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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17 17:43:20
Name 민머리요정
Subject [일반] [야구] 그저 아쉬운 이름 세글자, 조성민
안녕하세요. 민머리요정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야구 이야기로 찾아뵙는 것 같네요.
오늘도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소재로 찾아뵙습니다.

한국 야구사에 있어서 뛰어난 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학번이 몇몇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번들이 92학번과 01학번.
01학번은 현재, 정근우, 이대호, 김태균, 추신수 로 대표되는 학번이 있고,
이보다 더 월등히 뛰어난 92학번이 있습니다.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박재홍, 차명주, 염종석, 정민철, 설종진 등 엄청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그저, 안타까운 천재, 조성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91년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우승, 대통령배 준우승, 청룡기, 화랑대기 4강.
91년 고교야구선수권 대회에서의 신일고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전국을 평정했습니다.
당시 신일고의 멤버로는, 3학년 - 조성민, 설종진, 2학년 백재호, 강혁, 1학년 김재현, 조인성 등
워낙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선수는 조성민과 설종진.
설까치로 불렸던 설종진은, 당시 정확성, 파워, 수비, 송구, 주루가 모두 뛰어난 5툴 플레이어로 평가되었고,
실제로 OB에서는 설종진을 잡기 위해서, 당시 계약금으로 5천만원을 제시하기도 했었죠.

이보다 더 대단했던 선수가 바로 조성민이었습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 140 중 후반대의 직구를 뿌리며, 여러개의 변화구를 뿌리던 투수.
당시 조성민과 비교할 수 있던 투수는, 단 한명뿐이었습니다. 휘문고의 임선동.



사실 고등학교 입학까지만 해도 초고교급 선수로 불리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전무후무한 30승 투수 너구리 장명부가 신일고 인스트럭터로 오게 되어,
설종진과 조성민을 지도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조성민은 야구에 눈을 뜨며, 빠른 성장세로 단숨에 초고교급 선수로 성장합니다.
코치 장명부는 조성민의 체격에 감탄하며, 릴리스포인트를 높이라고 지적했고,
이와 더불어 볼끝이 좋은 투수가 좋은 투수라며, 변화구를 알려주게 되는데,
이 구종이 바로 투심 패스트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장한 조성민을 앞세운 신일고는,
역대급 시즌을 보냈고, 5개 대회 17승 3패라는 기록을 세웁니다.
조성민이 없었다면, 이런 기록은 나올 수 없는 기록이었겠죠.



이후, 조성민은, 임선동, 손경수와 함께 고교 빅3라고 불리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전국에는 뛰어난 투수가 참 많았습니다.
경남상고 차명주, 광주일고 박재홍, 공주고 손혁, 박찬호, 부산고 염종석, 대전고 정민철.....

이런 대단한 투수들 중에서도 조성민의 라이벌은 임선동 단 하나였습니다.

이후, 이렇게 뛰어난 여러명의 92학번 동기들은
91년 미국에서 열린 한미일 고교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합니다.
당시 고교 대표팀의 주력투수는 단연, 조성민과 임선동.
하지만, 이들보다 미국에서 더 주목받은 선수가 하나 있으니, 그 선수가 바로 박찬호 선수입니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미 박찬호 선수는 출발했을 때부터 행운이 따랐다고 합니다.
신일고나 다른 학교들은 동문들이 미국에 좀 있어서, 숙소를 금방 구할 수 있었는데,
공주고는 동문 선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현지 교포 집에 머물러야 했었는데,
당시 박찬호가 머물렀던 곳은, 훗날 박찬호의 LA 다저스행을 주선했던 스티브김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마운드에서도 운이 따랐으니,
당시 넘버원으로 평가받던 임선동은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투구 내용도 좋지 못했고,
이에 따라 박찬호의 등판 기회가 많아졌고, 이에 혼신을 다해 던진 공들이 초 강속구.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박찬호의 빠른공에 연신 스피드건으로 체크하며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런 작은 관심의 차이가, 훗날 박찬호와 조성민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됩니다.



