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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0/11 14:32:18
Name OrBef
Subject [일반] [영어 동영상] 대니얼 데닛 - 의식의 기원, 유물론의 관점에서.

HTML 사용에 능하지 않은 관계로 동영상 재생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질 않습니다. 동영상 아래에 제가 원하는 재생 시간을 표시해두었으니 거기만 봐주세요. 다른 데까지 보시려면 시간이 너무 길어질 거에요.

 

이 연재물을 처음 보는 분을 위해서: 종종 시사/철학/종교/과학 등을 주제로 하는 영미권 (혹은 호주 쪽도...) 동영상들을 올리는 중입니다. 좋은 동영상이 보고 싶으면 TED 톸 보면 됐지 왜 니가 올리는 동영상을 봐야 해? 라고 물으신다면, 물론 '보셔야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TED 는 일방적인 강연이고 저는 되도록 다양하게 인터뷰나 토론 등등의 형식을 가진 동영상들도 올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이 동영상 시리즈는 저와 여러분의 영어 공부를 겸하는 거니까요! 같은 이유로, 한글 자막은 없습니다.

지난 동영상:

1. 조지 칼린 스탠딩 코미디 "지구의 날":">


원래는 예쁜 여배우의 인터뷰 영상을 올리겠다고 했지만, 이 기회에 인식 철학 쪽 이야기를 잠정적으로 정리해두는 것이 저한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냥 끝까지 달려봅니다. 이 바닥에서 최종 보스급의 철학자들이 몇 있는데, 그중에서 저 개인적으로 가장 그럴듯하다고 느끼는 학설을 만든 대니얼 데닛을 오늘의 동영상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대니얼 데닛은 현대 서구권에서 무신론 운동을 이끌고 있는 4인의 기사단 중 한 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쪽 방면으로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사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무신론을 설파하는 것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에 반해서, 데닛이 무신론을 설파하고 다니는 것은 ‘내가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 열심히 수십 년간 연구하다 보니 이러저러한 결론이 나왔는데, 그 부산물 중 하나로 종교에 대해서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되었어’ 라는 정도의, 일종의 부업 같은 겁니다. 또한 리차드 도킨스가 진화 생물학자로서의 본업을 때려치우고 무신론 설파에 커리어를 건 것에 반해 데닛은 인지 철학/과학계에서 여전히 왕성히 활동하고 있고 이 분야에서의 데닛의 기여도는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즉, 데닛을 무신론자로 보는 것은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굉장히 지엽적인 시각이고 이 사람은 인지 철학의 대가로 보아야 합니다.

제가 데닛을 좋아하는 이유 중 큰 것 중 하나는, 이 사람은 과학과 철학을 통섭적으로 다룬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인지 철학은 형이상학의 형태를 띠었었고, 사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 자체가 과학이 다룰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인간의 성격이나 기억 심지어는 판단까지도 [주: 언젠가 이 점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어떤 대상에 대해서 판단을 하는 경우에는, 실제 판단 (신경계가 활성화되는 시점) 이 우리의 의식 (본인이 판단을 내렸다고 의식하는 시점) 을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우리의 의식은 우리를 행동을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신경계가 내린 결과를 통보받는 존재입니다.] 우리 의식과 별로 상관없는 현상일 가능성을 점차 보여주고 있고, 이 상황에서 ‘과학적 발견들을 받아들이되, 과학이 아직 밝혀내기 힘든 부분은 철학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즉, 일관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인지 철학자는 전무한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전무가 아니라 전무에 가까운 이유는 대니얼 데닛이 바로 그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존 서를, 데이빗 채머스, 데이빗 로젠탈 등은 전부 인지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다루고 있고, 그 결과 인식의 기원에 대해서 제법 설득력 있는 가설들을 만들었습니다. 데닛의 가설 –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 은 서를이나 채머스의 가설에 비해서 일단 감정적으로 굉장히 불쾌한 가설이며 로젠탈의 그것에 비해서 비직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과학적 사고’와 가장 잘 맞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10분짜리 데닛 관련 동영상들은 거의 다 그의 무신론 – 이건 데닛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 에 관한 것이고 그의 철학 강연 영상들은 전부 1 ~ 2 시간짜리입니다. 더구나 각 강연이 조금씩 다른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하나 봐서 데닛의 큰 이야기를 이해하기도 힘들고요. 해서 데닛의 세 강연을 링크하되, 각 강연에서 주요 부분들을 1~2분 정도씩만 빼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영상들은 해당 시점에서 시작하게 코드를 손봤는데, 가끔 잘 안되는 것들도 있어서 그런 경우에는 아래 설명을 간략히 달았습니다.

1인칭 체험의 불확실성
우선 첫 동영상. 여기서 데닛은 우리의 1인칭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환상에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인지 철학/과학에서 그런 취약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1인칭의 진술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되며 일반적인 과학처럼 3인칭 시점에서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하죠. 즉 ‘나는 내가 의식이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 라는 본인 스스로의 진술도 그대로 믿으면 안 되고 ‘나는 내가 의식이 있다고 느끼는구나. 왜 그렇게 느낄까?’ 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시점에서 보다 보면 1인칭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뇌가 수행하는 스테이지 매직의 결과물임을 알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여담: 이거 20분 17초부터 보시면 되는데, 아무리 코드를 손봐도 20분 7초부터 재생이 됩니다. 첫 10초는 무시하시고 20:17 ~ 22:20 까지 약 2분간만 보세요]

데닛 – 이 그림을 보면 가운에서 뭔가 움직움직하는 것 같죠? 근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움직이고 있지 않아요. 실제 움직임이 없으니 당신 시신경에도 움직임이 없겠죠. 그런데 신호를 처리하는 어느 시점에서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 [주: 데닛은 ‘it just seems’ 라는 표현을 즐겨 씁니다. 결국 의식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리죠. 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데카르트식의 이원론적 정신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 라고 결정을 내린단 말이죠. 다른 그림을 하나 더 봅시다. 이 깃발 가운에 있는 십자가를 주시하시고 있으면 제가 화면을 끌게요. 하나 둘 셋! 어때요? 뭔가 잔상이 있다고 [주: it seems] 느껴지지요? 이것도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 시신경에도 잔상 같은 건 없어요. 이건 그냥 당신이 잔상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거지요 [주: it seems] - 데닛끝

 

사실 이런 현상 관련해서 제일 충격적인 것은 color phi 현상이라는 놈입니다. 데닛이 원래 유명해진 게 color phi 착시 현상과 의식 간의 관계를 주제로 쓴 논문인데, 나중에 그 논문의 세부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나오면서 요즘은 저 현상을 잘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color phi 현상이 괴상한 건 사실이지요. 아래 동영상을 일단 보시죠.

