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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23 09:55:23
Name 信主
Subject [일반] 6공화국의 선거결과와 정당변화
*인물에 대한 존칭은 편의상 생략했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의 정치에 대한 분석입니다. 제가 정치를 보는 기준은, 사람들은 인물에 대한 호불호는 바뀔 수 있어도 정치적 관점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러한 기준을 갖고 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5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있다고 봅니다. 이 글은 모두 이런 가정을 통한 추론이기 때문에 이후에는 생략하겠습니다.)

1. 보수진영 지지자로서 새누리당(과 전신) 지지자.
2. 보수진영 지지자로서 새누리당을 지지하지 않는 자.
3. 개혁진영 지지자로서 민주당(과 전신) 지지자.
4. 개혁진영 지지자로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자.
5. 진보진영 지지자.

1번그룹은 현새누리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입니다. 어느정도 투표에 참여하는 유권자를 기준으로하면 대략 25% 내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번그룹은 비판적 새누리당지지자이거나, 선진당등 제2보수정당지지자입니다. 때에 따라서 지지가 변하기도 하고, 선거참여여부도 바뀌기도 합니다. 20% 내외 정도로 예상합니다.

3번그룹은 민주당의 콘크리트 지지층과 정권교체를 최우선으로 하는 세력의 연합층입니다. 35% 내외정도로 예상합니다. 17대총선을 돌이켜보면, 후자가 대부분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리고 가장 투표율이 낮아 보입니다.

4번그룹은 범야권지지층으로 정권교체를 바라지만 민주당을 싫어하는 세력입니다. 정권교체를 포기하더라도 3번그룹세력을 지지하기 싫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15% 내외로 예상합니다.

5번그룹은 진보세력 지지층입니다. 콘크리트 지지층과 비판적 진보당 지지층의 합산입니다. 5%정도로 예상합니다.

정당은 지지가 없으면 결국 해산될 수 밖에 없고,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은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정당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그 지지기반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혹 정당이 없어지더라도,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결국 생겨난다는 것이죠. 이 경우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은 허다하게 많으니, 공급이 수요를 압도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다섯 그룹으로 나누고, 이 그룹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적어보려합니다. 80년대부터 시간순서대로요.



80년 신군부는 기존의 모든 정당을 폐쇄하고 주요정치인들에게 정치활동금지조치를 내린 후, 바뀐 헌법에 따라 정당을 새로 조직하고 총선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전두환이 총재로 있던 민주정의당(민정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신군부가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새누리당의 전신으로 위에서 이야기했던 1번그룹의 시작점이죠.

87년 6월항쟁을 통해 헌법은 개정되게 되고 6공화국이 열리게 됩니다. 6공화국헌법의 기본틀은 대통령직선제와 총선의 소선거구제입니다. 그리고 3김은 정치활동금지가 풀리면서(양김은 보다 일찍 풀렸지만) 다시금 정국을 주도하게 되죠. 이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양김은 하나로 힘을 합쳐서 통일민주당(민주당)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김 중 한 명이 후보로 나설 경우 당선이 유력시 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당시 양김의 세력은 동일하지 않았고, 김영삼 쪽의 세력이 좀 더 커서 당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후보 경선방식이 김영삼에게 유리했고 이에 김대중은 반발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탈당,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게 되죠. 아마 71년 대선 이후 16년만의 대통령선거에 상황을 읽을 능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선거결과 노태우가 36.6%의 득표로 당선되고, 김영삼 28.0%, 김대중 27.0%, 김종필 8.1%로 낙선합니다. 그렇게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네 사람은 몇 개월 뒤의 총선에 힘을 쓰게 되지요. 이 중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은 민주당의 전신으로 3번그룹의 시초고, 공화당은 자민련의 전신으로서 2번그룹의 시초죠.

