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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1/19 20:10:47
Name 王天君
File #1 old_boy.jpg (68.5 KB), Download : 44
Subject [일반] 올드보이 리메이크 보고 왔습니다. (스포일러 없습니다)


마지막에 아주 약하디 약한 스포일러 있는데, 읽더라도 감상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스킵하실 분은 스킵하시길.

어떤 작품을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 작품을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영상이나 사운드 같은 요소들의 기술적 발전을 아무리 적용한다 할 지라도 알맹이가 똑같다면 결국 리메이크의 결과물은 껍질만 다른 복제물이 되고 말죠. 온갖 특수효과를 떡칠을 해놓고서도 원작의 깊이를 전혀 쫓아가지 못한 토탈리콜의 리메이크작은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박찬욱만의 개성이 전체적인 매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올드보이’의 경우 재해석의 시도 자체가 만만한 일이 아니죠.

가장 큰 포인트라면,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원작에 비해 동물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원작에 비해 스파이크 리의 올드보이는 육감적이고 파괴적입니다. 캐릭터부터 미쟝센 그리고 액션의 연출까지, 꿈틀꿈틀하는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스파이크 리의 이런 해석은 합격점을 줄 부분은 아닙니다. 그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원작이 지닌 의뭉스러움과 여유로움, 그리고 뜨거움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금속성의 차가움을 벼리는 듯한 섬뜩함을 포기하고 있거든요. 물론 이것이 선택의 문제인지 역량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작품이 전체적으로 평면적으로, 단순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농담 투의 대사들로 사람들을 웃기던 원작이 어떤 식으로 블랙 코메디까지 가지고 있는지를 본다면, 이번 작품은 아무 개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작품이 얄팍해진 가장 큰 이유는 이번 작품이 원작만큼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복수라는 체스판 위에서 움직이는 장기말처럼 캐릭터들이 활용되고 있을 뿐이죠. 원작은 오대수의 나레이션을 통해서, 미도의 개미 환각을 통해서, 이우진이 수술대 위에서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의 성격, 가치관, 고통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극중 각 인물들이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씬을 할애해 캐릭터를 묘사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 리메이크작은 마치 관객들이 모두 원작을 봤다고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물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행동에만 초점이 맞춰져있지,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여요. 그나마 조 두셋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초반 장면조차도 사실은 별 의미가 없는데 반해 그 비중이 너무 많죠. 중요한 건 감금 이후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고 무엇을 생각하는지인데 말입니다. 박찬욱이 앵글, 대사, 사운드트랙으로 이들의 감정을 대변하고자 애를 썼다면 스파이크 리는 정말 놀랄 정도로 무성의하게 캐릭터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가장 큰 핵심인 조 두셋만 봐도 약점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원작은 오대수의 절망과 분노 이외에도 현실적인 디테일을 결코 놓치지 않았어요.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동안 변해버린 바깥 세상에 대한 낯설음과 호기심으로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감격하는 오대수를 보여주면서 역으로 15년동안의 감금이 그에게 얼마나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상상케 하죠. 그러나 조 두셋은 어떤가요? 그는 복수에 바빠 죽을 지경입니다. 세상에 적응할 틈도 없이 놀라고, 분노하고, 시종일관 격정과 충동에 휩쌓여 있어요. 주인공의 묘사부터가 이렇게 시시한데, 다른 인물들이라고 뭐 딱히 나을 게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오대수의 절망과 곤혹이, 미도의 천진난만함이, 이우진의 한과 허무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열받아 어쩔 줄 모르는 아저씨와 머리 좀 좋은 사업가가 있을 뿐이죠.

무엇보다 제가 가장 짜증이 났던 부분은 샬토 코플리가 연기한 에드리안의 일차원적인 캐릭터입니다. 오대수와 완벽하게 상반되는 싸늘함과 냉철함, 그리고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오대수를 놀려대는 여유와 장난기까지 이 모든 매력을 갖춘 이우진은 도대체 어디로 실종된 겁니까? 이는 단순한 캐릭터의 상실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조롱과 비웃음이 오대수와는 상반된 형식의 복수를 뜻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자학적 심리를 내포한 것을 본다면 이 캐릭터는 복수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가 됩니다. 스파이크 리의 올드보이는 이렇게 캐릭터의 밑그림과 채색에 모두 실패하면서 작품의 수준 자체를 단순한 스릴러로 격하시켜 버리고 만 것이죠.

