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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28 01:27:12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전쟁 속의 한국 - 5. 차일혁, 김영옥
한국에서 경찰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일제강점기부터 독재정권 동안 온갖 일들을 저질러 왔으니까요. 권력도 막강했구요. 친일파 쪽 얘기를 들어봐도 경찰에 대한 욕을 쉽게 볼 수 있고, 그 때문에 경찰보다 더 센 군인이 되든가 조선을 떠나 만주로 가든가 하는 얘기를 볼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야 뭐... 다들 아시겠죠. 지금 경찰에 대한 이미지는 이에 대한 반감이고, 오히려 요새는 경찰들이 불쌍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권력을 위해 간 이들도 많겠지만, 이들 중에 정말 평화를 위해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 간 이들이 어찌 없겠습니까. 이들이 편하게 일을 한 것도 아니었구요. 나라에 대한 충성심 역시 없었다고 할 수 없죠. 일본인 경찰이라 하더라도 주민들을 위해 일 한 미담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결국 문제는 윗선입니다. 이 치안이라는 것은 결국 나라의 판단이죠. 치안을 어지럽히는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라,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좌익들을 붙잡아라, 북한에 나라 팔아넘기려는 민주화 운동가들을 잡아라... 군은 그래도 북한군이라는 확실한 적이 있었습니다. 반면 경찰은 국내에서 "적"들을 상대하는 선봉이었습니다. 이들을 "적"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지만, 이 적들을 찾기 위해 억울한 피해를 많이 낸 것도 크죠. 한 명을 놓치더라도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내면 안 되는 것이건만, 그 반대로 갔죠. 국가에서는 그걸 강요했고, 일선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나라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든, 싫지만 명령이라 생각했든간에요. 미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던만큼 미친 사람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죠. 아주 단순무식한 방법을 쓰는 사람들로요.

그럼에도, 이런 상황에서, 최일선에서 적과 싸우면서도 미치지 않은 사람 역시 있습니다.


차일혁, 1920년 7월 2일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에 존경하던 교사가 일제에게 잡혀가는 걸 보고 (민족주의자라서 애초에 요시찰인이었다죠) 그를 구하려고 경찰을 두들겨 팬 집을 나옵니다. 그 종착지는 중국이었죠. 거기서 그는 의열단원이었던 김지강을 만났고 그를 통해 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중국군 장교로 있었지만, 일본군과 직접 싸우고 싶어서 조선의용대에 신병으로 들어갑니다. 41년부터 시작된 기나긴 항쟁은 일제의 패망으로 끝났고, 그는 스승 김지강을 다시 만나 한국으로 옵니다. 이후 북으로 간 동료들과 총을 맞대게 되죠.

한국에 와서는 미군정의 비호로 남아 여전히 활개치고 있던 사이가를 저격하는 일에 참가했고, 그 유명한 미와 경부를 저격하는 일에도 참가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전주로 피신해 공장의 경비주임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는 남로당계의 적색 테러를 당했죠. - -;

그리고 1949년 12월, 그는 전주의 15청년방위대 총무처장이 됩니다. 예비군격이긴 하지만 다시 군인이 된 것이었죠. 이후 전쟁이 시작됐고, 유격대를 편성, 게릴라전을 벌입니다.

+) 여기서 이게 명령이었다는 것과 그 스스로의 의지였다는 것으로 갈리네요. 그 때 그는 후퇴하려던 대원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동지들, 북괴의 불법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다. 비록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할지라도 전북을 적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준다는 것은 사나이의 고집 상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고장 전북은 탐관오리의 학정과 일제의 침략에 과감히 항거한 동학혁명의 자랑스러운 얼을 이어받지 않았는가?"

그는 37명으로, 다시 19명으로 유격전을 폈고, 전멸합니다. 그 자신도 목숨은 건졌지만 왼팔을 쓰지 못 하게 됩니다. 친척인 척 하고 논산에서 숨어살다가 수복을 맞았죠.

