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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24 04:12:33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전쟁 속의 한국 - 2. 노근리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개전부터 낙동강까지 밀리기까지, 곳곳에서 편의대, 말 그대로 사복을 입은 북한군이 나타납니다. 빨치산이라 부르든 간첩이라 부르든 크게 상관없겠죠. 이들은 국군의 후방을 타격하고, 적에게 정보를 알려줬으며, 몰래 바리케이드 등을 치우면서 북한군의 진입을 도와줍니다. 이들 모두가 "보도연맹원"이라 묶인 것이 또 보도연맹 학살에 영향을 줬죠. UN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후에는 이를 문제삼으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습니다.

국군의 경우 이들을 어떻게든 색출해내고 아니면 억울한 이들까지 다 죽이면서 내려왔지만 -_-; 문제는 미군이었죠. 급히 투입되고, 훈련도는 낮았으며, 한국말은 물론 한국 문화 자체도 서툴렀던 이들이었죠.

불쌍한 한국을 돕는다는 마인드로 왔던 그들, 하지만 이들은 전쟁 곳곳에서 적군도 아닌 민간인들에게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애들이 무전으로 포격을 유도하는가 하면 곳곳에서... 이 얘기 저번 편에 했군요. -_-a

이에 맞춰 미군은 피난민들을 절대 근처에 접근하지 않게 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피난민들의 진로는 병력을 보내 다른 길로 유도하게 했고, 그러고도 미군에게 접근하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죠. 윗선의 방침이 이랬고, 장병들은 계속되는 포위와 피난민의 공격에 시달리며 날카로워져 갔죠.

  +) 보도연맹에 왜 전쟁을 하지도 못 하는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되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그 외에 6.25 때 희생된 이들에 대한 증언에는 언제나 이런 말이 나오죠. 안타깝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빨치산과 북한군이 그렇게 나왔거든요. 여순 사건에서 반란 주력이 미리 빠졌고, 마지막까지 막은 이들 중엔 여자 + 아이, 여학생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러니 보도연맹에 포함될 수밖에요.
후퇴 과정에서 이들을 막은 피난민들 역시 민간인이었죠. 여자와 아이 모두 포함됐구요. 북한은 이 부분에 대해서 할 말 없으며, 이 부분에 대해 비판하려면 북한도 같이, 먼저 비판해야 합니다. 이런 게 게릴라전이긴 하겠죠. 하지만 이 때문에 여자와 아이들은 전쟁에 관련 없었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거죠. 제가 게릴라전을 좋게 평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18일, 미 1기병사단은 급히 포항에 상륙해 영동으로 향합니다. 이들은 국군에 북쪽을 맡기고 서쪽을 맡았죠. 그들 뒤에는 아무도 없었고, 꼭 막아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적의 포위공격에 직면했고, 부대별로 포위됐다가 탈출했다가를 반복합니다.

이 때 민간인들이 사단 진지 내로 들어오기도 했는데 여기서 무전을 가진 임산부를 잡았고, 다른 피난민들의 짐 속에도 화기부터 박격포까지 들어있는 걸 알아냈죠. 곳곳에서 피난민들에게 공격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군부터가 피난민들을 앞세워 진격하고 있었구요. 이 때문에 피난민에 대한 검문검색이 나왔고, 위와 같은 명령이 나왔구요.

이런 상황에서 미 7 기병연대 2대대는 25일 밤 게릴라 공격을 당합니다. 수 명의 피난민들을 통과시킨 직후였고 이에 맞춰 북한군이 전차를 몰고 왔죠. 이에 따라 2대대는 혼란 속에서 후퇴, 04시까지 공격을 계속 받았죠. 다음 날 겨우 집결해서 간부들이 낙오병들을 찾고 있었죠. 전사 1명, 부상 5명, 그리고 119명이 실종됩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 행방을 알 수 없죠.

