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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2/25 21:55:27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미지와의 조우 - 벨테브레와 하멜
한국에서 대항해시대를 얘기하면서 소외되는 나라가 네덜란드입니다. 초기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후기의 영국 프랑스 등에 밀리는 편이죠. 하지만 네덜란드 역시 대항해시대에 큰 몫을 했던 나라입니다. 동인도(아프리카+인도, 동남아 관리)회사와 서인도회사(아메리카)를 세워 식민지를 경영했고 나중에 영국이 이걸 따라하죠. 종교보단 무역을 중시했기에 좀 얌전한 느낌도 들지만 (그래서 일본이 유일하게 무역을 허용한 서양이었습니다) 동남아시아 등에서의 문제 역시 컸습니다.

어찌됐든, 흑선 내항까지 일본과 유일하게 놀았던 그들이니만큼 조선에 오기도 가장 쉬웠을 겁니다. 조선에도 관심을 가져 1620년에 동아시아 해역을 탐사하면서 조선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하는데,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고 합니다. 뭐 왔더라도 통상은 불가능했겠지만요.

하지만 일본과 조선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죠. 특히 폭풍우를 잘못 만나면 조선 해역으로 가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벨테브레이와 하멜 역시 이렇게 조선으로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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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제주도에 신기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것도 세 명이나요. 그들은 물을 구하려고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붙잡힙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얀 야너스 벨테브레, 박연이었습니다. 그들이 탔던 배는 우베르케르크, 그들과 함께 보트를 타고 상륙했던 이들은 그들이 체포되자 급히 도망쳤고, 배도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인생이 바뀌어버렸죠.

조선의 방침대로라면 그들은 명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죠. 때는 후금이 한창 팽창할 때로 조선과 명의 연락이 끊겼으며, 다음 해에 정묘호란이 일어납니다. 명으로 보내고 싶어도 보내기 힘들었고 열심히 노력해서 보내줄 정도로 조선은 착한 나라가 아니었죠.

물론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보내면 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왜관에서는 그들을 거부합니다. '접왜사초모록'에 그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문위 역관 김근행이 와서 말했다. 최근 부산의 연로한 이들의 말을 들었는데 정유년 연간에 남만선이 있었다. 경주(제주의 오기인 듯?)에 표착하여 3명을 붙잡아 왜관에 들여보냈으나 왜관의 왜인 등은 일본의 표류인이 아니라고 시종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만인이라고 하는 이들은 부산에 머물렀는데 4~5년이 지나서 조정의 분부에 따라 상경하였다."

이후 일본의 태도를 보면 의아합니다. 특히 하멜에 대한 태도를 보면 말이죠. 이 때 일본의 방침은 좀 달랐던 건지, 당시 왜관에 있던 이들이 귀찮아서 거부한 건지는 알 수가 없죠.

하멜표류기에서 하멜은 벨테브레가 조선에 남은 이유를 조금 다르게 적고 있습니다.

"자기가 오랫동안 우거하는 중에 일본으로 가 보려고 여러 번 국왕에게 허가를 청하였으나 아무 다른 대답을 듣지 못 하고 다만 날개가 돋아 거기로 날아가지 못하거든 그런 기대는 단념하라고 하실 뿐이었으니 (후략)"

그러면서 조선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합니다. 붙잡힌 이유는 세 명만 따로 식수를 구하려다 그들만 붙잡힌 거구요. 이에 따르면 외국의 사정보다는 인조가 그를 붙잡았다는 게 되죠.

어쨌든 이렇게 그들은 조선에 남게 됩니다.

이후 그들은 훈련도감에 소속됐고 화포 등에서 능력을 발휘하면서 훈련도감 내의 일본인과 중국인을 통솔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에도 참전했고 그를 제외한 두명은 전사했죠. 그 후에도 계속 조선에 남아 훈련도감에서 일했고, 언제일지는 몰라도 박씨 성을 받고 귀화합니다. 조선인과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기도 했구요. 이만하면 실록에도 기록이 남을 만한데 없습니다. 귀화라는 건 왕의 명령이 있어야 하고 분명 인조가 이를 허락한 것일텐데 말이죠.

