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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1/11 10:12:23
Name vivims
Subject [일반] 스무살의 나에게 보내는 답장
1. 십대의 끝자락에서 나의 미래에게 쓰는 편지 - 응답하라 1997과 함께
https://pgr21.com/pb/pb.php?id=recommend&no=1966&divpage=1&sn=on&keyword=vivims

2. 이십대의 중간 즈음에서 내가 보내는 답장



  얼마 전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내가 빨래하는 걸 꽤나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빨래를 하는 것보다는, 멍하니 세탁기를 바라보는 게 좋습니다. 고향집에서는 아직도 구형 세탁기를 쓰지만, 제 자취방에는 옵션으로 드럼 세탁기가 놓여 있거든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늘어갑니다. 철벅철벅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도 경쾌하고,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옛날에 썼다는 빨래 방망이로 두들기는 것처럼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우습게도 세탁이 끝난 빨래를 널지도 않고 며칠 묵혀뒀다가 다시 빨게 되는 낭패를 보곤 합니다. 옷에 밴 땟국을 빼는 것은 참 만족스럽고 눈이 즐거운데, 깨끗해진 옷가지 하나하나를 널어 말리고 개어서 정리하는 시간은 아직도 귀찮은 것 같습니다.

  몇 주 전 어느 날에도 빨래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음악을 틀어놓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통을 쳐다보다가 잠시 인터넷으로 눈을 돌렸지요. 포털사이트 메인의 어느 한 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페르세우스 유성우>이었습니다. 그 날 밤에 별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뜻이었지요. 나는 아주 잠깐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 과거의 나인 당신이 계곡에서 친구들과 함께 유성우를 바라봤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정말 아주 잠깐, 유성이 찰나에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때의 기억은 분명하게 그러나 강렬하지는 않게 지나가버렸고 나는 곧 관심을 돌려버렸습니다.

  내가 세탁기 거품을 바라보던 그 시간 창문 밖에는 아마 그때와 같은 별들이 쏟아졌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그날까지 꼬옥 쥐고 있던 별들은 작별의 손을 흔들면서 어디론가 흩어졌겠지요. 다만 시간이 흐르고, 눈 밑이나 손톱 밑이나 이마에 하나쯤 남아서 먼 훗날에나 찾아낼 것입니다.> 당신은 눈 밑이나 손톱 밑, 이마에 하나쯤 남은 별들이 세월에 씻겨 내려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여 남아있다 하더라도 내 어깨춤에 벌레나 먼지가 앉은 것처럼 툭툭 털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비를 피하듯 별을 피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입던 옷을 벗어던졌고 세탁기는 묵은 것을 벗겨냈고 나는 그 날 밤, 집밖으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는 어느덧 이십대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의 한 가운데에 서있습니다. 뒤를 돌면 보이는 지나온 시간의 거리만큼, 딱 그만큼 걷다보면 나는 이십대의 끝자락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스물다섯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 합니다. 당신에게 처음 편지를 썼던 그 즈음에 내가 무언가 이루었을 것처럼 상상했던 바로 그 시기입니다.

  나름의 성공도 해봤고, 실패도 해봤고, 사랑도 해봤고, 이별하기도 했고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보기도, 한없이 게으르게 지내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군대를 다녀왔고 뭔가 새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전역 후의 시간은 이등병 때만큼이나 빠르게, 그러나 별다른 것도 없이 흘러갔습니다. 내가 변하기 이전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고 나는 언제나 한 발 늦게 시간과 걸음을 맞췄습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던 관계는 단순해지고 나 스스로 건조해지자 느닷없이 툭, 하고 끊어지는 인연의 끈도 있었습니다. 사람에게서 뭘 얻고자 했던 적이 없기에, 사람조차 얻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보다 잃는 사람이 많아질 무렵에도 시간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갔고 나는 흘러간 것들을 돌아보며 뒷걸음질 치듯이 시간을 따라가 보려 했습니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콰당, 하고 넘어진 뒤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은 이미 저만치 가버렸고 나는 흘러간 사람, 흘러간 사건, 흘러간 관계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나는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종 볼 수 있는 한심한 청춘이기도 합니다.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몰라서 그냥 쉽게 휩쓸렸습니다. 그래도, 비록 눅눅하게 젖더라도 물살에 밀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까지 떠내려가진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단단하지는 않지만, 날 지탱해주던 사람들은 단단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때를 떠올려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 누군가도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서로 상처를 부여잡고 누가 더 아픈가를 따지고, 화를 내고, 욕 하다가 그렇게 아물어 버렸습니다. 어느 한 쪽이 상대의 상처를 보듬어줄 틈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 괜찮아져버렸습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흐릿한데 그때의 기억만 뚜렷합니다. 새카만 어둠에 눈이 적응되자 윤곽이 보이는 건 그 사람, 그 사건들이고 나는 매일 밤 울렁이는 속을 붙잡고 2년 전의 이야기들이 담긴 상자를 열었습니다. 자꾸 확인하고 되새김질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피로 얼룩져서 입지도 못하는 옷을 아직도 걸어두고 있습니다. 휴대전화 비밀번호는 아직도 그 날을 의미합니다. 버리고, 바꾸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건, 아직 죄책감과 분노라는 상반된 감정이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괜찮아져야한다는 강박은 정말 괜찮아 보이게 할 겁니다. 그들 역시 그렇듯.