[HTML 이 무서워요.. 그냥 1분 정도로 진행시켜서 봐주세요...]

30초 정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냥 색점들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는 색점이 ‘it seems 움직이고 있다’ 라고 느낍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두 색점 사이에서 뭔가 색깔을 가진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실제로 느끼죠. 이게 정말 말이 안 되는 현상인 것이, 첫 번째 색점에서 불이 꺼지고 나서 두 번째 색점에 불이 들어온 뒤에 ‘아 뭔가 움직였군’ 이렇게 착각하는 것은 말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번째 색점에 불이 들어오기도 전에 그쪽으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미리 받지요. 즉 시간을 되돌려서 착시 현상을 느낍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이 serial processing 이 아니라 parallel processing 에서 얻어낸 data 를 [주: 여기까지가 로젠탈이 이야기하는 perception 의 영역; 데이빗 로젠탈이 perception 과 consciousness 의 차이를 명확히 한 철학자입니다] 임의로 조작해서 serial processing 인 것처럼 변환하여 [여기서부터 consciousness 의 영역;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perception without consciousness 는 굉장히 광범위한 현상이고 이 차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 이런 현상은 인간 진화의 결과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1초 ~ 1일 정도의 시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생존에 적합하고, 따라서 0.1초 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1초 정도의 사건으로 뭉뚱그려서 패턴화시켜버리는 것이죠. 고대인들이 0.1초 단위로 반짝이는 색점은 볼 일이 없었지만 수풀 사이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하는 늑대의 움직임은 잡아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데자뷰 현상도 무슨 전생 체험 따위가 아니라, 우리의 시각 정보 처리 회로에 오류가 일어나서 현시점의 체험을 마치 예전의 기억인 것처럼 느끼는 [it seems] 일종의 정신 질환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이 나고 있습니다. 데자뷰를 우왕굿 스럽게 많이 느낄 수 있게 되는 약물도 있다더군요. 이 역시 1인칭 체험담을 – 본인이 1인칭 체험을 한다는 그 직관 자체를 포함해서 -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근거가 되지요.

자, 이렇게 해서 데닛은 1인칭의 경험을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비판 없이 믿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냅니다. 그리고 다음 주제 –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 – 로 넘어가지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말하듯, 우리는 우리의 몸 (뇌를 포함해서) 은 껍질이며 그 속에 진정한 내가 존재한다고 직관적으로 ‘안다고 생각합니다.’ 데닛은 그 직관적으로 ‘안다’는 것은 사실은 it seems 그렇게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두 가지 논증을 통해서 이원론적 시각이 의미 없다고 주장합니다.

데카르트의 극장

[HTML 포기! 39:30 ~ 42:57 를 봐주세요]

데닛 –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면 이런 겁니다. 여기 보시면 우리 눈에서 이미지가 들어오고, 이걸 신호처리 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마지막에 영사기로 화면을 띄우죠. 그리고 그걸 우리 머릿속에 있는 호문쿨러스 (작은 인간이라는 뜻) 들이 봅니다. 저 호문쿨러스가 우리의 정신이지요. 제가 이런 개념도를 만들고 여기에 데카르트의 극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요, 이거 사실 빈정대려고 만든 표현입니다. 이 개념은 그냥 틀린 정도가 아니라 한심한 수준이에요. [주: 잠시 농담] 일단 이 개념은 인간의 의식을 설명한답시고 저 안쪽에 작은 인간을 새로 넣은 것에 불과해요. 그럼 우린 저 작은 인간이 어떻게 의식이 있는지를 풀어야 하잖아요? [주: 우리 뇌 속에 정말로 중앙 통제소가 있고 그곳을 통해서 정신세계와 접촉한다고 치면, 그 정신세계에 있는 우리 정신 (혹은 영혼이든 뭐든) 은 어떻게 해서 의식 작용이 가능한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럼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죠.] 그리고 애초에 그런 거 다 떠나서, 이 개념이 참이려면 우리 머릿속에서 모든 신경세포들을 취합해서 종합 판단을 내리는 통제소가 있어야 하는데, [주: 잠시 맨인블랙 1 의 외계인 - 큰 외계인 속에 작은 외계인이 있는 그놈 - 의 예를 들어서, 데카르트식의 모델은 결국 그런 거라는 지적을 함] 모든 신경과학적 발견을 통해서 그런 게 없음이 밝혀졌단 말이죠. [주:우리는 산수/작문/음악감상/운동 등등등 우리가 하는 활동의 종류에 따라서 뇌의 완전히 다른 부분을 사용하며 그런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합 관리하는 소기관 같은 것은 뇌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의식의 기원을 설명하려면, 데카르트의 극장을 쪼개고 쪼개서 의식이 없는 보잘것없는 것들로 나눈 뒤에, 어떻게 해서 이것들이 모임으로서 의식이 나타나는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 데닛끝

자아의 딜레마 & 주인 없는 공장

43:01 ~ 44:40

데닛 - 여기서 저는 ‘자아의 딜레마’ 를 언급해야겠군요. 제가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 의식에 관해서 어떤 이론을 만들려고 할 때는, 자아를 쪼개서 다뤄야 제대로 된 이론입니다. 자아를 그대로 남겨놓고 무슨 이론이네 뭐네 하는 걸 만들어봤자 그건 진짜 문제를 뒤로 미룬 것뿐이지 정당한 이론이 아니에요. [주: 이게 데닛의 입장이죠] 물론 다른 입장도 있어요. 데이빗 채머스가 말하는 입장인데, 자아를 그대로 남겨놓지 않고 이론을 만들면 진짜 문제를 피해 가는 것이지 제대로 된 이론이 아니라는 거지요. [주: 여기서 채머스를 다시 한번 깔 줄 알았는데, 앞에서 얘기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넘어가네요]

자 그럼 제 입장을 따라서 한번 문제를 파고 들어가봅시다. 그럼 결국 뭐가 나오느냐…?? 굉장히 무섭고 어떻게 보면 역겹기까지 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여러분은 의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공장의 문을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는 여러가지 기계가 웅웅대면서 돌아가고 있는데, 정작 사람이라고는 [주: 의식의 주인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 아무도 없는 그런 광경을 보게 되지요. 감시자도 없고 책임자도 없고 보스도 없고 그냥 기계만 있는 그런 것이죠. 근데 역설적이게도, 의식에 관한 제대로 된 이론이라면 그런 식으로 이어져야만 해요. 만약 의식에 관한 어떤 이론이 감시자나 보스의 존재를 상정한다면 [주: 그 감시자나 보스는 왜 의식이 있을 수 있는지를 또 고민해야하니까] 아직 이론을 시작도 안한 거거든요. - 데닛끝