바로 이 때 피난민 무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것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기 이전에 일어난 것이에요. 그러나 나는 모르겠어요." - 2대대 본부중대 소속 한 무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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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의 피해자는 주곡, 임계리의 피난민들입니다. 그 외에 타지에서 온 이들이 30% 정도라고 하구요. 어이없는 것은 그들이 피난한 이유가 미군의 인솔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죠. 27명이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26일 새벽 미군은 전투가 벌어질 것이니 그 자리에서 엎드리라 했고, 밤새도록 포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떨어질까 두려울 정도로 가까웠다고 하죠. 그리고 여기서 첫 희생자가 나옵니다. 7명 정도가 도망치거나 화장실 간다고 일어났다가 미군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이 때 이들을 인솔할만한 위치에 있었던 건 5기병연대, 하지만 여기서 피난민을 인솔했다는 기록과 증언이 없습니다. 단 한 명이 이를 증언했지만 트럭에 태워 후퇴시켰다고 했으니 다른 피난민 무리로 봐야겠죠.

26일 아침, 2대대는 수습에 최선을 다했지만 소대별로도 모이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긁어모으는대로 진지를 구축해야 했죠. 이 곳이 바로 노근리입니다.

그 무렵, 피난민들은 자신들을 인솔하던 미군이 없어진 걸 알게 됩니다. 이들의 소속은 지금까지도 불명이죠. 그래도 미군이 있었다는 사람은 있지만 증언들을 보면 인솔이 아니라 그냥 흩어져 후퇴하던 미군인 걸로 보입니다. 피난민 중에서는 그냥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고, 그래도 남쪽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차라리 집으로 돌아간 게 나았습니다.

그대로 내려갔던 이들은 다시 미군에 막힙니다. 도로로 내려가지 말고 철도를 따라 계속 가라는 것이었죠. 이들 역시 소속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도로를 통제하던 헌병이었다는 설이 있고 7연대 2대대 소속이었다는 설이 있죠.


문제의 쌍굴에서 300m 근처까지 갔을 무렵, 피난민 선두는 짐 검사를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보따리 안을 검사하고 남자들은 옷도 벗겨서 검사했다고 하죠. 반면 뒤쪽에 있던 피난민들은 짐 검사가 없었다고, 최소한 자신은 받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줄은 꽤 길었고, 선두가 멈춘 김에 밥을 준비하거나 아예 낮잠을 잔 경우도 있었다고 하죠.

여기서 모든 게 시작됩니다. 미군은 무선교신 후 사라졌고, 갑자기 전투기가 날아와 폭격을 해 온 것이죠. 이것으로 많은 피해가 생깁니다. 70~80명부터 100명이 넘는다는 증언도 있죠.

이 폭격과 기총 사격이 명령에 의해서였는가, 특히 7연대 2대대의 요청에 의해서였는가가 쟁점사항이죠.

여기서 피난민들의 증언은 많이 엇갈리는 편입니다. 확실히 전투기가 자신들을 노렸다는 것부터 아예 날아가긴 했는데 자기들에겐 오지 않았다는 것, 공격을 받긴 했는데 내가 봐도 오폭이라는 것도 있구요. 그 외에 폭격과 함께 미 육군의 사격이 있다는 말과 없었다는 말 역시 엇갈립니다.

미군들 역시 증언이 엇갈립니다. 대체로 미군 지역으로 오지 못 하게 하거나 그 자리에 피난민들을 묶어두라는 명령이었죠. 한편 아예 박격포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 때 피난민 대열에 섞여 있던 미 24사단 소속 1명도 사망, 1명이 부상당했고 피난민 시체 중 2명의 게릴라를 발견했다는 것이죠.

이후 피난민들은 쌍굴로 몰립니다. 이 역시 증언이 엇갈립니다. 미군이 아예 없이 비행기가 겁 나서 쌍굴로 피했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미군이 강제로 쌍굴에 모이게 했다는 증언도 있죠. 또한 미군들이 와서 부상자들을 치료해줬다는 증언도 나왔고, 이건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17명 정도를 치료해줬다고 하네요.

