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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3/19 16:50:26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갑자사화 - 갑자년까지
연산군 5년부터 10년, 갑자년까지... 정치적으로 딱히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연산군은 여전히 대신들과 논의해가며 나라를 이끌었고 대신들은 그를 보좌했으며 대간들은 여전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죠. 이 때 연산군은 민생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진족도 경계하는 등 왕다운 모습을 보여주죠. 가령 연산 8년(1502)에 일본 오우치 가문이 바친 원숭이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봅시다.

"내가 듣건대, 앵무새를 선왕 때에 바쳤으나 값만 비싸고 나라에 이익이 없었다고 하는데, 지금 또 암 원승이를 바치니 반드시 이전 일에 의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자에 구리와 쇠와 같은 필요한 물건도 그 값을 대기가 어려워서 공무역과 사무역을 정지했는데, 하물며 이같은 무익한 짐승이겠는가? 도로 돌려주고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타이르라."

딱 나라 생각하는 왕의 모습이죠. 원숭이 한 마리도 이득은 없이 비용만 드니 돌려주라고 했으니까요. 이런 것만 모아서 본다면 갑자사화는 정말 뜬금없이 나온, 왕이 갑자기 미쳐버렸다는 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죠.

첫째는 사생활 보호, 연산 5년부터 궁궐의 담장을 높여 갔습니다. 여기에 궐 내의 관청을 밖으로 옮겼고, 궐 주변의 민가를 철거해 갑니다. 더 나아가 위에서 궐을 내려다볼 수 있는 민가를 없앴고, 아이들이 산에서 궐을 보자 그 가족들도 다 잡아간 적도 있었죠. 이것 자체를 금지해 갔습니다.

대간들이 연산의 사생활을 참견할 경우 벌했고, 그걸 알려준 이는 어김없이 벌합니다. 이렇게 되자 대간들도 이 일에 대해선 몸을 사리게 됐죠. 안에서 뭔 짓을 했길래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생활 보호를 철저히 한 것이죠.

문제는 대간들은 물론 대신들까지 사생활에 대해 뭐라고 할 정도가 됐으니...

연산 자신의 씀씀이가 헤퍼져 갑니다. 그림부터 수달, 꿩, 담비 가죽, 금, 공작 깃 등 참 다양한 물건들을 진상하게 했죠. 대비들과 자기를 키워준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도 온갖 잔치와 선물을 합니다. 그게 다 돈이었죠. 나라에 흉년이 들고 물난리가 날 때도 그의 사치는 계속됐습니다. 방을 데울 때 향을 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단지 자신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뽀대나게 하려고 했습니다. 거친 종이는 예의없다면서 깨끗하고 두꺼운 종이를 쓰게 했고, 곤룡포에 화려한 치장을 했죠. 화려하게, 럭셔리하게, 그런 걸 원한 것이었습니다.

사냥 역시 더욱 자주하게 되었죠. 왕의 사냥은 백성들의 고생이 많아서 반대를 많이 받는 일이었습니다. 뭐 그래도 적당히 하면 모르겠는데 끝이 없었죠. 여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갑자사화 몇 개월 전에는 이런 일도 벌어집니다.

"왕이 미행하여 환자(내시) 5, 6인에게 몽둥이를 들려 정업원으로 달려들어가 늙고 추한 여중을 내쫓고, 나이 젊은 아름다운 자 7, 8인만 남기어 음행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이다."

유교 국가는 기본적으로 검소를 숭상하며 왕이 그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때문에 조선 왕실은 비교적 가난하게 살았고, 사치를 최대한 경계했죠. 그런 상황에서 왕의 사치는 계속돼 갔습니다. 나라 꼴이 좋지도 않았어요.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세입보다 세출이 늘어가고 재정은 고갈돼 갔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서 대신과 대간은 손을 잡습니다. 누가 대신감이 아니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대신들 역시 대간들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천했죠. 다른 어떤 문제보다 커진 것이 왕의 사치였습니다. 삼정승이 1년간 쓴 돈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면서 소비를 줄이라 했고, 사냥과 강무(군사훈련을 겸한 사냥)를 중지할 것을 건의합니다. 대간들은 이를 강력히 건의했고, 대신들은 찬성했죠. 연산군의 변명이 은근히 보입니다. 여기엔 다름아닌 인수대비의 요구도 있었습니다.

이때 왕이 친근한 사람들을 사랑하여 물품을 내려줌이 너무 지나치고 잔치놀이를 법도 없이 하므로, 인수 왕비가 바로잡지 못할 것을 알고, 비밀히 한치형에게 유지를 내리기를,
“왕의 하는 짓이 이러면서도 고치지 않는데, 경이 사직의 중신으로서 죽을 힘을 다해 바로잡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조종의 혼령을 뵙겠는가?”
하니, 이로부터 한치형이 성준·이극균과 더불어 왕의 하는 일을 바로잡고 깨우침이 많았다.

