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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1/27 02:23:31
Name DEICIDE
Subject [일반] 에반게리온 : 서(序). - 아, 그렇지. 상처였습니다.
에반게리온을 보셨습니까?

그리고 재미있으셨습니까?



에반게리온을 처음 접했던 것은 제가 중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중학생' 이라는 신분, 참으로 애매한 시기이지요.
순수함과 철없음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초등학생과는 다르고,
어른의 논리에 눈뜨고 이성과 입시에 골몰하는 고등학생과도 다릅니다.
어리지도 않고, 크지도 않습니다.
아직 멋모르고, 겪어본 것도 적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없지는 않습니다.
무어라 규정짓고, 다루기가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중학생' 이라는 신분은 소외받기 십상입니다.
바로 이 '중학생' 이 에반게리온의 파일럿들이며,
그들을 처음 만났던 저였습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의 신화적 작품을 만났을 때
저는 조용히 침묵하며, 그러나 격하게 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에반게리온' 은 여러가지 단편적 언어의 조각들로 남아있습니다.
에반게리온. AT필드. 사도. 폭주. 네르프. 제레. 서드 임팩트...
오늘 그 언어의 조각들을 들고 과연 내가 침잠해 들어갔던 것이 무엇이었나
다시 한 번 확인하러 극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상처' 였습니다.


에반게리온에는,
가슴 서걱거릴 정도로 쓸쓸한 외로움에 홀로 버려져 보았고
나 주위의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나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또 인정하려 애쓰며
스스로와 맺는 관계에 대해 진붉은 선혈이 낭자한 치열함을 겪어 보았다면.
그 상처입은 자들이 꼭꼭 숨겨두었던 자기 가슴 속의 차가운 한켠.
그 곳을 연결짓는 어두운 빛깔의 거대한 유대를 만들어 놓습니다.

때문에, 에반게리온의 팬들은 흔히 몹시도 독선적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만이 스토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캐릭터들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요.
지금 저부터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상처를 건드리고, 그것에 공감해주기에
다른 누구와도 공유하기 싫은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
그것을 에반게리온의 '재미' 라고 부른다면,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그 시기, 관계에 대해 무지했고 그런 나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무능했던 저는
쉽게 말해서 따돌림과 외로움의 시기를 겪어 보았던 저는
에반게리온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받지는 못했지만
그 상처를 다른 누군가와 공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때 받았던 그 감동과 충격은 직설적이었고, 피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받았던 상처와 아픔은 사람으로 회복되어집니다.
어느새 나이가 들면서,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로 인하여 남에게 사랑받고 사랑받는 법을 알게 되어가며
점차 그 '상처' 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되어갑니다.

...하지만, 그 상처입은 자들과의 공감과는 어느새 조금씩 멀어집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
우둔했던 어린 시절을 넘어 현명해지지만
그런 자신의 우둔했음을 잊어버리는 우둔함마저 따라오게 되지 않던가요.


ThEnd.




p.s. 제가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장면중의 하나가 이번 '서(序)' 에서는 나오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옮겨보겠습니다.

미사토의 집에 찾아온 리츠코 박사가 레이의 갱신된 카드를 신지에게 넘기며 나누던 대화입니다.


리츠코 : "착한 아이야. 네 아버지를 닮아서 무척 서툴지만."
신지 : "서툴다니, 뭐가 말이죠?"
리츠코 :  "사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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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27 03:02
수정 아이콘
정말 집요하게 남과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잡아주는 작품이죠. 사실 다시 보면 은근히 개그도 많고, 밝은 부분도 많은데.. 시간이 지나면 쓸쓸한 감흥만 남더군요. 그래서 다시 볼 때마다 어색해지곤 합니다.
08/01/27 21:04
수정 아이콘
이 글을 보니 한 번 보고 싶네요.
길시언 파스크
08/01/27 23:26
수정 아이콘
전 고등학교때 에바를 봤습니다... 제가 본 첫 애니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충격이란...

