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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26 14:09:59
Name 눈시H
Subject [일반] 지가 백제 후손이랩니다


+) 쓰고 보니 일본 전국시대에 대해 좀 아셔야 재밌을 글이네요. ㅠ_- 죄송해유

1399년, 정종 1년 7월 10일, 일본에서 사신이 옵니다. 헌데 참 특이한 말과 요구를 했죠.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백제의 토전(土田)을 청하였다.

헐... 0_0...

이 때 그는 공물을 바치면서 공을 보고했고, 거기 걸맞는 보상 겸 백제 후손으로서의 땅을 요구한 거였죠. 정종은 이에 도평의사사에 좀 찾아보라고 했는데, 당연히 찾을 수 없었죠. 이에 잠정적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 고씨의 후손으로 보고 3백결의 토지를 주려고 했습니다.

뭔가 순진하다는 생각까지 들지만, 나름 계산은 있었겠죠. -_-a 안 그래도 왜구 때문에 짜증나는데 확실한 친조선 세력이 필요했으니까요. 거기다 그 공은 바로 왜구를 토벌한 공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좀 아니긴 하고, 권근 등이 계속 막습니다. 이에 사자로 온 승려에게 말 하니 하는 말이

"만일 세계를 명시해 주시면 전지를 주지 않더라도 또한 좋습니다."

랩니다. 허 이 놈 보소 (...) 땅 달라는 건 그냥 찔러본 거고 중요한 건 족보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죠.

+) 이 때 백제의 수도로 생각한 것이 완산, 전주였습니다. 백제를 충청도 -> 전라도로 바꾼 후백제의 위엄이죠.

어찌됐든 그들 자신도 그렇게 주장하고 조선에서도 그걸 받아들이면서 제법 오랫동안 둘 사이의 괜찮은 관계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게 첫만남은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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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슈 서쪽을 보셔요.

당시 일본의 스오 쿠니(國)를 지배하던 호족은 뭔가 특이했습니다. 다른 가문들도 진짜든 가짜든 미나모토(原), 다이라(平) 등 명문가의 후손을 자처했지만 이건 일본 내의 얘기였죠. 이들이 내세운 건 바로 백제의 임성태자였죠. 성왕의 셋째 아들(위덕왕의 아들설도 있죠)로 성왕이 신라에게 당하자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에서만 나오는 인물이라 어디까지를 진짜로 봐야 될 지 애매하죠.

+) 예전에 신라 백제 얘기할 때 제법 한 얘긴데, 일본서기 판타지라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_-;

그가 일본에서 발을 딛은 곳이 다다라(多多良)하마여서 다다라씨라 칭했고, 이후 오우치에 거주하면서 오우치(大內)라 칭했다고 하죠. 오우치가 씨고 다다라가 성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_-a 이들을 다룬 책이 있는데 안 봤습니다 (...)

+) 씨와 성은 원래 좀 다릅니다. 이 때 일본의 경우 씨는 혈족 전체를, 성은 개인 직계 가문을 말하는 거라 보면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도쿠가와는 성이고 그는 겐지(原氏) 일족이죠.

하지만 이들이 정말 임성태자의 자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건 헤이안시대 말기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고 가마쿠라 막부쯤 가면 스오국을 장악했다는 거 정도? 오우치씨를 자칭한 건 위 실록의 주인공 요시히로의 증조부 때부터구요. 족보야 있지만 그 위로는 다 무슨 왕 무슨 왕 이런 거라서 -_-;

진실 여부에는 크게 관심 없어요. 도래인들이 많이 오던 곳이고 백제가 무너질 즈음 해서 많은 백제인들이 왔으니 정말 그 후손일 수도 있고, 임성태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백제인들의 후손이 내려져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백제의 후예를 외쳐도 먹혔다는 것이겠죠. 아무 의미 없는 걸 자칭할 순 없는 거잖아요.

아무튼, 실록으로 돌아가 보죠.