아군의 북진과 중공군 개입 기간 동안 그는 전투경찰의 길로 들어갑니다. 전북지구 전투사령관이던 최석용 대령의 추천 덕분이었죠. 그 역시 중국에서 같이 싸우던 이였습니다.

"우리는 절대, 공비들과 전투하는데 있어서 물러설 수 없다. 여러분들이 후퇴한다면 내가 총을 쏠 것이고, 내가 후퇴를 하려 한다면 제군들이 나에게 총을 쏴도 좋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이 땅에서 공비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용감히 싸우자"

이렇게 태어난 게 전투경찰 18대대입니다. 이 떄부터 그는 '진중기록'을 씁니다. 이 기록은 당시 경찰이 남긴 기록 중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다는 평을 받죠. 이 일기는 종군기자였던 김만석이 소장하고 있다가 차일혁의 유언대로 그가 죽은 지 25년 후에 공개됩니다.

해방 직후와는 다르게 당시 경찰의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전쟁으로 무기 등의 지원이 군에 우선됐기 때문이었죠. M1이 단 한 정이고 나머지는 다 일제가 놔두고 간 것일 정도였죠. 경찰에 배속된 이들 역시 청년단부터 호국군 등 예비군 소속들이어서 훈련도 부족했구요. 거기다 이미지가 좋았을 리가요. -_-;

구이면에서의 첫 전투, 역시 부하들은 참호에 머리를 박고 숨을 뿐이었습니다. 빨치산은 그들을 포위했고, 차일혁은 특공대 3명을 뽑아 중화기진지를 공격, 적을 격퇴합니다. 3명이 전사했고, 그 중 한 명은 그의 친구 동생이었습니다. 전과는 사살 확인 42명이었습니다.

+) 이 때 그를 호위하는 보신병이 유일하게 M1을 들고 있었는데 멋있어 보이려고 태극기를 달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에게 집중공격이 가해졌죠. 내 참 (...);;;; 호위하는 건지 여길 소라는 건지

이렇게 첫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제 문제는 지역 주민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였습니다. 모든 토벌부대가 겪은 일이었죠. 적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내통자를 색출해야 된다는 게 대원들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차일혁의 부대를 반갑게 맞이하기보단 불안 속에서 두려워했죠.

차일혁이 도피했을 때 그를 도와주던 사돈과 면장은 그를 찾아와 설득합니다. 자신들이 내통자를 찾아낼테니 어떻게든 무고한 살상만은 없게 해 달라구요. 반면 내통자들을 밀고하는 주민도 있었고, 특히 그들에게 가족을 잃은 이들의 요구도 컸습니다.

차일혁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생포한 빨치산 5명을 귀순자로 바꿨고, 이후 내통한 것으로 잡힌 이들 역시 모두 귀순자로 처리합니다. 그들 중에 끝까지 싸우려는 이들은 없었고, 최대한 감싸줬죠. 흥미로운 건 그에게 총을 쏜 이가 잡혔다는 것이었습니다. 왼쪽 팔의 원수였죠. 그는 이조차도 용서합니다. 이후 부대가 철수할 때 주민들에게 맞아죽을 것 같으니 데려가 달라고 한 그를 취사병으로 받아줍니다.

"차일혁군은 적과 싸울 때는 무자비하나 사살당한 공비의 사체는 대원을 시켜 일일이 매장해 주고 있다. 살아있을 때는 원수요 죽은 후에까
지 시체까지 원수가 아니어서 묻어준다는 차 대장 아니 대한민국 경찰의 금도와 아량은 얼마나 빛나랴.” - 당시 전북일보

그의 방식은 언제나 이랬습니다. 그는 전경의 전투력을 최대한 올리고 작전에서 빨치산을 최대한 섬멸하고 "해방구"를 탈환하려고 온갖 힘을 썼습니다. 군의 대규모 토벌이 아닌 이상 상황은 언제나 열악했지만, 그는 계속 전과를 올려갔죠. 그리고 사살한 적은 일일이 묻어줬고, 생포한 적은 풀어주려고 최선을 다 했으며, 대민피해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가령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1951년 4월 20일, 트럭 세 대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았고 차일혁의 부대는 급히 그들을 구합니다. 두 대는 이미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한 대는 무사히 구할 수 있었죠. 이 안에는 백조가극단이 타고 있었습니다. 차일혁은 대원들의 사기도 올릴 겸 즉석 공연을 부탁했고, 전옥은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차일혁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2천명의 빨치산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구성진 노래가 울려퍼졌죠.


