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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28 12:25:41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폭군의 품격-충혜왕
1.
1295년 겨울. 개성의 어느 차디찬 거리를 가로막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곳은 세자가 지나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예상대로 화려한 군복을 차려입은 세자가 말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그 앞으로 다가가자 시위무사들이 당황해 칼을 내리치려 했습니다.
“그럴 것 없다. 이들은 무기도 없지 않느냐?”
나지막하게 세자가 말하자 무사들은 칼을 거뒀습니다.

길을 가로 막은 사람들은 버석버석 언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억울하옵니다!”
스무살 청년 세자는 말 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는 잘 알아서 하겠노라며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충렬왕은 이미 인심을 잃었습니다. 30년간의 몽골과의 전쟁과 뒤이은 일본 정벌로 백성들의 상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지만 충렬왕은 원나라 부마로 대도에서 놀던 대로 질펀하게 놀아대고 있었습니다. 왕의 비위를 잘 맞춘 대가로 후궁과 환관들과 부원배들은 부귀영화를 누렸고 그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했습니다. 사람들은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었고 결국 세자를 찾았습니다.

세자 원의 가슴에 불꽃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나서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세자는 힘을 비축하기 위해 원나라로 다시 들어가 1296년 11월에 대도에서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하고 귀국합니다.
오자마자 세자 원은 아버지 충렬왕이 아끼는 후궁과 환관 등 40여명을 직접 처형하는 하극상을 벌이게 됩니다. 충렬왕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습니다. 결국 버팀목이던 제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어 아들에게 왕위를 물러주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세자 원이 바로 충선왕입니다.

그런데, 왜 충선왕은 세자인데도 불구하고 왕을 능가하는 힘을 가졌던 것일까요? 그리고 왜 백성들은 그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던 것일까요? 그리고 과연 충선왕은 성군이 되었을까요?

잔혹하게도 역사가 내린 결말은 고려시대 충자로 시작되는 왕호를 가진 임금시대의 비극의 시작임과 동시에 희대의 폭군 충혜왕을 낳게 되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
몽골에 끝까지 저항한 대가로 고려는 왕의 지위를 잃지도 않았고, 풍습을 그대로 사용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항복문서를 받아든 쿠빌라이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 동아시아 최고의 정복군주는 당태종이었는데, 바로 그 당태종도 해내지 못한 일, 고려(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냈기 때문이지요.

기분이 너무 좋아진 까닭일까요? 쿠빌라이는 자신의 딸을 고려 원종의 아들과 결혼시켰습니다. 명실상부 고려는 원황실의 부마국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계 대제국 황제의 사위가 된 충렬왕은 기쁜 나머지 몽골 군복을 입고 몽골풍에 쩔어 살게 됩니다. 이윽고 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라 제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원 즉 충선왕입니다.
(물론 이 결혼이 기분 탓은 아니란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고려의 위상에 각별하게 관심을 둔 까닭은 당시 아직 끝나지 않은 남송 정벌과 일본 정벌을 염두에 둔 것이었죠. 그리고 쿠빌라이의 계산대로 충렬왕은 글로벌 호구가 되어드리죠..)

충선왕은 태어난 지 두해 만에 세자가 되었습니다. 요람에서부터 이미 권세가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바로 징기스 칸으로부터 이어져 쿠빌라이 칸을 거쳐 내려온 정통 황금씨족이었습니다. 북방 유목민족 특유의 혈연의식에 따라 세자 원은 각별하게 원황실의 보살핌을 받았고, 어릴적부터 이런 대제국 자손의 긍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4살 때 원나라 수도 대도에 들어갔을때는 쿠빌라이가 매우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고 친히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몽골이름은 이질보하로 똑같다는 뜻의 이질과 황소라는 의미의 보하를 합친 말입니다. 당시 원나라 태자비가 지어줬다고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그 태자비도 이후 황제가 되는 성종의 부인으로 원황실의 후한 대접을 받은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요)

이후 세자 원(충선왕)은 대도와 개경을 오가며 지냈는데 개경에선 그 어떤 권력자도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고 대도에서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사춘기 소년의 권력에의 의지는 충만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세자시절인 13살부터 세자비를 두루두루 거느리게 됩니다.

