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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3/31 06:23:22
Name 아마돌이
Subject [일반] [반픽션 연애스토리] 봄, 여름, 가을, 겨울 (4)
          첫 번째 겨울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대학생이 되어 처음 맞이한 방학은 나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다. 하나는 멋없고 굵기는 꼭 내 팔뚝만했던

내 구식 단음 핸드폰을16화음이 가능한 최신형 단말기로 바꿔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 마음을 담은

일생 일대의 고백을 대신해 줄 꽤 예뻤던 커플링이었다. 물론 둘 중에 하나는 주인 얼굴도 못본 채 아직도 올

림픽대교 아래 물 속에서 자고 있지만...

나는 효정누나를 더 이상 동아리에서 볼 수 없었다. 더 이상 따로 연락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학업보다 스쿼시에 열중했다.

1학기 때는 3.7 정도 되는 나쁘지 않은 학점을 받았지만 2학기가 되고 나는 동아리 신입생 중에

손꼽히는 스쿼시 선수가 되어 있었고 내 학점은 1점대로 내려가 학사경고를 받았다.

D대학교 스쿼시 동호회와의 친선 교류전에 나는 신입생으로는 처음으로 (다크호스로) 참가해서 D대학

에이스 선수의 혼을 빼 놓는 접전을 펼쳤고 무려 한 세트를 빼앗아냈다. 나로서는 져도 손해볼 일이

없는 경기였지만 3학년 에이스였던 그 분 입장에서는 이기고도 분명 진 기분이었으리라.  

영진이도 동아리 활동을 나 못지않게 열심히 했지만 선배들과의 관계도 좋고 스쿼시 실력도 하루하루

눈에띄게 늘어가고 있던 나를 선배들은 차기 회장감으로 이미 점찍어둔 모양이었다.

가을이 지나자 70명에 달하던 신입생들은 15명 정도만 남아있었다.

나는 동기들보다 선배들과 사이가 더 좋았지만  동기들과의 사이도 딱히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그 중에 유난히 나와 사이가 나쁜 여자동기가 한 명이 있었다. 그 아이 이름은 진주였다.

진주와 나는 뒤풀이 술자리에서 몇 번이나 언성을 높이고 싸우다가

선배들이게 주의를 받기도 할 정도로 신입생중에서 손꼽히는 앙숙이었다.

진주는 살짝 통통하고 귀염상이었지만 나 뿐만 아니라 동기들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진주는 나만큼이나 동아리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특히 선배들에게

싹싹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선배들에게는 평이 좋았지만 동기들 (특히 여자동기들)과는 잘

이야기도 하지 않는 편이었고 어쩌다 이야기를 하더라도 길게 얘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신입생 동기들 중에서 진주와 가장 많이 싸웠던 나는 언젠가부터 그 이유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진주는 단지 자기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게 서툴렀으며 또한 매우 솔직했던 것이다.

자기 솔직함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 때문에 그녀는 점점 말을 아꼈고 점점 동기들과 멀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더 이상 진주와 싸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싸울 일이 생기지 않았다.  

겨울방학을 앞둔 11월 말 즈음이었다. 동아리 회장 선거가 2주 정도 남아있었고 당시 동아리 내에서는 단연

회장선거가 화제1순위였다. 그리고 누구나 내가 회장이 될 것으로 생각했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다.

진주가 문제삼은 것은 이 것이었다.

"나도 경호가 회장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나도 경호 못지않게 열심히 했거든? 나도 적임자라고 생각해. 경호가 남자고 스쿼시를 동기들 중에 제일 잘 하는건 물론 장점일 수 있지만 경호는 일처리가 너무 물러서 회장되면 여러사람 피곤할 스타일란 말이야. 그런데 선배들이나 동기들이나  벌써 경호가 회장 된 것 처럼 말하고들 있잖아. 맘에 안든다니까 정말.."

K여대생이었던 진주의 유일한 과 친구인 미선이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눈치없이 당사자가 바로 옆

테이블에 있는데 다 들리게 말한다.

미선이는 곁눈질로 나를 보며 한숨을 쉰다. '이것들 또 싸우겠구만..' 아마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나도 안다. 그니까 니가 도와줘라."

진주는 흠칫 놀랐다. 내가 듣고 있는걸 몰랐던 모양이다.

"아.. 듣고있는지 몰랐어. 미안"

"안미안해도 된다. 맞는말인데 뭐. 근데 그래도 내가 회장 할거니까 안 물러터진 니가 도와줘라."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는 효정누나 말을 빌리자면 '별로 봐줄 건 없지만 이 것 하나만큼은

연상킬러급인'  눈웃음을  싱긋 날렸다.  

"아니. 회장은 내가 할거니까 니가 도와줘."

진주는 이렇게 말하고는 싱그럽게 웃는다.  효정누나처럼 화사하지는 않았지만 신기하리만큼

마음을 채워주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처음 본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모가나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

상처를 주고마는 각력암인줄 알았던 진주는 흔하게 굴러다니는 돌덩어리가 아니라 크리스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연합동아리 참이슬의 회장이 되었고 선배들의 지지를 많이 받은 진주는

부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와 친했던 영진이는 총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진주는 많이 울었다.