전옥,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친일파긴 했습니다만 -_-a 전쟁 때는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죠.

여기서 그녀는 "등을 보이는 관객들"을 불러오기를 요구합니다. 막사에 감금돼 있던 빨치산 포로들이었죠. 이에 차일혁은 그들을 무대 맨 앞줄에 앉히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한국 전경과 빨치산이 한 데 모여 가극을 듣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런 가운데서 갑작스레 빨치산의 공격이 있었고, 아수라장이 펼쳐집니다. 다행히 곧 물러났지만 배우들은 다 그만두겠다고 나섰죠. 이에 차일혁은 이런 말로 맞섭니다.

"지금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있지만, 빨치산과 우리 대원들이 관객으로서 하나 되어 모여 있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이 공연은 이념과 사상을 넘어선 뜨거운민족애를 보여주는 뜻 깊고 역사적인 자리가 될 것입니다."

다시 시작된 공연, 전옥은 조선의 어머니역으로 극을 마무리짓습니다. 눈물의 여왕답게 그녀의 목소리에 대원들도, 빨치산도 한데 엉겨 울었다고 합니다. 이 때는 정말 좌도 우도, 토벌대도 빨치산도 없었습니다. 그저 같이 눈물짓는 한민족만 있을 뿐이었죠. 이 영향인지 포로들은 모두 귀순했다고 합니다.

+) 그녀가 친일파인 걸 생각하면 친일파도 없었던 모양입니다만 ( - -)

그 외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화엄사를 지킨 것입니다.

산에 있는 절들은 빨치산의 은신처가 되기에 좋았습니다. 때문에 토벌 시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었죠. 차일혁은 이에 맞서면서 특이한 행동을 보여줍니다. 화엄사의 문짝을 다 뜯어서 불태운 것이었죠. 적이 안에 있는지 관측할 수 있고 문이 없어 은신처로 쓰기 어려우니 이걸로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이렇게 그는 화엄사는 물론 지리산 천은사, 쌍계사, 김제 금산사,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등 많은 절들을 지켜냅니다. 이 때문에 1개월 감봉을 당했지만요.

그리고 가장 유명한 건 바로 이현상을 묻어준 것일 겁니다.


이현상, 남부군의 대장으로 "한국의 평화가 그에게 달려있다"고 할 정도의 평가를 받는 이였습니다. 사실 좀 과장된 것이었습니다만 -_-a 이승만도 그를 만나고 싶어했죠. 정식 경찰이 아닌 이들은 최대한 풀어주고 기존의 약탈에서 기약이 없긴 해도 나중에 갚아준다는 보증서를 써 주는 등, 다른 모습을 보여줬던 그였죠. 전후 남로당계가 숙청되면서 그 역시 평당원으로 강등됐고, 결국 53년 9월 17일에 죽습니다. 군경 중 누가 그를 사살한 것인지 논란이 됐고, 남부군을 쓴 이태의 경우 북에서 암살했다는 의혹도 제기했죠.

염주를 늘 가지고 다녔다는, 공산주의자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그에게서 생각해 볼 점도 많습니다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 때 차일혁은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2연대장으로, 총경이었습니다. 지금 그의 공식 명칭 역시 차일혁 총경이죠. 경찰측으로 이현상의 맞수였습니다.

군경이 서로 이현상을 죽인 전공을 올렸다고 싸울 때, 그는 한 발 물러서 있었습니다. (경찰 쪽으로 결론이 났죠) 그가 관심 있었던 건 포상이 아니라 이현상이라는 사람의 명복이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돼 서울에서 20여일동안 전시됩니다. 그를 보고 싶다던 이승만은 죽은 이현상에게는 관심없었고, 그저 빨치산이 이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과시했죠. 그의 가족들은 월북, 친척들은 그의 시신 인수를 거부합니다.

