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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06 14:14:05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신뢰는 취향의 문제다 : 자립음악생산조합 본부.
대학 시절의 나는 때로 레닌주의자인 척 하였으며 때로 아나키스트인 척 하였다. 서른 살은 그러면 안 되겠지만, 스무 살이란 그럴 수도 있는 나이인 것이다. 이를테면 스무 살이란 사회학과에 다니는 여자친구와 심리학과에 다니는 여자친구가 동시에 있을 수도 있는 나이인 것이다. 덕분에 나의 스무 살은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였다. 대학의 선배들은 '그건 멍청한 무정부주의자들이나 떠올릴 법한 사고다' 라고 나를 비판했고 무정부주의자들은 '그건 멍청한 레닌주의자들이나 할 법한 사고다' 라고 나를 비판했다. 뭐, 결국 나는 열심히 사고했고 아무 것도 실천하지 않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을 신뢰하는 건 유쾌한 인생을 위해서 되도록 자제해야 한다.

허나 사람이 어디 그렇게 합리적인가. 사람들은 때로 역사와 사실이 보증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들'을 신뢰하고는 한다. <사람들은> 은 너무 오만하니 <나는> 정도로 바꾸도록 하자. 대학 시절 학생회장을 하던 선배가 아가씨 바에서 나오는 걸 보는 일은 유쾌하지 못하다. 자칭 무정부주의자 모씨께서 친구들 돈을 몇백 빌리고 잠적했다는 이야기를 다른 친구의 입에서 듣는 일과 마찬가지로. 그래도 나는 때로 무언가를 신뢰했고 또 여전히 신뢰한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엿먹일 지라도.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세상이 타인이 나를 엿먹이는 일 보다는 내가 세상을 타인을 엿먹이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니, 때로 내가 엿먹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깨질 수 없는 영원한 약속 같은 건 스무 살 때 쯤에나 믿어봄직한 일이다. 그것이 한미동맹이 되었건 동지애가 되었건. 그리고 나는 나의 스무살에 충실했다. 무엇이 되었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신뢰했고, 내가 혐염하는 것들을 증오했다. 신뢰는 그다지 역사적이지도 사실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어쩌면 그냥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나의 신뢰가 깨어짐에 혹은 굳건해짐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나의 노무현이 이럴 리 없어 나의 이명박이 이럴 리 없어 나의 박근혜가 이럴 리 없어, 하는 사고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신뢰는 취향의 문제이며, 성인이라면 자신의 취향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게 나는 조직화된 운동의 힘을 믿었고 여전히 믿는다. 그것은 역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취향의 문제다. 그리고 대학 시절 내가 가장 신뢰하지 못하던 부류의 인간들은 문화 운동이 어쩌고 저쩌고, 신사회 운동이 어쩌고 저쩌고 떠들던 치들이었다. 그런 건 80년대 말에 끝났어야 할 이야기다. 정말로 좋게 봐줘서 IMF전까지 유효할 수 있고, 그 이후로는 시대착오적이다. 2000년대 초반이면 말할 것도 없다. 그 시절의 나는, 문화운동이니 신사회운동을 꺼내며 소위 구좌파 운동을 비웃던 이들은 그저 쿨시크해 보이길 원하거나, 부모님이 벌어주신 남는 돈을 비생산적인 일에 쳐박고야 말겠다는 종류의 사고를 강박장애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 생각했다. 그건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역사와 상관없이 나는 그저 구좌파들의 급진적인 헛소리가 취향에 맞았고, 신좌파들의 세련된 헛소리가 역겨웠을 뿐이다. 십년이 넘게 지난 오늘까지 문화운동가들은 내가 비난한 것들 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루었을 것이고, 소위 구좌파들은 내가 바란 것보다 많은 역량을 쓰레기통에 쳐박고 쿨시크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곤 했을 것이다. 사람을 욕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고, 그것은 나의 삶에도 해당될 것이니 그만두도록 하자.

그리고 태초에 두리반이 있었다.

연애의 태초에 그저 그런 흔한 섹스가 존재하듯, 두리반은 그저 그런 흔한 사건이었다. 홍대의 흔한 재개발로 인한 흔한 철거. 그리고 흔한 자영업자의 퇴거. 흔한 자본주의에서 흔한 노동자가 자살하듯한 그런 일이었다. 하지만 흔하디 흔한 섹스 중 어떤 것이 연애로 이어지듯, 두리반은 흔하지 않은 관계를 잉태해냈다. 소위 운동권 뿐 아니라 음악가들이 모여들었고, 세력화하여, 투쟁하고, 승리했다. 이럴 수가. 이게 무슨 소리야. 신뢰하지 않던, 차라리 그 시절의 내게는 불호에 가까운 친구들이 무언가를 멋지게 해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어떤 음악가들은 스스로를 세력화했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허나 그 시절 나는 내 먹고 사는 일에 바빠 단 한번도 그들과 연대하지 못하였다. 내가 밥벌이의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그들은, 어린 시절의 내가 신뢰하지 않던 무리들은 꽤 멋진 일을 해냈다. 그러면 뭐 별 수 있나. 신뢰는 취향의 문제다. 그리고 역사란, 취향을 바꾸기 위한 좋은 관련근거가 된다. 성인이라면 자신의 취향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하고, 나는 그것을 바꾸는 것이 내 합당한 책임이라 생각한다.