26일 오후, 여기서 미군들은 피난민들이 쌍굴에서 벗어나 미군 지역으로 오지 않게 경고 사격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편 피난민들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미 장교에게 남쪽으로 가게 해 달라고 했지만 "상부의 지시를 따를 뿐이다"는 대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날 밤, 추가 사상자가 나옵니다. 노근리 사건 보고서에서는 밖에서 미군에게 당한 피난민들이 계속 몰려왔고, 이 때문에 안에 있던 피난민들이 공포를 느껴 탈출을 시도했으며, 미군은 이들을 향해 쏜 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날부터 미군은 하루 세-네번씩 쌍굴 근처로 위협사격을 해 왔습니다. 이 중에는 쌍굴 입구에도 맞은 게 있었고, 이에 대한 피해도 있었죠. 이 중에는 운 좋게 미군이 트럭을 타고 와 후방으로 피난 갔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7연대 1대대로 추정됩니다) 남은 이들은 시체로 벽을 쌓고 미군의 총알이 자기에게 오지 않기를 빌다가 미군이 후퇴한 29일, "북한군에 구조됩니다."

현재, 피해자로 신고된 인원은 사망 177, 부상 51로 총 248명입니다. 미군들은 이보다 적은 수를 증언하고 있지만, 보고서에서는 이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피해자 수를 추정했고, 오히려 피해자들의 증언보다 더 많을 가능성(190여명)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후...

원인을 찾자면 역시 게릴라 때문에 부대가 와해된 직후에 다시 피난민들을 만났다는 것이겠죠. 초기의 폭격은 오폭이었거나 항공통제반의 착오로 보구요. 철도에서 짐 검색을 하던 이들이 무전 후 폭격이 왔다고 하지만 그렇게 직접 연결되는 체계는 아니었거든요. 공군 역시 미군 진지에 접근하는 피난민에 대한 공격을 해도 된다는 방침을 받았다는 메모가 있구요. (이런 걸 듣지 못 했다는 증언도 있긴 하네요) 미군의 방침은 피난민이 일정 통제선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한 것이었고, 경고 사격이 아닌 직접 사격은 명령이 아닌 일선 부대의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났죠. 이 부분은... 모르겠네요. 어쨌든 상급부대의 명령서는 없습니다.

결론은 전쟁 초기 미군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피난민보다는 미군의 안전을 더 우선시했다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당하게 된 것이죠.

미 1 기병사단은 이 26일을 제외한 날 동안 계속 격전을 치렀고, 29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후퇴합니다. 사단 전체의 사상자는 919명이었죠.

그리고 2001년에야 겨우 이들의 억울함이 밝혀집니다. 클린턴은 이를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이라고 공식 규정했고, 유감을 표명합니다. 그리고 100만 달러의 위령비와 75만 달러의 추모기금을 설치했죠. 하지만 개인적인 피해 보상은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애초에 너무, 너무 늦었어요. 다른 사건들에 비해선 빠른 편일지 모르겠지만요.

그 지만원이 이에 대해 다룬 글이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인정해서인지 반박은 못 하더라구요. 그래도 미군을 감싸는 글이지만, 눈에 띄는 부분은 있네요. "지금 또 다시 전쟁을 한다 해도 노근리 사건은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다. 그래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최소한 이것만큼은 인정해 줬으면 좋겠네요. 입만 열면 전쟁 전쟁 하지 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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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휴전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전선으로 나가기를 열망하는 50만 명의 반공 청년들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들 50만명의 무장이다. 그것을 지원해 달라." - 장면

중공군으로 인해 아군이 밀릴 무렵, 이승만은 그노무 50만 국군 양병설을 계속 꺼내듭니다. 맥아더에겐 아예 100만 얘기까지 했죠. 하지만 군대를 모르는 그가 이 문제를 알 리가 있나요. 미군은 이를 거절합니다. 당연한 얘깁니다. 지금 부대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미군에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병력을 아무리 늘리고 싶어도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훈련과 보급이 없다면 그냥 총알받이가 될 뿐이죠. 아니, 총알받이 수준이라도 전선에 투입될 수 있으면 그나마 나았죠 -_-

이승만은 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명분은 한국인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국가총력전으로 중공군과 맞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국민방위군설치법이 제정됩니다. 대상은 만 17세 이상 만 40세 미만 남자였습니다. 모태는 기존의 예비군조직인 대한청년단이었죠.

