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3/04/18 02:43:02
Name Kemicion
Subject [일반] 해외봉사 전국시대(불면증 ver.)
해외봉사 전국시대다.
나름 3-4번의 장단기 해외봉사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내가 머문 마닐라의 NAIA 공항에 방학철인 7-8월 한두시간 쯔음만 머물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한국발 비행기 하나당 적어도 2-3개의 봉사활동팀이 입국하는 흥미로운(?)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패키지관광처럼,

1-2주의 기간동안,
별다른 준비없어도 적당히 수행할 수 있을만한 과업들과,
한편에는 끝내주는 사진을 만들어줄 DSLR 하나.
나를 충격에 빠뜨리던 그들의 열악한 생활 환경 체험,
쉽게 나를 환대해주는 너무나도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간간히 문화탐방이라는 이름의 유적지 방문, 혹은 쇼핑시간
마지막날 즈음에는 한국식당에 들려서 즐겁게 마무리.

한국에 돌아오고나면 자연스레 페북에 올라가는 그곳 아이들과의 행복한 사진.
눈뜨고 보기 힘들었던 그들의 생활 모습, 그리고 상투적인 감사.

매년 이런 형태의 봉사팀들이 수십수백개씩 몰려든다.
기업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몇년새 엄청나게 생겨난 해외봉사 프로그램 덕분에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해외봉사 경험이 있는 친구들을 찾을 수 있다.

뭐, 사실 해외봉사가 유행하고 있다는 게 그리 비판할만한 내용은 아니다.
봉사자가 별다른 목적의식이 없이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충분히 의미있고
솔직히 말해, 그 의미가 전무하다 하더라도 조금의 경제적 도움이나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그만큼 우리 사회가 타 국가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경제-문화적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기도 하고.

그런데 가끔은 아주 씁슬했던 기억들이 있다.
해외봉사, 아니, 봉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인식이 탑재되지 않은 채 봉사에 참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내가 봉사를 하는 이들도 나와 다른 사람, '타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끔씩은 잊곤 한다.나는 이를 타자화시켰다고 표현하곤 했다.
봉사의 수혜자를 박제되거나 이미지화된 개체로 생각해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 실수를 하곤 했다.

예 하나.
내가 인솔하던 봉사팀 일정에는 현지 빈민가방문일정이 잡혀있었다.
빈민가였기때문에,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길거리에 누워자는 것과 다를 것 없는 광경.
여러 봉사팀의 모습은 한결같다.
쪼그마하고 퀘퀘한 집안 곳곳을 뒤져보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냐며 그들을 동정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한편에서는 그 희귀한 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려 플래쉬 세례.

그런데말이다. 물론 사전동의를 받고 방문하는 거지만, 현지사람들 입장에서보면 이게 참 당황스럽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집에 들어와, 내가 불쌍하다며 울음을 터뜨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집안 구석구석 사진을 찍고 있다.
방문과 함께 가져오는 자그마한 선물들 덕분에 뭐 그리 티는 내지 않지만,
사실 그리 맘이 편치않다. 뭐 그래도 어쩌겠는가.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고 있다.
뭐 사실 이 글은 불면증에 못이긴 내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글이니.

가끔씩은 슬프다.
카톡프로필에, 페북 담벼락에, 아이들과 씨이익 웃으며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두는 걸 보노라면,
마치 잘 진열된 악세사리를 골라잡아,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인증하는 하나의 상품을 보고있는 느낌이랄까.
그 사진속의 아이들은 자기사진이 거기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3/04/18 02:52
수정 아이콘
그래서 봉사는 남들 모르게 하는 게 정답같습니다. 아주 가~끔 이런 일이 있다고 알리는 편이 봉사 받는 쪽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그런 경우를 빼면 웬~만하면 조용하게....

근데 사실 봉사 활동이라는 게 참 힘들더군요. 일주일에 한 번, 6개월 동안 빈민층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딱 6개월만 하고 기간 연장을 사양했습니다. 관광성 말고 제대로 봉사활동하는 분들은 그래서 참 존경합니다.
Kemicion
13/04/18 12:00
수정 아이콘
은근히 남몰래(정확히 말하자면 티내지않고) 꾸준히 봉사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사실 그런분들이 하시는 봉사의 경우, 아름답기 보다는 빡센데 대부분이라, 정말 존경할만한 분들이죠.
자제해주세요
13/04/18 02:53
수정 아이콘
솔직히 저는 해외봉사를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알바하면서, 인턴하면서 만났던 여성분들 중 해외봉사 다녀오신 분들은 페북이나 미니홈피에 사진 엄청 많이 올려놓으셨더군요.
웃긴건 그 분들 사진이 다 비슷비슷해요... 흐흐