그가 실록에 나오는 건 1648년, 조선에 온 지 21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 때 무과에 급제한 이들의 대포로 박연의 이름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게 정말 본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요.

야사에서는 그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평이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위인이 뛰어나고 훌륭하며 깊에 헤아리는 바가 있었다"(한거만록), "박연은 나라를 위해 그 재능을 펼쳤다. 드디어 홍이포를 제작하였다."(석재고) 등에서 보이죠.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았다느니 개신교가 떠오르는 얘기를 하고 다녔다느니 하는 모습도 보이구요. 특히 효종이 그를 눈여겨보며 무기 개량을 맡긴 것 같구요.

그에 대한 기록은 이 정도입니다. 조선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고 눌러앉았지만 기록에 제대로 나타날 정도의 관심은 받지 못 한 듯 합니다. 그 자신도 그냥 이런 생활에 만족한 거 같구요. 아 그리고...


부산에서 살면서 표준말보다 사투리에 익숙한 걸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쌀국수를 참 좋아했다고 하죠. 유명한 말로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지예"와 "한 뚝배기 하실레예?"가 있죠.

... 믿는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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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은 순조로운 항해 끝에 7월 16일 무사히 타이요완 섬에 도착했습니다. (중략)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30일 타이요완항을 출발, 신의 이름으로 빨리 항해가 끝나도록 빌며 항해를 재촉했습니다."

하멜이 탄 배는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신께 기도하며 출발했지만, 하루만에 폭풍을 만나버렸죠. 그 때부터 그의 인생은 꼬여버립니다. 다음 날 새벽 그들은 섬을 발견했고 급히 그 쪽으로 갑니다. 중간에 암초가 있어 아예 죽을 뻔하기도 했죠. 겨우 섬에 배를 댔을 때 완전무장한 병력이 그들을 맞이합니다. 그들의 무력시위를 보면서 하루만에 다시 출발했지만 이번에도 신은 그들을 돕지 않습니다.


8월 15일, 폭풍으로 배는 좌초, 완전히 망가집니다. 선원 64명 중 살아남은 건 36명, 그들은 천막을 만들고 여기가 제발 일본이길 빌었죠. 하지만 전혀 다른 곳이었으니... 사람이 잠깐 나타났다가 도망친 후 무장 병력이 그들을 붙잡았고 신문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말이 통할리가요.

그들은 최대한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고 싶다고 했지만 먹혔을 리가요. 하멜은 야판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걸로 생각했지만 그들을 상대한 제주목사 이원진은 알아듣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장계입니다.

+) 하멜은 조선에서 일본을 "이르폰"이나 "예나레"라고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왜나라 뭐 이런 거였겠죠.

"왜어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인가?’ 하니, 다들 ‘야야’ 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라 하고, 본도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라 하고, 중원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이라고도 하고 대방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타타르)이라 하고, 동쪽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죽 등 먹을 것을 얻어먹고 대신 술이나 망원경 등을 선물합니다. 참 좋아했다네요. 이후 제주 목사 이원진에게 가서 역시 이런저런 문답을 했고, 거기에 머뭅니다. 이원진은 그들의 요구도 잘 들어주고 (이쯤 해서 서툴지만 대화가 됐다고 합니다) 잔치도 열어주면서 곧 일본으로 보내줄 거라고 약속합니다... 마는...

10월 29일, 박연이 효종의 명을 받고 제주도로 옵니다. 이 때 그는 네덜란드어를 거의 잊은 상태였지만, 하멜 일행과 계속 만나면서 다시 익숙해졌다고 합니다. 서로 반가워했지만 (박연은 몰래 울었다고 하네요. 하긴 서양인을 만난지도 한참인데 같은 네덜란드인이었으니...) 외국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말에 충격을 먹습니다.

