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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7/21 11:41:02
Name 안동섭
Subject [일반] 성리학의 탄생(1)
제가 할 수 있는 기능재부 재능기부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한 번 써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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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존의 학설



엔하위키를 참조해봅시다.

"그런데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서 불교가 요즘 한국기독교처럼 사회적으로 폐단을 일으키게 되면서 점차 불교를 극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기게 됐고, 이 때부터 유교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학계에서 가장 유행하던 해설은 크게 두 가지, 사상계의 변화를 사상계 안에서 찾으려던 내부원인론과

사상계 밖에서 찾으려던 외부원인론으로 들 수 있습니다.

외부원인론을 외치던 분들이 대개 중공 학자들이었고, 이들의 학설은 중국철학사 전체를 유물론과 유심론의 대결로 칼로 자르듯 견강부회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 + 전통시대의 해설을 적절히 조합했던 게 바로 위와 같이 "불교의 진격을 막아내기 위한 유교의 대반격" 과 같은 해설이었죠.

이게 딱히 틀린 해설은 아니지만, 충분한 해설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즘 나오는 반론들을 살펴봅시다.

먼저 송나라 당시는 불교의 사회적 폐단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사회적 폐단이라고 할만한 일들은 대개 당나라 중기에서 말기에 집중되어있고, 그나마 당송 교체기의 혼돈의 카오스 속에 전 국토가 반파당하면서 누구의 폐단이 심하다 어쩌다 주장하기 민망할 만큼 국토강산이 모두 다 같이 폭망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 혼란이 송조의 건국과 함께 수습되면서 다시 번영기를 누리게 되는데, 불교나 유교나 뭐 딱히 이 번영에 대한 지분이 크지 않고, 방해한 것도 없고, 여튼 그렇습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사회경제적 흐름이 유교나 불교에 영향을 줬다면 모를까, 유교나 불교가 사회경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쳐서 그 책임을 놓고 유교가 불교를 비판하고 뭐 그런 그림이 잘 안나온다는 겁니다.

다른 한 가지는

성리학의 탄생을 마치 불교를 극복하기 위한 유교인들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처럼 묘사하는 것에 대한 반론인데,

가만 보면 태동기의 주요 성리학 인사들(예컨대 정호 정이 형제라든지)이 '불교'를 직접 놓고 비판한다기보다는 주로 '불교를 물고 빠는 관료들'을 비판했다는 겁니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공맹을 성인으로 받드는 척하면서 경전해석은 통째로 불경처럼 하는 관료들이 그게 마치 공맹의 진리인양 떠드는' 꼴을 제일 혐오했습니다.

반면에 오히려 각잡고 출가해서 수행하는 승려들에 대해서는 칭찬의 코멘트를 남긴 사례도 있는 것과 대조적이죠.

또, 정씨 형제의 특급 제자를 보통 4~5명 정도 꼽는데, 그들 대부분이 불교 자체에 대해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특히 한 명은 매우 우호적이었는데 이점은 나중에 주희가 격렬히 비판합니다)

비유하자면, 일본이 싫다기보단 민족주의자인척 코스프레하면서 속으로는 친일파인 조선 지식인들이 싫다랄까요 -_-;(?)

뭐 물론 태동기로부터 100여년이 흘러 주희가 등장하게 되면 양상이 조금 달라지게 됩니다. 주희는 정말 불교가 싫었거든요.

즉, 성리학이 유교재해석운동임은 분명하지만, 그게 과연 불교라는 거인을 무찌르기위한 반작용이었냐라고 한다면

글쎄요, 결코 그게 다라고 할 수 없다는 거죠.





2. 요즘 유행하는 해석 - 외부원인론


그리하여, 오늘날 학자들이 가장 섹시하게 생각하는 해석은 그 원인을 사상계 밖에서 찾아서 성리학의 탄생을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음,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성리학의 '탄생'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왜 지식인 층 일반이 성리학에 '열광' 했는가를 분석한다고 해야 옳겠네요.

누구나 시대를 앞서가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청중이 그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그 말 자체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겁니다.