이후 신인 드래프트가 진행되었고,
OB와 LG가 임선동과 조성민을 놓고 스카우트전을 펼칠 것이라고 모두가 내다봤습니다.
실제로 LG가 임선동을 지명하면서 순리대로 가나 싶었는데, OB는 조성민이 아닌 손경수를 선택.
조성민은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드래프트는 모두에게 좋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_-).....
* 임선동은 LG에 입단을 거부하고 연세대에 진학했지만, LG와의 긴 법정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 손경수는 두산에 입단을 거부하고 홍익대에 진학했지만, 태도 문제로 문제 선수로 찍히게 되었고,
이어 발생한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홍대에 자퇴서를 제출도 해보고, 극적으로 OB에 입단을 했으나,
간염을 얻어, 이후 단 1번도 1군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임의탈퇴 선수가 되어 방출당합니다.

조성민은 지명이 되더라도, 고려대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드래프트가 끝이 나고,
93년 미국에서 열린 유니버시아 대회에서 박찬호와 조성민은 좋은 투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달 후에, 애틀란타의 스카우터 클라크가 박찬호와 조성민을 만나려 방한합니다.

당시 한국 야구인들은 임선동과 조성민을 추천했다고 하는데,
클라크는 박찬호의 공을 보고서, 미국 본토를 제외한 중남미, 일본, 타이완 출신 선수들과 비교해,
가장 인상깊게 봤다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군대 2년도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함)
반면 클라크는 조성민에게는 박찬호에 비해서, 메이저리거가 되기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클라크는 두 선수 모두 영입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다저스와 토론토가 두 선수에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갔기 때문이죠.

다저스는 박찬호를 점찍고, 이에 박찬호는 한양대를 중퇴하며 미국에 진출했습니다.
반면, 토론토는 조성민을 점찍고, 적극적인 구애를 했지만,
결국 조성민은 고려대를 졸업했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인터뷰로 조성민 선수가 언급을 했는데,
아버지와 고려대 감독이 워낙 절친한 사이였고,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학교와의 의를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이 들어서,
애초에 학교를 중퇴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혹시 모를 실패에 대비해서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조언까지...

만약이지만, 이 선택을 뒤집어
조성민도 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이후 조성민은 요미우리 행을 선택하게 됩니다.
요미우리는 조성민의 실력 뿐 아니라, 출중한 외모까지 높게 평가하며,
팀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죠.

1995년 조성민은 계약기간 8년, 계약금 1억5천만 엔(당시 한화 약 13억 원)을 받고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요미우리는 이례적으로 조성민을 영입하고서, 미래의 요미우리 100승 투수를 영입했다며,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돌리기까지 합니다.

입단 첫해에는 매우 부진했습니다. 대학시절에 팔꿈치 부상으로 구속도 빠르지 않았고,
그 결과 시범경기에 난타. 한국에서는 초고교급 선수, 초대형투수로 불렸지만,
일본에서는 그보다 뛰어난 투수들도 많고,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조성민은 투구폼도 교정했고, 변화구도 개발했고, 일본어를 배우려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자신을 변화시켜가며, 끝없이 노력합니다.



97 시즌에도 2군에서 시작을 하게 되었고,
입단 첫 해와 달리 빠르게 성장한 조성민은 2군 무대에서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요미우리는 조성민의 1군 승격을 결정하고, 마무리 투수로 주로 등판하게 됩니다.

97년 후반기, 22경기 1승 2패 11세이브 방어율 2.89
일본 무대에서의 첫 세이브를 자신이 존경하던,
당시 주니치의 마무리 투수 선동열 (現 기아 타이거즈 감독) 앞에서 기록하게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며 세이브 행진을 이어가게 됩니다.

당시 조성민을 평가하길,
요코하마의 사사키 가즈히로, 주니치의 선동열, 요미우리의 조성민.
3명을 센트럴리그의 마무리 빅 3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성공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일본무대 데뷔.
이듬해였던 98년 조성민은 보직을 마무리에서 선발로 변경하게 됩니다.
코칭 스태프의 평가로, 선발로 써도 전혀 무리가 없겠다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죠.

조성민은 코칭 스태프의 기대대로 부응하며,
15경기 7승 6패, 방어율 2.75 / 12번의 QS, 그중 11번이 QS+였으며,
완봉한 경기가 3경기, 완투한 경기가 3경기였습니다.
전반기 막판까지도 조성민은 다승, 방어율 1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이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추천을 받아 올스타전에 출전까지 하게 되죠.