차일혁은 10월 8일, 2연대 본부 앞의 섬진강에서 그를 화장합니다. 유일한 유품인 염주와 함께였죠. 부대에 있던 스님이 독경을 했고, 그의 시체는 한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에 뿌려집니다.

경찰 내에서도 이를 좋게 보기 힘들었고, 군의 경우 증거물은 은폐(군경 중 누가 죽였냐는 증거물 -_-;)하려 했다고 하거나 사상이 의심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비판했죠.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이제 지리산의 공비토벌도 거의 다 끝나가고 있소. 나 역시 많은 공비들을 토벌했지만 그들 역시 같은 민족이 아니오? 내 고향이웃일 수도 있고 내 친척일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소? 당신은 죽어서까지 공비 토벌하러 다니겠소?"

공비 토벌이 끝나고 지리산에 평화가 왔을 때, 그는 충주서장, 진해서장, 공주서장 등이 됩니다. 아이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만들기도 했고, 비료공장에서 일어나는 노사 갈등을 중재해 주기도 했죠. 하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 1958년 8월 9일,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죠.

그의 나이 겨우 38세 때였습니다.



"나는 외팔이 부대장으로 군경 토벌대를 놀라게 한 외팔이지만 차일혁 총경 역시 전쟁 초기에 인민군 치안대에 의해 총상을 입고 왼팔을 쓰지 못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조국을 염려했지만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외팔이었던 것이다. (중략) 그 때 있었던 은원일랑,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섬진강 물에 흘려보내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그리고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지하에서나마 지켜보길 바란다." - 차태환

"분단된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말할 수 없는 혼란을 겪어왔다. 국가가 분단된 상태에서 일어났던 빨치산들의 혁명적인 활동과 빨치산 토벌작전은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수 없는, 양쪽 다 피해자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성이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수기가 민족화합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차일혁 총경의 명복을 빈다." - 지기를 추모하며, 김두운

그와 종군기자 김만석이 했던 대화 중에 하나를 옮겨봅니다.

"김 기자의 말대로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졌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소만, 우리들 어느 누구도 이 현실을 부정하거나 바꿀 수는 없소.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로 역사의 물결에 떠밀려가고 있을 뿐이오. 나는 단지 내 자신에게 맡겨진 몫에 충실하기로 했소."

모두가 미쳐가던 그 시절, 그에게 역사를 바꿀 힘은 없었습니다. 그는 남북 중 한국을 선택했고, 한국의 승리를 원했고 한국을 위해 싸웠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유격대부터 전경 부대까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 자체를 미소에 의해 일어난 동족상잔으로 생각했고, 적 역시 그런 피해자로 봤습니다. 포로를 귀순시키려는 노력부터 살리려는 노력까지, 이현상을 비롯한 죽은 빨치산들을 묻어주며 명복을 비는 모습을 보여줬죠.

모두가 미쳐돌아가던 시절, 그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였고, 경찰에서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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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전쟁이 났습니다. 군복을 다시 입겠습니다."

김영옥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재입대를 결심합니다. 한창 잘 나가던 코인 세탁소 사업도 남에게 줬고, 이전 100대대 소속이었던 일본계 친구들의 만류도 설득하면서요. 미군에서도 그에게 영장을 다시 발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시 군으로 돌아간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려 9월은 돼야 했습니다.

겨우 일본으로 갔지만 윗선에서는 그를 전선에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군 내에서 유일한 한국계 장교였기 때문이었죠. 그는 물론이고 한국말을 아는 사람들은 전방보다는 정보 쪽에 남아서 적의 전략을 연구하는 등의 일을 맡겼습니다.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알면 한국에 보내지 않았죠.

그럼에도 그는 계속 한국행을 고집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였죠. 이를 위해 극동사령부에서 시험 하나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한국어를 모른다는 걸 확인해야 했죠.