 

이렇게 해서 데닛은 전통적 의미의 ‘분해 불가능한 자아’ 개념을 해체합니다. 사실 데닛이 대놓고 언급하고 있진 않습니다만, 데닛이 '의식이란 저런 bottom up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고 믿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진화론의 강력한 지지자이기 때문입니다. 박테리아는 의식이 없죠. 지렁이도 아마 의식이 없을 겁니다. 근데 지렁이는 원시적인 뇌라고 할 만한 신경 집합체는 있단 말이죠. 그리고 원숭이 정도 되면 분명히 의식이 있을 겁니다. 그럼 지렁이와 원숭이 사이 어디에선가 의식 수준이 갑자기 0 0 0 0 0 짜잔 이제부터 1 입니다!!! 라고 변했을 리는 없으니, 의식이란 뇌 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조금씩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겁니다. 고로 의식을 담당하는 크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뇌 속의 소기관들이 상호작용하는 패턴의 일종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데닛의 Fame hypothesis (유명세 가설) 은 이를 바탕으로 합니다.




19:00 ~ 20:15

 

 

데닛 - 그럼 의식은 뭐냐! 내가 말하는 multiple draft model 에 따르면, [주: 이건 요즘 fame model 이라고 새 이름을 미는 중입니다]  의식의 내용은 1. '역사적인 존재여야만 하고요 [주: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성질의 것만이 의식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 0.1초짜리 의식은 없다], 2. '그 시점에서의 경쟁을 이겨내고 제법 오랜 시간에 걸쳐서 뇌를 차지하고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저는 이런 방식의 해석에 ‘유명세 가설’ 이라고 이름붙였는데요, 실제로 의식은 유명세와 비슷한 점이 많아요. - 데닛끝

 

[주: 이 부분은 좀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해서 난입했습니다.]

뇌의 여러 모듈은 외부 세계 – 자신의 내면 세계도 유물론에서 보면 외부 세계지요 – 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타를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다음 행동을 결정을 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유기체 전체의 조화를 위해서 서로 교신을 하겠죠. 이 교신은 1 대 1 이 아니라 다 대 다, 즉 공챗의 형식을 띌 것이라고 데닛은 가정합니다. 그리고 그 공챗들은 다른 모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지요. 대충 예를 들어보면:

 

발의 촉각을 담당하는 부분: 이봐 '눈'씨, 지금 땅을 밟았는데 아주 평탄하지가 않아. 넘어지지 않게 아래 좀 봐줄래?

코의 후각을 담당하는 부분: 이봐 '눈'씨, 지금 어디선가 커피 냄새가 나는 데?

눈의 시각을 담당하는 부분: (카톡 메시지를 보는 중) 기억을 담당하는 모듈이 나에게 '닥치고 이 화면에 집중하래' 다들 닥치쇼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 응 다들 닥치쇼 지금 '읽음' 표시가 언제 사라지는 지가 제일 중요함

 

이런 식으로요. 즉, 모든 감각과 기억과 기타 등등을 담당하는 뇌의 모든 기관이 광역 방송을 해요 –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 라는 식으로요. 물론 다른 기관도 나름대로 방송들을 하고 있고요. 그 와중에 이 기관들의 집합체인 뇌 기관이 ‘A 라는 사건이 제일 중요하구나’ 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그 관련 정보가 상당 시간동안 뇌 기관에서 주류 정보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22:30 ~ 24:40

데닛 - 어떤 뇌에 등록이 되는 거랑 뇌에서 유명해지는 거랑은 달라요. 등록은 시간 순서대로 되겠지만 의식은 그 반대로 움직일 수도 있어요. [주: Bill arrived after John did 라는 식의 문장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의식의 그런 성질의 반영이라고 주장] 의식이 유명세와 비슷하다는 제 요지를 좀 자세히 이야기해보자면, 사람이 15분동안만 유명할 수는 없잖아요? 일단 유명해지면 꽤 오래가지요. 같은 맥락에서 의식이라는 것도 꽤 긴 호흡을 가지고 바뀌어갑니다. - 데닛끝

 

데닛의 '유명세 가설'에서는 의식과 유명세 간의 유사점이 꽤 많음을 지적합니다. 유명세라는 것은 어떤 특정인에게 도장을 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시작된다는 점, 모든 사람이 유명해지고 싶지만 실제로 유명해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 일단 유명해지면 꽤 오랜 시간 유명세가 지속된다는 점, 다른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거나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유명세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모든 면에서 의식이 뇌의 소기관들간의 경쟁/협동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특정 이벤트가 누리는 유명세라는 가설과 잘 들어맞지요. 그렇게 보면, 의식은 인간의 정신 작용을 유발하는 (causation) 존재가 아니라 그 부산물 (aftermath) 에 가깝습니다. 물론 일단 유명해지면 인생이 달라지듯이 의식도 롱텀으로 보면 무의식에게 무언가 영향을 끼치긴 하겠습니다만.

여기서 데닛은 의식이 꼭 정신 작용과 등가물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멍하니 운전을 하다가 문득 ‘이런, 여기서 우회전했어야 했는데!’ 라고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합니다. 운전이라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작업인데 그 작업을 사실상 무의식 상태에서 진행할 수가 있지요. 즉, 우리 신경계가 우리 기억회로와 상호작용하면서 악셀과 브레이크와 기어를 움직이고 길을 찾아가는 와중에 우리는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슴을 의식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24:50 ~ 26:35


데닛 - 자 보세요. 우리가 어떤 방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데 시계에서 종이 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종소리를 의식하지 못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어 종이 치네?’ 라고 의식을 하곤 하죠. 근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의식한 뒤에는 ‘아 맞아 이게 네 번째 종이지’ 라는 식으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와중에도 정신 작용은 계속 이루어집니다. 의식은 정신 작용의 매우 작은 부분인 거지요. 분명히 첫번째 종소리는 우리 의식속에 없었어요. 그런데 네번 째 종소리를 듣는 순간 첫번 째 종소리가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요. 사실 첫번째 종소리도 우리 머리 속에 등록이 되었다고 보아야 해요. 다만 '유명하지 않았을 뿐' 이죠. 그런데 종소리가 계속 나니까 결국 첫번 째 종소리부터 네번 째 종소리까지를 다 이어서 '유명한 사건' 으로 뇌 전체에 방송이 되는 겁니다.- 데닛끝