사실 박연의 사정을 보면 하멜 일행이 조선에 남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으로 보낼 수 있는데 일본이 거부했었으니까요. 정작 하멜 일행이 탈출했을 때는 왜 일본으로 안 보냈냐고 따졌구요. 이 때 그냥 일본으로 보냈으면 무사히 갈 수 있었을지도요. 하지만 박연이 화포 등에 능력을 보이면서 하멜 일행 역시 거기로 보내게 됐죠. 박연이 의도한 건 아니었겠습니다만...

이후 하릴없이 제주도에 남아있던 그들, 목사가 교체되면서 영 안 좋은 대접을 받게 됐고 탈출을 결심합니다. 작은 배에 물도 없이 감행했죠. 당연히 물길을 몰라 실패했고 "이런 대우를 받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대답을 합니다. 이후 볼기를 맞고 한달동안 누워 있어야 했죠.

+) 하멜은 제주도에 대해 농사가 힘들고 주민들이 가난하고 본토인들에게 천시당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1654년 5월 말, 참 늦게야 효종의 명이 도착합니다. 한양으로 데리고 오라는 거였죠. 한양에 도착한 그들은 박연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빌었지만 효종은 거부하고 훈련도감에 속하게 합니다. 이렇게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어져 갑니다.

이 때 하멜은 "그들은 세계 최강의 적군과 대치하고 있기나 한 듯이 맹렬히 훈련합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효종이 그들을 일본으로 보내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만 하죠. 외국인들을 밖으로 보내는 관습이 없다면서 한 거였는데 예전의 사례들을 보면 전혀 아니거든요.

그들의 신기한 모습에 많은 관심을 받았고 양반들은 심심하면 그들을 불러 검술이나 곡예를 시킵니다. 코가 커서 물 마실 땐 코를 귀의 뒤로 돌려서 마신다는 소문도 퍼진 모양입니다. 그들의 숙소에도 많은 구경꾼이 몰렸고 이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죠. 실록에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그들을 꽤나 괴롭혔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돈을 모아서 따로 집을 샀다고 하죠. 효종이 나름 챙겨주긴 했지만 부족했고, 더욱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갔죠.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일등항해사와 포수 한 명이 계획을 꾸밉니다. 청에서 찾아올 때마다 그들은 남한산성으로 보내져 존재를 숨겼고, 만약 청인(타타르인)에게 가서 말한다면 돌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죠. 속에 네덜란드 옷을 입은 후 그것을 보이며 말고삐를 붙잡고 애원한 것이죠.

그래봐야 말은 안 통했고 다시 잡혀갑니다. 청나라 사신은 통역과 함께 그들을 불렀지만 조정에서 뇌물을 바치면서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군요. 반면 실록에는 사신이 놀라긴 했는데 누군지 묻진 않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 남북산(남만인이라 해서 전부 남씨)이라는 자가 길에서 곧바로 하소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청사가 크게 놀라 본국을 시켜 잡아 두고 기다리게 하였다.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끝내 묻지 않았다."

어느 쪽이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둘은 음식을 거부하다 죽습니다. 처형당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의 목숨 역시 위험해졌구요.

+) 하멜은 조선인들이 청에 대해 칙사나 오랑캐라 불렀다고 적고 있습니다. 칙사야 사신을 말하는 걸 헷갈린 거겠죠. 그리고 중국과 그들을 늘 분리해서 말했다고 적고 있죠. 이쯤될 땐 중국은 곧 청이었지만 조선인들 마음이 어떻게 그러겠어요.

이 때문에 회의가 열렸고 (하멜은 3일간 계속됐다 적고 있습니다) 효종과 인평대군, 훈련대장 이완이 이들 편을 들면서 겨우 살게 됐습니다. 대신 전라병영으로 보내졌죠. 이 때까지 생존한 인원 33명(두 명은 위의 일로, 한 명은 한양 가던 길에서 죽습니다), 1656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간 그들은 전라도에 계속 머물게 됩니다. 그 이후의 서술은 참 심심합니다. 그만큼 별 일이 없었던 모양이고, 그 자신도 별 희망 없이 살았던 것 같네요. 그들이 맡은 건 주로 관청의 돌맹이를 줍고 풀을 뽑는 일이었습니다. -_-; 계속 데리고야 있었지만 조선으로서도 처치곤란이었던 모양이네요.