하지만 이 엄동설한에,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무려 50만이나 되는 젊은이들을 남쪽으로 보냈다는 것이죠. 경상도부터 제주까지 50여개의 훈련소가 있었고 여기서 일만씩 장정을 받기로 했습니다.

근데 이 예산이 한 달 후에 통과됩니다. 총인원을 50만으로 추산해 3개월분 209억원이었지만 1인당 배당액은 목숨을 유지하기도 부족한 액수였다고 합니다. 아니 그나마 이 상황에서 열과 성을 다해서 했다면 얼굴이라도 들 수 있겠죠. 애초에 이 과정도 웃겨요.

"1951년 1월 중순경, 대구로 향하던 길에 어느 국민학교 앞에서 가마니를 뒤집어 쓴 군인들이 거지처럼 서성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혼내주려고 가니 보여드릴 게 있다 해서 가니까) 교실마다 5~6명씩 거적을 쓰고 누워 있는 자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 굶고 병들어 죽은 시체들이었다. (중략) 헌병사령관이 되기 전에는 일선에만 있어서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조차 처음 들었는데 이것은 보통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철저히 조사하기로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에게 줄 재원을 어디서 구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한국의 최대 물주는 역시 미국이었죠. 헌데 미국 등 UN에서 지원하는 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군인인 국민방위군에게 돌아갈 수 없었죠. 헌데 이들은 현역이 아닌 제 2국민병, 즉 예비군으로 소집된 것이엇습니다. 때문에 군에 돌아가는 걸 이들에게 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남은 건? 없었어요. 각 교육대에서 먹이고 재워주라 했지만 이에 대한 예산 편성 자체가 없었던 거죠. 이에 대해 문제가 계속 터지자 반응은 이랬습니다.

"백만 국민병은 편성, 훈련중에 있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낭설을 퍼트리고 있는 것을 실로 유감이다." -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1월 20일

"국민병 처우 운운하나 최후승리를 위해서는 돌발적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이 적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제5열의 준동이 가장 위험한 일이니 제5열의 책동에 동요되지 말기를 바란다" - ... 신성모 1월 26일

예산을 편성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거죠. 이런 가운데서 정말 최소한의 예산이라도 편성되게 됩니다. 26일에 전라도에서 오는 장정 23만은 즉시 귀가시키게 됐고, 이어 30일에 209억의 예산이 만들어진 것이죠. 여기서 총 장정수를 50만으로 잡고 나온 게 하루 식량 1인당 4홉, 취사용 연료비 40원, 잡비 10원이었습니다. 여기에 각 교육대의 운영비, 장병들의 피복비, 의료비는 물론 장교와 기간병에 대한 봉급도 계산돼 있지 않았습니다.

+) 당시 포로의 하루 식량이 5홉 반이었습니다. 포로는 UN이 관리하기에 국군보다 오히려 사정이 더 좋았고 이에 대한 불만이 나왔지만, 국군 역시 다수가 매일 굶었다거나 하는 말은 없습니다. 아니 저 4홉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었다면 상황은 그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 도로는 UN이 보급로 확보를 위해 통제하고 있었기에 이들은 주로 철도부터 좁은 길, 아예 산길을 가거나 해야 했습니다. 입을 것 먹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 걷고 또 걸어야 했죠. 숙식은 각 마을의 이장이 책임져주는 방식이었지만 매일 수천명씩 몰려드는 상황에서 식량을 넉넉하게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늦게 가면 굶어야 했고, 약탈도 벌어졌죠.

결정적인 건 이 과정에서 벌어진 비리였습니다.

3월 29일, 국회에서는 각 정파별로 3명씩 뽑아 15명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약 1개월 동안 행해진 조사에서 나온 결과는 어마어마했죠.