직접 말로 하다가 안 돼서 대신들에게 부탁한 건지, 자기가 직접 하긴 그래서 대신들에게 부탁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모습이 연산군에게 좋게 다가왔을 리 없었죠.

"황제의 모습은 어떠하며, 또한 중국에서도 대간을 두어 일이 있게 되면 논란하여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와 같이 하던가"

연산 6년 4월의 일입니다.

명나라에 갔다온 사신들에게 연산군이 물어본 것이죠. 사신들은 있다고 했구요. 이런 모습들을 보면 그가 대간을 없애려 한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유교 정치의 근간인지라 그것 자체를 없앨 시도까진 못 했겠죠. 그저 억눌러 놨을 뿐.

무오년에 대충 손을 봤으니 이 정도면 됐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죠. 좀 몸을 사렸을 뿐 대간들의 위세는 여전했고, 다른 건 몰라도 인사권에 대해서는 여전히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인사 등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싸웠을지 몰라도 연산군의 사치에 대해서는 대신과 대간들이 모두 문제삼았죠.

능상, 위를 능멸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연산군에게 있어 신하는 그저 왕의 명령에 굽신해야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절대권력, 왕 앞에 모두가 복종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유교의 충신은 왕에게 그저 엎드리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잘못됐다 하면 맞서는 것이 충성이었죠. 무오사화에서 이 둘의 인식 차이가 크게 드러납니다. 그 누구보다 연산군의 편을 들고 대간들에게 고기를 씹고 싶다는 말까지 들었던 노사신의 변화가 그걸 잘 보여주죠. 대신들 역시 유교사회의 선비였으니까요. 뭐 한명회 같은 예스맨이 그 때 있었으면 어땠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하지만 세조는 그런 사치를 보여주진 않았죠.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유교라는 이름 아래 누가봐도 잘못된 길, 그게 연산이 가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자의 노래에 이르기를 ‘안으로 여색에 빠지는 짓을 하거나, 밖으로 사냥에 빠지는 짓을 하거나, 술을 즐기고 풍류에 빠지거나, 집을 높이 짓고 담을 치장하는 이 한 가지 일이라도 있으면 누구나 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비록 인군이 이 중에 한 가지가 있더라도 나라가 반드시 곧 망하게 되지 않을 것이나, 아래에 권세를 쥐고 농락하는 신하가 있으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니, 이 뜻으로 대간과 홍문관에 말하라"

연산은 그 모든 것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는 근본적인 원인을 신하들의 능상에만 맞춥니다. 그리고 그 때, 능상하지 않은 신하는 없었습니다.

연산군 10년 갑자년, 1504년에 이 갈등은 마침내 터집니다.

감정적으로 이 때 터진 것, 다시 말해 미친 것이든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피의 숙청을 준비한 것이든... 쌓아놨던 걸 터뜨렸다는 점은 변함없을 겁니다.

그가 어머니 폐비 윤씨를 얼마나 기억했는지...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문제니 추론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있죠. 애정이 있든 없든, 그게 그에게 가장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어머니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왕으로서 무엇이든 하려 했던 그에게 왕이면서도 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큰 것이었죠.

위를 능멸하는 신하는 모두 죽인다, 아니 어디 신하들 뿐이었겠습니까. 사대부부터 백성들까지... 모두가 그 아래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능상이 없어질 때까지 피는 멈추지 않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죽일 셈이었을까요? 멩스크가 죽을 때까지?

이제 그 피의 시작, 갑자년으로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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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편 쓰기가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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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19 17:02
수정 아이콘
렛 더 킬링 비긴....?

사치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궁 고치는거나 사냥이나 다 왕권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진짜 치열한 파워게임이네요
13/03/19 20:17
수정 아이콘
그냥 검소하게, 왕권은 좀 약하게 써먹으면서 살면 안되나..??
Je ne sais quoi
13/03/19 20:50
수정 아이콘
권력을 절제한다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겠죠 -_-a
냉면과열무
13/03/20 01:27
수정 아이콘
완전기대!!!!
제레인트
13/03/20 11:08
수정 아이콘
잘 보고있습니다! 한국사시험 공부중인데 도움이 되네요 크크 그리고 연산군은 어쨌든 폭군(?) 은 폭군이었나봐요.
13/03/20 12:41
수정 아이콘
켁ㅜ완전 잘읽고있었는데 끝나다뇨..ㅜ담편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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