우는 모습을 보며 미안해 하는 나에게 진주는 내가 회장되는건 인정할 수 있다며 마치 3의 인물이

선출되었으면 깽판이라도 쳤을 거라는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꽤나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로 진주와 한층 더 친해질 수 있었다.  

"경호 너는 나보다 오히려 나에대해 더 많이 아는 느낌이야. 누가보면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인 줄 알겠다"

12월의 어느 날 진주는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듯 말했다.

"당연하지. 관심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냐."

"뭐야 그건 니가 날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소리야?"

"빙고~"

이건 웬 돌직구인가? 라는 표정으로 벙벙해져서 나를 쳐다본다. 그날 난 그냥 웃기만 했다.

효정누나에게 고백했을 때와는 달리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은 했지만 사귀자는 말은 도통 꺼내지 않는 내 덕에 석달동안 진주는 혼자 밀당을 하며 끙끙

대야 했고 난 그런 그녀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평범한 대화만 했을 뿐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아직도 그 날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날이 너무 특별한 날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화이트데이

다음날이라 기억하기 쉬울 뿐이다.

"나 내일부터는 니 남자친구 하고싶다."

도통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는 나와 혼자 줄다리기를 하던 진주는 오히려 후련한 표정이었다.

1분정도 아무말도 않던 진주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꼭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 넌 내가 왜 좋아?"

"그냥 좋아"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고 애매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몇 분인가 시간이 지나고 진주는 들릴듯 말듯하게 나직히 말했다.

"몰라. 니맘대로해."  

그렇게 진주는 내 첫 사랑이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2월의 어느 날 좋아하노라고 말 했을 때 진주는 정말 벙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귀자고 하면 단호히 거절하려고 했는데 도통 이남자가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진짜 좋아하는게 맞나? 그냥 장난친건가? 라고 생각도 했지만 표정을 보면 그건 아닌것 같고

혼란스러웠다는게다.

그리고 혼란스러움에도 익숙해질 즈음 난데없이 사귀자고 말하는 나에게 그녀는 세 달동안 준비했던

거절의 핑계를 만들기 위한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왜 자기가 좋냐는 질문에 이러쿵 저러쿵 이유를 다는건 진짜 좋아하는게 아니라며 다시는 그 말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는 거다. 그런데 나에게 나온 대답은 자기가 원한 대답이 아니었고

(아니, 사실은 진짜 원하는 대답이었겠지.) 조용히 생각해보니 혼자 밀당하던 세 달 동안 내가

좋아져 버린 것 같기도 해서 자기 마음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거절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거절을 못 한거지 승낙한게 아니라고 끝까지 우기곤 했다.

그렇게 첫사랑이 갔고, 첫 사랑을 만났다.

진주와 함께했던 짧지 않은 시간은 내 인생의 따뜻한 봄이었고, 뜨거운 여름이었고,

쓸쓸한 가을이기도 했으며, 시린 겨울이기도 했다.





덧'
저는 글재주에 자신이 없는 편입니다.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얘기였긴 했는데.. 계속 할 수 있게 용기를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다른 남자의 아내인 진주씨.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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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니
13/03/31 10:02
수정 아이콘
다시 봄은 찾아오셨나요?
왠지 500일의썸머란 영화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아마돌이
13/03/31 11:23
수정 아이콘
이제 막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을 준비를 한 것 같아요 ^^; 이제 돌아다니다보면 꽃도 피고 하겠죠? 사실 연애 뿐만 아니라 제 인생이 한 절기 끝나고 봄이 온 것 같아요. 아직 애매하게 추워서 봄입니다. 요새 날씨처럼 말이죠 ㅜ.ㅜ
정어리고래
13/03/31 12:02
수정 아이콘
봄은 이래야 제맛인데...
저는 동아리 부회장까지 했었는데도.... 아 그때는 생겼구나.....

얼른 동아리 가입하러 가야겠네요....크크크
Jealousy
13/03/31 14:14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잘읽고있어요.
13/03/31 21:27
수정 아이콘
역시 밀당인가요.
메지션
13/04/01 10:33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다음 편도 있는건가요?
사랑에 서툴 때는 사랑 이외에도 다른 이유로 만날 수 있는게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밀당도 만나야 통하는 법인 듯.
니누얼
13/04/01 10:43
수정 아이콘
우와, 저도 저런 고백 받아보고 싶어요!!!!

글이 잼있네요, 저도 동아리에서 화장오빠랑 여러번 싸워본 여자라 진주씨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히히.
아마돌이
13/04/01 15:53
수정 아이콘
댓글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원래 8~10 편분량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재밌는 이야기가 안나와서 4편으로 끝낼까 했는데.. 욕심나는 부분이 있긴 해요.
2편정도 더 올려볼 생각도 있습니다 헤헤.. 그런데 제 글 실력에 한계를 느껴서 겁이 나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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