아래는 부산경남(PK)과 호남의 대통령선거 득표현황입니다.
부산경남3920729표 김영삼2104053표(53.7%) 노태우1433379표(36.6%) 김대중269213표(6.7%) 김종필102905표(2.6%)
호남3072998표 김대중2716499표(88.4%) 노태우302932표(9.9%) 김영삼36427표(1.2%) 김종필14571표(0.5%)
이것을 굳이 보여주는 이유는, 이 차이가 총선의 차이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13대총선결과 비례의석을 제외한 224개 지역구에서 민정당 87석, 평민당 54석, 민주당 46석, 공화당 27석을 가져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평민당이 민주당을 이긴 거죠. 위에서 보다시피, 대선전 세력은 김영삼이 더 컸고 대선에서의 득표도 김영삼이 좀 더 득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13대 총선의 득표율도 민주당이 평민당보다 4.5% 더 득표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서울에서 평민당이 좀 더 이긴 것도 이유겠습니다만, PK와 호남을 제외한 지역의 의석은 민주당23석, 평민당18석이기 때문에 그 부분은 작은 부분이구요. 호남몰표상황이 영향을 준 것입니다. 12대총선까지는 중선거구제로 하나의 선거구에서 2명씩 선출했습니다. 그러다 13대부터 소선거구제로 사실상 기존의 선거구를 둘로 나눠서 각각 1명씩 뽑게된거죠. 이 결과 평민당은 호남에서 의석이 2배로 늘어나는 효과(지역감정이 심화되어서 실제효과는 더 컸습니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아니었죠. PK에서 민정당의 지분도 상당했기 때문에, 중선거구에서 선거구당 2명씩 뽑은 것과 소선거구에서 각각 1명씩 뽑은 것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민주당은 지역감정안에서 다시 여촌야도현상이 벌어지며 부산에서는 압승했지만 경남에서 석패하면서 PK지역 37석 중 23석을 가져가고 민정당에 13석을 내줬습니다. 반면 평민당은 37석중 한화갑이 후보등록취소로 후보가 없었던 1자리를 제외하고 36석을 차지했죠.(이후 그 한자리는 평민당에 입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독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민정당은 과반의석확보에 실패,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신군부로서는 여소야대 자체가 처음이다보니 많이 힘들어했죠. 그리고 민주당은 넘버2에서 넘버3로 밀린 것에 대해 다음 대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공화당은 넘버3조차 되지 못해 시선에서 아웃당할 것을 걱정하는 상황이 됐죠.

이에 3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3당합당이 이뤄집니다.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거대여당의 탄생이죠. 13대국회는 원구성 2년만에 다시 여대야소로 변했습니다. 민주당의 일부의원은 이 야합에 반발, 탈당하게 되고, 대선에서 양김이 갈라선 것에 책임을 묻고 탈당했던 무소속등의 사람들과 연합해 민주당을 창당하게 됩니다. 이 민주당은 일명 꼬마민주당으로 불렸죠.

이 꼬마민주당은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선거만이 진행된 91년 지방선거에만 참여했고 대선과 총선에는 참여한 적이 없지만 중요한 이유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4번그룹의 시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수정당의 한계와 총선에서 민자당을 견제하기 위해 평민당과 합당을 하게되죠.

이 때 현대그룹 회장인 정주영은 대선출마를 목표로 정계에 뛰어듭니다. 그 준비로 통일국민당(국민당)을 창당하고, 14대 총선에 뛰어들죠. 국민당은 2번그룹을 지지기반으로 4번그룹도 조금 흡수하며 14대총선을 3파전 양상으로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경기, 강원, 충청, 경북 지역에서 고르게 의석을 가져오며 237석의 지역구 중 24석을 얻어 제3당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합니다.

민주당은 호남과 서울의 지지기반에서 많은 의석을 가져오고, 영남을 제외한 타지역에서도 의석을 가져오며 총 75석으로 지난 총선보다 많이 성장한 결과를 냅니다. 반면 민자당은 전국구포함 149석으로 사실상의 과반을 이뤘지만 본래 갖고 있던 의석을 많이 잃은 결과를 낳았죠.

민자당은 대선후보 결정을 위한 당내의 파워게임에 돌입하게 되고, 당내에서 2,3번째의 세력이던 민주계와 공화계가 연합해 민정계에게서 당권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 결과 대선후보로 김영삼이 선출되지요. 민주당에서는 김대중과 이기택이 후보경선을 벌였고, 김대중이 대선후보로 선출됩니다. 여기에 국민당의 정주영까지 3파전이 됐으며, 4번그룹을 지지기반으로 박찬종이 독자후보로 출마한 상태였습니다.

14대 대선결과 김영삼이 42.0%를 득표하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김대중 33.8%, 정주영 16.3%, 박찬종 6.4%로 낙선했습니다. 대선 후 김대중은 정계은퇴했고, 정주영은 현대그룹과 국민당에 대한 압박에 못이겨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당권을 공고히하려는 노력에 돌입하게 됩니다. 민정계와 공화계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고, 김종필에게 물러나기를 요구합니다. 이에 김종필은 반발, 구 공화계를 중심으로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기존 국민당 세력을 흡수합니다. 한편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은 다시 민주당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 제 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서울시후보선택에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선거결과 민주당은 서울시장과 호남의 3개 광역단체장만을 가져가 김대중의 영향력이 재확인 됐고, 자민련은 충청권 3개 광역단체장과 강원지사를 가져가 정계구도를 3파전으로 만듭니다. 민자당은 공화계가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한데 이어 민정계도 대거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 영남의 3개 단체장(대구는 민정계의 탈당한 무소속)과 인천시장과 경기지사를 가져가는데 그쳐 선거에 참패하게 됩니다.(그리고 경기지사 이인제는 유력인사로 떠오릅니다.)

