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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1/05 14:44:26
Name js
Subject [일반] 원고지 삼 매의 무게: 김훈 "거리의 칼럼"

“거리의 칼럼”은 지금은 전업 소설가인 김훈이 2002년 한겨레신문에 기자로 재직하던 당시 맡았던 고정코너의 이름입니다. 원고지 삼 매라는 적은 분량을 ‘더할 것 없는’ 간결한 문장으로 채운 총 31편의 칼럼은, 기자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고 베껴 보는 일종의 ‘기자의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삼 매는 참 어려운 분량입니다. 아래아한글에서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면 아홉 매 남짓입니다. 그걸 셋으로 나누면 삼 매가 되지요. 문단 둘 셋을 쓰면 삼 매는 금방 차버립니다. 일기나 약술형 시험 답안, 간단한 질문글이라면 모를까 사실과 주장이 같이 들어가야 하는 칼럼을 삼 매 분량으로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든 글쓰기 교본에서 언급하는 쓰기의 제일원칙인 ‘간결성’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는 이상, 삼 매는 참 어렵습니다.

후배 담당 기자가 “더 쓰셔도 된다”고 하자 김훈은 “아니, 저는 삼 매가 좋습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실제 칼럼을 읽어 보면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그리고 아무나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더욱이 단순히 분량만 맞춘 칼럼이 아닙니다. 현장의 결이 가감 없이 담겨있고, 쉬이 선동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보면 볼수록 어렵습니다. 채우기보다 줄이기가 어려움을 다시금 느낍니다.

제 부족한 결론을 남기기보다 그의 탁월한 칼럼 둘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첫 칼럼은 “거리의 칼럼” 중 가장 유명한 <라파엘의 집>, 두 번째 칼럼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밥’에 대한 단상>입니다. 그냥 읽으셔도 좋고, 글쓰기 공부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노트에 베껴보셔도 좋겠습니다.



*****

<라파엘의 집>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 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 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불우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 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아들이다. 술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아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밥'에 대한 단상>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다른 칼럼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34/home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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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상이
13/11/05 14:48
수정 아이콘
흠..기자질하며 먹고사는 입장에서...매 순간 '3매'의 무게를 느껴야 하는데, 가끔은 3매 기사라고 너무 대충 써버리는 건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기자하기 전에는 그저 길게 쓰고 화려하게 쓰는 게 잘쓰는 글인 줄 알았는데, 기자 하면 할수록 짧게 쓰기, 짧게 쓰며 할 말 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버릴 문장없는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고 있습니다.
13/11/05 16:02
수정 아이콘
현직 기자분이 계셨네요. 직업으로서 글쓰는 분들 모두 존경합니다.
13/11/05 15:44
수정 아이콘
와 훌륭하네요 다읽고 다 직접 써봐야 겠습니다.
공학도지만 글을 잘 쓰고싶었는데,
이런정보 너무 감사합니다.
13/11/05 15:59
수정 아이콘
필사 공부에 최적화된 칼럼이기도 합니다. A4 1페이지 내외의 보통 칼럼은 쓰다 보면 팔도 아프고 해서 귀찮아지는데 이건 딱 아프다고 느낄 때쯤 끝나서 좋아요. 서른한 편밖에 없어서 소소한 목표로 두기에도 부담이 없고요.
철석간장
13/11/05 16:08
수정 아이콘
오늘 처음 봤습니다...

라파엘의 집.. 정말 대단한 글입니다.
바닥인생
13/11/05 16:09
수정 아이콘
라파엘의 집. 처음 읽어봤는데 정말 깔끔하면서 담백한 글이네요.
좋은 글, 링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13/11/05 16:34
수정 아이콘
김훈 정말 좋아합니다.. 투핸드해머로 내려치는 듯한 그의 문체는 정말 강렬합니다. 항상 지식인을 조소하고 혐오하지만 그 자신까지 포함한 자기조소로 느껴져서 뭔가 공명된다고나 할까요.. 마초라고 욕먹지만 그것까지도 매력적이라고 느끼니 이만하면 제가 빠돌이인가 봅니다.
어강됴리
13/11/05 16:56
수정 아이콘
글 참 좋네요, 갠적으로 중언부언하는거 딱질색이라, 역시 힘쓰는거 보다 힘빼는게 어려운가 봅니다
큰애기남편
13/11/05 16:56
수정 아이콘
한편의 시 같네요. 감사합니다.
be manner player
13/11/05 17:05
수정 아이콘
와.. 3매 분량 칼럼에서 자기 할 말 다 하고 군더더기도 없네요. 잘 봤습니다.
앨런페이지
13/11/05 17:39
수정 아이콘
참 좋네요 ..
메모박스
13/11/05 18:19
수정 아이콘
김훈이 항상 강조하는게 주어와 동사로 이뤄지는 스트레이트 문장이죠 정말 좋아하는 글쟁이입니다. 더 강렬하고 잔상이 오래남죠. 문제는 원고매수가 줄어 생계에 지장을 받는다는것...
여기똥포장되나요
13/11/05 19:03
수정 아이콘
이분은 진짜 폭풍간지...
13/11/05 19:28
수정 아이콘
기자 김훈, 작가 김훈을 정말 존경합니다. 칼의 노래를 읽다가 문득 코 끝에 바다 냄새가 나는걸 느기며 흠칫 했던 순간부터, 그를 존경합니다.

강산무진에 김훈 작가의 싸인을 받아두고, 아이리버에서 Story K HD 김훈 한정판이 나왔을 때 사두길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tannenbaum
13/11/05 19:31
수정 아이콘
정말 좋습니다
13/11/05 22:30
수정 아이콘
폴 오스터였나.. 한 유명 소설 작가는 자신의 원고를 퇴고할때 '무조건 무슨일이 있어도 10%는 줄인다'라는 강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짧고, 간결하며 좋은 문장'이라는 것은 모든 글쓴이들의 위대한 성배지요. 그런면에서 김훈 작가님의 이 칼럼들은 성배를 독차지한 증거처럼 보여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비단구두
13/11/05 22:42
수정 아이콘
5공을 찬양하고 후에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할 일이라 내가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후안무치함에 저는 너무 싫어합니다.
이라니
13/11/06 19:49
수정 아이콘
비단구두님..김훈씨가 5공을 찬양했나요??

약력을보면 한겨레 출신인데...

잘 이해가 안가네요

혹시 관련자료 있으시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13/11/07 04:27
수정 아이콘
김훈은 한국일보->시사저널->한겨레 테크트리를 탔죠. 5공 찬양건은 한국일보 재직 시절 있던 일입니다. 엔하위키에 간략한 설명이 나와 있고,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라고 검색하시면 한겨레 기자가 김훈에 대해 쓴 긴 글이 있으니 관심 있으시면 찾아보셔도 좋겠네요.
이라니
13/11/07 16:05
수정 아이콘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구경남
13/11/07 03:13
수정 아이콘
와 김훈... 그의 아버지가 김승옥을 보고 정말 천재가 나왔다고 개탄했다는데 보다 더 한 사람을 낳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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