사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의식과 정신 작용이 등가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더 명확하게 자기 이론에 도입한 사람은 데닛이 아니라 데이빗 로젠탈이라는 철학자입니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perception 과 consciousness 는 다른 것이고 perception without consciousness 는 매우 흔한 현상이라는 이야기를 환기시킨 철학자라고 잠시 언급한 그 양반이죠. 우리가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처음에는 게임에 집중하느라 잘 몰랐는데 알고보니 옆에서 담배 연기가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걸 의식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까부터 담배 연기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연달아서 이놈이 아까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곁눈질로 본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심상이 의식의 세계로 들어오고 나면 거기서부터 시간을 거슬러서 기존에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 그러나 사실 뇌의 어딘가를 통해서 차곡차곡 받아서 기억 소자에 저장까지하고 있었던 데이타를 연달아서 뇌살려낼 수가 있지요. 이 예를 통해서 로젠탈은 ‘우리 뇌는 사실 우리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데이타를 perceive 하면서 memory backup 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행동을 consciousness 수준에서 할 수는 없으니 평소에는 low order thought 수준에서 조용히 진행하고 있다. 의식이란, 어떤 이유에서든 이 low order thought 를 high order thought 가 바라보는 사건이 발생할 때 일어난다. 즉, 정신 상태가 다른 정신 상태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이 의식의 실체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예라면, 놀이터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문득 바지에 핏자국이 보임을 깨닫습니다. 알고보니 아까 넘어졌을 때 살갗이 벗겨졌나봅니다. 그 사실을 알고나니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쓰라린 느낌이 마구 밀려옵니다. 이것 역시 로젠탈의 이야기와 앞뒤가 맞습니다. 우리가 가장 강렬한 체험이라고 인정하는 ‘고통’ 마저도, 우리의 의식 세계로 들어오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즉, 우리의 의식이란, 우리가 우리의 뇌가 벌이는 온갖 활동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이 로젠탈의 higher order thought 가설의 요지입니다. 굉장히 깔끔한 설명이긴 한데, 이 가설의 한계라면 그 higher order thought 는 low order thought 와 뭐가 다르길래 혼자 고고하게  low order thought 를 바라보는 멋진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 아무 답을 주지 않습니다. 또 다시 데카르트의 극장이지요. 해서 로젠탈은 perception without consciousness 라는 멋진 이야기를 들려준 것으로 자기 의무를 마치고 퇴장시키겠습니다.

 

결론으로 가지요. 저는 철학에 대해서 쥐뿔 아는 거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미천한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판단해볼 때, 데닛의 '의식이란 뇌의 여러 모듈이 서로 쏘아대는 공챗의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 동안 유명세를 획득한 메시지의 흐름이다' 라는 가설이야말로 '의식이 진화의 결과로 어떻게 나타났는가?' '의식이 없는 것들이 모여서 어떻게 의식이 있는 존재가 되는가?' '의식이 있는 상태와 정신줄 놓은 상태의 관계는 뭔가?' '돌이켜보니 이러저러했다! 라는 경험은 왜 가능한가?' 등등의 의식 관련한 다양한 주제에 일관되게 답을 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무이한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데닛은 본인의 견해가 매우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정신 세계를 물질 과학으로 해석하고 나면 전통적 의미의 자유 의지 개념이 위협받는 다는 것도 잘 알고요. 해서 요즘은 자유 의지쪽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인과율과 양립 가능한 자유 의지의 개념을 확립하는 데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관련 영상:

28:00 ~ 31:30

데닛 - 산타 바바라 주립대에서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어요. 프란시스 크릭의 (노벨 생물학 수상자) 책을 주면서, 첫번 째 그룹은 크릭이 의식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해석한 부분을 읽게 했고 두 번째 그룹은 크릭이 '자유 의지란 환상이다' 라고 말한 챕터를 읽게 했어요. 그리고 나서 두 그룹을 비교했더니 두 번째 그룹이 이후 수행한 각종 테스트에서 속임수를 쓸 확률이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갔습니다.

 

자.... 고전적 의미의 자유 의지가 환상으로 밝혀진다고 해서 여러분들은 별로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 없어요.

 

복권을 살 때 당첨 여부가 아직 정해져있지 않다면 공정하지요?
근데 사실 복권을 살 때 당첨 여부가 이미 정해져있다고 해도 상관 없어요. [주: 긁기형의 즉석 복권이 그렇죠]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복권의 당첨 여부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다 정해졌죠. [주: 양자역학쪽 이야기는 잠시 무시하자구요]

So what? 그게 뭔 상관입니까? 결국 복권의 당첨 여부가 비결정적이든 결정적이든 아무 상관 없잖아요? 같은 논리에서, 당신의 의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하든 비결정적으로 작용하든 그게 당신 자유하고 사실 별로 상관 없어요. - 데닛끝

 

데닛이 생각하는 자유 의지란, 주어진 환경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 – 그게 이익을 위해서든 아니면 본인이 추구하는 높은 가치를 위해서든 – 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자유 의지를 저렇게 정의하면 사실은 결정론적인 세계관에서만 자유 의지가 가능하지요. 데닛은 사실 전통적 관점에서 주장하는 자유 의지 – 물질 세계의 인과율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반대로 물질 세계에 영향을 줄 수는 있는 능력 – 이란 것은 우리가 그런 게 있기를 바란 것일 뿐,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거니와 우리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히 좋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지식 체계, 우리의 성격, 주변인들과의 관계 등등은 모두 물질계의 것인데, 이런 것과 동떨어져서 자기 마음대로 우리 행동을 결정하는 우리 속의 쥐콩알만한, 그리고 신비로운 저 너머 세계의 의지… 그런 게 정말 필요할까요? 데닛은 그런 것이 있다면 오히려 우리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고, 진정한 자유는 선택의 자유이고, 선택의 자유는 결정론적인 세계에서만 성립 가능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칸트의 정언 명령을 따라 사는 도덕적인 인간도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자유’ 를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으아니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되다니.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제가 철학 전공자는 커녕 더러운 공대 출신인지라 데닛이나 채머스, 로젠탈 등의 이론을 10% 라도 이해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사실 본업도 꽤나 바쁜 지라 여기에 본격적으로 시간을 투자할 여건도 아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글을 올렸다가 지나가던 철학도분이 ‘너 님 완전히 헛다리 짚었네염 으흐흐흐’ 라고 댓글 다실까봐 좀 불안하긴 한데, 하지만 이렇게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야 저도 이 주제에 대해서 당분간 생각을 파킹해두고 생업에 본격적으로 종사할 수 있을 듯 하네요. [주: 여담이지만, 데닛 영감님이 어딘가에서 강연하다가 engineer 에 대해서 언급할 일이 있었는데, ‘engineer 들이 잘 살다가 갑자기 오오 난 철학에 관심이 있어! 하면서 철학을 막 파는 경우들이 있어요. 음….. 보통은 그 결과가 좋지 않아요’ 라고 하더라구요. 음하하하 고로 저는 그냥 영감님 신작이 나오면 읽으며 즐기는 수준으로 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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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엔
13/10/11 14:40
수정 아이콘
OrBef님이 내 지도교수님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13/10/11 15:53
수정 아이콘
레지엔님 덩치가 큰 편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전 덩치 큰 사람들한테 약합니다.
13/10/11 14:46
수정 아이콘
아.. 너무 재밌네요!
아이유라
13/10/11 14:54
수정 아이콘
호오 재미있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데닛의 책을 한번 사보고 싶어졌어요
물론 저는 비루한 물리학도라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13/10/11 15:54
수정 아이콘
우리의 의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 Sweet dreams
내 생각에 의식이란 이런 것이다 > Consciousness explained
진화론이 가지는 중대한 의미는 이런 것이다 > Darwin's dangerous ideas