지방선거 후 15대 총선을 맞이하며 다시금 정계개편이 이어집니다. 서울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도 1위를 기록한 민주당은 김대중의 정계복귀와 함께 평민당계가 대거 탈당,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분열됩니다. 김영삼은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이 구속되자, 이회창, 박찬종,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등 유명 재야인사들을 영입하며 신한국당으로 재창당합니다.

15대총선은 분열된 야권과 재창당한 여당, 그리고 좀 더 공고해진 자민련으로 4파전양상이 벌어집니다. 이 선거가 제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1,2,3,4그룹이 각각 가장 명확했던 선거죠. 선거결과 이미지 쇄신에 성공한 신한국당은 지역구 121석, 비례 18석을 얻으며 139석으로 선전합니다. 자민련은 민정계도 흡수하면서 충청권에 명확하게 자리를 잡고(이 선거 전까지는 텃밭이라고 해도 김종필에 대한 지지율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경기와 강원, 대구등에서도 활약하며 총 50석을 확보, 점점 더 제2야당의 위치를 확실하게 합니다. 김대중에 의해 창당된 국민회의는 호남을 기반으로 수도권에서 선전하며 총 79석을 차지,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입증했으나 남은 민주당은 비례의석을 6석이나 차지했지만 지역의석을 9석 얻는데 그쳐 15석으로 교섭단체구성도 실패했습니다.

신한국당은 무소속의원들의 영입으로 과반을 확보하고 여대야소를 구성했고, 이에 야권에서는 당을 분열시킨 김대중에게 책임을 묻게 됩니다. 각 정당은 대선을 맞아 각기 이회창, 김대중, 김종필, 조순후보를 선출합니다. 하지만 이회창에 대한 아들 병역의혹이 터지자 지지율은 급감했고, 여론조사에서 이인제가 이회창의 2배 가까운 지지율을 기록하며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합니다. 이에 이인제가 탈당, 국민신당을 창당하면서 선거는 5파전을 띄게 됩니다. 하지만 탈당하면서 이인제의 지지는 떨어졌고, 김대중이 1위로 치고나가게 됩니다.

선거를 한달여 앞둔 11월에 접어들면서 김대중과 김종필은 연합했고, 이회창과 조순은 합당을 선택,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합니다.(다시 민주당 일부는 이에 반발하고 탈당하여 국민회의에 입당합니다.) 합당의 결과 김대중의 지지는 별로 상승하지 않았지만 이인제는 소폭상승, 이회창은 대폭상승하며 3파전이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선거결과 김대중이 40.3%를 득표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회창은 38.7%, 이인제는 19.2%로 낙선했습니다. 김영삼이 밀어준다는 소문이 있었던 이인제는 탈당하고, 김대중과 김종필이 연합하고,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는 등 워낙 변수가 많았던 이 선거는 1번그룹과 3번그룹이 아닌 2번과 4번그룹의 표가 여기저기로 흔들리면서 가장 정쟁이 심했던 선거였습니다.

한편 건설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은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선출, 15대대선에서 1.2%를 득표합니다. 산발적으로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이 1.2%의 득표가 5번그룹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선 후 연합정부를 구성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공조체제를 통해 단일후보를 내는 형태로 재보궐선거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선거결과 다시금 영남/호남/충청으로 갈리는 지역민심이 명확해졌고(90년대 중반이 가장 명확하던 때였습니다.), 3파전 양상도 굳어졌습니다.

이회창은 당권을 쥐고 당내 입지를 강화합니다. 박근혜를 영입하고, 민정계인사들을 다시 영입하는등 몸집을 불리고 자신의 입김을 강화합니다. 그리고 16대총선에서 당내 유력인사들을 공천하지 않았고, 이에 반발 유력인사들은 탈당해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합니다. 하지만 비교적 정치가 안정화되었고, 당시의 낙선운동에서 '당적이동'으로 낙선대상자로 많이 선정되면서 참패합니다. 공고해진 지역구도로 인해 자민련은 완전히 지역정당의 낙인이 찍히며 16대 총선결과 17석으로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합니다.(민주당 의원 3명을 영입해, 의원꿔주기 논란과 함께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는 합니다.) 자민련의 몰락, 그리고 민국당의 참패를 통해 양당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1,2그룹의 보수당과 3,4그룹의 개혁당으로 구분되는 정치적인 안정상태가 됩니다.