병사가 좋은 사람이면 대접도 좋아졌고, 아니면 생활이 힘들어졌습니다. 이 때 하멜이 좋고 나쁘게 평가했던 이들이 실제 역사에서도 괜찮은 장수나 탐관오리로 평가된다 하는데 비교해보진 않았습니다.

나라에서 주는 게 부족했던만큼 이들은 주로 나무를 팔아서 돈을 모읍니다. 그 외에 쏠쏠한 돈벌이는 백성들에게 이런저런 재밌는 얘기를 해 주는 거였습니다. 조선인들이 호기심이 많고 구걸이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는 걸 알고 한 거라네요. 특히 스님들과 교류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서로 조선에서 천시당하던 이들이라서 그런지 스님들은 그들의 얘기를 좋아했고 잘 들어줬다고 하네요.

하지만 사는 건 더 팍팍해져 갔습니다. 1659년에 효종이 죽으면서 더 잊혀져갔고, 기근이 들면서 급료도 안 나왔기 때문이었죠. 1662년 2월이 되면 여기저기 갈라집니다. 그 때까지 나남은 인원 22명, 하멜을 비롯한 12명은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갔고 5명씩은 순천과 남원으로 분산됐죠. 하멜은 이 때가 가장 슬펐다고 적습니다.

"저희들은 집과 가구, 정원들을 힘들여 장만했는데 지금은 그것들을 내놓아야 하게 되었으며 다른 마을에 가 보아도 이 굶주림의 상태는 호전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슬픔은 오히려 커다란 기쁨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바닷가로 가게 됐다는 게 나쁜 일은 아니었죠. 탈출할 기회가 생겼다는 거니까요. 그로부터 4년, 여전히 수사의 성향에 따라 생활이 좋아지고 나빠지고를 반복했지만 그들은 최대한 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배를 사기 위해서였죠. 이게 성공한 것이 1666년 7월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배를 판 이 역시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남만인들이 배를 사는 이유야 간단했으니까요. 하멜 일행은 그에게 웃돈을 얹어주며 자기들이 떠난 후 배를 도둑맞았다고 고발하라고 합니다. 대신 충분히 멀리 간 후에 고발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공범이라 하겠다 했죠.

9월 4일, 달이 졌을 때 그들은 여수를 떠납니다. 그저 신의 가호를 바라면서요. 다행이 작은 배임에도 물살이 험하지 않았고, 얼마 안 가 일본의 고토 열도에 닿았고 곧 나가사키로 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에 온 지 13년하고도 28일만에 그들은 조선을 떠나 그리도 바라던 일본에 도착합니다. 이제 남은 건 조국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거였죠.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아직 조선에 남아 있던 8명의 동료가 있었죠. 일본은 이를 강하게 항의합니다. 그 명분이 아란타(홀란드, 그러니까 네덜란드)는 우리의 속국이니 아란타 사람은 모두 자기에게 넘겨달라 했는데 조선이 이를 숨기고 있었다는 거였죠. -_-; 이를 들은 조선에서는 영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 때 전라좌수사 정영이 남만인이 도망쳤다는 걸 숨기고 있었거든요. =_=;; 당연히 벌 받았겠죠.

조선에서는 일본이랑 남만이 무슨 상관이냐며 트집 잡는걸로 여겼지만, 그래도 남은 이들에 대한 송환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 중 한 명은 그냥 조선에 남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1667년 10월 23일, 나가사키를 출발해 1668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에 도착합니다. 기나긴 항해의 끝이었죠.