이렇게 추천드립니다 :) 저는 세 번째 책이 제일 읽기 쉬웠습니다.
아이유라
13/10/11 18:28
수정 아이콘
우와... 언제나 느끼지만 참 다독가이신것 같아요
책추천까지 두번 감사합니다!
감모여재
13/10/11 14:5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데닛의 사상을 이리 쉽게 써주시는걸보니 학식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저도 컴퓨터가 고쳐지면 데닛의 자유의지의 진화에 대해 한 번 써보고싶네요.
13/10/11 15:55
수정 아이콘
그거 듣기만해도 두근두근합니다. 자유의지의 진화 이거 좋아요!
13/10/1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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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데닛의 저작물들을 꼭 한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위 설명들만 봤을때는 "유명세"가설도 의구점이 많이 드는것 같습니다. 특 히각각의 모듈이 신경을 통해 보내는 전기적 신호들이 뇌에서 교차하는건 사실인데 그와중에 유명세를 획득한것이 의식이다라는 설명인데, 여기서 유명세를 획득했다는게 무슨 의미인지가 분명치 않은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팔의 신경에서 오는 전기신호와 다리의 신경에서 오는 전기신호들이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며 그런작용들이 의식의 원천이겠지만 어떤 상호작용인지 이해하기에는 데닛의 설명도 많이 부족한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 의식을 관리자 없는 공장기계로 비유한 설명도 전혀 역겹거나 부정하고 싶은 느낌이 안드는게 그 기계의 작동원리가 매우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려우며 심지어는 인류가 지금까지 확립한 물리법칙만으로는 제대로 분석될수 있을런지도 미지수인건 분명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거대한 신비앞에서 설레는 느낌은 참 좋은것 같습니다.
13/10/11 15:59
수정 아이콘
예 사실 데닛 본인도 유명세 가설이 틀린 것일 가능성을 매우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데닛의 설명이 가지는 가치라면, 인지 철학자들이 보통 인간의 정신 세계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와 매우 동떨어진 것인 마냥 학처럼 고고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서 데닛은 인간이 결국 생물의 한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인지 철학 체계를 세운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생물의 한 종에 불과한 인간이 이 정도까지 한다는 게 놀랍지 아니한가!' 라는, 좀 역설적인 의미의 자부심이 생기기도 하지만요.

뇌의 작동원리와 관련해서 데닛은 계산주의 (뇌는 컴퓨터다) 입장을 취하긴 하지만 '인간의 뇌는 우리가 단시일 내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니 나는 뇌의 아키텍처나 싱크로 여부 등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도 안 쓸 거임'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매우 겸손하지요 :)
13/10/11 16:17
수정 아이콘
유명세를 할당(선택)하는게 자유의지가 아닐까요?
재미있는글 감사합니다. 시간내서 다시한번 천천히 봐야 겠습니다.
13/10/11 15:51
수정 아이콘
지각과 의식에 대한 설명이 명쾌하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Je ne sais quoi
13/10/11 15:57
수정 아이콘
무심코 읽다보니 역시~ 잘 읽었습니다
13/10/1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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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활동에 대한 좋은 이론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정신이 어떻게 육체와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따르면 정신 작용은 (여러 개의 모듈로 구성된) 뇌의 활동이기 때문에 육체의 일부로서 그런 고민은 해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식 또한 정신 작용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정신-육체 간의 의사소통(?)에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의식이 정신 작용의 부산물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전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신 '어떤 것에 대한 판단'과 같은 경우는 육체를 통한 지각 과정의 연장선 상에 있을 뿐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의식을 전부 설명할 수 있는 실험결과도 아닙니다.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냥 움직임이라면 어떨까요. 갑자기 손을 든다던가 소리를 지른다던가요. 그런 것까지 뇌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의지나 자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를 신비로운 저 너머의 세계로 보내버리고 의식을 정신활동의 부산물로 취급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본문을 제대로 이해한건지 모르겠네요.

+고민을 더 해봤는데 그냥 움직임이라도 습관적인 것이나 병적인 것이 아닌 이상 어떤 것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받은 행위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심심하다는 현재 상황에 대한 판단이라던가, 결정론에 대한 어떠한 판단에 영향을 받아 움직였겠죠. 그냥 움직임이라기보다는 판단과 그 판단으로 인한 행동 사이의 과정에 의식의 개입이 정말 없는 것인지 반문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13/10/11 16:42
수정 아이콘
의식이 정신작용의 부산물이라는 전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언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한다고해도 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증명하긴 힘듭니다. 적어도 현 시점에선 선택의 문제죠.