동네 후배에게 맛있는걸 사줘가며 비디오를 빌려다가 바로 쭈욱봤죠~ 화질이 안좋았으나 그런것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뭔가 이상하게 서글프고 쓸쓸하고,, 황량한것이,, 차라리 꿈(?)처럼 나왔던 그부분이 진짜 앤딩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할정도로 마지막은 이상했죠.. 그후 후속편에 데스 앤 리버스.. 등등 까지는 다 봤지만.. 도무지 이해는 되지 않고..

오히려 레이와 아스카 신지 등에 대한 환상(?)만 깨지고....
혹자는 에바의 뒷부분을 가르켜 '자기애니파괴'라고 부르더군요... 마지막만 좀 다르게 끝났어도 좋았을 작품이었는데요...

혹시 글쓰신분은 에바의 뒷부분까지 다 이해하신거라면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사도, 롱기누스의 창,, 레이의 정체,, 결말...
이해가 잘 안돼요..
08/01/28 00:03
수정 아이콘
길시언 파스크란!님// 에바는 티비판과 극장판의 결말 부분이 다릅니다. (새로나오는 극장판은 아예 본편의 스토리 자체도
다음 편부터 본격적으로 달라지는 것 같더군요.) 에바는 단순하게 얘기하면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주제를 대형 전투 로봇,
학원, 미스테리 등의 (일본에서) 익숙한 소재들을 가지고 신화 차원으로 다루는 이야기 입니다.
글쓰신 분 말대로 "마치 자기 자신만이 스토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캐릭터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생각하게 만드는건
(일본 만화와 SF 팬들에게 익숙한) 매니악한 코드들을 듬뿍 뿌려놓은데다 다의적인 신화속 상징들을 직접 사용해서 분분한
해석이 나오도록 의도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나온지 한참된 메가히트작인만큼 그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설명들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조금만 검색해보시면
얼마든지 답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에바를 꼼꼼히 보면서 의문점을 체크해두었거나 하지 않았다면 (왜 에바는
저 어린 애들만 조종이 가능할까? 레이와 아스카와는 달리 전혀 훈련받지 않은 신지가 바로 실전에 투입됐던 이유는 뭘까? 부터
시작해서...) 제법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겁니다.

뒷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감독이 처음부터 '인류보완계획'이란 이것이다. 라고 명백하게 정해두고 시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냥 '뭔가 숨겨진 음모가 있다'는 식의 분위기를 풍기는 정도로 진행하면서 고심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달콤쌉싸름
08/01/28 13:02
수정 아이콘
에반게리온의 감동은 그런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공존한다는데 있지 않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epic님이 거의 다 하셔서.. 저는 침묵해야겠군요. 하핫.
신화적 차원의 스케일과 감동을 유지하기 위하여 실제로 에반게리온에는 C.G.Jung의 정신분석학이나
사해문서, 생명공학과 다른 문명권의 신화적 상징을 실제로 차용했다고 나오죠.

에반게리온에 대한 무척이나 잘 쓰여진,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은 해설과 설명들이 실제로 많은데요,
저는 제 감동을 유지하고 싶어서- 아마 이것이 '독선적'이라는 말과 맞닿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참고하고 싶은 것들만 참고했답니다.

저는 '호저의 딜레마' 라는 시리즈 타이틀제목,
'제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가시를 세우면 다가오는 사람을 상처 입힐 수 밖에 없고 고독해지지 않을 수 없다' 는 제목에
반응했는데, 아마 제가 중학교시절 조금 거칠었(?)던 건 나름 가시가 아니었을까 한답니다. 하하..
그리고 카오루가 신지에게 "너의 마음은 유리처럼 섬세해서 깨지기 쉬워.."라는 말을 하죠. (정확하진 않을꺼 같네요. 헤헷..)
아마 중학생이었고 나름 섬세했던 그때는 저말이 무척 위로가 되어 닿았던 것 같습니다.

모든 성장통을 겪는 영혼들을 위한 닭고기 수프 같은 존재 아니었을까요.
지금의 저는 적당히 크고 닳아버려서 그때 느꼈던 공감과 전율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네요.

와닿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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