하지만, 98년 올스타전은 조성민이라는
야구선수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게 됩니다.



일본 진출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
일본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감격과 영광.

하지만, 조성민은 이런 감격과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반기 막판 2경기에서 4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강판을 했을만큼,
전반기 너무 많은 경기에 등판했고, 또 많은 이닝을 소화했기에,
팔꿈치가 조금씩 아파왔었다고 말합니다.

팔꿈치 부상이 우려된다고 조성민은 요미우리에 통보했고,
이에, 요미우리는 조성민에게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을 느끼면 올스타전 감독인,
요코하마 곤도 히로시 감독에게 통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성민은 요미우리에서 지시받은대로, 올스타전 2차전을 앞두고,
팔꿈치가 좋지 않다고 곤도 감독에게 말을 했지만,
곤도 감독은 다른 선수들도 다같이 부상을 조금씩 앉고 있으니,
책임감을 가지고 투구하라며, 되려 조성민의 요청을 묵살해버립니다.

조성민은 그렇게 올스타전 2차전에 마지막 투수로 등판합니다.
8회말 등판해서, 아키야마 삼진, 이치로 중견수 플라이, 무토 삼진. 깔끔하게 3자범퇴로 이닝 종료.
하지만 조성민은 무토를 삼진으로 잡던 마지막 공을 던졌을 때,
팔에 뚝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경기는 3-2로 센트럴리그가 지고 있었고, 더이상 등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9회초 퍼시픽리그 7번째 투수 오오츠카가 와일드 피치로 1점을 더 내주게 되면서,
9회말 누군가가 마운드에 올라야되는 상황이 되버리고 맙니다.

올스타전 규정상, 연장전에 돌입하지는 않고, 9회말까지만 진행되는 올스타전.
센트럴리그 올스타 엔트리에는 사사키 가즈히로가 남아있었지만,
불펜에는 몸을 푸는 선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조성민이 올스타전 마지막 투수로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9회말 다시 등판한 조성민.
노구치를 상대로 다시 삼진을 잡은 그 순간, 조성민은 팔꿈치에 뚜둑 소리가 나는 것을 다시 들었고,
더이상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 타자 하츠시바를 상대할 때는 이미, 팔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초구에 몸쪽으로 빠지는 볼, 2구는 타자의 가슴을 향하는 위협구. 3구 역시 존과 멀리 벗어나는 볼.
이에 곤도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왔지만, 당시 조성민은 통증에 대해 곤도 감독에게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곤도씨는 저희팀의 감독이 아니기때문에 팔꿈치의 통증에 대해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센트럴리그는 요미우리, 주니치, 요코하마의 3파전 양상)
그렇기 때문에 곤도감독에게 손가락이 조금 아파서 던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곤도상은 제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이 2루수를 보고 있던 요미우리 니시를 불러
[어이 니시, 통역좀 해줘] 라고 얘기했습니다.
어째서 같은 일본인에게 통역을 하라는거지 라는 생각에 "아, 이사람은 애초에 교체할 마음이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니시씨는 제게 "성민, 무리하지마 "라고 말해주었고
벤치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일단 내려가겠다고 말하고 벤치로 갔습니다.
주위에는 다른 팀의 감독들이 있기때문에 팔꿈치가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고,
팔을 굽히고 뻗고를 10회 하고 벽에 볼을 몇차례 던진고 나서 마운드에 복귀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당시 가진 생각은 3대3 동점 장면에서 처음 출장한 올스타전에서 패전투수가 되고싶지는 않았습니다.
다녀오겠다라는 말과 함께 벤치를 나가고 사사키 선수는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만약 제가 던질 수 없게되면 남은 투수는 사사키씨 뿐이였으니까요"

이후, 포수의 싸인과는 상관없이 체인지업으로만 공을 던지며,
2사 만루의 상황이 되었고, 이후 단 1개만 던진 속구로 2루 땅볼을 만들어 아웃카운트를 만들어 경기 종료.
3-3 동점으로 98년 올스타전 2차전은 끝이 나게 됩니다.

