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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2/12 13:51:45
Name 오름 엠바르
Subject [일반] 삶의 한 페이지를 접다.

예전 아직 하이텔이 전성기였던 시절에 알고 지내던 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냥 귀찮으니 꼬마라고 부르죠.
저보다 한 세살 혹은 두살 정도 어린 남자애였는데 굉장히 마르고 숫기없는 성격을 가진 애였습니다.
몹시 무덥던 여름에 꼬마의 집이 아마도 대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전에 있던 저희 집에 놀러왔더랬습니다.
잘 대해 주고 싶었는데 썩 그렇진 못했습니다.
전 저대로 바빴고 룸메이트는 룸메이트대로 바빴으며 정작 그 꼬마를 초대한 애도 바빴거든요.
나름 노력했지만 꼬마의 짧은 체류기간 마지막날 안좋일이 생겨서 그다지 좋은 기억도 추억도 없이 그렇게 그 친구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직접적인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네요.
그 뒤로 하이텔의 세이기능을 통한 몇번의 메세지 교환 - 대충 미안하다와 다음에 올라오면 잘해줄게 같은 대화였습니다 -
몇번의 전화통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조금은 독특한 어감의 이름을 가진 꼬마는 그 뒤로 제 기억에서 천천히 잊혀져갔습니다.
다만 그 이름, 요즘 아이들이 갖기엔 좀 옛스런 느낌의 이름만이 뇌리에 남을 뿐이었네요.

지난 주 언제쯤인가 티비를 보는데 꼬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오더군요.
퍼뜩 꼬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요샌 뭘하고 지내고 있을까 같은 당연한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잘 지내고 있겠지.
그 마르고 숫기 없는 얼굴이 살짝 웃으며 사투리 섞인 억양으로 '누나'라고 부르던 것이 기억 납니다.

그리고 조금 전,
정말 우연찮게 그 꼬마가 죽었다는 글을 봤습니다.
몹시도 아팠다고 하는군요.

눈물이 나거나  하지 않습니다.
위에 길게 적은대로 꼬마와 제 인연은 서로를 위해 울어줄만큼 크지도 깊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저 젊은 나이에 내내 아팠다가 죽었다는 사실이 마음이 무겁고,
그 애와 저의 마지막 기억이 그다지 좋았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슬퍼집니다.
그리고
제가 인생에서 가장 예뻤을 그 이십대, 그 이십대를 빛나게 해줬던 하이텔 시절도 끝났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때 만난 인연 중 몇몇은 아직도 질기게도 이어지지만
찌직거리는 모뎀 연결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은 다 끝났네요.

꼬마에게 좋은 기억을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고
결국 상처만 가득한 제 이십대에게 미안하고 그런 하루입니다.

- 꼬마가 극락에 갔을지 천국에 갔을지, 아니면 집 앞에 술이 흐르고 미녀가 시중 들어주는 곳에 갔을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좋은 곳에 갔겠죠. 그곳에선 아프지 않으려니 합니다.
- 아, 인터넷은 좋은건가요. 끊어진 인연의 종말을 이렇게 알게 되니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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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J
08/02/12 14:19
수정 아이콘
마음이 안좋으시겠어요...

끊어진 인연을 찾지도 않고 그다지 기억하지도 못하는 편이라...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소식들은 참 기분을 묘하게 만들지요.

지금도 그 인연들을 떠올리면
'아...잘 지내고 있겠지' 정도만 하는편입니다.
그네들이 어느순간 그때를 떠올렸을때,
나와 함께보냈던 그 시간들에 내가 미숙하였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리라는 것은 믿어주기를 바라지만...아니어도 할수없다고 생각하지요.


어쨌든- 놓아버린 인연에 대해서는 나쁜소식이면 듣고 싶지 않고, 좋은소식도 '그렇구나-'이상은 없으니
인연이 끊어졌을때- 기억도 지워지는 것을 바라고는 합니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닿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처음뵙겠습니다-'하고 인사할수 있게.
또...이기적인 욕심일테지만, 기억속에서 나와 그사람들의 시간들이 윤색되지 않도록...
(흔적도 없어 '펑-'하고 사라지기를 원하지요.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언젠가 사라질날이 오면 그리해야지..하고는 합니다.)
arq.Gstar
08/02/12 16:42
수정 아이콘
연락해도 잘 안받고
어느순간부터인가 전화나 문자를 해도 별 반응도 시덥잖고,
그런 사람이 있는데
어느날 돈빌려달라고 전화오더라구요.

아.. 정떨어져.. -_-
08/02/12 17:59
수정 아이콘
뭐라 말할 수 없는... 옛 기억이 떠오르네요..
08/02/12 19:13
수정 아이콘
파트릭 모디아노의 청춘시절 끝부분이 생각나는군요. 이제 돌아오지 않는 시절이지 말입니다.
도시의미학
08/02/12 20:14
수정 아이콘
OrBef님// 참 깊이 와닿네요 ㅠ_ㅠ..

중학교때 우연히 통신이라는 걸 알게되고, 그 곳에서 활동하고, 여러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연락을 하곤 했지만 그게 하루, 이틀 뜸해지기 시작해서 결국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정말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아직도 연락을 하곤 하지만 그래도 그 몇몇 사람들 외에 연락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 애틋합니다. 지금이야 제가 온라인->오프라인으로 나가려고 마음을 먹는게 좀 수월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아서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시겠죠? 전혀 상관없는 커뮤니티지만 괜히 인사한번 남겨봅니다.

뭐랄까, 정말 안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다시 소식을 들을 수 있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꼬마분의 명복을 빕니다..
강예나
08/02/12 21:34
수정 아이콘
저도 한동안 호주에 유학간 친하게 지내던 동생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 애 싸이에 갔다가 그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참 많이 울었었죠. 사실 유학도 유학이었지만 병을 고치기 위해서 간거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잘 지내고 있으려니.. 하고 신경도 안썼던 제 자신이 참 바보같았답니다. 제 기억속에는 고 3이라 힘들다고, 그러면서도 해사하게 웃던 그 얼굴이 마지막 기억이 되었네요.
08/02/12 22:59
수정 아이콘
제가 예전에 썼던 글에도 있습니다만... 러시아 유학간지 몇년 안된 교회학교 제자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때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갑자기 기억이 떠올라서 눈시울이 또 붉어졌습니다. 철없게스리...
이카르트
08/02/13 10:27
수정 아이콘
위로를 해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보는 저도 마음이 아파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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