16대대선에서 민주당은 당원과 비당원의 비율을 5:5로 하는 국민경선제를 도입했고, 군소후보였던 노무현이 첫 제주경선에서 3위로 등장, 이인제에 대한 대항마로 떠오르자 울산과 광주에서 연이어 이인제에 승리하면서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이후 충청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노무현이 승리하면서 경선을 이끌었고, 노무현이 민주당 후보로 결정됩니다. 한나라당은 무난하게 이회창이 승리하면서 양당의 대선후보가 결정됩니다.

이후 월드컵 열기로 인해 완전히 이슈에서 벗어나버린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호남의 3개 광역단체장과 제주까지 4곳의 광역단체장만을 차지하고, 광역 의원과 기초단체장에서도 한나라당에 현저하게 밀리며 노무현은 책임론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월드컵의 열풍을 타고 정몽준이 떠오르며 노무현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민주당은 분열, 일부가 탈당하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이러한 민주당 내의 노무현 비토현상에 친노세력을 중심으로 개혁국민정당이 창당되어, 다시금 제 4그룹의 정당이 탄생, 노무현을 대선후보로 지지합니다.

민주당의 내분여파로 지지율이 하락하며 이회창이 앞서나가 단일화가 아니고서는 노무현과 정몽준 두 후보가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후보등록을 앞두고 여론조사를 통해 노무현으로 단일후보가 결정되면서 다시금 양자구도의 형태를 띄게 됩니다. 그리고 노무현으로 단일화가 되면서 이인제가 탈당해 노무현지지를 철회하고, 다시 선거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지지를 철회합니다.

선거결과 노무현이 48.9%를 득표하며 대통령으로 당선, 이회창은 46.6%로 낙선합니다. 한편, 민주노동당후보로 출마한 권영길은 3.9%를 득표하면서 5그룹의 정당으로 확연히 자리를 잡게 됩니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분열, 탈당파가 개혁국민정당과 함께 열린우리당(열우당)을 창당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의 3당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역풍이 불었고, 열우당은 영남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며 총 152석으로 과반의석을 확보합니다. 반면 자민련과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함께 탄핵을 진행했다는 것에 강한 역풍을 맞아 각각 자신의 지역기반인 충남과 전남에서 4석과 5석을 얻는데 그쳐 군소정당으로 전락합니다. 특히, 자민련은 17대총선에서 새로도입된 정당명부투표에서 2.8%에 머물러, 3%이상 또는 지역의석 5석이상에 도달하지 못해 비례1번이었던 김종필의 원내입성에 실패하게 됩니다. 1그룹의 지지는 여전히 유효한 가운데, 2,3그룹의 지지는 4그룹중심의 열우당으로 옮겨졌거나, 투표를 포기하면서 발생한 일이죠.

그 가운데 민노당은 새로도입된 정당명부투표의 비례대표제에 힙입어 비례의석 8석을 차지, 최초 지역의석 2석을 포함해 10석을 확보하며 한나라당과 열우당에 이어 제3당이 됩니다. 이는 본래 진보지지자이지만 우선과제를 한나라당에 승리를 두던 사람들이 열우당에 대한 지지가 올라가자 우선과제의 해결로 보고 본래의 지지로 돌아갔거나, 열우당에 합류한 3그룹기반의 정치세력에도 불만을 가진 4그룹이 이동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총선승리를 통해 과반을 확보한 열우당은 총선 후 각 계파간의 내분으로 빠르게 지지를 잃어갑니다. 열우당 자체가 다양한 계파가 모인 연합정당에 가까웠고, 급속히 제도권 밖에서 원내로 진입한 초선의원들이 많다보니 더더욱 각계파들의 수장들에게 힘이 몰리게됩니다. 하지만 이제야 힘을 갖게 된 그들은 하고싶은 것이 너무 많았고, 그것이 서로 다를 때도 있다보니 계파간에 갈등이 발생한 것이죠.

한나라당은 17대총선을 통해 이회창의 입지가 협소해지고, 박근혜의 입지가 매우 강화됩니다. 그리고 자민련의 비례1번이었음에도 당선되지 못한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하게 된 것과 맞물려, 1그룹과 2그룹의 지지가 한나라당으로 결집되는 현상을 가져옵니다. 거기에 열우당의 내분으로 인해, 특히 4그룹 지지자들은 투표를 포기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정계의 주도권을 회복합니다.

열우당은 4회 지방선거에서 참패, 전북 한 곳에서만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며 완전히 몰락합니다. 반면 한나라당은 호남 3개지역과 제주만을 제외하고 전 지역에서 당선되며 역대 지방선거에서 가장 크게 승리합니다.