(여담이지만,1990년대 말, 삼성전자가 주당 2만원하던 시절, 이게 대박이 날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죠. 아무도 안믿었지만 -_-;;)

요즘 학자들이 궁금해하는 문제는 결국 그겁니다.

"도학(道學)은 순수 사상의 측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선 하나의 운동(movement)로 보아야한다. 이 운동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결국 전 중국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인쇄술과 과거제도




3. 인쇄술

일단 당나라와 송나라의 인쇄-출판 시장은 그 규모에서 차원이 다릅니다.

당나라 때 인쇄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말 대부분의 대부분의 대부분의 경우 필사본이었던 반면

송나라 때는 목판인쇄가 굉장히 활발해지기 시작합니다.

"발굴"된 문헌들을 제외하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전 자료들은 대개 그 최고의 판본아 송나라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다는 게 이 점을 방증해줍니다.

(심지어 선불교 문헌들도 그 위대한 당나라 때의 공안들은 모두 송나라 때에 와서야 수집되어 정식으로 '인쇄'된답니다.)

재밌는 건, 인쇄기술이 똑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술에 대한 입장이 두 왕조에서 사뭇 달랐다는 겁니다.

자, 여기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성경이라고 해볼게요.

하나는 우리 아버지께서 피땀흘려 정성스레 필사한 성경이고

다른하나는 어디어디 출판사에서 한 판에 10만부씩 찍어내서 각급 교회에 돌리고, 그 각급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무상 배부하는 성경입니다.

당나라 지식인층들은 이 둘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전자의 가치와 후자의 가치는 비교도 안됐어요.

그런데 이 문화가 조금 바뀌어서 송나라 때에 와서는 "내용이 같은데 뭐..."정도로 바뀝니다.

오히려 "필사한 쪽은 오류가 더 많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생길만큼 인쇄된 책에 대한 인상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같은 차이는 국가 단위의 인쇄사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나라 까지는 중국에 들어선 통일왕조들이 "석경(石經)"이란 걸 만들었습니다.

많은 필사본들을 수집하여 주요 경전의 정본화사업을 진행한 후, 그렇게 확정된 정본을 거대한 비석에 새겨서 수도에 세워두는 거죠.

이렇게 세워두면 이 국가공인 '정본'을  탁본하기 위해 지방의 많은 지식인들이 수도에 관광을 옵니다.

이는 신생왕조의 문화적 종주성, 권위를 확인해주는 일종의 상징이었죠.

그런데 송나라 때에 와서는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그냥 목판에 새겨서 인쇄를 두르르르르 해서 각급 지방으로 뿌려버렸습니다.

신선한 변화죠.

이 변화의 여파는 대단했습니다.

이제 전국의 먹물 좀 먹었다는 룸펜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국가의 정본에 직접 접속할 수 있게 되었고(여전히 비싸긴 했지만, 개봉까지 가서 탁본해오는 수고에 비한다면!)

그러다보니 이 룸펜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다른 판본들과 비교해가면서 무려  국가 정본의 '오류'를 찾아낼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이런 대규모 인쇄물을 만들 때 마다 각급 지식인들이 오류 리스트를 만들어서 조정에 조심스럽게 보고하는 일이 잦아지게 됩니다.

제가 기억은 정확히 안나는데 1000년대 초반 쯤이었나 전한서와 후한서, 사기를 정본화해서 뿌렸더니 뿌릴 때 마다 오류리스트가 빗발치는 바람에 수정 재수정 재재수정 재재재재수정 작업을 근 50년간 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재밌는 건, 송나라 조정의 유연한 태도입니다.

사실 돌에다 새긴 경우보다는 나무에다 새긴 경우에 "수정작업"에 대해 더 너그러울 수 밖에 없겠죠.

석경을 갈아치우는 건 정말...굉장한 일 아니겠어요 -_-;;?

여튼 이런 변화로 인해 지방의 룸펜들은 이제 그냥 룸펜이 아니라 주요 서적들의 "전승" 과정에 참여한 당당한 일원이라는 자부심들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교 물을 먹은 이들 지식인들에게 있어 텍스트의 "전승"이란 그냥 후손들에게 좋은 책을 물려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에 창성했던 진리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없어지는 현 상황에 있어 이 진리를 무사히 후대로 운반하는 위대한 문화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폭발한 거죠.