그래도 확실하게 알려졌다고 믿어진 fact들 중 하나는 뇌와 신경의 전기신호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감각이나 행동, 말 혹은 생각도 불가능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부정하는건 지구의 자전을 의심하는 것과 수준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13/10/1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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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본능의 영역은 데닛이 이야기하는 의식과 별개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본문에 말씀드렸다시피 데닛의 관점에서 perception 과 consciousness 는 별개이고 consciousness 는 뇌가 수행하는 무수한 병렬 처리 작업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니까요. 그 관점에서 보면 본능적인 움직임 역시 뇌의 판단에 따른 것이겠지만 (무릎을 두드려서 발작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무조건 반사는 예외), 그런 작은 판단은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기에는 유명세가 불충분했다... 라고 데닛이 대답할 것 같습니다.
13/10/1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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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말이 통 이해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ㅠㅠ 결정론적인 세계에서 선택의 자유라는 게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 거죠?
이오덕
13/10/1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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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왼쪽으로 도시고 한번은 오른쪽으로 도세요
몽키.D.루피
13/10/1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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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개념의 혼동일 수 있는데 말그대로 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란 개념적으로 오직 유일신만 가능합니다. 왜냐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존재가 두 명이 되면 필연적으로 한쪽의 자유는 침해 당하니까요. 오로지 하나의 존재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는 것이고 그 존재는 개념적으로 신이죠. 그리고 인간들은 일종의 시민으로서의 자유가 있는 겁니다.
칸트의 경우에는 이성의 윤리 명령인 정언명령을 따르는게 자유입니다. 인간 본성은 본능적으로 이 명령을 어기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본능을 거부하고 이성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거죠. 지금의 자유개념이랑은 좀 다른데 본문의 데닛의 개념과는 구도상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13/10/11 23:55
수정 아이콘
칸트의 입장에서의 자유는 정언명령을 따르기 위한 실천이성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거기에서의 판단은 비결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몽키.D.루피
13/10/12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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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하게 따지자면 결정론이라는 말이 안 어울리죠. 통념상 의무에 따라서 행하는 것을 자유라고 하지는 않는데 칸트는 의무에 따라서 행하면서도 실천이성의 자유를 인정하니까 데닛이 결정론 속에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개념상이 아니라 구도상 일맥상통한다고 했어요.
13/10/11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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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정치적인 자유란 부당한 압력을 느끼지 않으며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하니 결정론과 상충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자유를 필요로하는 개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내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 '꼭 비결정론을 필요로 하는' 개념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자유의지' 라는 단어만이 인과율을 초월하는 자유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데닛은 이것을 일종의 신비주의나 종교적 개념이라고 공격합니다. 애초에 그런 게 없는데 인간이 멋대로 이름을 붙인 뒤 그런 게 있는 것 마냥 행동한다는 것이죠. 부연하자면 자유라는 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내 행동을 결정함,' 즉 '판단' 이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것인데요, 데닛의 입장에서는

(인과율에 따라서) 주어진 조건을 보고 (인과율에 따라서 형성된) 내 인격이 (인과율에 따라서) 잘 판단해서 (인과율에 따라서) 내 행동을 결정

하면, 그것으로 자유의 개념은 충분히 만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위 문장에서 '인과율에 따라서' 라는 부분을 빼고 보면 전통적 의미의 자유의지와 별로 다를 것도 없지요. 여기서 오히려 전통적인 자유의지 개념을 엄격히 적용해보면

(인과율과 무관하게) 주어진 조건을 보고 (인과율에 따라서 형성된) 내 인격이 (인과율에 따라서) 잘 판단해서 (인과율에 따라서) 내 행동을 결정
혹은
(인과율에 따라서) 주어진 조건을 보고 (인과율과 무관하게 형성된) 내 인격이 (인과율에 따라서) 잘 판단해서 (인과율에 따라서) 내 행동을 결정
혹은
(인과율에 따라서) 주어진 조건을 보고 (인과율에 따라서 형성된) 내 인격이 (인과율과 무관하게) 잘 판단해서 (인과율에 따라서) 내 행동을 결정
혹은
(인과율에 따라서) 주어진 조건을 보고 (인과율에 따라서 형성된) 내 인격이 (인과율에 따라서) 잘 판단해서 (인과율과 무관하게) 내 행동을 결정

이 중 하나가 되어야 할 텐데, 1번은 미친 세상, 2번은 광인, 3번은 무개념, 4번은 금치산자죠. 이런 식으로 데닛은 인과율에 종속되어야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13/10/11 23:48
수정 아이콘
제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는데, 데닛의 입장에선 예컨데 컴퓨터 프로그램도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판단'이라는 부분에서 비결정론적인 입장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주어진 명령어를 보고 프로그램이 잘 작동해서 출력을 결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결과가 정해진 결정을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3/10/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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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닛은 뇌를 컴퓨터의 일종이라고 보긴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점이라면 컴퓨터는 타인의 목적을 위해서 타인에 의해 설계된 존재이고,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어나가는 존재이죠. 데닛은 그런 부분에서 인간과 컴퓨터의 차이점을 발견합니다. 즉 자유 의지는 진화에 의해서 창발한 현상으로 보는 거지요.

창발현상이네 뭐내 해봤자 인과율 따라가는 거 아뇨!

라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한데, 결국 이 비판 뒤에는 비결정론적인 자유 의지만이 자유 의지다라는 생각이 숨어 있지요.

물 그런 거 없습니다. 그건 결국 산소와 수소가 특정 형태로 결합한 것일 뿐이죠.

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맞고 어떻게 보면 틀리듯이, '자유' 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문제라고 봅니다.
13/10/1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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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데닛의 이론은
인과율에 따라서 창발적으로 형성된 '의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이런 경우라면 '의지'가 있다고 쓸텐데, 굳이 '자유 의지'라는 용어를 쓰는 걸로 봐서 제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결정론적으로 주어진 걸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양립가능론의 문제가 예전부터 이해가 안 됐어요. ㅠ.ㅠ
13/10/1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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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것이 비결정론에서만 성립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자유란 단어를 해석하는 한 방식일 뿐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죄수가 '난 이제 자유다!' 라고 말할 때 그가 꼭 '난 이제 인과율의 노예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이 좀 이상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라고 물어봅니다. '왜' 라는 질문 자체가 인과율을 전제하고 물어보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의 성격이 이상해도 '쟤는 성격이 왜 저래?' 라고 비난하는데 이것 역시 마찬가지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즉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는 우리의 의지가 인과율에 따라서 동작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자유 의지라는 단어를 볼 때만 갑자기 '인과율에서 자유로운 뭔가 초월적인 무언가' 를 연상하는데, 우리의 일상생활과 연관이 없는 개념이라고 봅니다.
13/10/12 00:36
수정 아이콘
대부분의 사람은 '자유'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인과율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상상하지 않나요?
예시하신 죄수의 사례에서 죄수가 "난 이제 자유다!"라고 말할 때, '난 감옥에서 풀려난 세시간 뒤에 마을버스를 기다리다가 교통법규를 위반한 택시에 치여 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 중 사고로 죽도록 결정되어 있지만 난 자유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인과율에서 자유로운 뭔가 초월적인 무언가'가 이상한 개념이긴 합니다만, '결정론적 세계에서의 자유의지'도 제 생각엔 엄청 이상한 개념이에요. 대충 '자유'라는 단어의 용법에 관대함을 보여서 자유가 존재한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결론이네요.