세자 원은 할아버지 쿠빌라이가 병석에 눕자 그 누구보다 더 열성적으로 병간호를 합니다. 아마도 태어나자마자 입에 문 숟가락의 품격을 결정해주었을 할아버지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이었나봅니다. 아버지 충렬왕과는 그토록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이죠.

세자원의 결혼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습니다. 부인 계국대장공주는 진왕 감마라(쿠빌라이의 손자)의 딸이었습니다. 따라서 쿠빌라이의 딸을 어머니로 두고 손자를 장인으로 두고 있었으니 그누가 그에게 대적하겠습니까. 엄연히 살아있는 권력이었던 아버지 충렬왕의 심복인 환관과 부인인 후궁을 처형하는 일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역사상 이토록 힘이 센 세자가 또 있을까요?

그가 아버지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엔 민생현장의 소리를 들어주던 자상한 군주의 모습을 통해 나라의 미래를 발견했던 조정신료들의 힘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충선왕에게서 ‘성군‘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월한 혈통, 백성의 지지, 조정신료들의 믿음. 그리고 집현전을 연상케하는 학문연구기관인 사림원의 탄생.

하지만 거칠것 없던 충선왕은 불과 7개월만에 폐위됩니다.

3.
표면적 이유는 여자때문이었습니다. 13살부터 여인들과 관계를 맺어 세명의 부인을 이미 두고 있었지만 그거야 후비이니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고도 다시 새롭게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버린 세자의 행동이 빌미가 된 것입니다. 공주는 화가 났고 그 틈을 타 충렬왕 지지세력들의 맹렬한 로비가 먹혀 원나라에서 충선왕 부부를 불러들이며 충렬왕의 복위를 결정합니다.

물론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습니다. 충렬왕과 이권이 연결된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개혁이 반발을 불러왔다고도 하고, 사림원을 통한 반원적 성향의 독재에 원나라에서조차 근심했다고도 합니다. 사림원은 단순한 학문연구기관이 아니라 비서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왕명의 출납만 맡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주요정책을 심의 결정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왕은 신하들을 믿지 못했고 그들과의 타협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충렬왕에 아부하거나 직언하지 못한 관료들이란 한통속이라고 여겼던 탓이겠죠. 물론 그럴수도 있지만 관리란 쓰기에 따라 폭군의 도구도 되고 성군의 파수꾼도 되는 법이었지요.

고려시대는 성종-문종대를 거치면서 ‘재추’들의 시대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평화롭던 태평성대시대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200년 가까운 평화는 문신들의 낙관론을 가져와 왕과 재추들간의 세력균형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재추가 되려면 과거합격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왕의 재가가 필요했기에 적어도 예종때까지는 이 세력간 팽팽한 균형이 이뤄졌습니다)

이 균열이 생긴 것은 내부에서였습니다. 이자겸,묘청의 거듭된 반란과 그에 따른 숙청과정을 거치면서 균형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을 독점하게 된 개경파 혹은 김부식의 후예들은 자신들이 가진 화려한 지식을 뽐내기 위해 임금인 의종을 고립시켰고 무신들을 능멸했습니다.

왕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비서들에 기댔습니다. 사적인 비서인 내시와 환관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공적인 정무비서인 ‘승선’을 강화하고 활용해 관료에 대한 지배력을 높였습니다. 이들은 우월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관리들을 이간질하고 그들의 비리를 손에 쥐며 정국이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왕으로서는 할 수 있는게 고작 정보공작정치뿐이었습니다.

이지경까지 되고도 문신들의 평화가 지속되긴 어려웠습니다. 균열을 틈타 무신정변이 벌어졌고 재추들의 위상은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대화와 타협의 기구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신정권은 의종이 그랬듯이 비서들을 이용한 측근정치 외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애시당초 말이 통하지 않을테니까요.

무신정권의 몰락으로 대화와 타협의 기구들이 일부 복원되었지만 그 자리엔 부원배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원나라를 등에 업은 이들의 횡포와 원나라의 부마가 되어 권력을 잃을 위험이 없어진 충렬왕의 부패와 부정과 타락은 지친 백성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습니다.