생각해보면 참 우스꽝스런 장면이었을 겁니다. 한국인 문관이 그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고, 이게 통하지 않자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가며 낚시를 계속했습니다. 최소한 "안녕하십니까"라는 말 정도는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며 따졌죠. 다 알고 한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인사기록에도 한국어 과정을 이수했다고 남아 있었으니까요. 그는 끝까지 모르는 척 했습니다.

그를 도와준 것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그의 대대장이었던 싱글스 대령, 그의 동기가 한국인 문관을 막고 시험을 통과시켜 줍니다. 이런 과정까지 거치고서야 겨우 한국에 올 수 있었죠. 51년 3월이었습니다. 거기서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이승만을 만납니다. 그의 아버지가 이승만을 지지했기 때문이었죠. 이승만 역시 반갑게 맞이해 줬구요. 하지만 그 이후 그는 다시 이승만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 그의 인맥은 참 후덜덜합니다. 대통령인 이승만부터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UN군사령관이 되는 클라크까지... 맥아더가 물러날 때 클라크 역시 사령관 후보에 있었는데 그가 됐다면 또 어찌 됐을지 모르겠네요.

그가 원했던 미 7사단 17연대로 가는 길, 그는 기차 밑에서 석탄을 줍는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기차에 탄 미군들을 설득해 그 날의 전투식량들을 모두 아이들에게 줬죠. 그 날 가장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7사단에 도착했지만 바로 17연대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를 아는 장교들이야 반갑게 맞았지만 모르는 이들에겐 왜 한국군 데리고 있냐는 수준이었거든요. -_-; 여기서 그는 편의대를 미국 발음으로 부른 "베니대 특공대"를 잠시 맡게 됩니다. 이 정찰 작전으로 사단 앞의 적이 중공군이 아닌 북한군이라는 걸 확인하고 돌아오죠.

그렇게 돌아온 그에게 31연대 정보참모를 맡게 됩니다. 그는 원래 계획대로 17연대로 갔지만 "여기서는 더 잘 해줄 수 없다. 나라도 거기로 가겠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죠. 알고보니 두 연대장 사이에 합의가 돼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31연대장 맥캐프리 중령은 유색인 대위 한 명을 위해 자기 휘하 소령 두 명을 준 것이었습니다. (...) 미군 사이에서 있었던 속칭 '말 거래'였죠. 맥캐프리 역시 유럽에서 김영옥의 활약을 알고 있었기에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전투에 투입된 건 중공군의 5월 공세 때였습니다. 31연대는 소양강 부근의 다리를 맡고 있었고, 국군 5, 7사단이 무너지면서 이 곳을 철저히 지켜야 될 필요가 생겼죠. 마침 현지에 있던 김영옥에게 부사단장이 날아와 임무를 맡깁니다. 참모였던만큼 일정한 부대 없이 후퇴하는 미군과 국군을 지휘해야 했죠. 미군이야 부사단장이 직접 그의 명령을 따르라고 하고 갔지만 (전차 5대로 이루어진 소대) 국군에 대한 지휘권은 없었죠.

그래서 김영옥은 국군 "소령"에게 (다시 말하지만 그는 대위 -.-) 총을 들이대며 자기 명령을 따르게 했습니다. =_=;;; 국군 입장에서도 퇴로를 엄호할 부대가 필요했기에 받아들여졌고, 많은 미군과 국군이 후퇴합니다. 다행히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다리를 지키던 병력도 후퇴했죠.

이후 국군의 반격, 여기서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죠. 피난가지 않은 한 촌로를 만나 그는 이렇게 물었고, 그에 대한 답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공산주의를 지지합니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지지합니까?"

"우리는 들풀이오. 어제는 소가 밟고 지나가더니 오늘은 말이 밟고 지나가는군. 소에게 밟히든 말에게 밟히든 들풀에게는 마찬가지요."

그 이후 김영옥은 다시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하죠.


