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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30 01:42:22
Name nickyo
Subject [일반] 가장 외로웠던 장례식.
올해의 마지막 휴일 밤을 어떻게 마무리 할까 하다가, 막 밖에서 들어온 동생이 날씨가 풀렸다고 전해주는 참에 거리로 나섰다. 거리래봐야 주황색 가로등이 듬성듬성 켜진 인적없는 기다란 산책로 정도지만, 오랜만에 느긋하게 걸어보고자 했다. 서울은 오후에 눈이 조금 내렸었는지 바닥이 사박사박 거렸다. 근 몇 년간 제설이라면 이를 갈았던 터라, 눈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말에 깊게 공감하면서도 이 뽀드득 거리는 느낌이야말로 겨울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집에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바뀌지 않고 몇 년째 나이를 먹어가며 같은 곡만 쏟아내는 구형 mp3를 귀에 꽂은 채, 도로를 달리는 차조차 거의 없어 땅울림 없는 고요한 거리를 걸었다. 한 개의 가로등을 지나, 어둠을 맞이하고 또 한 개의 가로등을 지나, 그림자 사이로 스며든다. 깜빡, 깜빡 하는 낡은 가로등을 지나 얼마를 걸었을까, 조명이 휘황찬란한 고층 아파트를 본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문득, 걸어온 길 뒤를 바라보고 알아차린다. 이 고층 아파트 단지 앞에 놓인 길은 6~7미터쯤 되는 짤막한 2차선 도로로 보여도 사실은 6~7억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그런 길고 두꺼운 벽 너머의 세상임을.


참 얄궂은 일이다. 지구의, 대한민국의, 서울의, 서초구의. 말하자면 난 이런 '두꺼운 벽'중에도 몇 겹의 희귀한 확률을 극복하여 이 안에 남겨졌다. 그럼에도 또 다시 이 짧은 도로의 앞에 세워진 담벼락과, 번쩍이는 조명과, 헬기를 착륙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높은 아파트 꼭대기의 멋진 옥상. 누구도 감히 허락없이는 들어가서는 안될 것 처럼 느껴지는 입구의 기다란 차단봉과, 단지의 나무들 사이에 걸린 반짝이는 트리 조명들. 소문에는 이 아파트가 한 40억쯤 한다고 했다. 평생 무슨 일을 해서 40억쯤 집을 사는데 쓰고, 관리비를 한 3백만원씩 내도 괜찮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피식, 웃음이 튀어나온다.


커다란 외제차가 내 앞을 지나 아파트로 들어선다. 육중한 차단기는 행여나 외제차 가시는 길에 방해가 될 새라 가볍게 휙 하고 올라간다. 밤거리의 고요를 깨는 중후한 엔진음과 함께 거대한 아파트 단지 사이로 외제차가 사라져갔다. 그 뒷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떠나보낸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그와, 아니 그녀와 아는 사이였을까? 그녀의 장례식에 갔으니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와 내가 어떠한 인간적 인연을 맺었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관계를 정의하기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 일들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녀와 나의 어떤 관계에 대한 지리한 이야기를 늘어뜨리고 싶지는 않다. 남녀로서의 어떤 감정이라든가, 설렐수도 있었던 많은 상황들이나. 혹은 공유하며 느꼈던 몇몇 시간들 같은 일들은 꺼내어 볼 만큼 새롭지도 신비롭지도 않다. 다만, 그녀는 내 기준에서는 참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이별법마저 내게는 생소하고,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시간이 점점 흐르고,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은 이메일의 휴면계정 경고때문에 열어본 받은 편지함에서 가버린 그 사람의 먼지 쌓인 이야기들을 읽고 나서는, 아. 아아. 하고. 귿쎄, 그 마음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목을 매달기 위해 줄을 구하고, 풀리지 않을 매듭을 묶고, 체중을 충분히 지탱할 튼튼한 고리를 찾으며 보냈을 그 시간들이 참 아팠을 거라고. 그래서 울었던 것 같다.


그녀의 장례식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한 눈에 봐도 번쩍이는 구두들과, 온갖 외제차들이 가득한 주차장. 고급 대형 병원에서 배려해 준 넓은 장례식장과.. 그녀의 영정사진. 나는 그녀가 왜 죽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흔히 자살은 장례식을 간소화 한다고 하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성대하다. 는 말이 적합하리라. 성대한 장례식에 온 사람들 사이로, 얇디 얇은 부조금을 내며 도망치듯 나왔다. 그만큼 나는 그 장례식장에서 이질적인 외부인이기도 했다. 잠깐 있는 동안에도 장례식장 안에서는 돈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았다. 나는 살면서 죽은 이에 대해 그렇게 고급스럽고, 무성의하게 보낼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내 생각에 그녀는 죽어서마저 고독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오늘 뉴스에서, 차에 치여 죽은 개의 시체 옆에서 영하 13도의 온도에도 친구의 주검 옆을 떠나지 않은 한 개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래, 차라리 개 쪽이 인간답다는 기분이다.


그녀는 수십억 짜리 아파트에 혼자 사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어떠한 접점도 없을 그런 계층의 사람. 우연히 알게 된 것은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일종의 스터디 모임에서였다. 워낙 평범하게 모임에 나왔던 사람인지라,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거짓말 같이 느껴지기만했다. 부자라는 계급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의 글은 대체로 슬프거나, 외롭거나. 부족한. 결핍에 매달리면서도 그 결핍을 차마 드러내려 하지 않는 절제된 모양새를 많이 보였기 때문에 더욱 더 그랬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그녀가 그런, 부자중에서도 부자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조금 생경해보이기는 했다. 글에서 주는 이미지와는 참 달랐기에, 조금 가식적이어 보이기까지 했던 것 같다.