  너무 우울한 이야기만 한 것 같아요. 당신이 없이 못 살았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해줄게요.

  음악을 좋아했고, 그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했던 정은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어요. 사실 이미 몇 번의 시도를 했어요. 마지막까지 실패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심리학을 공부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나는 매번 짓궂은 농담을 하지만 진심으로 정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 녀석은 가장 멋진 의사가 될 수 있어요.

  한은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좋은 쪽으로요. 아주 적극적이고, 하루하루 보람을 찾아가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표가 있는 삶이 부럽다는 걸 나는 녀석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어요. 정말 오랜만에 술 한 잔 하면서 그 녀석과 이야기를 했는데, 생각하는 것에도 실천하는 것에도 주관이 뚜렷해졌습니다. 정말 멋진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서 질투가 생길 정도로 부러웠습니다.

  7년 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누워서 별똥별을 바라본 친구들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연락은 뜸해졌지만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아 좋아요. 항상 붙어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그래도 나이를 먹는다고 벌써 아저씨 같아진 녀석도 있습니다. 그래도 일 년에 두어 번 보는 얼굴들이 어쩜 그렇게 반짝반짝 해보일까요. 투명하게 덧댄 것처럼, 가장 어리지만 가장 밝았던 때의 모습이 보여서일까요. 아니면 당신 말대로 별똥별이 눈 밑이나 손톱 밑이나 이마에 하나쯤 남아 있어서일까요.

  빙글빙글 세탁기가 돌아갑니다. 오늘은 꼭 빨래를 널어두려고 했는데, 바깥을 보니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해요. 그래도 오후에는 해가 쨍하겠지, 란 기대를 해봅니다. 오해할까봐 말해둘게요. 모두가 잘 살고 있는데 나만 괴롭다고 투정 부리는 건 아니에요. 그냥 빨래 이야기를 하다 여기까지 흘러왔어요.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올 12월에는, 우리가 아스팔트에 누워 바라봤던 별을 다시 찾아볼 생각입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지만 예전에 누군가 그랬습니다, 몇 달 후에 찾아올 봄비가 저 우주에서부터 떨어지는 것이 12월의 별똥별이라고요. 친구와 함께 기울이는 소주잔에 별 하나 톡, 떨어지면 나는 아주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잔잔한 파동이 손끝에서 일 때면 새삼 설레는 마음에 크게 한 번 웃고, 조금 부끄러워하고, 조금 후회하고, 조금 미워하고 꿀꺽, 한 잔 넘긴 뒤 씁쓸한 뒷맛에 아주 잠깐 찡그리고…… 그리고 다시 웃겠습니다.






===






위 링크는 내용 그대로 열아홉살의 겨울에,
본문은 작년 가을에 쓴 글입니다.
5년 주기로 짤막하게나마 글로 남겨보자-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사실 이제 겨우 두번째입니다. 이십대 중반이니까요.

사실 피쟐에는 제가 쓴 글을 잘 안 올립니다.
왜냐하면 여타 사이트와는 다르게 여긴 정말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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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11 12:54
수정 아이콘
좋은 글에 리플이 없어 아쉽네요. 감성이 넘치는 글을 봐서 좋네요. 일터가 아니라 늦저녁에 집에서 여유있게 봤으면 더 이입해서 읽을 수 있었을텐데..

세탁기가 돌아간다에서 예전 대학생활이 떠오르는군요. 난방을 틀어도 쌀쌀한 한겨울 자취방 안에서 보내는 휴일이란 사람을 사색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듯 합니다. 좋은 글 읽었습니다.
14/01/11 13:41
수정 아이콘
리플 감사합니다!
바로 위에 너무 강력한 글이 있어서 당황스럽네요 크크크
14/01/11 18:2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한여름
14/01/13 15:55
수정 아이콘
단편소설 읽는 기분으로 설레면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제 경험과 엮어서 심상이 막 머릿속에 떠오르네요. 더 자주 글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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