공녀를 바치고 일본과의 전쟁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충선왕이었고, 충선왕은 그들의 요구에 보답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바로 사림원독재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몰락을 앞당겼습니다.참으로 불꽃같은 7개월이 지나 충선왕은 폐위되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상 첫 번째 복위입니다.

4.
권력에의 의지가 남달랐던 충선왕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매의 눈을 한 채 대도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대도에까지 뻗친 충렬왕 세력들의 공세로 몇차례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원나라에서도 후계논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충선왕은 수많은 왕자들과 교유하면서 미래의 황제를 점찍었습니다. 무종과 인종 형제가 그들이었습니다.

치열한 권력암투과정에 충선왕은 쿠빌라이의 손자로서 참여하였고 그 결과 무종형제가 승리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짜릿할까요? 손맛을 알아버린 낚시꾼과도 같은 희열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의 서막이었습니다.

무종은 원나라 황제가 되자 그누구보다 앞장서 자신을 지지해준 충선왕에게 심양왕의 자리를 내줬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세상을 떠난 충렬왕의 뒤를 이어 고려왕에도 올랐습니다.
이로서 충선왕은 고려와 심양을 지배하며 어쩌면 과거 고구려 부여땅을 되찾을수 있을뻔도 했습니다. 이후 원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 그럴 의지를 가지고 군사력을 길렀다면요.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심왕과 고려왕을 동시에 얻게 된 충선왕은 세계정복군주의 후예로서 만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에 돌아온 왕은 거침없이 개혁정치에 열을 내는 듯하더니만 갑자기 정치에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에겐 여전히 남아있는 세계제국의 왕자로서의 짜릿한 손맛.그 정치투쟁의 현장의 생생한 느낌이 유혹했던 것일까요? 충선왕은 고작 3개월간 고려에 머물다 대도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배가 그의 대도에서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서해바다를 건너갔고, 그 안에는 고려인들의 땀과 눈물과 한숨이 얼룩진 금은보화가 가득했습니다. 신하들이 울부짖는 백성들을 대신해 왕의 귀국을 요청했습니다.
대도에서 화려한 정객으로서의 활약을 반가워하던 무종황제도 죽고 나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원나라에서도 귀국을 종용하였고 충선왕은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그가 궁여지책으로 귀국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아들인 충숙왕에게 고려왕의 자리를 넘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충선왕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 잃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조카인 왕고에게 넘겨주고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후 불러오게 될 폭풍을 이때 그는 예상이나 했을까요?

황금혈통으로서 대도에서 세계군주의 반열에서 화려한 정객의 삶을 살던 충선왕의 영화도 곧 끝났습니다. 정쟁의 소용돌이는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토번(티벳)으로 3년간의 유배후 돌아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그가 죽은 곳은 원나라 수도 대도였습니다.

5.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충숙왕에겐 치명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충선왕은 여전히 건재했는데다 아버지에 대한 심한 열등감마저 있었습니다. 충숙왕의 어머니는 원나라 공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충선왕은 세자시절 원나라 평범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그 때 태어난 아들이 충숙왕이었습니다.

충숙왕의 부인도 마찬가지로 쿠빌라이의 직계가 아니었습니다. 방계집안의 딸내미였으니 공주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그다지 힘있는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충선왕은 또 다른 불씨를 남겨놓았는데 그것은 심왕(심양왕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심왕으로 고침)이 끊임없이 고려왕의 자리까지 노리게 된 것입니다. 십년간 충선왕의 허수아비 임금으로 살다가 그가 죽자 이번엔 심왕파가 사사건건 간섭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심왕파와 충숙왕파로 나뉘었습니다. 심왕인 왕고는 원나라 조정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충숙왕을 괴롭혔고 견디다 못한 충숙왕은 왕위를 내주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왕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아들 충혜왕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잠시 왕위를 물려주고 대도로 건너가 훗날을 모색한 뒤 다시 양위받을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고려 왕실의 왕위계승방식은 난리도 아니었으니까요. 아버지 충선왕이 그랬듯이 아마도 자신도 아들을 꼭두각시로 내세울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15세 어린 충혜왕은 결코 녹녹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특유의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폭군의 품격을 결정했던 것도 이것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려시대에 수많은 정변과 전쟁속에서 숨을 죽였던 고종임금에 대해 후대의 사관은 이런 평가를 했습니다.

