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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3/05 21:07:06
Name 손나이쁘다
Subject [일반] <단편> 여행

최근에 쓰고 있는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입니다. 픽션이 많이 가미됐지만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실제로 같이 서로에 대한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미루다미루다 가지 못하고 늦게나마 미련을 떨고 있는 글입니다. 뒷부분은 아직 다 쓰지 않았지만,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살았던 곳을 주인공이 여행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나오는 이름은 당연히 가명이구요..

쓰다가 너무 먹먹해져서 오늘은 더 못쓰겠어서, 글은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매일 같이 들렀던 pgr에 글의 앞부분을 남겨봅니다^^





오늘의 기억

햇살이 눈부시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맑은 날씨, 탁하지는 않지만 숨 가쁜 것만 같은 공기, 그리고 고스란히 나를 받쳐주는 대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켤 수는 없다고 해도 평화로운 날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날에 나는 시내를 걷고 있다. 시청 역 2번출구 덕수궁 앞,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덕수궁 문 앞에서 펼쳐지는 행사를 신기한 듯 보고 있다. 나는 발길을 돌려 무교동 쪽으로 간다. 신호등을 건너 시청광장을 가로질러 난 단지 그 날 마셨던 코코넛 주스를 마시기 위해 간다. 이제 입구를 착각하지 않는다.
"오천팔백원입니다."
무심히 카드를 내밀다가 현금을 가져올걸 하는 후회를 한다. 그 날 너는 현금을 내밀었었지. 카드를 안 쓴다던 네가 나는 왜 그렇게 귀여웠을까.
너와 앉았던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다. 아마도 그 자리가 비어있었다면 나는 잠깐이라도 그 곳에 앉아있었을 것이다. 다른 자리는 의미가 없다. 밖으로 나와 뚜벅뚜벅 걷는다. 다시 시청광장을 가로질러 신호등을 건너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도 그 날 그렇게 웃었을까. 그렇게 좋았을까. 계속 걷는다. 왼쪽으로 시립박물관이 보고이고 조금 더 걸으면 오른쪽으로는 정동극장, 왼쪽으로는 정동교회가 보인다. 조금 더 걷는다. 이윽고 너와 처음, 다시 처음 만나 함께 밥을, 파스타를 먹었던 레스토랑에 다다른다. 너와 앉았던 자리는 비어있다. 먹고 갈까. 아니 나는 혼자 밥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곳은 너하고만 왔었던 곳으로 기억하고 싶다. 다시 돌아선다. 그 날처럼 눈이 쌓여있지도, 사람이 우리밖에 없지도, 몸은 춥지만 마음만 따뜻하지도, 그리고 나는 웃고 있지도 않다. 그냥 걸을 뿐이다. 조금 더 걸어 을지로입구 역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로 들어간다.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그리고는 그 날 너를 보냈던 곳에서, 지금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손을 흔든다.
"잘 가. 이젠 정말 잘 가."
그렇게 너를 보내고 나는 다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러 간다. 자꾸 네가 선명해서 그 선명함에 숙연해져서, 그만큼 숙여진 고개만큼 내 발걸음은, 너는 무겁다. 하지만 발걸음보다 덜컥 내려앉은 가슴이 침전물처럼 가라앉는다. 아예 묻기로 했는데, 어쨌든 어제 먹으려다 버린 귤처럼 너도 시겠지. 버릴 날이 오겠지. 내 여행은 그렇게 계속 되고 있다.



중요한 기억 하나.

"우리 여행갈까?"
"생뚱맞게 무슨 여행이야.오빠는 엉큼한 생각이 들 때 그러더라. 그리고 오늘 일요일인데 무슨 여행, 가려면 어제 갔어야지."
내 방 침대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으면서 점잖은 척 하는 이 아가씨. 귀엽다. 귀여웠다.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보고 싶다.
"꼭 여행이 먼델 가야하는 건 아니잖아. 가까운 데로 가자."
"생각해둔 데 있어?"
"음. 생각은 해뒀는데, 네가 말해줘야 갈 수 있어."
"그게 뭐야."
"신희영 여행 가자."
눈이 얼굴만큼 동그래진 너.
"네가 태어난 곳,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 다녔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옮기기 전의 직장까지 다 가보자. 지나온 너의 시간을 여행하자 우리."
"아, 오빠는 너무 낭만적인 게 탈이야. 안 피곤해? 하긴 오빤 어제 쉬었잖아. 나는 어제도 일했다구. 난 오늘 아무것도 안할래. 누워서 티비보고 낮잠자고 그럴래. 이따가 파스타나 만들어줘."
"푸. 그럼 다음에 가자. 난 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내가 몰랐던 때의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응? 다음엔 꼭 가자."
"지금 실컷 보세요."
너는 쭈욱 고개를 내밀어 토라진 내게 살짝 키스를 해줬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방에서, 여기쯤이었던가, 이 곳에서 고개를 내밀어.



마지막 기억.

아주 추운 날, 추웠던 날. 나는 이제 막 쿠폰은 다 모은 너의 집 근처의 카페에 와 있다. 굳은 표정으로 손을 살짝 떨면서 연한 더치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너에게 인사를 하자는 문자를 보내고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의 책. 페이지를 넘긴다. 어디였더라, 뒤쪽이었는데, 접어두었던 곳, 110쪽. 쉽게 찾아낸다. 그리고 읽는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나는 소리 내어 흐느끼며 읽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그렇게 몇 백번을 읽었을까. 문을 열고 네가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이제야 온다. 나는 마지막을 고한다. 아니 마지막을 고하지 않는다. 잠시만, 잠시만이라고 한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사랑할거니깐 잠시만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너는 습관처럼 웃는다. 더 이상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을만큼 차갑게, 그리고 단호하게 웃는다. 카페에서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한다. 마지막으로 너를 살짝 안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감정이 없는 너는 인형같다. 다시 감정이 오길, 내게 다시 오길 기다리며, 기다릴 거라 다짐하며 너를 보낸다. 너의 뒷모습이 조금씩 작아진다. 멀어진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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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andertal
13/03/05 21:38
수정 아이콘
흠...소설이라....
그냥 취미로 쓰시는 지 아니면 전문적인 작가가 되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빌겠습니다...^^
손나이쁘다
13/03/05 22:35
수정 아이콘
격려 감사합니다.^^
전문 작가가 꿈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글 실력도 워낙 없어서 단편 정도 써서 주변 사람들한테 선물하는 정도입니다.
좀 길게 써보려는 건 처음이라 호흡이 무겁네요.
써둔 단편 몇개를 문예 공모전에 내볼까 생각도 가끔 했었는데, 왠지 부끄럽고 그래서 내보진 못했네요.
PoeticWolf
13/03/06 11:49
수정 아이콘
내보세요. 심사위원들 어차피 얼굴볼 것도 아닌데요 몰. 저도 1년에 한번씩 그해 썼던 것들 모아서 공모전에 내고 그래요. 2000년부터 이짓을 해왔는데, 13년?동안 좋은 소식 온 곳은 딱 한 군데네요.
지금은 그냥 그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쓰는 게 얼마나 늘었는지 정리하는 차원에서 개인 연말 행사처럼 하는데, 고 재미가 나름 쏠쏠해요. 붙어야 된다는 압박감이 없으면 더더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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