악몽같은 98년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을 회고하며, 조성민 선수는 3가지를 후회했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팔꿈치에 이상이 왔을 때 일찍 전달해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했어야 했다는 점,
두번째는 올스타전에 출전하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
세번째는 곤도감독이 올라왔을때 던질 수 없다고 강하게 어필하지 않은 점.
만약 이 세 가지중 하나만 이뤄졌어도 좀 더 길게 일본에서 플레이할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올스타전 직후, 한순간에 요미우리는 부상으로 에이스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에 요미우리는 곤도 감독에 항의했고, 이에 곤도 감독은 유감이라며 의사를 밝혔지만,
당시 요미우리와 요코하마가 1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던 점.
그리고 엔트리에 사사키가 있었음에도, 조성민의 등판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우승에 눈이 멀어 상대팀 에이스를 망가뜨렸다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결국 98년 센트럴리그의 우승팀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차지였습니다.



이후, 99년을 통째로 쉬게 된 조성민은, 수술이 아닌 재활을 선택했고,
재활로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자, 8개월이 지나서야 수술대에 오릅니다.

그리고 통상 수술 이후에는, 1년을 쉬는 것이 정상이지만, 이후 무리하게 페이스를 올려,
바로 이듬해 2군 경기에 등판해 건재함을 과시했고, 다시 1군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연이은 무실점 행진과 1점대 방어율을 기록. 조성민이 부활했나 싶었지만,
그의 인생 최대의 변수가 터졌으니, 그 사건이 바로 故 최진실 씨와의 열애설입니다.

복귀해서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터진 열애설로 그 흐름이 끊기게 되었고,
그 시기에 얻은 발목 부상, 그리고 열애설로 인한 언론의 인터뷰 요청 쇄도.
야구에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버리고 맙니다.

이후, 자신이 따르던 팀 선배 구와타에게 결혼에 대해 자문을 구했고,
구와타는 이에, 한명이 희생하며 같이 사는 것이, 떨어져 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해줬다고 합니다.
(당시 양가 부모님은 결혼에 대해 반대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00년 7월 조성민은 최진실 씨와 결혼을 발표하며,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이후, 1군에 복귀해 2년 2개월만에 다시 승리투수가 된 조성민은,
2주 뒤 다시 어깨 통증을 느꼈고, 2군에 다시 내려가게 됩니다.

개인훈련으로 다시 몸을 만들고, 01년 새시즌을 2군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온 팔꿈치 통증. 병원은 조성민에게 또 다시 팔꿈치 부상을 판정하며,
2번째 수술대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빠르게 페이스를 올렸고,
02년 5월 다시 1군 무대에 올라, 1년 9개월 만에 다시 승리를 따냅니다.
하지만, 다시 팔꿈치 통증이 재발하며, 부상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고, 이어 조성민은 퇴단을 결심하게 됩니다.

요미우리는 끝까지 조성민의 재활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이미 조성민은 가족도 있었고, 요미우리에 마음이 떠난 후라,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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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조성민 - 故 최진실 씨 사이의 가정사는 적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작은 가정불화로 시작된 싸움이 3년간의 소송으로 이어졌고,
복잡한 가정사 가운데서도 조성민은 재기를 희망했습니다.

03,04년에는 신인지명회의에도 참가했지만, 프로팀들은 냉소적인 반응이었고,
2차 지명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해설가로 활동하던 05년 기회가 우연히 찾아오게 되었는데,
한화 경기를 중계하러 김인식 감독님을 찾아갔다가, 우천취소가 되어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전날 투구한 선수를 언급하며 "제가 던져도 저것보다는 잘 던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농담을 던졌을 뿐인데,
김인식 감독은, 이에 아까운 재능을 썩히지 말고, 다시 한번 도전해보라며 입단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야구선수로 복귀한 조성민은,
한화 이글스에 3시즌을 뛰며, 3승 4패 방어율 5.09 /
07년을 끝으로 그는 다시 한계를 실감하며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이후 야구 해설가로 다시 복귀했지만, 담당PD와 갈등을 겪으며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여러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야구계에 복귀한 곳은 두산베어스의 2군 코치진.
재활 코치로 다시 야구계에 들어가게 된 조성민은
자신이 선수시절 겪었던 부상들과 여러 재활들을 통해서,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해보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스스로 코치진을 내려놓고 물러갔고,
이후 몇차례의 사건을 통해서만 조성민의 소식을 대중들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안좋은 소식들로, 주취 폭력과 관련된 사건들)

그리고 결국 조성민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고교시절 최고의 스타,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 진출.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한 올스타전... 이후, 끝없이 추락했던 조성민.