“왕이 조심스럽게 법을 지키고 수치를 견디고 참았기 때문에 왕위를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고려사,고종 세가

46년간 최장수 임금으로 남은 비결은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격동의 고려말, 충혜왕은 그럴 생각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어릴적부터 원나라에서 할아버지 충선왕의 리더쉽을 보고 자란 그의 롤모델은 아마도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원나라에서 충혜왕은 세자시절부터 활발한 교류를 통해 실력자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친목을 쌓기도 했습니다. 자기 사람을 만드는데는 특유의 기술이 있었던 듯합니다.

충혜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단지 아버지의 허수아비가 될 생각따윈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고려인이라는 것이 그에게 더욱 그런 생각을 부채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지요.

그의 눈에 충숙왕은 무능력한 군주일 뿐이었습니다. 충선왕같은 기개도 없어보였습니다. 충혜왕은 아버지의 바람과는 반대로 충숙왕의 측근들을 모조리 잘라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을 앉혔습니다.

깜짝놀란 충숙왕과 그 지지세력은 충혜왕을 모함하였고, 충혜왕은 2년만에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갑니다.
(당시 서해 어느 섬에 귀양온 원나라 황실나부랭이와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는 죄목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치죄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

그곳에서 절치부심, 다시 지지세력을 모으려 했지만 상황은 나빠졌습니다. 자신의 지지자였던 정승 연첩목아가 죽고 그 아들 당기세는 반란을 일으키다 숙청당했습니다. 연나라 황실은 순제와 기황후 그리고 백안의 손에 들어갔으니 충혜왕의 반대파들만 득실거린 셈입니다.

그러나 충혜왕은 천성적으로 패거리를 이끄는 능력이 있었던지라 아무도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 대도의 쓸쓸한 거리를 이잡듯 뒤져, 마침내 위그르 인들과 친하게 지냅니다. 이때 그는 상업과 교역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원나라에서 돌아온 뒤에도 고독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궁궐안에 충혜왕의 지지자는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더욱 차갑게 대했습니다.
“이런 발피같으니...”
충숙왕이 이 말은 충혜왕의 가슴에 얼음송곳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원나라에서 5년간의 숙위기간을 채우면 왕이 될 자격을 갖게 될 터였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백안이 충혜왕을 고려로 돌려보내면서 내뱉은 말도 그 말이었습니다.
발피, 즉 건달.
정적이었던 백안과 아버지는 각각 원나라의 실세와 고려의 왕이었으니 어쩔도리가 없었습니다.
(숙위란 볼모생활이라고 하지만 원나라는 이 기간을 통해 친원파 고려왕을 만들려는 뜻이 있었고, 고려의 세자는 이기간을 통해 원나라에 자기 지지세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충혜왕은 힘을 기르며 원,아버지,관리들에 대한 복수를 꿈꿨습니다.

그때 아버지 충숙왕이 죽었습니다.

6.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이 군주로서 가진 능력에 대해 의심했을까요? 왕은 죽으면서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하기야....아직 어린 강릉대군(공민왕)을 왕위에 올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뭐, 안될것이야 없었을 것입니다. 충혜왕의 아들 둘은 각각 8살,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니까요. 충혜왕으론 절대 안된다라고 여길만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란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충혜왕은 원나라 실세인 백안과 등을 돌린지 오래였기에 쉽게 왕위계승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조정도 나뉘었습니다. 그동안 충혜왕을 끌어내리기 위해 충숙왕은 심왕의 지지자들과 손을 잡았는데 내심 고려왕의 자리를 기대하고 있던 심왕파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대안이 있다고는 하지만 충혜왕은 장자이고, 충숙왕의 유언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정은 심왕반대파들도 건재했습니다. 심왕을 받아들이느니 충혜왕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본 것은 이해타산이 맞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심왕이 고려왕이 된다면 충숙왕파야 말로 죽쒀서 개주는 꼴이니까요.

