이 취하고 있는 입장 자체에서 악의나 편협함 또는 불관용적 태도와 같은 악덕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이유로 그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되며, 이는 그 사람이 우리와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반대자들이 자신들의 진술에 정직성을 갖추고 반대자들에게 과장하거나 은폐하지다면 그 사람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던 여론은 그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시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밀의 대응

밀은 자유에 대한 원칙을 제시했다. 일단 성립된 원칙은 다른 더 나은 원칙을 제시하거나 혹은 원칙이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을 보임으로써만 부정할 수 있다. 가끔가다 원칙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개별적인 경우에 원칙을 따르는 것보다 자신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근거로 그 원칙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원칙은 매 순간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기 때문에 원칙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원칙화 시켰을 경우에 총체적으로 가장 나은 결과들이 도출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으로 그 이익을 형량하여 그 원칙을 깬다면 그것은 이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나은 것이라고 합의했던 것보다 자신 스스로의 생각이 더 낫다고 자만하는 것이며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회의 일반 판단원칙에 대한 비판은 될 수 없다. 기존 원칙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기존 원칙과 다른 판단이 그 순간 더 나은 결과를 유도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매순간 각 개인이 자신의 판단으로 선택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원칙이 가져다주는 총 효용과 원칙이 갖는 총 부작용을 비교하여 그 부작용이 크다는 것을 근거로 원칙을 부정하거나 혹은 이 원칙이 갖는 총 효용과 다른 원칙 또는 무원칙이 갖는 총 효용을 비교하여 원칙을 폐기하거나 교체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위와 같은 노력 없이 자유의 원칙에 대한 예외를 설정하는 것은 사실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을 제약하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저 의견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정할 수 없다거나,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의견이라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자유를 대원칙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고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의견에 대해서는 자유의 보장이라는 문제는 애당초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의견이 억압될 경우에만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자유를 하나의 정당한 논거로 보는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자유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선 상대방의 의견이나 행동이 나와 맞지 않아 제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1. 한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
2. 자유와 다른 가치 중 무엇이 우선하는지에 대해 서로가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점
3. 위와 같은 고려를 충분히 한 뒤에 내 생각이 진리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더라도 그것을 근     거로 곧바로 상대방의 의견을 억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흔히들 자유에 대한 존중에 있어 1에 대한 고려는 빠지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의 행동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우선 인식한 뒤 그것이 보호받아야 하는 자유의 영역인지를 판단하여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통 자신은 2의 과정을 거쳤으므로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해준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의 과정에 의해 어떤 행동이 자유의 보호영역에 속하는지 여부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고려가 없다면 2의 과정은 추상적인 자유의 존중일 뿐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상대방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충분히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결국은 상대방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줄 수 없다는 입장과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입장 간의 대립이 발생하고 이러한 다른 차원의 대립은 논의를 통해 극복될 수 없는 문제에 해당한다.
밀은 1을 누락하는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를 분명히 인지했으나 이를 비판하거나 극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그가 제시한 원칙에 이러한 문제까지 반영하여 그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고자 하였다. 밀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고려했기에 다수가 소수를 핍박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원칙을 제시하여 뛰어난 사람들의 생각이 단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사회를 구상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다음의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소크라테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초기 기독교들은 사자에게 던져졌지만 소크라테스의 지성은 하늘 전체를 비추고 기독교 교회는 당당하게 성장했다. 오늘날 사회적 불관용은 그 자체로는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고 어떤 의견도 근절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을 위장하도록, 자기의 의견을 전파하기 위한 그 어떤 적극적인 노력도 삼가도록 유도한다. 이단의 경우는 따라서 완전히 입지를 잃지 않으며 결코 활활 타오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의 마음에 매우 만족스러운 상황이 계속된다. 왜 그들에게 만족스러우냐 하면 그러한 상황은 사상의 질병을 앓는 이단자가 이성을 행사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지하지는 않는 가운데, 그리고 누구에게든 금전벌이나 감금형을 내리는 불유쾌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모든 지배적인 의견을 겉으로 보기에 교란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는 지성의 세계에 평화가 깃들게 하고 그 세계의 모든 일이 진행해오던 그대로 계속 진행하게 하는 하나의 편리한 계책이 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지적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정신의 도덕적 용기 전체의 희생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은 단지 진부하고 평범한 것에 순응하는 자이거나 진리와 관련해 시류를 따르는 기회주의자일 것이다. 그는 모든 큰 주제에 대한 논증을 청중의 취향에 맞추는 사람이지 자기 스스로 신념을 갖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되기를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원칙의 영역을 범접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사소하고 실용적인 문제에만 자기의 사고와 관심을 좁게 한정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정신을 강화하고 확장시키는 것, 즉 가장 높은 차원의 주제들에 대한 자유롭고 대담한 사고는 포기된다.]

사회의 원칙을 제시할 때에는 그 구성원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실제 모습이 반영되어야하나, 각 개인은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다. 서로의 인식이 다를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논의의 차원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할 줄 아는 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식에 더해 나와 다르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을 갖출 필요가 있다. 내가 동의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인정하는 것에 자유 존중의 의의가 있는 것이지 내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의견을 제재하지 않고 단순히 묵인하는 것만으로 자유를 존중한다고 할 수 없다.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불쾌감을 갖지 않으려면 나와 다르다는 것 자체를 긍정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 밀은 다음과 같이 쓴다.