학원 선생질을 하다 만난 어느 사회당 선배는-9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졸업했으며, 당비셔틀로 살아가고 있었다-이렇게 말했다. '우리 때 그런 말이 있었는데. 신촌 홍대에서 음악한다는 애들만 조직하면 사회주의 혁명이고 뭐고 일으킬 수 있다고' 뭐랄까, '이번 주에 로또에 맞으면 우주선을 한 대 사서 달나라 여행이라도 한번 떠나볼텐데' 만큼이나 전제도 논리도 잘못된 이야기지만. 일단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운동가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한 모임이 아니라는 것 부터가. 그럼에도 그것의 의미는 간명하다.

그들은 그렇게 2년을 버텨왔고, 한예종의 '남영동 대공분실'과 문래동 로라이즈와 이태원 꽃땅과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결국 오늘 사무실이자 공연장을 얻어 안착한다. 펑크/하드코어 레이블 '비싼트로피 레코드'의 사장이자 '김정일 카섹스'를 트윗한 죄로 국보법 위반자가 되어 40일간 콩밥을 먹은 죄슬아치 사진가 박정근의 '조광사진관'과 함께. 자립음악생산조합본부 '자본'은 오늘, 충무로에, 새 신혼집을 차리게 되었다.

박정근은 내게 훌륭한 청첩장을 보내왔다.

...삼가 모십니다. 둘이서 사랑으로 만나 진심과 이해로써 하나를 이루려합니다. 오늘까지 이 둘을 지성으로 아끼고 돌봐주신 여러 어르신과 동지들을 모시고 서약을 맺고자 하니 바쁘신 중에라도 이 둘의 계약을 가까이에서 축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바텐더가 된 후에, 직업상의 사정으로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어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퇴근하고 새벽에 갈 수 있는 장례식장이야 매 년, 아니 매 계절 따박따박 갔었던 것 같지마는, 역시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힘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가보도록 해야겠다.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인연으로 만들어진 신혼집으로. 혁명이 어쩌네 조직화가 어쩌네 하던 급진적 헛소리를 하던 사람도, 문화운동이 어쩌네 예술가의 자생적 네트워크가 어쩌네 하던 세련된 헛소리를 하던 사람도 다 어디갔는지 모를 그 축복의 땅으로. 술을 몇 병 챙겨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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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공파일
13/12/06 15:13
수정 아이콘
믿을 수 있는 것을 믿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지 않을 때, 눈 먼 자와 극단적 회의주의 사이의 함정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겠죠. 믿어야 할 것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지 않을 때, 그것은 윤리의 문제가 되고 사실 그곳에는 아무 윤리도 없으니 결국 취향의 문제가 되고요. 애초에 믿고 말고의 문제에 과학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죠.
몽키.D.루피
13/12/06 19:49
수정 아이콘
멋진 글입니다. 당시 이데올로기를 잘 이해 못하는 세대라서 좀 이해하기는 어렵네요.
아케미
13/12/06 20:23
수정 아이콘
비가 오는 듯 마는 듯 하던 9월의 어느 날, 들어가지도 지나치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며 외벽의 그림과 글과 현수막을 구경하고 있는데, 안에서 이상한 귀걸이를 한 남자분이 고개를 내밀고는, 들어와서 커피 한 잔 하고 가실래요? 하고 물어봐 주었죠. 전기가 끊어져 어둑어둑한 실내에 두어 사람이 앉아 말없이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던 기묘한 평화. 어디 학생이냐고 물어보기에 근방의 Y대입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아 여주대 다니시는구나, 하고 썰렁한 농담이 돌아오기에, 네 크크 교환학생 왔어요, 서울은 무서운 곳이네요 안 나간다고 전기도 막 끊고, 뭐 이렇게 더 썰렁한 농담으로 되돌려 주기도 했었습니다. 자가발전기로 전구가 짠 하고 켜지던 모습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느지막이 가게를 나서려니 또 와요, 하고 시크하게 기타를 치시던 그 남자분도 역시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일원이었으려나요. 결국 또 가지는 못하고 투쟁이 끝났네요. 아, 칼국수 먹으러 한 번 가 봐야 하는데.
LowTemplar
13/12/06 20:29
수정 아이콘
...덕분에 보드카 잘 마셨습니다 크크크크 그래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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