임금의 자리는 여전히 비었습니다. 여전히 원나라의 백안은 충혜왕이 보낸 사신들에게 발피에겐 왕위를 넘겨줄 수 없다는 말만 거듭했습니다. 그가 심왕 왕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더욱더 내보이고 있었고 심왕은 평양으로 들어와 자신의 지지자들의 우두머리인 조적을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충혜왕이 믿는 유일한 사람은 악소라고 불리는 젊은 무뢰배들뿐이었습니다. 그는 고려에 돌아온 뒤 특유의 조직력을 발휘, 젊은이들을 모아 함께 매사냥을 하고 스포츠를 즐기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들의 단합력과 실력은 단연 돋보였습니다.
(후대에 그가 사냥과 격구만 즐기는 폭군이라고 하였지만, 사냥과 격구를 즐긴 임금은 즐비했습니다. 악비들 중에는 상인들도 많았습니다. 위그르족과 어울리면서 교역에 대해 한 수 배우면서 아마도 상인과 떼려야 떼어낼 수 없는 무장집단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중국 삼합회가 그렇게 탄생했듯이)

사람들은 여전히 눈치를 보며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악비들과 격구를 즐기고 사냥을 하는 것외에 달리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 하나 더! 여자들을 탐하였습니다. 바로 희대의 색마 등극인 셈이죠.

7.

‘1332년 5월 병인일(8일) 충혜왕이 그의 장인 홍융의 후처 황씨를 간음하였다.’

이것은 충숙왕이 죽은지 36일만의 일이며 충혜왕의 흑역사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를 색마에다 폭군으로 만들어버린 일은 이렇게 시작된 광기어린 색마본색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그럴까요?

첫 음행의 당사지인 황씨는 아마도 이일로 임질에 걸렸던 듯 합니다. 당시 왕실에는 무분별한 성생활로 인해 성병이 만연했습니다.
조선후기 의료선교사로 들어온 알렌,에비슨 등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들의 5대질병중에 성병이 있었습니다.따라서 충혜왕의 성병은 그만이 문란해서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그러나 모든 폭군의 운명이 그렇듯 그는 문란한 성생활의 주범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충혜왕은 다시 장인의 집에 찾아갑니다. 황씨가 연회를 베풀어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왕이 찾아간 이유는 황씨의 임질을 치료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호색한답게 임질치료전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떻든 여러 정황상 황씨와의 관계는 폭력성이 있는 일방적인 관계였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충선왕이 부인인 계국대장공주와 잠자리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서도 임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란한 부인의 성병을 의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면에서 충선왕은 매우 분별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황씨 외에도 여러명의 여자들을 욕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아버지의 여자들이라는 점과 아버지를 모시던 내시의 여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아버지 충숙왕도 민가의 정숙한 여자를 범해서 궁궐에 데리고 있다가 죽고 나자 충혜왕이 취했다가 자신의 가신에게 주기도 합니다.

왕이 되지 못한 충혜왕은 무기력함을 사냥과 스포츠와 여성편력으로만 해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경화공주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궁궐의 최고어른이자 실력자는 경화공주입니다. 경화공주는 아버지 충숙왕이 복위하면서 결혼한 부인입니다. 아직도 건재한 충숙왕파의 우두머리는 그녀였습니다. 충혜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서 왕위계승의 지지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설득이 실패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경화공주가 답례로 베푼 연회에서 그녀를 겁탈하고 맙니다. 어쩌면 자신의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간 그 때 그 댓가로 아버지 충숙왕과 결혼한 경화공주에 대한 분심을 이기지 못한것일까요? 아니면 설득하는 방법을 터득하기엔 너무 이른나이에 폐위의 고통을 맛본 것일까요?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부인을 취하는 것은 몽골족(우리나라의 경우는 부여나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의 취수혼전통에 따라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의 부인을 후궁으로 들였습니다. 물론 둘 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므로 취수혼 전통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애초에 그녀가 범한 여자들은 아버지의 여자들이라는 공통점도 찾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후 원나라 감옥에 갇힌 뒤 귀국하여서는 이 경계선을 넘었고 더 이상 쳐줄 실드는 없게 된 셈입니다만)