다가올 17대 대선에서 사실상 한나라당의 후보가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한나라당의 후보가 누구냐에 몰리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당권을 쥐고 있던 박근혜와 박근혜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세력의 대표였던 이명박의 대결이 되지요. 대선 후보를 결정하기 위한 당내 경선에서 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이 승리,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됩니다.

반면 탈당러시로 인해 열우당은 사실상 와해되었는데, 대선을 앞두고 손학규와 그 세력, 그리고 시민단체를 끼고 다시금 모여들어 대선후보 경선을 진행합니다. 경선은 정동영과 손학규, 그리고 친노의 이해찬이 3파전을 벌이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정동영이 승리하며 대선후보로 결정됩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가 정동영으로 결정되면서 대안으로 거론되던 문국현의 지지율이 소폭상승하지만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합니다. 이후 이회창이 무소속 출마를 선언, 국민중심당도 이회창을 지지하며 이명박에 대항하는 제2후보로 떠올랐지만 점점 지지율이 빠져 대선구도는 이명박 1강에 정동영-이회창 2중, 문국현-권영길 2약으로 형성됩니다.

대선은 역대 대선 중 가장 낮은 63%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이명박이 48.7%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정동영 26.1%, 이회창 15.1%, 문국현 5.8%, 권영길 3.0%로 낙선했습니다. 정동영은 대선참패로 인해 지지가 급락했고, 이회창은 무소속으로서 높은 득표율을 기록해 정치재개에 힘이 되었습니다.

대선이 끝나고 4개월만에 총선이 있었고, 각 정당은 바로 총선체제를 갖춰갑니다. 한나라당은 공천권을 쥔 이명박의 친이계가 친박계의 공천을 대거 탈락시키자 이에 반발해 다수가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라는 이름으로 창당해 출마하게 됩니다. 국민중심당은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했던 이회창을 영입하며 자유선진당을 창당합니다.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은 합당해 통합민주당이 되었고, 5그룹도 분당되어 민노당 탈당파가 진보신당을 창당, 총선에 참여하게됩니다.

총선결과 18대총선은 역대 모든 선거를 통틀어 가장 낮은 46.1%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총선결과 한나라당은 153석이라는 과반의석을 확보하며 여대야소를 열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2그룹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자유선진당도 대전과 충남을 기반으로 지역구 14석을 얻고 비례 4석을 얻어 18석을 확보했으며, 친박연대는 6석의 지역의석과 함께 비례의석으로 8석을 확보했고, 친이중심 공천에 반발에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의원들도 대거 당선되면서 범여권이 큰 승리를 거두게됩니다.

반면 통합민주당은 수도권에서의 참패로 지역의석 66석을 얻는데 그쳐 총 81석의 제1야당이 되었고, 분당된 민주노동당은 지역 2석과 비례 3석으로 5석을 얻어 17대국회에 비해 절반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진보신당은 노회찬, 심상정의 두 지역의석을 기대했으나 실패했고, 정당비례명부투표에서 2.9%를 기록, 3%이상의 정당에게 부여되는 비례의석도 얻지 못해 의원을 한 명도 내지 못하고 원외정당이 됩니다. 창조한국당은 문국현의 지역구 당선과 함께 비례의석 2석등 3석이 되었지만,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선진당과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구성해 지지자들이 이탈하게 되고, 당선자들의 당선취소가 이어지면서 선진당과의 연합으로도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게 되어 군소정당으로 추락합니다.

17대총선과 18대총선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과반을 차지할 정도로 세몰이가 이어져, 두 번의 선거를 통해 정치권은 상당히 많은 수의 인적쇄신이 일어나 그 결과 다선의원들의 입지가 더 높아지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연이어 진행된 대선과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크게 승리했고, 한동안 선거가 없어 한나라당의 독주는 이어집니다. 이러한 한나라당의 독주에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시민들에 의해 촛불집회가 형성되고, 이는 집시법개정등 정국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후 재보궐선거는 진보신당의 조승수가 당선되어 원내정당으로 진입하는 등 야권에 좋게 흘러갔습니다.

전대통령의 자살이라는 큰 사건이 벌어지고, 당대정부에 대한 불만은 지난 정부에 대한 향수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국민참여당이 창당됩니다. 하지만 민주당에 잔류한 친노세력이나, 여전히 정계에서 떨어져 국민참여당에 합류하지 않은 친노세력등 친노세력의 집결도 이루지 못해 처음부터 한계점을 갖고 시작합니다.