여하튼 글쓴분 포함해서 해외봉사를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터라~
Kemicion
13/04/18 12:01
수정 아이콘
뭐 사실, 돈,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뭐 그걸 거기다 쓰는 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하겠지만요:)
클라우제비츠
13/04/18 03:03
수정 아이콘
스펙만 생각하고가시는 분도 있어서 그런것 같네요
여하튼 어디선가에서 수고하시는분들 화이팅요
Kemicion
13/04/18 12:02
수정 아이콘
사실 그걸 기업에서 제대로 스펙으로 봐주는 지도 의문입니다- 허허
몽키.D.루피
13/04/18 03:04
수정 아이콘
해외봉사가 아니라 해외봉사체험이죠. 이것도 일종의 스펙쌓기처럼 되어버려서..
근데 사실 진짜 봉사활동다운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처럼 우후죽순 생기는 해외봉사 프로그램 때문에 진짜 봉사단체를 찾기 힘들 수가 있습니다. 저는 굳이 단체를 통해 갈 필요 없이 인도 캘커타의 마더테레사 하우스를 추천합니다. 그냥 아무데나 날아가도 얼마든지 원하는 기간만큼 할 수 있어요. 인도가 체제 비용이 싸기 때문에 부담도 없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젊은이들과 함께 봉사활동 하는 것도 굉장히 좋은 경험입니다.
王天君
13/04/18 08:49
수정 아이콘
오오 이거 좋네요 감사합니다.
Kemicion
13/04/18 12:02
수정 아이콘
그런 의미에서 단순 봉사보다는 워크캠프를 추천하곤 합니다.
봉사라는 거창한 의미를 두지도 않고, 세계 각국의 청년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구요.
안철수대통령
13/04/18 03:57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주변에서도 봉사활동이 말 그대로 '봉사'가 되어야 하는데 '자랑'이 되어가고 있는것 같네요...
Kemicion
13/04/18 12:05
수정 아이콘
특히 연예인들의 봉사활동의 경우

NGO입장에서는 인지도 향상에 매우 유리하고
연예인들 입장에서는 이미지 개선에 효과가 좋다보니.
서로 윈윈하는 입장이라.

현지에 가서 아이붙잡고 사진만 왕창 찍다 오는 경우도 흔히 있다고 하더라구요.
뭐 물론 아닌 분들도 많습니다.
포포탄
13/04/18 06:49
수정 아이콘
그러고보면 과거 성인들의 일갈은 시대와 배경을 구분짓지 않고 통하는 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의 무주상보시, 예수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지고지순의 진리입니다.
13/04/18 16:13
수정 아이콘
본질을 관통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4490 [일반] 병인양요 - 프랑스군 철수 [8] 눈시BBbr6029 13/06/14 6029 6
44481 [일반] 강희제 이야기(1) ─ 평화의 조화를 위한 소년 황제 [15] 신불해7962 13/06/13 7962 21
44433 [일반]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경험한 기독교 이야기 (3. 마지막) [42] minimandu7007 13/06/12 7007 19
44284 [일반] [책 소개] 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 시사 활극 [10] DarkSide8053 13/06/05 8053 2
44264 [일반] "여긴 이단 김밥집, 절대 가지말라"..한 교회의 횡포 [114] 타나토노트11219 13/06/04 11219 6
44224 [일반] 개신교 방언 이야기가 나와서 조심스레 경험담 풀어봅니다. [130] 미스터H9695 13/06/03 9695 7
44220 [일반]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경험한 기독교 이야기 (2) [130] minimandu8603 13/06/03 8603 4
44139 [일반] 유부남 초급 베이킹 도전기 1/2 - 무반죽 발효빵 [31] k3mi5t5756 13/05/30 5756 0
44093 [일반] [책 소개] 굿바이 사교육 - 한국의 모든 학부모님에게 [11] DarkSide7470 13/05/28 7470 0
44084 [일반] 정관사 the를 아십니까? [41] Neandertal10533 13/05/28 10533 6
44070 [일반] [넋두리] 얼마야? 얼마면 되겠어?! [49] AhnGoon5314 13/05/27 5314 2
44043 [일반]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경험한 기독교 이야기 (1) [51] minimandu7223 13/05/27 7223 3
43456 [일반] 프로파일링 - "뒤셀도르프의 뱀파이어" 피터 쿠르텐 [7] Neandertal8086 13/04/27 8086 0
43334 [일반] 그리스도교에 대한 몇가지 오해들 [112] 하얗고귀여운8745 13/04/21 8745 0
43308 [일반] 차별금지법안의 좌초에 관하여 [19] 烏鳳4993 13/04/19 4993 3
43264 [일반] 해외봉사 전국시대(불면증 ver.) [13] Kemicion4610 13/04/18 4610 3
43194 [일반] 진격의 거인 재미있네요. - 단행본, 스포 유 - [32] tyro13565 13/04/14 13565 0
43104 [일반] '똑똑하다'란 무엇을까요? [28] chamchI4666 13/04/09 4666 0
43102 [일반] 여자친구가 남자인 사람 친구 만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107] 내사랑사랑아30231 13/04/09 30231 0
42808 [일반] [신앙] 루카치의 꿈과 나의 꿈 (다원적 민주주의 시대에 사는 한 기독교인) [29] 쌈등마잉4280 13/03/22 4280 4
42736 [일반] [잡담] 여느때와 같이 주제 없는 잡담. [92] OrBef6684 13/03/17 6684 7
42699 [일반] 제 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선출 [30] The xian7487 13/03/14 7487 2
42469 [일반] <단편> 디링디링-7(여러분 럭키세븐입니다!) [5] aura7457 13/02/28 7457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