언젠가 한번, 우리는 각자의 수필을 들고 모였던 적이 있다. 그 날의 주최자는 그녀였는데, 어째 모임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그 때도 겨울이었고, 날씨가 추웠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삶을 조금 엿보았다. 커다란 재산을 물려받고, 가족 하나 없이 살아온 그녀의 인생은 일종의 비극을 아주 담담하게 풀어낸 듯 한 짧은 수필이 되어있었다. 문장 사이사이로 마치 슬퍼해서는 안되는 것 처럼 감정이 절제되어, 아니 그것은 절제가 아니라 일종의 감정적 거세처럼 느껴졌다. 슬퍼하는 것 마저 죄책감처럼 꾸며진 그 글을 읽으며 비로소 그녀의 글에서 느껴왔던 이질감들의 정체가 보였다. 이제까지 모임에서 그녀의 글을 읽으며 느껴온, 절제되고 막혀버린.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말하기를 포기한 듯 한 그런 감금된 슬픔과 외로움의 파편을 엿본 듯 했다. 제일 슬픈 대목은, 얼굴이 못생겼던(그 때는 상당히 예쁜 편이었다. 우수에 차있는 미인이라고 떠올리면 딱 맞을 만큼.)때에, 자신의 재산을 보고 텅 빈 소리를 뱉어내던 수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 성형을 했다. 예뻐지면 나를 봐 주지 않을까 하고, 성형수술을 누군가의 보살핌도 없이 홀로 그 고통을 버티며 텅 빈 입원실의 긴 밤을 아픔에 울었다. 하지만 예뻐져도, 성격을 바꿔보아도, 직업을 가져보아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는 내용을, 아주 담담하고 건조하게 써 내려간 곳이었다. 부모의 죽음으로 쏟아진 그 재산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수없이 모여들던 불나방떼. 무슨 짓을 해도 얻을 수 없었던 영혼의 교감. 아아, 지금 떠올리면 그녀의 모든 말과 몸짓은 어떤 필터에 걸러져 이해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영원히 외로워했던 것 같다. 내가 조금 더 순수했더라면, 나는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이라도 나눠볼 수 있었을 텐데 속물같았던 나는 그 불나방떼와는 조금 다르게, 그러나 혹은 똑같이 그녀의 외로움을 방관한 셈이다.



어쩌면 그녀는 내게 어떤 영혼에 가까운, 고독을 나누고 맡길 그런 사람이기를 기대했었나 보다. 사실 우리의 글은 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슬픔, 비애, 고독과 같은 것들을 누군가 시키기라도 한 듯이 절제했었던 서로의 글에 어쩌면 그녀는 드디어 자신과 오롯이 공감할 사람을 찾았다고 믿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녀의 글이 싫었다. 정확히는, 나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계층의 사람이 나와 같은 슬픔을 갖고있는 것 처럼 써 내려가는게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그녀의 글은 싫지만, 우수했다. 배울 점이 있었고, 감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는 다르게 나는 계속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시간을 팔아야 했던 노동자였다. 바쁨은 나의 것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점점 만남도 연락도 없이 가끔 서로의 이메일에 글을 쓰곤 했다. 마치 감정의 쓰레기통처럼 서로의 이메일 함을 이용했다. 이윽고 그런 이메일 조차 내가 확인하지 않고 지낸지 몇 달 후, 나는 생경한 번호로 날아온 그녀의 부고를 들었다.




유서처럼 남겨진 이메일들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하려 애썼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녀를 죽음까지 몰아넣은 그 고독의 정체를 잘 이해할 수 없다. 여전히 그런 부자들이 부럽고, 돈이 많으면 근심걱정도 없을것만 같다. 그렇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다 다르듯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신은 그녀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려 살아가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지만, 그 슬픈 겨울의 장례식과, 수많은 조문객 사이에서 가장 외로워 보였던 그 흑백의 영정사진은 마음 한켠에 찌르르 남아있다. 언젠가 그녀의 고독을 다 이해하게 된다면 얼마나 더 슬퍼하게 될까. 한 살씩 그녀가 떠난 나이에 가까워 질 때마다, 나는 그 죽음을 떠올린다. 가장 외롭게 떠나간,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던 고독의 형벌에 아파했던 그 사람을. 그녀가 남긴 말들로 채워진 그 슬픔을. 삶의 여행길 내내 고독을 밟고 외로운 마지막을 초대했던, 너무 착했을 뿐인 그 아름다운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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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30 02:49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읽는 nickyo님 글이네요.
반가운 마음에 '읽을거리다!' 하며 달려들었는데 마음 한구석에 얼음이 하나 굴러다니는 느낌이네요.
그곳에선 좋은 친구들을 만나셨길 바라며
13/12/31 07:50
수정 아이콘
저도 정말 오랜만인데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니 마냥 신기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vlncentz
13/12/30 03:34
수정 아이콘
13/12/31 07:50
수정 아이콘
덕분에 만화 재밌게 봤습니다.
doberman
13/12/30 13:12
수정 아이콘
연말 쓸쓸함이 물씬 느껴지네요.
뽀로로
13/12/30 19:5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유니꽃
13/12/31 00:25
수정 아이콘
닉쿄님 정말오랜만입니다. 닉을바꾸어 모르실테지만 전부터담담하게 써내려간 글들을 고이보던 애독자(?)입니다^^
한동안 글이 없어 질게에 소식을 여쭈어볼까도 했는데 간간히 질게에 쓰시는 글로 안부를 대신하였네요.
오늘 글은 추운 날씨마냥 가슴한쪽이 시려옵니다.
앞으로 글 자주남겨주세요^^ 기다리고있습니다..
애독자(?)로 부터...
13/12/31 07:45
수정 아이콘
글을 거의 안 쓴지 참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이 닉네임을 기억해주신분이 있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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