18대총선이후 2년여만에 치러지는 5회 지방선거는 정권심판이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며 야권연대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습니다. 여권의 경우 선진당이 대전, 전남, 서울에만 후보를 공천해 사실상 단일화의 필요도 없는 상태였기에 더더욱 야권이 주목받게 됩니다. 당대당 야권연대에는 실패하지만 개개의 후보들간에 지역별로 연대가 이뤄지면서, 야권에서는 대체적으로 친노인사들이 후보로 선출됩니다. 선거결과 54.4%를 기록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투표율이 상승했고, 상징성이 큰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한나라당에 내줬지만, 지난 선거에 비해 많은 지역에서 야권이 승리했고, 특히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도 야권이 승리했습니다. 친노세력은 서울, 경기, 부산등의 광역단체장선거에서 석패하기도 했으나 강원, 충남, 경남 등에서 도지사를 배출하며 부분적인 정권심판을 이뤄내게 됩니다.

이듬해 보궐선거에서도 성남 분당에서 손학규가 당선되고, 강원도지사로 최문순이 당선되는 등 대체적인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심판의 분위기는 이어집니다. 단, 이 보궐선거에서 원내진입을 노렸던 참여당은 후보단일화과정에서의 잡음이 문제가 되고 결국 선거에서도 패하면서 참여당의 존립여부가 흔들리게 됩니다.

하반기 보궐선거에서는 서울시장에 대한 보궐선거가 진행되어, 매우 높은 관심을 끌게 됩니다. 서울시장의 후보 물망에 안철수가 거론되고, 여론조사에서 50%를 넘길 정도로 높게 나오며 관심을 끌었다가 박원순으로 두 사람간의 후보단일화를 이루자 관심은 더 커지게 됩니다. 이후 박원순은 민주당 박영선, 민노당 최규엽과의 후보단일화경선에서도 승리하면서 야권은 무소속 박원순을 중심으로 연대하게 됩니다.

박원순이 재보궐선거결과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자, 야권연대는 커다란 대의로서 등장합니다. 이에 야권은 그간 무소속을 유지하던 인사들도 대거 합류하며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양당으로 모이게 되고, 다시 양당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며 단일 후보를 공천하게 됩니다. 반면 한나라당은 홍준표가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되고,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총선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민통당 단독으로도 새누리당과 지지율이 경합을 보일 정도로 야권연대에게 유리하게 시작된 총선정국은 연합세력인 민통당 내의 공천과정에서의 잡음과 이후 통진당과의 후보단일화 과정에서의 잡음, 그리고 선거구 결정에서의 문제등으로 지지가 하락합니다.

총선결과 새누리당은 지역구 127석에 비례 25석을 합해 152석을 확보하며 거대여당으로 다시금 자리합니다. 민통당은 지역의석 106석, 비례의석 21석의 127석, 통진당은 지역의석 7석에 비례의석 6석, 선진당은 지역의석 3석에 비례의석 2석을 가져갑니다.

19대총선은 호남과 영남의 지역선거를 기반으로 여촌야도 현상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호남은 야권이 싹쓸이했고, 영남은 민통당이 부산에 대대적인 힘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산2석, 경남 1석에 그쳤습니다. 서울에서는 야권이 2:1로 앞섰으나, 경기-인천-충청권은 선을 그은 듯 서울과 대전 근처는 야권이, 서울과 대전에서 먼 지역은 여권이 가져가는 현상을 보이며 반반의 결과가 나왔고, 강원도는 새누리당이 독식했습니다. 여촌야도는 결과적으로 인구당 의석비율에서 도시가 적은 의석을 갖고 있는 관계로, 새누리당42.8%, 선진당3.23%, 민통당36.5%, 통진당10.3%로 정당명부투표에서는 비등한 싸움을 했음에도 새누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며 야권이 참패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총선 결과 민통당 지도부는 총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해 새로 지도부를 선출했고, 통진당은 비례대표 공천과정에서의 부정선거가 불거져 조금이라고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비례대표 후보는 전원사퇴하자는 측과 사퇴해서는 안된다는 측의 부딪침으로 당이 깨지게 됩니다.

민통당은 18대 대선후보 경선을 통해 문재인이 후보로 선출되었고, 새누리당은 박근혜가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현재 무소속의 안철수를 포함 3자대결구도가 형성된 상태입니다.