끝없이 노력했고, 의지를 보이며 다시 야구를 하려 노력했지만,
세상은 그를 곱게 바라보지 않았고, 그는 알게 모르게 끝없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너무나 아쉽고, 쓸쓸하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생전 조성민은, 어떤 선수로 기억되길 바라냐는 질문에,
[열심히 했던 선수,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선수로 기억되길 바란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상 일들로 그를 비난하기 이전에,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잘 지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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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하하핫
13/12/17 17:55
수정 아이콘
몇년도인지는 기억나진않지만 요미우리에서 던지던모습은 기억에생생하네요..
정말 얼굴값하는 선수중에 한명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설탕가루인형형
13/12/17 17:56
수정 아이콘
정말 한순간 한순간이 중요하다는걸 되새기게 되네요.
iamhelene
13/12/17 17:57
수정 아이콘
하아 이런일이 있었군요.. 안타깝네요.. 98올스타전은 정말이지 천추의 한으로 남을듯 하네요..
一切唯心造
13/12/17 18:01
수정 아이콘
올스타전이 정말 한이 되었겠네요
아르센벵거
13/12/17 18:04
수정 아이콘
너무 안타까운 선수생활/인생을 살았던 선수/사람 이지요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하길 빌겠습니다.

ps. 그나저나 응사에 칠봉이가 여러가지면에서 계속 조성민 선수가 생각나서.. 부상당하는건 아닌가 조마조마하던데
저만 그렇게 느꼈던 것인가요?? (외모때문일수도 있고요..)
드라마에서는 끝까지 성공해내는 모습을 봐도 정말 감동이 있을것같다고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엘레노아
13/12/17 18:24
수정 아이콘
사실 칠봉이는 여러 야구선수들에게서 조금씩 모티브를 따와 만들어진 캐릭터지만,
저도 조성민 선수와 가장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13/12/17 18:30
수정 아이콘
저도 칠봉이 모델이 조성민 같더라고요.
wish buRn
13/12/17 18:05
수정 아이콘
잘 관리됐다면 역대급 슈퍼스타가 됐을꺼라고 생각합니다.
요미우리에서 보낸 전반기는 한국선수가 해외에서 보여준 퍼포먼스중 가장 압도적이었죠.
타자로써도 일본통산 타율이 3할4푼1리(44타수 15안타)를 기록했었구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선수입니다.
이녜스타
13/12/17 18:10
수정 아이콘
조성민씨가 평범하게 야구를 오래했더라면 팔때문에 투수가 안된다 하더라도 타자로 전향해도 대성했을겁니다.그만큼 천재들이라던 동기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야구센스가 뛰어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베이징때의 해설도 괜찮았습니다.거의 무당급으로 해설을 하셨죠.이대호가 타석에 들어오자 와다가 체력이 떨어질때쯤 됐으니 이대호가
큰걸 날릴 가능성이 높다고 하자마자 홈런.
시케이더
13/12/17 18:20
수정 아이콘
말한마디 해본적 없는 신일고 23기 동기생이지만 그가 있어 힘든 고3시절 즐겁게 보낸 기억이 나네요.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하길..
13/12/17 18:56
수정 아이콘
요즘 응사 칠봉이 보면 자꾸 조성민선수가 생각나서 가슴이 아프더군요...
주머니속이어폰
13/12/17 19:15
수정 아이콘
아직도 아마추어최강라인업 92중 최강투수라 불리는 투수..
13/12/17 20:54
수정 아이콘
부상만 없었으면 충분히 일본 정복하고 메이저리거가 됫을텐데 ㅜㅜ
너무 아쉬운 재능이였죠..
13/12/18 00:28
수정 아이콘
결혼전에 이소라의 프로포즈였나??

하는 프로에서 어제 배운 섹소폰을 부는거 보면서, 저희 어머님이 참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최진실이 반할만 하다고 한게 생각나네요
아스트란맥
13/12/18 14:15
수정 아이콘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군요. 조성민씨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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