그리고 성적으로 문란한 문제는 공주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하고, 심지어 충선왕은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 충선왕의 경우를 보건대 경화공주를 아내로 맞는 것은 충혜왕에겐 그다지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문제는 폭력이었습니다. 경화공주는 끝까지 저항했고 충혜왕은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는지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에 경화공주를 폭력으로 굽히려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상황은 돌이킬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화공주는 곧바로 조적에게 이일을 알렸습니다.

조적은 무기력하게 감았던 눈을 치켜뜨며 무릎을 쳤습니다.
‘옳다구나!’

마치 강태공의 구부러지지 않은 바늘에 물고기가 물린 기분을 느꼈습니다.

8.
심왕파.

그들은 왜 심왕이 고려왕이 되길 원했을까요? 이것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습니다. 일단 왕고라는 인물자체가 연구가 되어있지 않으니까요.
다만 개인의 입신영달이라는 매우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는 그누구나 가지고 있으므로 논외로 하고 대의명분이 무엇이었을까요?

충선왕이 고려왕과 심왕을 동시에 유지하였더라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테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이 두 개의 나라를 분리해버렸습니다. 덕분에 원나라는 손안대고 코풀게 된 거죠. 두 왕의 정치적 싸움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하면 그만이니까요.

심왕과 고려왕이 그리고 심왕파와 고려왕파가 으르렁 거리면 거릴수록 좋은 것은 원나라였습니다.

심왕파들은 그 지역적 특성상 원나라와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서 로비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들의 로비력은 늘 고려왕을 능가했습니다. 충선왕과 달리 원나라 황실의 적통과 결혼한 왕이 없게 된 고려왕의 능력과 자질은 로비력으로 인해 늘 폄하되었습니다. 심왕에게 유리한 이런 상황은 심왕파들을 늘 존재하게 하는 화수분이었습니다.

거기에다...굳이 대의명분을 들이밀자면 고려는 옛 고구려의 영토를 확보할 거점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왕파의 본거지가 평양이라는 것도 이런 점에서 고려시대에 소외된 정치세력, 그리고 동명왕과 유화부인의 사당에 이때까지도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평양과 만주지방의 고구려인들의 정서를 생각해본다며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삼국신화 개념을 제압한 것은 물론 단군신화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후로는 옛삼국시대 부흥운동이 없습니다)

심왕파들의 화려한 정치력은 충숙왕을 압도해서 충혜왕에게 양위하도록 하더니 반대로 충혜왕을 몰아내기 위해 충숙왕과 손을 잡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만, 뒤집어 보면 반대였습니다. 충숙왕에게 당한 셈이죠.

충숙왕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은 그토록 벌레보듯 하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말았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인거죠.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는 심왕파의 유일한 돌파구는 원나라 백안이 충혜왕을 너무 미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왕파의 우두머리 조적은 실낱같은 가능성에 희망을 건 채 평양의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습니다.

개경에서도 충혜왕의 반대세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충혜왕의 여성편력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충숙왕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악비들의 악행때문이었습니다. 충혜왕은 바른말을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15살 왕위에 올라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 폐위당한 트라우마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덕분에 충혜왕의 주변엔 제대로 된 인간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충숙왕파들은 자신들의 돌파구로 경화공주의 우산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충혜왕의 겁탈은 경화공주에겐 인간적 모욕은 물론이고 정치적 반격의 기회도 주었습니다. 위기에 몰린 충숙왕파는 이 기회를 놓칠리 없었습니다.

당장 경화공주파(옛충숙왕파)는 조적파(심왕파)와 손을 잡았습니다. 반군은 순식간에 천여명을 돌파하며 왕실을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악비들은 그동안 그냥 공으로 놀고 먹고 사냥하고 스포츠를 즐기던 이들이 아닙니다. 이들의 무장력은 가공할만했습니다. 조적의 난은 순식간에 제압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충혜왕의 악비에 대한 믿음만 키웠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등장한 셈이지요. 마치 나치의 친위대를 방불케하는....