여기까지로 글을 마칩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2월이었는데... 정말 오래 걸렸네요. 다시 쓸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다보니 더더욱 늦어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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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3 10:1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흐름이 한눈에 보이네요.
설탕가루인형형
12/11/23 10:21
수정 아이콘
현대정치사는 정리된 자료가 많지 않아서 정말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자료도 많이 찾아봐야 되는데...대단합니다.
깔끔한 정리 잘 읽었습니다~
김익호
12/11/23 10:25
수정 아이콘
정성들여 쓴 글 너무나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가 되네요.
레지엔
12/11/23 10:49
수정 아이콘
언젠가는 87년부터 97년까지만으로도 수 백 권의 책이 나올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이 글보다 재미있는 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잘 봤습니다.
퀘이샤
12/11/23 10:49
수정 아이콘
흐림이 잘 보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2/11/23 10:54
수정 아이콘
1번그룹보단 2번그룹 쪽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정부에서 친이와 친박쪽 지지가 또 좀 세분화 된 경향이 있습니다. 이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경우가 세종시와 신공항논란였고요, 양쪽 지지자들은 거의 정확히 반대쪽 스탠스를 취했습니다. 결국 지역의 차이가 크겠지만 (또 한가지는 보수기독교층 버프)...그리고 친박이 득세한 이후, 상당수의 친이 지지자들이 안철수를 지지하는 모습을 꽤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람들이 현재 양자대결에서의 차이를 만드는 중요 계층이라고 보고요. 다르게 이야기하면 그만큼 친이가 형성되면서 세력확장이 나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친박은 말씀하신 1번그룹의 연장이었던 것 같고요. 문재인으로 단일화 되면 이 사람들이 박근혜를 찍을 지 그냥 선거를 포기할 지 유심히 관찰하는 중입니다.
수호르
12/11/23 10:58
수정 아이콘
다른 곳에서 제가 쓴 글인데.. 한번 재미로 보시면 좋을듯요.
어느정도 이글과 연관된 것 같아서 새로운 게시물보다는 댓글로 답니다.
참고로 내용이 좀 깁니다..

14대 대선에서부터 이번 18대 대선의 양상을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합니다.
아울려 예상 득표수를 살펴보죠.

먼저

14대 대선
유권자 - 29,422,658
투표자 - 24,095,170
투표율 - 81.9%

김영삼 - 9,977,332
투표자 대비 득표율 - 41%
유권자 대비 득표율 - 34%

김대중 - 8,041,284
투표자 대비 득표율 - 33%
유권자 대비 득표율 - 27%

정주영 - 3,880,067
투표자 대비 득표율 - 16%
유권자 대비 득표율 - 13%

박찬종 - 1,516,047
투표자 대비 득표율 - 6%
유권자 대비 득표율 - 5%


15대 대선
유권자 - 32,290,416
투표자 - 25,642,438
투표율 - 80.7%

김대중 - 10,326,275
투표자 대비 득표율 - 40%
유권자 대비 득표율 - 32%

이회창 - 9,935,718
투표자 대비 득표율 - 39%
유권자 대비 득표율 - 31%

이인제 - 4,925,591
투표자 대비 득표율 - 19%
유권자 대비 득표율 - 15%


16대 대선
유권자 - 34,991,529
투표자 - 24,784,963
투표율 - 70.8%

노무현 - 12,014,277
투표자 대비 득표율 - 48%
유권자 대비 득표율 - 34%

이회창 - 11,443,297
투표자 대비 득표율 - 46%
유권자 대비 득표율 - 33%


17대 대선
유권자 - 37,653,518
투표자 - 23,732,854
투표율 - 63%

이명박 - 11,492,389
투표자 대비 득표율 - 48%
유권자 대비 득표율 - 31%

정동영 - 6,174,681
투표자 대비 득표율 - 26%
유권자 대비 득표율 - 16%

문국현 - 1,375,498
투표자 대비 득표율 - 6%
유권자 대비 득표율 - 4%



18대 대선 예상
유권자 - 40,528,052 (행정부 발표)
투표자
투표율 70% 예상일때 - 28,369,636
튜표율 75% 예상일때 - 30,396,039

이정도가 됩니다.

이번 18대 대선에서는 전문가들이 말하길 16대 대선 정도의 투표율인 70%정도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부터 쭉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정한 성향이 있습니다.
현 새누리당의 대선 총 유권자 대비 득표율을 보면
34%, 31%, 33%, 31%
이정도를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김영삼, 이회창씨나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전부 30~34%의 득표율을 했죠. 이 득표율은 새누리당이 잘했든 못했든 항상 유지 됩니다.
이번 대선도 박근혜 후보가 잘했든 잘하지 못했든 이 범위에서 벋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17대 대선 당시 정동영 후보는 진짜 혼자 삽질을 다한 결과 이명박 대통령이 역대 최고 지지율로 당선 됐지만
사실 유권자 대비로 따져보면 역대 새누리당 대표들 중에서 가장 저조한 지지율인 31%를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새누리당의 30~35%는 고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어떤가를 살펴보면,
27%, 32%, 34%, 16%
이정도를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저중에서 2번의 30% 이상의 득표율을 받은 것은 대통령 배출했을때의 지지율입니다.
그야말로 최고점을 찍은것이라고 할 수 있죠.
반면, 17대 대선의 정동영 후보는 실수란 실수는 다하고 멍청한 짓이란 짓은 다했죠, 전략 자체도 개판이었고..
하지만 16%라는 수치를 얻습니다. 이것은 민주당의 고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에서 대통령을 배출 했을때의 32%, 34%의 득표율은 민주당 고정표 + 부동층의 승리를 나타낸거죠.