오우치 가문과 조선의 만남이 보이는 것은 태조 4년, 1395년입니다. 많은 토산물을 바치면서 대장경을 구했죠. 하지만 태조 때까지는 딱히 별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공물 바치고 대장경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이랬죠. 헌데 1399년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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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관련... 있으려나요.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마침내 남북조로 갈린 일본을 통일합니다. 중국에게서 일본 국왕으로 임명돼 일본 내에서는 말이 많은 양반이죠. 이 때 오우치 요시히로는 쏠쏠히 이득을 얻어냅니다. 실록의 기록을 봅시다.

"(일본의 대장군에게 왜구 토벌을 명령했는데) 대장군이 흔연히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제가 능히 제어하겠습니다.”
하고,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여섯 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대장군이 대내전(大內殿)으로 하여금 군사를 더하여 나가서 공격하게 하니, 적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모두 나와서 항복하였다."

큐슈 내에 있던 남조 세력을 쓸어버리는 과정이었죠. 이게 정확히 어땠는지는 안 봐서 모릅니다. =_=;;; 넘어가구요.; 요시히로는 원래 남조였다가 북조에 귀순, 이 때를 잘 노려 6개 쿠니의 슈고(수호) 다이묘가 되죠. 헌데 남조를 무찌르자 요시미츠가 그를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 자신도 확실히 인정받을 만한 게 필요했죠. 특히 조선과의 교역권 및 자기가 백제의 후손이라는 확실한 인증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으로서도 일본 내의 상황이 어떻든 왜구를 상대하는 그를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둘은 친해졌고, 오우치에서 보낸 사신은 일본 정부에서 직접 보낸 사신 다음의 대접을 받게 됐죠.

뭐 그렇다고 그가 막 영화를 누리거나 한 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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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미츠는 그 유명한 금각사를 지으면서 다이묘들에게 삥 뜯기를 시전했고, 요시히로는 이를 거부, 부딪히게 됐죠. 오우치 가가 더 크기 전에 밟으려는 요시미츠의 계략이었다고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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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년 10월, (조선에서는 의홍이가 왜구 때려잡으니 걱정 없다고 하고 있을 때) 요시히로는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오사카의 사카이를 점령합니다. 여기서 두 세력은 다음해 1월까지 전쟁을 벌이다가 요시히로가 전사, 패했죠. 나름 반요시미츠파를 끌어모아 천하(-_-)를 노린 것이었습니다만... 당시의 연호를 따 오에이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로 6개국 중 원래 가지고 있던 스오와 대유기생명체콘택트용 쿠니인 나가토를 뺀 4개를 몰수당했죠. 하지만 이렇게 무너지면 얘기가 진행이 안 되죠.

그가 죽은 후 동생들끼리의 권력다툼 등 침체기가 있었지만 가문이 아예 몰락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이들을 완전히 제압할 힘이 없었고, 요시히로가 죽은 이후 딱히 적대한 것도 아니어서 봐 줬죠. 그 동안 오우치가는 부활합니다. 동쪽으로도 영역을 넓혀 갔지만 그들이 집중한 곳은 역시 북 큐슈였죠. 오닌의 난으로 일본이 개판이 되면서 (이 때 서군의 주요 전력으로 참전하기도 했지만) 오우치가 역시 본격적으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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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 당주에 오른 오우치 요시오키는 본격적인 확장을 시작했죠. 서쪽으로는 조선과의 교역에서 경쟁상대인 쇼니가와 오토모가를 밀어내면서 북 큐슈를 차지하고 동쪽으로는 아마고가와 싸웠습니다.

http://blog.naver.com/ywon605?Redirect=Log&logNo=70127115776
걍 여기서 지도 보세요 (...)

1508년에 그의 힘을 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상략(상경)이었죠. 거기서 쇼군을 갈아치워 버리고 그 자신이 후견인이 됩니다. 훗날 노부나가가 한 걸 먼저 한 것이었죠. 서국 제일의 다이묘로서 그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이었으며 천하인에 가장 가깝다는 걸 알린 것이었죠.

하지만 한계는 너무 컸습니다. 동서에서 벌어지는 전투도 쉽지 않았고, 교토는 너무 멀었죠. 하극상이 필수조건인 전국시대에서 집안 단속하기도 어려웠구요. 거기다 조선과 명과의 교역도 끊겨 버립니다. -_-; 이런 상황에서도 확장을 계속하다 1528년에 병사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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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히로가 죽은 후에도 조선과의 교역은 계속됐습니다. 누가 정권을 잡든 조선과는 친해져야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세종 때 그들에 대한 평가를 봅시다.