이 때 연대장으로 김영옥을 챙겨줬고 이후에도 후견인이 된 맥캐프리 중령

이런 상황에서 31연대 1대대에서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김영옥은 정보참모에 작전참모까지 겸하고 있었죠. (다시 얘기하지만 이 때 대위 -.-;;) 그는 전방의 1대대의 상황이 엉망이라는 말을 듣고 급히 찾으러 갑니다. 이 때 대대장은... 샤워하러 가 있었죠. -_-; 대대 휘하 A중대는 고지를 잘못 찾았다가 통신두절, B중대는 중공군의 포위에 당했고 C중대는 아군의 오폭에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작전참모로 대대장과 다투다가 자기 잘못을 안 대대장이 이 일을 묻기로 했지만, 곧 들통나고 잘립니다. 맥캐프리는 그 대신에 대대를 맡길 인물로 김영옥을 선택했죠. 대위이니만큼 편법을 써야 했습니다. 경험 없는 소령을 명목상 올린 후 실제 지휘는 대대 작전참모로 임명한 김영옥에게 맡긴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에 아주 성대하게 보답하죠. 첫 전투부터 그는 승리를 거뒀고, 은성무공훈장을 받습니다. 적의 포격은 물론 아군의 오폭에도 시달리는 가운데 공황상태에 빠진 병사들을 규합해 이뤄낸 승리였죠.

그 이후에도 유럽에서 써먹었던 방법을 계속 써먹습니다. 오렌지색의 포판을 잘라 병사들의 등에 부착했고, 이에 맞춰 포병이 지원해주는 방식이었죠. 꽤나 위험했어요. 적의 눈에 띄기 쉽고, 포격이 부정확하면 팀킬이 돼 버리니까요. 하지만 잘 되면 아군의 진격상황을 포병도 알기 쉬웠고, 근접지원 역시 쉽다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진짜 죽도록 싸웠던 100대대의 방식이었죠. 적에게 등만 보이지 않으면 걸릴 염려도 적다는 마인드였습니다.

여기다 그는 군단 포병은 물론 대공포까지 동원하게 합니다. 포는 많을수록 좋았고, 평소에 할 일이 별로 없는 상급부대의 포병과 대공포병들은 아주 시원하게 지원을 해 줍니다. 대공포까지 동원하는 건 미군 입장에서야 생소했지만 독일군은 참 많이 썼던 방식이죠.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때는 가능한 모든 화기로 중요한 곳마다 포격훈련을 시켰구요.

이후 그의 1대대는 38선을 넘은 첫 부대가 됐고, 미 7사단의 선봉이 됩니다. 작전기간 중 그의 부대가 진격한 거리만 60km였죠.

헌데 이런 빠른 진격이 오히려 독이 됐죠. -_-; 정찰기가 그의 부대를 "너무 북쪽에 있어서" 중공군으로 오인한 정찰기가 포격 지원을 요구했고, 실력이 안 좋기로 유명했던 포병대는 아주 정확히 맞춰 버립니다. 대대사령부가 궤멸돼 버렸죠. 대공포판을 확실히 부착했음에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실제 그의 부대는 4.5km 돌출돼 있었을 뿐이었지만 정찰기는 6km로 판단했죠. 포병이 잘 쏜건지 아주 정확히 빗나간 건지 모를 일입니다. 결론은 나오지 않고 유야무야됐죠. 군단포병이 실수한 거라서 책임단위가 너무 올라가거든요.

이 부상으로 그는 다리를 잘라야 될 위기에 처했고, 그건 피했지만 평생 동안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그럼에도 그는 두 달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죠. 8월 27일이었습니다. 맥캐프리는 기뻐하며 그에게 부상에서 회복할 동안 부대대장을 맡겼고, 9월 1일에는 소령으로 진급, 정식으로 대대장이 됩니다.