게다가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건국자들이 만들었던 "진리"가 담긴 텍스트들을 최초로 보기좋게 정리해서 후대로 "전승"했던 이가 바로 공자입니다. (사마천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육경(시, 서, 역, 예, 악, 춘추)을 직접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텍스트 수정 작업은 사실 공자가 했던 진리 전승 작업의 "따라하기"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여러모로 부심 돋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과거제도


자, 이제 두 번째 기둥인 과거제도입니다.

앞서 인쇄술의 발달이 지식인층의 새롭게 돋궈진 "부심"을 설명해주었다면

과거제도의 경우는 문제의 지식인층의 수가 급증하게된 원인을 설명해줍니다.

자,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아요.

현재 우리나라의 평범한 젊은이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수단이 뭐뭐 있을까요?

의대 들어가서 의사되기

치대 들어가서 치과의사되기

사시 붙어서... 아 이건 없어졌구나 ㅠ.ㅠ

각급 국가고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서 커리어를 달리기

유능한 방송인이 되기

사업이 흥해서 성공하기

대기업에서 쭉쭉 승진해서 임원급 짱짱맨이 되기

기타등등 커리어를 밟다가 의원급 정치인이 되기



이렇게 성공하는 인물들이 '많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성공을 향한 길 자체는 다양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송나라 때 중국은.... 현실적으로 과거시험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당나라 때부터 본격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고 배웠습니다.

르응!?

그렇다면 당나라와 송나라의 과거제도에 무슨 차이가 발생했던 걸까요?

제도가 상당히 복잡한데...

좀 간추려서 말하자면 당나라 때는 상위 문관 중 제대로 과거를 뚫고 올라온 관료들이 1%나 될까말까 했던 반면

송나라 때는, 시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최대 50% 까지도 진사 출신들(과거시험의 최종 합격 단위가 진사였습니다)이 장악했었죠.

게다가 최상위 문관으로 시선을 옮겨보자면, 송나라 때는 과거시험 출신이 짱짱맨이라는 인식이 퍼진 덕분에 최상위급 문신은 진사 출신이 아니고서는 진급하기 매우 어려웠던 반면 당나라 때는 음....

전공자 사이의 우스갯소리중 하난데, "아니 당나라 재상은 원래 다 배(裵)씨만 뽑기로 약속한거야?" 라는 말이 나올 만큼

특정 문벌들이 장악했었죠.

여튼, 조정에서 전격적으로 과거시험을 확장하고 또 그 출신자들을 우대하기 시작하면서

진사급제는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고, 무수한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과거에 매달리게 됩니다.

문제는, 합격자보다는 탈락자들입니다.

합격만 한다면 일족을 일으킬 만큼 보답받을 수 있지만

탈락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한 서른 마흔까지 탈락만 밥먹듯이 하다보면

배운건 글이요 나이는 먹었겠다 생업은 없고

큰일납니다.

더 야속한 건, 과거시험이 여러단계라는 건데요

성인 문관만 놓고 보더라도 지방에서 보는 향시를 통과하면(그 지방이라는게 남한 면적 뺨친다는게 함정), 그 합격자만 모아서 도성에서 회시를 봅니다(응시자만 만명을 헤아리는데 합격자는 쥐꼬리라는게 또 함정), 이 합격자만 모아서 다시 어전에서 전시를 봅니다.(이건 사시3차의 사례처럼 굳이 탈락시키지는 않지만 등수를 정하는 시험 정도입니다. 물론 이 등수에 따라 진급길에 손익이 있다는 것도 함정).

제일 골치아픈 경우가 향시합격-회시탈락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합격을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데

합격이라고 하기에는... 회시에 탈락한 이를 임용해주는 경우가 없습니다.

불합격이라고 하기에는... 향시 합격자는 그 지방에서는 일단 다 영웅들입니다. 지방정부가 우대해주고, 회시보러가는길에 지원도 팍팍 해줍니다.

