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4/01/14 23:38:24
Name 선비
Subject [일반] 이명(耳鳴)
시끄러운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핸드폰을 주워 통화버튼을 눌렀다. 윙윙거리는 귀울림 덕택에 전화를 받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찌뿌둥한 눈으로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새벽에 헤어진 여자의 전화를 받는 일에 익숙해지는 데에 일 년이 걸렸다. 그것은 이제 차라리 정기적인 의식에 가까웠다.
"무서운 꿈을 꿨어."
전화기 너머로 다인이 말했다. 그렇겠지. 짜증 섞인 말로 대답하다가 다음 말에 전화기를 놓칠 뻔했다. "이쪽으로 와주면 안 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못 들은 것처럼 다시 질문했다. "뭐라고?"  "아니야......" "그쪽으로 갈게."
전화를 끊고 옷을 입으려고 전등을 켰다. "뭐야? 이 시간에 어딜 갈려고?" 아직 잠이 들지 않았는지 같이 사는 현이 물었다. "그래 어딜 갈려고. 현금 있냐?"
"네가 맥주 사 먹는다고 가져갔잖아." 현이 대답했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나왔다. 주머니를 뒤지니 오천 원이 나왔다. 야간 할증이 얼마더라. 우선 택시를 잡아타고 천호동 방향으로 오천 원 어치만 가달라고 부탁했다. 강변북로를 건너자 5200원이 나왔다. 기사는 200원을 깎아주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열 두시가 가까워지자 그녀가 말했다. 정작 나가야 할 사람은 나인데 그녀는 마치 자기가 나가봐야한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게 그 여자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일 년도 전 일이었고, 내가 다인의 원룸 현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손목시계는 거의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벨을 누르자 다인이 나왔다. 긴소매 티셔츠와 노란색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종교적인 태도로 신발을 벗고 바지를 털었다.
"꿈에 그 사람이 나왔어......" 다짜고짜 그녀가 말했다.
"뭐라고?"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정말 꿈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다고? 나는 지금쯤 택시 기사 주머니에 있을 오천 원을 생각했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명료한 것이었다. 불쌍한 오천 원. 그걸로 담배 두 갑은 살 수 있었을텐데.
"그런데 뭐 타고 왔어? 막 이렇게 전화하면 예의 없는 건가? 나는 그냥 너무 무서운데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뭐라도 마실래?"
그녀의 말은 의문부호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말을 끊으며 말했다. "누구 말이야?"
"전 남자친구......"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성소를 더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에 대해선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술을 마시거나 화가 나면 다인을 때때로 때린다고 했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누구랑 서로 교통하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그녀가 나한테 전화를 했다는 거다. 내가 동조해 그 녀석을 욕할 때마다 그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두둔하곤 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없는 분별을 그녀에게 기대할 순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헤어졌다. 뜨겁게, 맞아가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헤어질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잘 되었다고 한 마디 했다. 그때는 나도 사귀는 여자가 있었다.
"꿈에 그 사람이 나와서 잘못했다고 하는 거야......" 다인이 말했다. 나는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캔맥주가 있었다. 나는 잠깐 한숨을 쉬고 그걸 가져와 한 모금 마셨다. "마셔도 되지?" 내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마실래?" "어?" 나는 캔맥주를 그녀에게 건네고 냉장고에서 새 맥주를 꺼냈다.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생각했다. 예전에 다인은 교회를 다니는 여자였다. 그녀의 자취방에 술을 사 들어왔던 적에, 내가 술을 권할 때마다 그녀는 기독교 교리를 들며 거절했다. "내가 아는 기독교인들은 술만 잘 마시던데." 그러면 그녀는 대답했다. "걔네들이 교리를 잘못 해석하는 거야." 기독교에 대해선 잘 몰랐으므로 나는 묵묵히 들었다. "그런데 맥주는 술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웃었다. 지금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혼전순결도 교리에 있던가. 나는 엉뚱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떠올릴 순 없었다.

"나한테 잘못했다고 하면서 긴 막대기를 건네는 거야. 그걸로 자길 때리라고." 다인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꿈 이야기야?"
"꿈 이야기야."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나도 복받치는 감정으로 그 사람을 때렸어. 빨갛게 멍이 들도록." 나는 '멍은 검푸른 색인데'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런데 아무리 때려도 그 사람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때리고 계속 때렸어. 나는 울면서 때리는데 그 사람 얼굴을 보니까 웃고 있었어. 그게 너무 무서워서......"
개새끼네. 나는 무심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소변이 마려웠다. 다인을 쳐다보자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랑 잘도 사귀었네." 내가 말했다. 어디에선가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무서워. 내가 그 사람이랑 어떻게 사겼는지 모르겠어." 모르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 좀 쓸게." 나는 그녀를 힐끗 보고 말했다. 변기 뚜껑을 올리고 오줌을 눴다. 오줌 색이 빨갰다. 다 나은 줄 알았던 혈뇨가 다시 나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짜증이 몸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아마 하나님을 믿지 않은 탓이였다. 작게 욕을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다인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놀라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여자의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여자를 안고 싶었다.
"우는 거야?" 내가 물었다.
"미안해."
"왜 울어 갑자기?"
"내가 너무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건데?"
"그만 울어야지 이제." 마치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게 나라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만 울어야지." 나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던 날들이 있었다.

다인이 진정될 때까지 우리는 몇가지 이야기를 더 나눴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리고 그녀의 두려움에 대해서. 그것을 그녀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우리는 맥주 한 캔씩을 더 비웠다.
"근데 이제 가봐야 할 것 같네." 내가 먼저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다인이 꽤 따뜻한 손을 가졌다는 걸 떠올렸다.
"오늘 밤에는 같이 있어주면 안 돼?"
"응?" 나는 무심한 어투를 가장하며 되물었다.
"같이 있어 줘."
"내가 왜 그래 주길 바라는데?" 그녀의 귀가 빨갰다. 왼쪽 귀 옆으로 내려뜨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내가 물었다.
맥주 몇 모금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여자가 대답했다.