하멜은 13년 동안 조선에서 겪은 걸 책으로 냅니다. 그 유명한 하멜 표류기죠. 동인도회사에 13년간의 임금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처음엔 2년분만 지급했지만 곧 13년분을 모두 줬다고 하네요. 하멜 표류기가 유명해진 것 때문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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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는 여러 언어로 번역돼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지금 우리게에도 서양인의 시각으로 본 조선으로 참 큰 가치를 가진 책입니다. 그 때문인지 하멜을 개고생시켰던 그 한국에서 동상도 만들고 표류기념 조형물도 만들었죠 (...) 하멜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할 지 모르겠네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으로 조선을 깠다는 말이 있지만 표류기를 보면 너무 담담하고 건조해서 신기할 정도입니다. 13년동안 힘들게 살았으니 쌍욕을 퍼부어도 부족하지 않을텐데요. 자기에게 못 대해준 이들이야 욕하지만 잘 대해준 이들은 칭찬과 고마움을 아끼지 않죠. 조선인의 국민성에 대해서도 딱히 혹평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와 함께 탈출한 동료들은 하멜이 조선에서 처자식을 얻었다고 했다 합니다. 표류기에선 그게 드러나지 않구요.

하멜에게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그냥 죽도록 싫은 나라일까요 뭐 그래도 추억은 될만한 나라일까요? 그건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는 목숨을 걸고 떠난 이니까요. 그들의 탈출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겠지만 조선에서 박대한 것도 클 겁니다. 말 그대로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나은 상황이었을지도요.

박연과 참 비교되긴 합니다. 박연은 조선인으로 완전히 정착했고 나름 왕의 신뢰도 얻은 상태니까요. 하지만 하멜은 딱히 인정받지 못 했고 (조선에서 원한 화포 등의 기술도 딱히 없었나 봅니다) 고국을 잊고 살기엔 그의 집이 좀 잘 나가기도 했죠. 뭐 그 밖에 하멜은 전라도 바닷가로 운 좋게 가면서 탈출의 기회가 있었지만 박연은 한양에서만 있었던 것도 크겠죠. 그리고 박연은 그와 함께 일을 꾸미거나 최소한 대화라도 할 동료도 죽었고, 조선에 순응하는 게 그 자신을 위해서도 더 다행이었을지도요.

한국에서 하멜 표류기가 연구되기 시작한 건 이병도부터입니다. 그는 한국보다 인구도 적은 네덜란드가 그렇게 뻗어나갔던 것을 보며 하멜이라는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했던 것 같아요. 이런 건 지금도 이어지고 있죠. 하지만 그런 작은 계기가 있었다 한들 조선이 통상의 길로 나갔을지는 의문입니다. 일본이라는 방해물도 있었구요. 따지고보면 감자,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부터 담배 같은 기호품은 조선도 잘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나가지 않았죠. 딱히 필요로 하진 않았으니까요. 그로부터 200년 후에도 문 안 열겠다 하고 있었던 걸 보면 하멜은 그저 동서양의 만남, 그 중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였을 겁니다.

이상... 미지와의 조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https://pgr21.com/?b=8&n=39784 - 탈출
https://pgr21.com/?b=8&n=41149 - 쥐베르의 조선 원정기
https://pgr21.com/?b=8&n=41209 - 이게 대체 뭔 소리여
https://pgr21.com/?b=8&n=41382 - 황당선
https://pgr21.com/?b=8&n=41495 - 무역에서 무력으로
https://pgr21.com/?b=8&n=41870 - 제너럴 셔먼호 사건
https://pgr21.com/?b=8&n=42168 - 오페르트 도굴 사건

자... 다음 얘기는 두 개로 나눠서 병인양요 - 신미양요 - 강화도조약 - 청일전쟁 - 러일전쟁 같은 무서운 얘기들과 개화기 때 조선에 온 (선교사 등) 서양인들이 본 조선을 다뤄보겠습니다.

... 음 일단은 연산군부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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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서스
13/02/25 22:21
수정 아이콘
하멜이라...
이원진이 제 직계조상이라 어린시절 하멜관련행사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던게기억나네요

이말년에 등장하셨을때는 기분이 참 묘했다는...
Practice
13/02/25 23:20
수정 아이콘
낭가삭기는 나가사키를 말한 거였을까요? 크크크크 서로 다른 언어와 언어의 만남이 되게 재밌네요
Je ne sais quoi
13/02/26 08:55
수정 아이콘
오늘도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
설탕가루인형형
13/02/26 10:39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소녀시대컴백
13/02/27 08:43
수정 아이콘
하멜표류기가 읽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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