9.

그러나 일년 뒤인 1440년 1월 9일 새해꼭두새벽에 충혜왕은 체포되어 원나라로 끌려가 감옥에 갇힙니다. 경화공주 겁탈사건을 빌미로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운이었을까요?아니면 비운이었을까요? 이때 백안이 실각합니다. 왕은 풀려나 귀국했고 이후 그는 조금씩 조금씩 더 반원,반귀족적인 형태를 노골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폭력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도 견딜 수 있을리 만무합니다. 원나라는 충혜왕을 다시 체포하였고 고려 대신들의 상소에도 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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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ostPsiki
12/12/28 12:34
수정 아이콘
짤렸다는게 슬프네요.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12/12/28 12:43
수정 아이콘
아니 이런 절단신공을... 잘 읽고 있습니다.
happyend
12/12/28 12:44
수정 아이콘
헉....글 수 제한이 있나요?
-------------- 뒷부분입니다.

고려 대신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하고 귀양 보내졌습니다.
(귀양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리기 위해 원로들을 소집하였으나 모이지 않아 파투가 났다고 합니다. )

대도에서 이만리나 먼 계양으로 가는 귀양길. 신하인 배전이 옷보따리를 왕에게 바쳤습니다. 왕은 보따리를 받아들고 돌아섰습니다.
보따리를 움켜쥔 왕의 슬픈 얼굴을 바라보던 배전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은 시종을 딸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종이 달려갔을 때 귀양행렬은 이미 멀리 떠나고 없었습니다.
왕은 계양까지 가지 못하고 악양현에서 죽었습니다.(독살되었다고도 합니다.)

그가 죽은 뒤 비로소 고려의 지식인들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임금의 목숨이 원나라 손에 잡힌 파리와 같구나....하고요. 형의 비극적 최후를 목도한 동생의 가슴속에 자주의식이 싹튼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동생은 훗날 왕위에 올라 공민왕이 됩니다.
알킬칼켈콜
12/12/28 13:46
수정 아이콘
게시판 수정 이후로 장문의 글은 짤리는 문제가 ㅠㅠ 덕분에 ACE란의 많은 글들이 토막났습니다
그리메
12/12/28 13:27
수정 아이콘
당시 동성애가 왕족들의 자존심? 비스무래하게 눈시BB님 글에도 일본 동성애 이야기가 나오긴 하던데...문란한 성생활에 대한 상당수 성병도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로 그 공민왕과의 픽션을 재구성한 것이 유명한 쌍화점...이죠.
충선왕은 정말 아버지를 능가하는 최고의 살아있는 권력이었겠습니다. 쿠빌라이 - 원종 사랑이 극진했고, 쿠빌라이가 가장 아끼는 딸의 아들...즉 외할아버지가 쿠빌라이라니...아버지도 우숩게 보였겠죠. 친할아버지는 무신 정권을 쓰러트린 원종이고 외할아버지는 전 세계 최강대국 원의 대칸이니...그런 자 치고는 너무 쉽게 무너진 감이 있습니다. 혈통을 근거로 심양까지 복속했음 어땠을까 싶긴 하네요. 이 심양 문제는 두고두고 고려를 괴롭히고 위화도 회군에서 고려 회복운동, 6진 개척까지 이어지는걸 보면 상당히 아쉽기도 한 대목같습니다.
runtofly
12/12/28 13:28
수정 아이콘
우와~~ 재밌습니다~~!!
2초의그순간
12/12/28 13:29
수정 아이콘
좋은 내용 잘 봤습니다!
Siriuslee
12/12/28 13:46
수정 아이콘
가장 드라마틱한 군주로 생각되는 심양왕 - 충선왕과
우리역사에 가장 최악의 군주로 생각되는 충혜왕..
초코다이
12/12/28 22:05
수정 아이콘
이글 잘 읽었
happyend
12/12/29 13:14
수정 아이콘
푸힛.....;;;;;;
Je ne sais quoi
12/12/29 00:11
수정 아이콘
우와 이렇게 드라마틱했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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