다인의 자취방이 있는 빌라를 나온 건 새벽 3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지 앞집에서 남녀의 다툼소리가 들렸다. '윙'하는, 귀를 괴롭히는 이명이 다시 찾아왔다. 그것은 평소와는 달리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제발 좀 조용히 해요!" 하고 내가 외쳤다. 남녀는 잠시 조용해졌다. 주황색 나트륨 등을 따라 걷다가 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을 자다 일어난 것은 아닌 눈치였다.
"술이 필요해." 내가 말했다.
"어디 간 거야?"
"다인이네 집."
"거길 왜 갔는데?"
"이야기하러."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근데 왜 벌써 끝난 거야?"
"듣기 싫은 말을 들었거든."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
"진심."

현이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담배를 하나 빼서 입에 물었다. 외투 주머니를 뒤졌지만, 성냥이 없었다. 바지 주머니를 찾아봐도 소용없었다. 남녀의 고성 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꺼내 그 여자의 번호를 수신 차단으로 바꿨다. 이명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나는 심한 추위를 느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히히멘붕이삼
14/01/14 23:47
수정 아이콘
읽으면 안되는 누군가의 일기를 몰래 훔쳐본 느낌이에요.
14/01/15 00:10
수정 아이콘
뻘플이지만 일기 좀 꾸준히 쓰고 싶네요...
14/01/15 09:58
수정 아이콘
글에 힘이 있네요 몰입했어요.
14/01/15 11:41
수정 아이콘
아 고맙습니다.
YoungDuck
14/01/15 10:15
수정 아이콘
진심이 추측이 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는 어렵네요.
추측이 맞다면 많이 사랑하셨나 봅니다. 힘내세요.
14/01/15 11:57
수정 아이콘
아 온몸에 피가 안 나는 데가 없네요. 근데 소설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로그인하게만들다니
14/01/15 11:29
수정 아이콘
추천하고 갑니다
싸이유니
14/01/15 12:17
수정 아이콘
생각이 많아지는 글이군요. 추천하고 갑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9418 [일반] 모태솔로 탈출하는 연애마케팅의 법칙 [49] YoungDuck9918 14/01/21 9918 14
49291 [일반] 이명(耳鳴) [8] 선비3731 14/01/14 3731 5
49175 [일반] 찌질남녀가 찌질하게 이별한 진짜 이유 [22] 해피아이8074 14/01/09 8074 7
49171 [일반] 작곡가 황상훈 씨, 양성애자 커밍아웃 [40] jjohny=쿠마10116 14/01/08 10116 0
49051 [일반] 나의 살던 고향은 [24] SaiNT3159 14/01/02 3159 0
48971 [일반] 강희제 아저씨에 대한 서양 예수회 선교사들의 반응 [14] 신불해7791 13/12/29 7791 6
48833 [일반] 미사 다녀왔습니다. [17] 4001 13/12/24 4001 0
48697 [일반] [영어 동영상] 몇몇 광고와 노래들로 보는 천조국의 종교 [43] OrBef5861 13/12/20 5861 4
48660 [일반] 개신교인입니다. 아주 안녕하지 못합니다. - 총신대학교 차기총장을 보며... [63] jjohny=쿠마5990 13/12/19 5990 13
48497 [일반] 증오의 정치에서 위로의 정치로 변화해야 합니다. [51] Alan_Baxter4289 13/12/14 4289 10
48416 [일반] 12.12 사태와 장포스(장태완 장군) 그리고 고딩딩과 나의 일상 [19] AraTa_Higgs4631 13/12/12 4631 1
47984 [일반] 정치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 -by 교황 프란치스코 [44] 곰주5719 13/11/26 5719 5
47975 [일반] 다윗의 막장의 최근작 2곡을 공개합니다. (복음밥, 봉고 안에서) [29] jjohny=쿠마5129 13/11/25 5129 7
47915 [일반] [리뷰] 사이비(2013) - 실사영화를 압도하는 애니메이션의 힘 (스포있음) [10] Eternity9623 13/11/23 9623 5
47607 [일반] 대학 강의로 생각해보는 '가난한 사람들은 왜 자 정당을 찍나' [83] Alan_Baxter8412 13/11/10 8412 17
47501 [일반] 클래식 음악가가 듣는 대중가요... [15] 표절작곡가4636 13/11/05 4636 6
47454 [일반] "지금 왕위 가지고 디펜스 게임 하자고? 좋아, 다 드루와! 다 드루와!" [7] 신불해10921 13/11/03 10921 1
47388 [일반] 기독교인 입장에서 기독교 비판 [116] porory8599 13/10/30 8599 14
47368 [일반] 교회의 의사결정 및 예산 지출 그리고 부패 [76] 탱딜아7664 13/10/29 7664 8
47348 [일반] UN Women의 새 캠페인 광고, 여초사이트 PGR에 드리고 싶은 이야기 [43] Naomi6812 13/10/28 6812 12
47328 [일반] 오늘 밤, 개신교인으로서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85] jjohny=쿠마8409 13/10/27 8409 18
47252 [일반] 곰주님의 글을 읽고 떠올린 글 (대선 후기로 썼던 글) [12] 쌈등마잉4214 13/10/23 4214 5
46955 [일반]  아일라우 전투. 눈보라와 살육, 시체와 광기 속의 서사시 [8] 신불해8671 13/10/09 8671 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