- 인원수 허위 보고에 의한 현금 횡령액 23억 5126만원, 양공 횡령액 20억 4710만원, 공제액 명목으로 공금 횡령액 28억 8328만원, 총 72억 8164만원

그 외의 쌀과 부식비의 대다수를 빼돌렸고(실제 공급된 게 1%일 정도 -_-;), 젤리 공장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실제 필요한 양의 몇 배를 요구하고 그걸 빼돌립니다.

헌병사령관 최경록이 조사한, 즉 군에서 조사한 건 좀 다릅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 현금 24억 2111만원, 군량미 1887가마

+) 이거든 저거든 지금의 시세로 따지면 조 단위는 우습게 넘어갑니다 -_-a

최경록은 이렇게 빼돌린 게 어디로 갔는지를 이렇게 말 합니다.

- 횡령액 중 1/3은 국회의 신정동지회, 1/3은 무마비로 (즉 이런 비리를 막기 위해 포섭하는 용도로), 1/3은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유흥비로 소비되었다. 특히 신성모 국방장관이 국회 내에 자기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만드려고 70명의 신정동지회에 정치자금을 지원한 데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국회의원이 175명, 신정동지회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죠)

이에 이어서 의미심장은 개뿔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말도 했죠.

"결국 방위군 관계자만 처벌됐지, 사건의 핵심이나 진짜 주동인물은 못 밝히고 말았습니다."

위가 이런 상황이니 아래라고 깨끗할 리가요. 위에서 뜯어내는만큼 아래에 내려오는 건 더 줄었고,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될 봉급조차도 책정돼 있지 않았던만큼 아래의 비리 역시 계속됐습니다. 국민방위군을 훈련시켜야 될 기간병들부터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왔던 쌀을 민간에 팝니다. 굶주린 국민방위군에 돌아갔어야 될 주먹밥의 가격은 100원이었습니다.

경남과 제주도에 있던 각 교육대에서 나온 방위군 소속 및 주변 주민들의 증언은 생략하겠습니다. 어차피 다 굶어죽었다는 내용 뿐입니다.

그 피해에 대해서 국회에서 조사한 것과 군에서 조사한 것은 역시 다릅니다. 공통점을 찾자면, 이 때 징집된 총수는 (장정 등록자 238만명 중) 68만여명, 이 중 교육대에 수용된 인원은 국회 조사에서는 38만여명, 군 조사에서는 29만여명입니다. 낙오자 역시 전자는 27만여명이고 후자는 38만여명이었죠.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국회 조사에서는 불명, 군 조사에서는 1234명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한 달 후 전라도에서 귀가시킨 23만명이 포함돼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도 관심 없는 거 같네요 (...) 포함됐다고 가정한다면 이 중 붕 뜬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봐야 그 정확한 총수는 알 수 없습니다.

교육대에 도착한 인원들도 다른 데로 가라는 등 미뤄집니다. 그리고 3월 25일에는 26세 이상 장정 6만 명을 귀향, 이후에는 26세 이하 15만 8천명을 귀향 조치합니다. 교육대까지 온 장정 중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한 인원들이 귀향 조치를 받았죠. 이런 귀향 장정에게는 1인당 쌀 9되와 현금 9450원이 지급돼야 한다는 결정이 났지만 실제 지급된 건 쌀 2되와 현금 500원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이걸 받고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나마 굶주림과 전염병을 이겨내고 교육대에 도착한 이들은 어느 정도 훈련을 받고 국군과 함께 투입된 병력도 없진 않습니다. 이 중에는 그나마 기간병들의 대접이 좋아서 자원, 기간병으로 간 이들도 있구요. 국민방위군이 해체된 후에는 나름 네임드인 이형근을 투입하고 국군 예비 5군단에 소속돼서 그나마 사정이 좋아지기도 하긴 했습니다. -_-a

여기서 희생된 인원 중 통설은 최소 5만여명입니다. 이 때 군에서 발표한 1234명은 숫자도 좋듯이 그 때 알아낸 인원이었고, 지금의 국군에서도 5만명설을 받아들일 정도입니다. 다른 사건에서는 대강이나마 추정했던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아예 그 수를 알 수 없다는 쪽으로 나옵니다. 그나마 교육대나 그 근처에서 죽은 인원은 추정이나 발굴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오는 길에, 돌아가는 길에 죽은 인원은 알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5만여명설이 대세일 뿐, 그 정확한 수는 추측조차 할 수 없습니다.