이렇게 인물들이 피상적으로 그려져 있으니 당연히 작품 내에 녹아있는 비극이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죠. 근친상간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원작은 오대수의 복수극이 사실은 이우진의 복수극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반전의 지적 쾌감과 동시에 심적인 고통 또한 확실히 전달합니다. 여기에는 물고 물리는 복수의 악순환과 사소한 죄가 인간을 파국으로 떠미는 카르마의 부조리, 그리고 금기를 어긴 인간의 원죄와 순수함에 대해 정말로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러나 이번 작품은 그것이 그저 파격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것은 스릴러 구조를 감독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롯의 최대 핵심인 ‘비밀’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부실하게 건축되어 있으니, 그것을 막상 철거시키며 밑바닥의 비밀을 드러내는 과정 역시 카타르시스가 전혀 없죠. 러닝타임이 20분가량 짧으니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기에는, 작품의 절정까지 다다르는 사건들 중 많은 것들이 축소되어있거나 생략되어 있습니다. 뭔가 척척척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어요. 반전을 위해서 원작이 얼마나 많은 복선과 암시를 깔아놨는지를 보세요. 미도와의 첫 만남부터 주변인물들과의 대화까지, 그것들은 결말에서 모두 회수가 되면서 하나의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그냥 깜짝쇼 정도로 그 어떤 사전공사도 없이 냅다 보여주고는 끝이에요. 반전의 진실을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의 강요하는 느낌이죠. 더군다나 그 방법은 누구나가 생각할 법한 ‘혹시 ….아냐?’ 의 그것이라서 창의성에서도 형편없기 짝이 없습니다. 게다가, 비밀이 드러난 이후 역시 원작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안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비로서 이우진의 고통을 체감하는 오대수의 오열은 반전의 충격을 얼마나 오래 끌고가며 그 여운을 짙게 남기던가요. 그에 비해 이번 작품은 거의 충격 자체도 없거니와 그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임팩트조차도 금새 휘발됩니다. 주인공들이 정말 잽싸고 안전하게 수습해버리니 관객들이 뭘 느낄 틈이 없어요. 그저 이제 끝이구나 하는 허망함뿐이죠.

그나마 미쟝센에서 조금이라도 차별점을 두려고 기를 쓴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도 후반에 가면 지극히 평범 그 자체로 전락하고 맙니다. 노랑 우산의 여인 말고는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어요. 제 머릿속에 남겨져 있던 올드보이 리메이크 버젼의 기억들은 벌써부터 증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찬욱은, 과연 이 작품을 보고 흐뭇할련지 씁쓸할련지.

무방한 스포일러

* 조 두셋이 감금시설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한 직원을 추격하는 씬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비밀 아지트에 식량을 배달하는 요원이, 자신의 차를 자전거로 맹추격하는 검은 양복의 사나이를 전혀 눈치도 못챘단 말인가요? 모른 척 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말이죠. 이런 녀석은 머리통에 장도리가 백번 꽂혀도 모자랍니다.

* 엘리자베스 올슨이 이렇게 이쁠 줄이야. 네이버 영화란에 있는 사진 보고 속으시면 안됩니다. 굉장히 잘 자라주었군요. 옛날에는 마냥 고릴라만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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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저그
14/01/19 20:17
수정 아이콘
확실하게 말아먹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국에서 흥행성적도 안 좋고, 한국에서도 일부 극장에서만 개봉에 상영시간도 완전 낮에 한 번 완전 심야에 한 번이더군요.
14/01/19 20:53
수정 아이콘
미국평도 보면
이거보고 원작이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얼마나 위대한 줄 알았다
보고나서 덕분에 원작올드보이를 다시감상하면서 너무 좋았다 댕큐 등등
악평의 일색이더군요;;
은수저
14/01/19 23:34
수정 아이콘
올드보이를 향한 애정과 분노가 동시에 잘 느껴지는 글이네요.
리메이크는 때려치고 시간내서 원작이나 한번 더 봐야겠네요.
글 잘읽었습니다. 리뷰 맛깔나네요.
주머니속이어폰
14/01/20 11:19
수정 아이콘
재해석이라는게 얼마나 위험한건지 알게된 영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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