여기서 좀 아쉬운 점은 당시 미군에는 전선에서 대대장으로 1달간 복무하면 중령으로 승진시켜주는 시스템이 있었다는 것이죠. 헌데 그가 병원에 있는동안 이게 폐지됩니다. 만약 그대로 있었으면 소령->중령 진급은 쉬웠을텐데요. -_-a

어쨌든 계속 1대대를 맡게 됐지만, 이 때는 이미 전쟁이 고지전으로 바뀐 상태였습니다. 자기를 아껴주던 맥캐프리도 미국으로 돌아갔고, 후임 연대장들은 그에게 중령 진급을 약속했지만 되지 않았죠. 이런 가운데서 그는 고지전을 계속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군은 한국에서 근무하는 기간별로 점수를 매겼고, 점수가 다 차면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줬습니다. 김영옥은 이미 그 점수가 차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은 상태였죠.

52년 9월 1일, 그는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군을 떠나진 않았습니다. 육군보병학교로 갔죠.

참 힘들게 왔건만, 참 열심히 싸웠건만 6.25에서 그의 활약이 그리 크진 않습니다. 그가 왔을 땐 이미 정치적으로 경계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이었죠. 거기다 오폭까지 당해버렸구요.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63년 여름, 그는 다시 한국을 찾습니다. 유럽에 주둔한 7군사령부에 있다가 국군 군사고문으로 온 것이었죠. 이 때는 중령으로 진급해 있었습니다.

이 때 문제가 된 게 왜 하필 군사고문으로 간 것이냐였습니다. 애초에 미 7군의 작전장교로 있던 그, 진급을 위해서라도 미 8군 사령부 쪽으로 갔어야 했거든요. 군사고문은 잘 봐줘야 1부리그의 탈락자들이었고 여기서 그가 더 진급을 할만한 건덕지가 없었습니다. 그를 아껴주던 이들 역시 이를 타박했죠. 그럼에도 그는 한국에 남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죠.

그게 더 한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요. 이를 위해 그는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어를 다시 체계적으로 배웁니다.


이 때 박정희 정권과 주한미군 사이에 청와대 및 서울 방어에서 이견이 생겼는데, 김영옥은 주한미군 대표로 예전에 알았던 국군 대표 채명신과 만나 타협안을 내기도 했죠.

이후 그는 한국을 떠났다가 대령으로 진급, 72년에서 군을 떠납니다.


그 뒤의 그의 삶은 인권운동가라는 말로 줄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도 이미 고아들을 돌봤고, 그 후에는 주미한인, 주미일본인, 아시아계 여성들을 위해 일했죠. 위안부 문제로 일본계에서 반대 로비를 하자 일본계 전우들과 힘을 합쳐 이를 막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러다가... 2005년 12월 29일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정말 너무나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이겨내고, 일본계들의 차별조차도 이겨냈죠. 유색인종으로 많은 활약을 보이며 미군의 교범까지 고치게 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사업도 접고 어떻게든 한국에 왔죠. 그 이후에도 한국을 위해 일했고, 인종차별과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이 영웅이 아니면 누구를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요?

국방일보에서는 2011년에 그의 일대기를 연재했고, 지금은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msn에서는 메모리얼 데이(미국의 현충일)을 맞아 전쟁 영웅 16인을 선정했는데 거기에 포함되기도 했죠. 조지 워싱턴부터 걸프전 다국적군 사령관 슈워츠코프까지, 이들 가운데 당당히 선정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모습은 한국에 뒤늦게나마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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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공군 얘기를 해 보죠.
이제 한 열 편 남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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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린언니
12/11/28 02:01
수정 아이콘
김영옥 대령님이 MOH를 받으셔야 했는데... 결국 못받았죠... 흨
그리메
12/11/28 08:05
수정 아이콘
끝까지 정독했습니다 그분들이 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았겠죠 안보만큼은 절대 양보해서도 안되는걸 다시 느낍니다
swordfish
12/11/28 11:32
수정 아이콘
클라크 대장이야 이탈리아 전선 미군 최고 책임자였고 김영옥 대령은 그 전선에서 영웅이니 알았겠죠
별 못단건 좀 아쉽지만 사실상 유색인이 군내 오를 수 있는 최고 위치까지 간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blue wave
12/11/28 11:34
수정 아이콘
김영옥 대령님의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한편의 드라마로 만들어도 그보다 감동적일수는 없을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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