OrBef님은 양립가능론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함께 성립할 수 있다는 의견이신가요?
루치에
13/10/12 01:00
수정 아이콘
제가 예전에 썼던 글에서 긁어와 봅니다.
데닛의 글을 인용한 부분인데, 개인적으로 결정론과 운명론이 무관함을 간결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결정론이 참이면 당신의 미래도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정론이 참이면 당신의 본성도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나머지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반응하여 본성을 변화시키도록 설계된 실체가 되도록 진화했기에 우리 본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결정론에 대한 잘못된 걱정이 야기되는 것은 고정된 본성을 지닌다는 것과 고정된 미래를 지닌다는 것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 혼동은 우주에 대한 두 관점을 동시에 고수하려고 할 때 생긴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눈 앞에 펼쳐 보는 '신의 눈' 관점과 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행위자의 관점이 그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신의 눈 관점으로 보면 변하는 것은 없으며- 우주의 역사 전체가 '동시에' 펼쳐진다 - 비결정론적 우주 조차도 궤적들이 가지를 뻗어 가는 정적인 나무와 다름없다. 살아가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고 행위자들도 그런 변화에 맞추어 변한다."
13/10/12 01:28
수정 아이콘
사실 인용하신 댓글을 읽어도 뭐가 다른 지 모르겠어요. '고정된 본성을 지닌다는 것과 고정된 미래를 지닌다는 것을 혼동'한다는 부분에서 더더욱요. 본성은 변하겠지만 변화 자체는 결정되어있잖아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할 수는 있지만,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걸 자유라고 할 수 있나요?
루치에
13/10/12 01:53
수정 아이콘
선비 님//

인간은 자연계에서 최고 수준의 선택 기계라고 합니다. 상황 1인 경우, A라는 행동을 하라는 단순한 수준의 행동패턴을 넘어서서, 상황 1인 경우, A-Z까지의 선택지를 비교하여 선택하는 매커니즘을 진화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데닛이 말하는 '자유'란 저런 의미에 가깝죠. 그런 의미에서 본성이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개구리나 인간이나 특정한 자극이 주어졌을 때 특정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개구리에 비교하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패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습니다.

고전적인 의미의 결정론의 정의 - 매 순간 물리적으로 가능한 미래는 단 하나 뿐이다. 에 따른다면 데닛이 말하는 자유라는게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내리는 '판단' 역시 '신의 눈' 관점으로 보면 어차피 결정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특정한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경험'이 의미가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잖아요? 제가 살아온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고, 전 그런 의미에서 결정론이 운명론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13/10/12 01:58
수정 아이콘
루치에 님// 음...말씀하신 자유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근데 운명론이라는 건 어떤 의미로 쓰신 건가요?
루치에
13/10/12 02:03
수정 아이콘
선비 님// '어차피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으니 내가 하는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류의 허무주의요.
13/10/12 02:17
수정 아이콘
루치에 님// 아 호메로스 시대의 운명론을 떠올려서 헷갈렸나봐요.
13/10/12 01:12
수정 아이콘
루치에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모른다. 그렇다면 설령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는 세상이더라도 당신의 운명을 찾아가는 이 여정이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 이성적인 측면에서 적절한 답변 같습니다.

감성적인 측면에서는, 선비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유 의지는 없다' 라는 말을 듣고 그 말에 설득이 되어버리는 순간 인간은 fatalist (운명론자라는 뜻인데,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입니다) 가 될 확률이 매우 높지요. 해서 비결정적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학자들이 (일단 학계에서는 이쪽이 대세입니다. 비결정론쪽은 이미 신학자들이나 가끔 이야기할 뿐, 세속 학계에서는 전멸에 가깝지요) 본인들의 학설을 강연하면서도 항상 '너무 걱정하지마. 내 말이 맞다고 해서 당신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게 아냐' 라고 부연을 붙이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그런 우려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저역시 유물론적, 결정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이후부터 커리어 관련한 퍼포먼스가 눈에 띄게 낮아졌었습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널리 퍼뜨리려고 하지 않고 종교인에 대해서 - 비록 저는 그들의 말을 전혀 신용하지 않지만 - 매우 관용적입니다. 몰라서 좋은 사실도 세상에는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느냐? 하면 결국 루치에님이 바로 위에 달아주신 저런 방향으로 탈출구를 찾았습니다. 저렇게 깔끔한 논증을 통해서 털어버린 것은 아니고, 붕알 친구와 이 주제로 대화를 하다가 친구가 해준 말이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지요.

"그래 니 말이 다 맞아서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내 모든 판단은 인과율에 따라서 돌아간다고 치자. 그래도 넌 꽤 괜찮은 놈이야. 그리고 인과율에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괜찮은 놈으로 살면 죽을 때 큰 후회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라고 해줬지요. 아직도 완전히 나온 것 같진 않지만, 그럭저럭 살 만 합니다.
13/10/12 01:23
수정 아이콘
그렇군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널리 퍼뜨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비결정론적인 것 같......

저는 앞으로도 결정론자가 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어쨌든 자유의지라는 게 있다고 믿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걸 아니깐요;
틀려도 틀리도록 결정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자유의지는 참 흥미로운 주제인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시간의 속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데, 혹시 시간에 대한 글을 써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13/10/12 01:29
수정 아이콘
선비 님//
[어쨌든 자유의지라는 게 있다고 믿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걸 아니깐요; ]

그렇죠. MEME 이론에 대해서 들어보셨겠지만, Gene 이 물질계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듯이 밈은 문화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아이디어라고 보는 이론이지요. 데닛은 자유 의지나 종교를 '인간의 생존에 어마어마하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이 아님에도) 수천년에 걸쳐서 대다수의 문화권에서 살아남은 강력한 밈'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밈을 받아들인 사람이 이 밈을 거부한 사람에 비해서 생존 확률이 극단적으로 높고,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반복적으로 전해져내려왔다는 것이지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는 쪽이 비교 불가능한 수준으로 우리 행동에 도움이 됩니다.

시간에 대해서는.... 저도 흥미있는 주제이긴 하지만 글로는 못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 제가 해당 주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진짜 거의 없고, 2. 일단 생업 전선이 뚫려서 밀려들어오는 적군을 막아내는 것이 급선무인지라 :)
13/10/12 01:41
수정 아이콘
OrBef 님//
음... 제가 쓴 이득이라는 말은 틀릴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었어요.

1. 자유의지가 있고, 자유의지를 믿는다.
2. 자유의지가 있고. 자유의지를 믿지 않는다.
3. 자유의지가 없고, 자유의지를 믿는다.
4. 자유의지가 없고, 자유의지를 믿지 않는다.

여기서 2,3번은 잘못된 믿음이고, 4번은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내가 믿고 안 믿고는 결정되어 있을테니까). 역시 1번을 믿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죠.