죽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죠.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으로 겨우 죽지 않은 정도의 인원이 대다수였으니까요. 당시 국회에서는 귀환 장정 중 20%는 생명이 위독하다고 했고, 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인원 역시 20%(80%도 있네요)로 잡습니다.

다른 사건에 대해 좀 잔혹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사건은 팀킬이라는 면에서 다른 사건과 비교가 안 됩니다. 다른 사건들은 어쨌든 "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거든요. 이 사건은 아군에 대해서 한 일이고, 증오심 같은 적에 대한 생각이 아닌 비리 등 아군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팀킬이었습니다. 50만명의 반공 청년? 이게 맞다 해도 (실제 주축이 대한청년단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정권과 군부는 이들을 스스로 죽인 거였습니다.

당시 한국이, 국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너무나도 처절하게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사건이 어느 정도나마 밝혀진 5월, 이에 대한 문제는 헌병사령부의 조사 결과에 따라 논의됩니다. 하지만 이조차도 신성모의 방해를 받습니다. 마침 거창 사건도 폭로된 상황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는 극에 달하고 있었죠.

이승만은 이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신성모는 그제야 태도를 바꿔 주모자급 6명 중 김윤근을 뺀 (조사는 됐지만 구속은 안 됨) 5명을 연금해 조사하게 됩니다. 이 때 비리를 저지른 자는 사형까지 가능하다는 법이 있었지만 (6월 28일에 나온,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입니다. 제가 보도연맹 사건의 명분이 된 법이라 추정한 법이죠) 결과는 너무나도 가벼웠습니다. 김윤근은 기소 각하, 윤익헌 부사령관은 3년 6개월, 나머지 4명은 1년 6개월이었죠.

+) 이 때 부사령관 윤익헌의 비리는 세간에 참 잘 알려졌습니다. 그가 돈을 쓰듯이 물 쓰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피난민들이 모여 물이 부족할 때였습니다.

이 때가 4월 30일, 이런 가벼운 조치에 온갖 불만이 터져나왔고, 이승만은 신성모를 자르는 것으로 맞섭니다. 이후 신성모는 별다른 벌 없이 일본 대사로 가죠. 그 대신에 7일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임명합니다.

그럼에도 국회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다음 날 국회는 '엄중 처단'과 '군법회의 재심' '사건 관련자는 판결시까지 휴직'을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을 본 이시영 부통령은 이에 실망, 사퇴하면서 이런 여론을 더욱 부채질했죠. (저희 대학교 창립자세요 >.<)

이승만은 이에 대해 참모총장 정일권과 작전국장 강문봉을 자릅니다. 말만 자른 거지 미 지휘참모대학 입교 명령을 내린 것일 뿐이었죠.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된 것이 바로 이종찬입니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이 구속돼 조사받고 있다."

이기붕은 이렇게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김윤근을 끌고 나옵니다. 국회의원들은 이에 박수갈채를 보냈죠. 그리고 이종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합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있죠. 한 번 판결 받은 이상 이를 바꿀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종찬은 기존의 국방경비법이 아닌 위의 비상조치법을 가지고 재심을 시도합니다. 다루는 법이 다르니 재심이 가능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김윤근, 윤익헌, 박기환, 강석한, 박창원 5명에게 사형, 나머지에게는 무죄가 선고됩니다.

이종찬은 이를 재판의 공정성을 알리기 위해 공개로 진행하고 아예 방청객을 위한 스피커까지 설치합니다. 이승만이 김윤근을 빼돌릴 것에 대비해 대구 근교에서 처형했죠. 이렇게 국민방위군의 중심인 5명은 처형됩니다.