그 지방 어디를 가나 명사가 되어있고, 여기저기서 초대도 많이 받습니다.

이들을 향신, 혹은 신사라고 부릅니다(영어로는 Gentry)

이들은 딱히 생업이 없으면서도 지방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룸펜이 되고,

다들 재능이야 뭐 출중하기 때문에 저술, 연구, 강학 등의 문예사업을 벌이며 향촌활동을 합니다.

이들의 수가 송나라의 과거제도 개혁과 더불어 급증하게 되고

돈만 많은 지주층과는 달리, 이들은 문화적으로/정치적으로 자신들이 (과거 실패에도 불구하고)여전히 유의미한 존재이기를 확인받고 싶어했습니다.

이들은 인쇄술 덕분에 비교적 접근이 쉬워진 많은 텍스트들을 탐독하면서

'정계'에는 비록 진출하지 못했지만,

정계의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학업을 연마하고, 그 학업에 힘입어 향촌에서의 영향력을 점증시켜갑니다.

자...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 화약고에 불을 당겨줄, 이 '실패자'들의 삶의 의미를 되찾아줄 사상적 기획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도학(성리학) 뿐 아닙니다. 북송 초중반, 몇몇 특급 관료들과 문인들이 이들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도학의 기획이 이들에게 최종적으로 선택받게 됩니다.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요?


....


제가 이제 씻고 결혼식장 가봐야해서..ㅡㅡ; 다음에 이어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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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21 12:14
수정 아이콘
중국은 원의 지배에 적극 협력했던 불교외의 다른 세계관이 요청됐던 것같고
고려는 호장계층이 중앙진출을 무관직으로 주로해야하는데 염증을 느낀 탓으로 보입니다.
안동섭
13/07/21 22:44
수정 아이콘
흠.. 오히려 원나라는 성리학을 띄워준, 도학자들 입장에서는 고마운(?) 나라입니다.
원나라가 성리학(사실은 주자학)을 국가공인으로 만들어준 최초의 통일국가라서..흐흐
펠릭스
13/07/21 12:17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성리학에 관한 최근의 학설들을 반영하는 단행본이 있나요?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요.
안동섭
13/07/21 22:44
수정 아이콘
피터 볼 저, 김영민 역의 "역사속의 성리학" 추천합니다.
더펄이
13/07/21 12:20
수정 아이콘
불교없는 성리학은 팥없는 팥빵
안동섭
13/07/21 22:45
수정 아이콘
하지만 팥=팥빵은 아니죠. 팥빵 또한 오리지널 웍입니다 :)
13/07/21 16:21
수정 아이콘
절단신공이 대단하시네요. 막 흥미가 올라오는데... 농담이고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글 기다리고 있을게요.
카서스
13/07/21 16:29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근데 당시에는 향신 신사가 아닌 사대부라 불리지 않았었나요?
사대부와 신사는 보유하고 있는 특권에서 부터 차이가 나는 걸로 알고있었는데요.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설명 부탁 드립니다.
안동섭
13/07/21 22:49
수정 아이콘
사대부는 본래 사 + 대부의 합성어입니다.
주나라 당시 예제상 등급이 공-경-대부-사 순서로 이루어졌었어요.
사 부터가 엘리트였고, 공이나 경이 워낙 드물다보니 사+대부가 엘리트 계급의 대명사처럼 자리잡게 되었죠.
향신이나 신사나 다 좀 늦게 나온 말인데요, 紳자가 관직에 진출한 자가 두르는 혁대를 의미합니다.
향신은 고향에 머무르는 벼슬아치, 신사는 그냥 벼슬아치라는 말이었는데
나중에 확장되어 위와 같은 특정 계층을 지칭하게 된 거죠.
정리하자면 사대부는 오래전부터 관료가 될 수 있는 엘리트계층을 지칭하던 말로 더 광범위한 것이며
향신이나 신사는 주로 송나라 이후에 과거준비생들, 혹은 계속되는 실패자들이 향촌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지칭하는 말로 자리잡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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