근데 왜 전 자유의지를 믿는데도 왜 그렇게 부정적이냔 소리를 들으면서 살까요... 하하...
13/10/12 01:43
수정 아이콘
선비 님//
오오 이것은 파스칼의 내기와 비슷한 논증이군요. 예 저도 말씀하신 논리에서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비님이나 저나 이제 좀 긍정적으로 살아보십시다!
13/10/12 00:25
수정 아이콘
인격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네요.
1. 인격이 의식이라면, 의식이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가 되기 때문에 의식을 정신활동의 부산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2. 인격이 의식을 포함해야만하는 정신활동이라고 하더라도 위의 문제에 걸쳐있게 되는 듯합니다. 분리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인격이 의식을 포함하지 않아도 되는 정신활동이고, 인격이 결정하는 행동이 의식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비상식적인 것 같습니다.

1번이나 2번처럼 의식이 의지로서 행동을 결정한다면 현재로서는 물리세계의 인과율로 해명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위의 1~3은 이 글[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43969 ]의 그림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인격이 의미하는 게 정말 3번과 같다면 이때의 자유가 어떤 의미일까요. 의식이 행동을 결정하는게 아니라, 그런 것처럼 느낄 뿐일텐데요. 어떻게 정의해야 이런 상황을 자유롭다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선비님과 마찬가지로 제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격과 자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3/10/12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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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문 철학자가 아닌 관계로 용어를 좀 혼동해서 쓰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방식은 대충 이렇습니다.

우리 인격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합한 것이다.
우리 인격은 우리의 외부 세계와 내 내면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여 인과율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런 결정 과정 중에서 일부는 우리의 의식의 대상으로 떠오르지만 어떤 것은 무의식 수준에서 끝난다.
우리의 의식은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결정을 통보받는 입장이다.
하지만 결정을 내린 주체는 결국 우리 인격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의식적인 결정'이 아닐 뿐이다.
고로 의식이 수동적인 입장이라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의 입장입니다. 자유 의지에 대해서는 선비님께 방금 달아드린 댓글로 갈음하겠습니다.
13/10/12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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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내 행동을 결정함,' 즉 '판단' 이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것]이라면 내 인격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내 의식이 자유롭다고는 말할 수 없겠군요. 그런데 '나'가 고정된 자아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의식은 자유롭지 않은데 인격을 자유롭고 그 인격을 괄호 안에서처럼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는 또 의문이 듭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데닛의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13/10/12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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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이렇게 된 거 청와대로 쳐들어간다!
13/10/13 06:04
수정 아이콘
자유의지란 선택과 관련돼 있는데 이 선택 가능한 상황이 어떻게 열리느냐에관해서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위험한 높은 곳에 있을 때 뛰어내리는걸 저 아이가 자유했다라 하지않죠.그냥 바보죠. 그러나 그 밑에 누군가 확실히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면 즉 미래가 결정적이면 아이는 선택의 상황이 열리죠.그래도 좀 불안하지만 미래가 신의 의지정도로 확실할 때 아이의 선택의 역동성이 가장 커지죠. 이게 몰트만인데
13/10/13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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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닛은 무신론자라 이렇게 말할수 없는겁니다. 결국 미래를 과거로 부터 작도해와서 미래를 현재에 적용해야합니다. 과거가 결정적일 수록 미래가 결정적이고 현재의 선택가능한 상황이 열리는거죠. 확률이 개입되고 신의 의지적 확실성은 없기에 선택의 자유는 제한되지만 자유의지에 대해 좀 불안해도 뛰어내리던가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3/10/1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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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물론 만세~!!! 는 오버고 올려주시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투박한 생각입니다만 진화론은 역사화한 유물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진화의 목적이 있는지 없는지 (아마도 우리는) 판단할 수 없을테니 '나는 자유로운 존재다'라는 말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나는 저 사람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말은 크게 흠잡을 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머리 속의 기계가 (진짜 기계와는 다르게) 다른 사람의 기계들과 완전히 똑같을 필요는 없는 거겠죠.

딴소린데 철학에 대한 메타 담론을 하나 조만간 긁어오겠습니다. 생각하기 따라서는 시사점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적인 즐길거리는 될 거 같아서요.

중요한 건, 늘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3/10/11 22:35
수정 아이콘
오오 말씀을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합니다!

진화에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유신 진화론쪽에서는 목적이 있다 유물 진화론쪽에서는 목적이 없었는데도 이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고 보는 쪽입니다. (그런 견해가 올바른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목적 없는 진화 프로세스가 어떻게 해서 목적이 없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이런 결과물을 거둘 수 있었는가! 만을 주제로 드립다 파고 들어가는 책이 두 권 있는데,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이 과학의 관점에서, 데닛의 '다윈의 위험한 생각' 이 철학의 관점에서 잘 다루지요. 둘 다 저같은 비전공자가 보기에 크게 부담 없는 책이었기에 추천 드립니다.

그리고 그와 별도로 '나는 저 사람과 다르게 생각한다' 라는 말에 흠이 없다는 말씀에는 완전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몽키.D.루피
13/10/11 20:27
수정 아이콘
자유의지 부분을 읽으면서 칸트가 생각났는데 역시 마지막에 언급해 주시는군요 크크
13/10/11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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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말로 몽키님이 예전에 그런 논지의 댓글을 달으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
루치에
13/10/12 01:0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인지과학에 한 때 관심이 가서 이것 저것 읽어보곤 했었는데, 생업이 바쁘다보니 예전에 주워들은 지식도 다 까먹어 가는 거 같네요.
책장에 꽂힌 책들 먼지 좀 털고 읽어봐야겠어요.
감모여재
13/10/12 09:45
수정 아이콘
데닛에 대한 관심이 높으니 좋군요. 예전에 최재천교수님께서 데닛에대해 글 쓰셨던게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http://m.navercast.naver.com/mobile_contents.nhn?rid=21&contents_id=3373
13/10/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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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님이 개미 제왕 윌슨한테 박사 받은 그 분이죠? 이 분이 벌써 석좌교수가 되셨네요....
질보승천수
15/03/15 21:38
수정 아이콘
의식의 기원 시리즈랑 칼 세이건 - 내 차고 안의 드래곤 좀 스크랩하겠습니다.
오래된 글이라 답변이 달릴 거 같진 않지만서도........
15/03/16 01:18
수정 아이콘
네 얼마든지요. 댓글 알리미때문에 오래된 글이어도 다 보입니다 :)
sway with me
16/04/19 01:52
수정 아이콘
오래 전에 남기신 글이지만, 잘 읽고 갑니다.
Consciousness는 왠지 attention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군요.
덕분에 1시간 넘게 즐겁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데이터 분석을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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