이것으로도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나마 죽어간 원혼을 어느 정도 달랠 수나마 있게 되었죠. 이종찬은 이후 보여준 모습들을 통해 '참군인'이라는, 정말 최고의 별명을 얻게 됩니다. 고은은 만인보에서 이종찬에 대해 이렇게 말 했죠.


거기 한 사람이 서 있다
  
가장 장군다운 장군 / 가장 인간다운 장군 / 가장 부패하지 않은 장군 / 다 맡겨두고 떠나온 / 맡겨둔 것 / 언제까지나 그대로인 장군
  
대한민국 육군의 명예 이종찬이었다

그 전, 정일권은 법정에 나오고도 그저 이승만의 지시였노라고,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구차하게 변명합니다. 그가 설령 모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국군의 총사령관으로 이 일에 대한 조사 및 처벌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국군 최악의 일이 벌어졌으면, 그가 벌을 받든가 그가 이 모든 것을 고치든가 해야죠. 고은의 만인보가 아니더라도, 참 적절한 평가가 있습니다. 간만에 호랑이 김석원의 평가를 들어봅시다. 아니 평가가 아니라 그 앞에서 욕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답변이 그게 뭔가? 당장 견장을 떼라! (견장 떼고 붙자 이 때려죽어도 시원치 않을 개아이야 -_-)"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군사를 몰랐다 한들, 책임은 그에게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이렇게 국군을 망친 이들을 엄히 처벌해야 했습니다. 결과는 꼬리자르기일 뿐이었죠. 그 어느 때보다, 그 무엇보다 분노했어야 할 그가 겨우 이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겠죠.

이 때 그나마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준 이기붕은 신성모와 이를 노리던 이범석을 제치고 2인자가 되는 게 성공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 준 이종찬은 이후 이승만과 제대로 대립하면서 쿠데타까지 생각하게 되고, 실제 하진 않았지만 몰락하게 되죠.

당시 국가에서 병에 걸린 장정들 1만여명을 병원에서 치료해 주긴 합니다. 그래도 소수는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지금, 조금씩이라도 그 때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분들이 밝혀지고 국가유공자가 되는 경우가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지기는 이미 너무 늦었죠.


영천의 국민방위군 희생자 추모비

마지막으로... 이것이 개전 초기처럼 젊은이들을 뺏기면 안 됐기에 무리해서 빨리 남하시킨 거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실제 1.4 후퇴를 보면 그럴듯 합니다. 과거사위원회에서는 호남의 장정들도 경상도로 이동했다는 걸로 이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만 전 이것 역시 큰 이유였다고 봅니다. 당시 중공군으로 미 8군은 낙동강으로의 후퇴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이 점에서 경상도나 제주도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아무튼, 이게 맞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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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사건은 다음 편으로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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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야
12/11/24 07:00
수정 아이콘
이 나라는 병사들에게 건국이래 꾸준히 같은 취급을 해 주고 있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눈시BBbr
12/11/24 14:46
수정 아이콘
꼭 그렇진 않습니다. 오히려 일선의 병사들은 저들보다는 좋은 환경이었으니까요. 저 상황에서 그냥 입대해버린 이들은 좀 나았거든요
그래도 아예 틀리다고 할 순 없군요. 짜증납니다
Granularity
12/11/24 11:46
수정 아이콘
할아버지께서도 여기 끌려가셨다가 겨우 살아오셨죠
안성에서 마산까지 가서 학교에 그저 있었는데... 다행히 일찍 귀가 시켜준쪽에 포함되셔서 돌아오셨습니다..
눈시BBbr
12/11/24 14:47
수정 아이콘
정말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인 상황이었으니까요
tannenbaum
12/11/24 12:23
수정 아이콘
역시 국사는 선택 과목이 되면 안됩니다
국사 선택 과목 만든 집단은 실수한겁니다
신용불량자
12/11/24 12:53
수정 아이콘
이번에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두 사건으로 인해 희생당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이지 다신 이 땅에 전쟁이 없어서 더는 저런 안타까운 혹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안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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