"대내전은 그 선대로부터 성심으로 우리 나라를 섬겨 왜적의 무리들을 금제하였고, 무자년에 통신 부사 이예가 해상에서 바람을 만나 석견주에 표류하여 사경에 이른 것을, 대내전이 진심으로 구호하였으며, 식량 40석과 배값으로 돈 1백 관을 주어 선척을 수리하여 호송하였고, 매양 본국의 사신의 행차를 당하면 해적들이 출몰하는 요해처를 모두 호송하게 하옵더니, 이제 드디어 구주를 탈취 점거하여 여러 섬을 총괄하여 거느리고 있어 다른 왜인 추장의 유가 아니옵니다." (1428년 11월 26일)

이러면서 오우치와 대립하던 쇼니가에 줄 것까지 오우치에 주자고 합니다. 세종은 좀 더 얹어주고 쇼니한테 줄 건 그대로 주라고 명했죠. 이후 둘이 싸운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왜구를 걱정하게 되는데, 그래도 우선순위는 오우치였습니다. 뭐 오우치가 이기고 있기도 했구요 -_-a

연산군 때는 원숭이를 바치기도 했네요. 이 때 연산군의 대답입니다.

"원숭이는 나라에 소용이 없고 또한 기이한 물건이니 단연코 받을 수 없으며, 말은 전에도 혹시 바치는 사람이 있었으니 저들이 만약 굳이 청한다면, 우선 받아두는 것이 어떻겠는가? 대신들에게 의논하라." (1502년 12월 9일)

사실 원숭이는 일본에서 여러 번 바치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없으니 희소가치가 있었겠죠. 하지만 조선에 딱히 필요한 게 아닌 사치품이었죠. 이전에 (어딘진 몰라도) 원숭이를 받으니 연산군은 이렇게 말하며 돌려보냅니다.

"내가 듣건대, 앵무새를 선왕 때에 바쳤으나 값만 비싸고 나라에 이익이 없었다고 하는데, 지금 또 암 원숭이를 바치니 반드시 이전 일에 의거했을 것이다. (구리나 쇠도 값 대기 어려워 안 하는데) 하물며 이같은 무익한 짐승이겠는가?" (11월 14일)

... 이랬던 왕이 ㅠ_ㅠ...

아무튼, 시간이 흐르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소원해져 갑니다. 간단히 일본에서는 더 열어달라 하고 조선에서는 더 닫으려고 했기 때문이었죠. 거기다 전국시대가 본격적으로 흐르면서 왜구의 활동이 다시 시작됐고, 이 갈등 속에서 삼포왜란까지 일어났으니 -_-a 오우치가는 물론 대마도에서는 막부에 요청해 교역 재개를 빌었죠. 조선은 열 받아서 더 줄이려 했고 그럴수록 왜구에 더 힘이 실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오우치와의 연계가 계속되긴 했지만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죠. 중종 때 기사를 보면 "내가 봐도 열 받겠다"는 식의 말들이 나올 정도니까요.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오우치가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명과도 이런저런 트러블이 생기고 있었죠.

여전히 교역권은 쥐고 있었지만 오는 건 줄어가고 갈등만 깊어지는 상황이 됐죠. 그들은 여전히 백제의 후예라는 걸 계속 내세웠지만 잘 안 먹힙니다.

그런 가운데 오우치가에 새로운 파트너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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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8년 당주가 된 오우치 요시오키, 그 역시 조명과의 무역을 손에 쥐고 확장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42년에 대패하고 양자 하루모치가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길을 돌리죠. 이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서양이었죠. 그는 포교를 허락하고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기존 것을 무시하지도 않았죠. 견명사를 보내 명의 것을 더 받아오려고 애쓰고 조선에서 받아 온 대장경을 번역하기도 했죠. 옛 것이든 새 것이든 동서양 어느 것이든 받아들이며 문화를 꽃피운 것이었습니다. 이 때를 오우치 문화, 혹은 야마구치 문화로 따로 분류한다고 하는군요. 그의 성은 제 2의 교토라 불렸구요.