[위대한 고대의 웅변가였던 키케로는 자기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보다 훨씬 더 열심히는 아니더라도 그만큼은 열심히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늘 연구했다. 어떤 문제를 자기의 입장에서만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 그의 논거는 훌륭할 수 있고 아무도 그것을 반박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도 반대편의 논거를 반박할 수 없거나 반대편의 논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도 못한다면 어느 쪽의 의견이든 선호할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가 취해야 할 이성적인 태도는 판단유보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는 권위에 의해 좌우되거나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가장 쏠리는 편을 선택하게 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주장에 대한 반론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방의 주장을 가장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는 형태로 알아야 하고, 해당 주제에 대한 진리인 견해가 부닥치고 물리쳐야 하는 난관의 힘 전체를 느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난관에 부닥치고 그것을 제거해줄 진리의 부분은 결코 진정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갖게 되지 못할 것이다. 상대방이 주장하는 내용을 정말로 믿고, 진지하게 그 주장을 방어하고, 그 주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그 주장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명절 때 친족 간의 정치 얘기는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피곤한 일에 해당한다. 정치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일상적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은 결론에서만 대립을 낳는 것이 아니라 결론 개별적인 사실 하나 하나에서 불일치를 낳는다. 일상적인 얘기는 굳이 대립하지 않고 공감해줄 수 있으나 정치와 같은 주제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소신의 작용일 수도 있겠다. 외국의 경우엔 어떤지 살펴보기 위해 구글에 talking politics with를 치니 미국에서도 명절에 벌어지는 정치 얘기가 문제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내용의 검색 결과가 나오는 반면에 미국에서는 정치 얘기를 하는 경우에 어떻게 싸움을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룬 글들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빠르게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자유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고 어느 정도 자유를 확립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췄지만 각 개인의 자유를 존중할 수 있는 일상적인 문화는 아직 녹아들지 않았다. 일상적인 문화라 하면 토론하는 방법,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방법, 나와 다른 사람을 다루는 방법 등을 말한다. 여기에는 동양 특유의 종합적인 사고방식도 한 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각 요소의 성질을 분석해서 파악하기 보다는 요소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의 사고방식에 의해 내 의견과 다른 상대방의 ‘의견’ 자체가 아니라 내 의견을 ‘반박’하는 상대의 의견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유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내 주장이 반박당하는 경우 나와 다른 의견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쉽게 판단하지 않도록 구분해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자유론에서 밀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자유를 확립할 수 있는 원칙을 제시하고자 노력했고 그 원칙 중 상당한 부분이 받아들어져 우리 사회를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사회적 원칙은 이미 널리 받아들여져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이미 극복된 경우가 많다. 즉 오늘날 자유가 쟁점이 되는 새로운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유론은 직접적인 원칙으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국 모든 자유의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 혹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의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밀이 자유론에서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각각의 개인 그리고 군중에 대해 무엇을 경계하였는지를 이해한다면 그 이해는 현재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사회적인 이슈에 있어서 국민들이 반으로 갈라져 서로가 서로를 틀렸다고 규정하고, 그 반대의견으로 인하여 감정이 상하고, 그런 것을 우려하여 일상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편이라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그런 의논을 할 수 없다. 하물며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도 친여권 사이트와 친야권 사이트가 구분되며 그 구분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론은 여전히 생명력을 갖춘 훌륭한 책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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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ogeneity
14/02/13 00:51
수정 아이콘
공리주의는 그것이 발현했던 시대적 상황에선, 도덕 원리로서 그것이 갖는 '혁신성' 때문에 매력적이었다면, 오늘날엔 이제 공리주의 원칙만으론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그 어떤 주장도 옹호하기 어렵다는 점(그건 사실 정 반대로, 공리주의에 입각해 온갖 종류의 정치적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기 때문인데)에서 극히 소극적인 사조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밀의 자유론이 저술될 시기에 이미 상당히 그런 상태에 처해 있었고요.

자유주의 사조에선 관용을 옹호하는 논거로 자주 '인식의 한계', 그리고 '다양성이 주는 창조력'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재밌지만 자유주의 전통 내에서의 분열을 상징하는 케인즈와 하이에크는 모두 이 논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에 대해 온갖 비난을 다 할 수 있지만, 아마 이 두가지 점에 대한 꾸준한 환기야말로 자유주의를 불멸의 주류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말 가끔 자유주의적 관용으로부터 몹시 큰 불안을 느낍니다. 전에 딴 글 댓글에서 몇마디 뇌까렸는데, 여기선 생략합니다. 아무래도 관용 그 자체에 대해선, 자유주의자 밀이 이룩한 것 이상의 진전이 필요한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어디로?

아무튼 이 책은 자주 기억될 필요가 있는 책인 점에서, 환영받을 만한 글입니다. 사실 이 책의 주요 요지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부어넣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SuiteMan
14/02/13 11:29
수정 아이콘
저도 정말 동의하는게 말씀하신 "자유주의적 관용으로 부터 몹시 큰 불안을 느낀다"는 부분입니다. 피쟐에서도 가끔씩 느끼고요. 그리고 공리주의하면 많이들 떠오를 말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인데..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멍멍이 소리죠..
요정 칼괴기
14/02/13 01:15
수정 아이콘
이 책에서 밀의 어떤 말은 정말 현실에도 매력적이죠.

대략 [ 영국의 경제는 자유로운데 왜 사회는 자유롭지 못한가?]이런 내용이었는데
이건 경제는 자유주의는 신봉하면서 정작 정치나 사회는 자유롭지 못한 현실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말로 기억합니다.
14/02/13 05:31
수정 아이콘
오... 이런 긴 글은 보통 나눠서 읽는 편인데 오늘은 한 번에 다 봤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4/02/13 10:0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해볼 점이 많네요.
곧내려갈게요
14/02/14 23:03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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