+) 헌데 이 전에 명과의 공무역이 파탄나는 일이 생겼고(닝보의 난) 이후 멸망까지 다시 이루어지지 못 합니다.

문제는, 이 때가 전국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문 쪽으로 흐르면 무 쪽에서 반발하기 마련이었죠. 히데요시 때 있었던 일이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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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 하루타카, 서국무쌍으로 불리며 큰 공을 세웠던 그였지만, 그만큼 불만은 더 컸습니다. 그는 1551년에 거병했고, 요시타카는 나가토의 다이네지에서 포위돼 자결합니다.

이 요시타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모양입니다. 전국시대에 싸우는 걸 포기했다, 전국시대에 평화를 바랬다는 것으로요. 그가 상경을 거부하고 영지 꾸미기에만 집중한 걸 보면 어느 쪽이든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서국 제일이자 천하에 가장 가깝다는 말을 들었던 오우치가는 몰락했죠. 혼노지의 변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이후 스에 하루타카는 요시타카의 양자 하루후사를 당주로 옹립한 후 실권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그는 이들을 밟으러 나섭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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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끈 2만의 병력을 단 3천으로 격파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모리 모토나리죠. 이 패전으로 하루타카 역시 자결했죠. 이 때가 1555년, 이 2년 후에 오우치가는 모리가에 의해 멸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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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익숙한 이름이죠? 이 때 수군을 이끌고 큰 활약을 합니다.

참... 사람 인생이든 어떤 세력이든간에 한 방이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죠. -_-a 하긴 전국시대니...

뭔가 참 요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저 오우치가를 무찌른 모리가가 임진왜란 때 실질적인 총대장이었다는 것이죠. 기분 묘해요.

아 조선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냐구요?

아예 몰랐던 모양입니다. (...);;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애들인데 관심이 없어요. 나중에 강항이 좀 말해준 것 같긴 한데 말이죠. 이런 부분에서 아쉬운 게 역시 정보를 더 얻으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굳이 무역이 아니더라도 계속 만나고 잘 대우해주면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었거든요. 중종 이후 관계가 줄어들면서 그에 대한 노력도 없어집니다. 아쉬운 부분이죠.

음... 처음에 시작했던 백제 얘기는 물 건너 보낸 것 같네요. =_=a 직계야 끊겼지만 방계는 도요타로 성을 바꿔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오우치 역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한 부부가 족보를 들고 한국에 와서 전북익산!의 홍보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는군요.

아무튼... 봐주세용 ㅠ_ㅠ) 이틀 동안 천도(신장의 야망 13)만 해서... 전국통일을 대체 몇 번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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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롱
12/12/26 14:14
수정 아이콘
오우치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아.. 신장의 야망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예상이 맞았네요. 크크.
눈시BBbr
12/12/26 14:27
수정 아이콘
크크
비교적 쉬운 가문들 해서 그렇지만, 이제 왠만한 가문들은 특성은 무슨 그냥 족경으로 다 밀어버립니다 = =;
swordfish
12/12/26 14:18
수정 아이콘
그러고 보니 고대 백제랑 전라도랑 별 관계가 없겠군요. 특히 전남 지역은....

그런데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조선은 히키코모리 기질은 확실히 있군요. 적어도 교역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야 했는데
이정도로 무지 했다니.
12/12/26 14:27
수정 아이콘
너희가 필요하다면 들어는 주겠다. 근데 너희한테 관심은 없어~ 이런거죠.
사대부의 나라다보니 내적논쟁만 해도 세월인데 외적요소따위 알거 없었죠. 왜인들이 뭐라하던말던... ;;
눈시BBbr
12/12/26 14:34
수정 아이콘
전남 같은 경우는 백제 색이 정말 옅었다고 봐야죠. 한 100년 지배했나 -_-a 그래서 견훤이 완산주로 도읍 옮긴 거고 나주도 그래서 쉽게 넘어간 것으로 봅니다. 다만 후백제를 고려, 조선에서도 백제를 계승한 것으로 쭉 봐 왔기에 백제=전라도 등식은 거기서 나온 것으로 보구요.

아무튼... 너무하긴 하죠. 오히려 조선 초에 그런 게 더 활발했다는 게 -_-; 조선도 할 말 있긴 했습니다. 삼포왜란 같은 거 주모자 잡으라고 했는데 못 잡았거든요. 거기다 사이도 같이 나빠지니 어차피 똑같은 놈들이구나 할 만 하죠. 근데 솔까 쟤네가 어떻게 잡아요 (...) 오히려 큐슈 지들이 다 먹었다는 식으로 뻥쳐서 조선이 더 기대했던 게 큰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관계는 계속 유지하고 정보를 최대한 뜯어내는 게 외교일텐데 말이죠.

뭐 조선은 명에 사대만 잘 하면 문 닫고 살아도 살만한 나라긴 했지만 -_-a
나이트해머
12/12/26 15:25
수정 아이콘
무로마치 막부 전후의 일본 내부 사정을 제대로 아는 외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본 자체적으로도 완전히는 몰라요.
그나마 조선은 알아보려고 노력한 편입니다.
12/12/26 22:49
수정 아이콘
그게 마냥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여전히 재미있는 떡밥인 무왕의 익산천도설, 혹은 익산별궁설과 관련해보면 전라도, 특히 전북지역과의 관계가 꽤나 깊다는걸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본 교토 쇼렌지(靑蓮院)에 소장된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으로 인하여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했다.' 라는 내용을 확인하고 무광왕이 무왕을, 지모밀지를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으로 비정하고 익산천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죠.

근데 기록이 쇼렌지 소장 관세음응험기가 유일하기 때문에 애매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유적지(+왕궁리 오층석탑), 그리고 미륵산성을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무왕은 익산에 꽤나 무게를 두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전남지역은 백제의 흔적이 많지 않아요.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마한의 지방세력은 강했고, 익산->나주로 이어지던 중심세력 역시 그 힘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호남지방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백제 유물을 보면, 충남에서 발견되는 백제 유물,유적과는 차이가 좀 보여요. 세력권을 비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묘제도 차이가 크게 보이기도 하구요. 백제 중앙정권과의 마찰도 꽤나 보이고요.

이걸 막기 위해 백제는 호남의 마한 세력에게 은관, 금관을 수여하며 백제의 범위 안으로 묶으려 했지만 만만치않았죠. 진한에서 성장한 신라가 가야를 병합하고도 꽤나 강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손에 쥐었던것과 달리, 백제는 지방분권적인 상황으로 인해 결국 멸망까지 가기도 했구요
후추통
12/12/26 14:27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전국시대쪽은 그렇다라도 일본 근현대사쪽에 관련해서는 약간 아는 정돈데 전국시대 관련 글은 처음 보는 군요.

오나라 관련 글도 사실 좀 늘어지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서 잠깐 쉬고 다른 글을 하나 올려볼까 고민중이긴 합니다 -0-;..
눈시BBbr
12/12/26 14:38
수정 아이콘
크크 당분간 이렇게 머리 식히는 글만 쓰려구요 ~_~;
근데 이건 쓰면서 머리 아팠어요 =_=;;; 저도 전국시대는 게임 수준으로만 알아서... 책 사거나 빌리기는 귀찮아서 걍 일본어 위키 뒤졌죠;;; 공부 더 해야 될 거 같아요
12/12/26 14:33
수정 아이콘
모리가 기습해서 스에 하루카타를 전사시킨것이 전국 3대 기습중 하나인 이츠쿠시마 기습입니다. 그 이후로 모리는 꾸역꾸역~
오우치의 구영토를 집어삼킨후에 아마고와 대치를 하게 되는거죠.

하루카타가 옹립한 요시타카의 양자는 오토모 소린의 아들이라는거.. 거참.. 꼬여있어도 이렇게 꼬여있습니다.

전국이 끝나고 세키가하라 전투이후에 패배한 총대장 모리가는.. '스오,나가토' 2국으로 영지가 급격하게 감소합니다.
그 2개국을 가지고 300년을 버티다가 막부를 무너트리는 쵸슈로 돌아오신다는거.. 보다보면 재미있어요. 흐흐흐
눈시BBbr
12/12/26 14:51
수정 아이콘
크크
하나하나가 다 엉키고 엉키고 또 엉켜있으니 =_=; 이게 재밌으면서도 머리 아픈 부분이죠. 행장 같은 거야 많지만 어디까지가 윤색됐는지 모르고 에도 시대에 얼마나 바뀐 건지도 모르고... 일본인들이 머리 아파할 건데 일어도 못 하는 상황이라 공부하기 어렵네요.
그냥 즐길래요 @_@
쵸슈와 사쓰마... 얘기가 거기로 또 이어지네요. >_<
12/12/26 15:15
수정 아이콘
어차피 역사란게 쭈욱 다 엉켜있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재미있는거죠 크크크.

그리고, 도쿠가와는 그래도 내려온 족보라도 있다 치지만 다이묘들 전부가 겐페이의 후손은 아니다..라고 믿고 있죠.
이 나라도 잘 보면 족보가 꼬여있는데, 하물며 옆쪽 섬나라가 안꼬여 있으면 말이 안됩니다.
그럴 족보 조차도 없는 농민의 아들이라 후지와라의 양자로 들어가서 성씨를 만들어버린 히데요시가 안습이군요 -_-;
헤이케 전성기때도 무사가 공경을 흉내낸다고 깠는데 일개 농민이 사무라이가 되더니 정권잡고 "나는 공경이다" 하면...

결국 공부하다보면 사료밖에 안남는데 이걸 뭐 다 믿을수도 없고.. 연구하시는 분들 자료도 왔다갔다 하니~
갈피를 잡는게 가장 중요한것 같아요.
눈시BBbr
12/12/26 15:22
수정 아이콘
크크 그렇죠. 솔직히 도쿠가와도 맞나 싶을 정돈데요 뭐
히데요시야... 전에는 히데요시 개인의 감정? 뭐 그런 쪽은 아니고 열심히 머리 쓴 걸 거다 생각했는데, 요새는 왠지 이해가 돼 가고 있어요. 딱히 노망 안 들어도 폭주한 거 아닐까 하는 거요. 천하-_-를 차지해도, 혹은 오히려 천하를 차지했기에 나오는 평민 출신의 열폭 이런 쪽?
12/12/26 16:18
수정 아이콘
"내가 천하를 통일했는데 니네들이 나 출신 천하다고 씹냐! 그럼 나는 귀족이 되어줄테다!"한거죠...
능력이 뛰어난데 자기 자신의 출생에 자부심을 가질수가 없었다고 봐야겠죠. 근데 이런 인물은 의외로 많았다는겁니다.
히데요시 정도면 어느정도 온건하게 반항한거라고 봐야죠.
Siriuslee
12/12/26 14:41
수정 아이콘
1399는 EU3 DW 그랜드캠페인 시작년도?
swordfish
12/12/26 14:50
수정 아이콘
그 시나리오로 영국하면 바로 백년 전쟁 크리죠. 그것도 프랑스가 일으킴...
12/12/26 15:16
수정 아이콘
프랑스가 삽질하고 프랑스가 제일 많이 피해보고 프랑스가 이긴 전쟁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땅'은 절대악입니다. 크크크크.
Siriuslee
12/12/26 15:16
수정 아이콘
잉글랜드는 그냥 프랑스쪽 영토 포기하고 브리타니아 통일만 해도, 국력으로는 유럽 1위가 되더군요.
(보통 AI 잉글랜드의 선택)
물론 전 조선을 골라서 만주돌파 조선라간! 을 외치고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을때는 치트신을 영접해도 어려웠는데, 룰을 조금 이해하니까..
만주돌파 -> 동남아 진출 + 시베리아 식민지 -> 일본을 공격한다. 의 재미가 있더군요.
눈시BBbr
12/12/26 14:51
수정 아이콘
헉 그건 안 해봤어용 '-'
사티레브
12/12/26 16:21
수정 아이콘
그냥 가만히 봐야겠다...
재밌는데 끼기엔 하나도 모르는 미지의 역사 제게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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