추가로 그렇다면 제 3후보의 경우를 살펴보면
13%, 5%, 15%, 4%
이정도가 나옵니다. (최소 백만표 이상을 득표한 후보만 기입, 14대 정주영, 박찬종, 15대 이인제, 17대 문국현)

현 18대에서는 3명의 후보를 제외하면 백만표 이상 득표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최소 4%에서 최대 15%가 유동층으로 볼 수 있을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18대 대선에서는 어떻게 될 것이냐를 살펴보면

투표율 70% 경우
3인 모두 출마시(단일화 실패)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 대략 35% 득표 9,929,372
민주당 문재인 후보 - 대략 25% 득표 7,092,409
무소속 안철수 후보 - 대략 10% 득표 2,836,963

투표율 75% 경우
3인 모두 출마시(단일화 실패)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 대략 35% 득표 10,638,613
민주당 문재인 후보 - 대략 25% 득표 7,599,009
무소속 안철수 후보 - 대략 15% 득표 4,559,405


투표율 70% 경우
문재인 후보로 단일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 대략 35% 득표 9,929,372
민주당 문재인 후보 - 대략 35% 득표 9,929,372

안철수 후보로 단일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 대략 35% 득표 9,929,372
무소속 안철수 후보 - 대략 35% 득표 9,929,372

투표율 75% 경우
문재인 후보로 단일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 대략 35% 득표 10,638,613
민주당 문재인 후보 - 대략 40% 득표 12,158,415

안철수 후보로 단일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 대략 35% 득표 10,638,613
무소속 안철수 후보 - 대략 40% 득표 12,158,415


이정도로 예상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안철수 지지율은 사실 거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로는 현재 지지율은 100% 투표를 한다고 했을때를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 35%에 달하는 고정표와 민주당 25%의 고정표는 투표율이 높으나 낮으나 무조건 투표를 하는 진성 투표자입니다.
이들만 해도 벌써 60%에 육박하게 되죠.
이번 대선의 경우 예상되는 70%의 투표율에서 생각을 해본다면
새누리당 35%, 민주당 25%는 고정표로 무조건 투표을 할 것이고 투표를 하는 남은 투표자는 10%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안철수 후보가 갖고 갈 수 있는 표는 10%가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3자 대결시 안철수 후보의 23%에 해당하는 지지율에서 절반은 자의든 타의든 투표를 하지 못하는 유권자지만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수치는 투표율을 고려했을때 허수라고 볼 수 있죠.

대략적으로만 살펴봤지만,
만약 75%이상의 투표율이 나온다면 현상태 유지시 누구든지 박근혜 대표를 이길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참고로 말하자면 박근혜 후보의 득표율은 최소, 타 후보들은 최대치를 염두하고 작성했습니다.
이 말인 즉슨, 기본적으로 박근혜 후보의 득표율은 저정도가 될테지만,
현재와 같은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의 삽질은 정치 협오자들을 양산하면서 전체적인 투표율이 낮게 나타나거나,
단일화을 한다고 하더라도 100% 융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단일화 후보 선택할 바에는 박근혜를 찍겠다라는 사람이 많아 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리잔
12/11/23 12:32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각잡고 정독했네요.
12/11/23 12:47
수정 아이콘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1987년 당시 여론조사는 선거법상 공표금지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누가 앞서는지에 관하여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고, 사후적으로 여론조사기관에서 발표한 것을 가지고 그때 그랬었구나 하기는 합니다.

본문입니다. 김영삼 후보가 계속 앞서다가 마치 김현희 사건으로 역전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야권이 갈라졌음에도 대선은 김영삼이 앞서고 있었는데, 대선 18일전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이 급반전 됩니다.]
위키백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잠시 김영삼 후보가 치고 나갔다가 김현희 사건으로 역전당한 것으로 표시합니다.
[선거 중반 김영삼 후보측이 12·12 군사 반란 당시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면서 강제로 전역당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을 영입하면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40%를 넘어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과 선거일 바로 전날 용의자 김현희가 서울로 압송되면서 여당인 노태우에게 유리하게 돌아섰다.]

그런데, 당시 김영삼 후보가 40%를 넘었다는 내용이 위키백과에 쓰여 있고, 뉘앙스가 일부 다르긴 하지만 이 글에도 앞선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근거를 찾을 수가 없네요.
당시에는 돈 문제가 있어서 요즘처럼 일일조사는 못 하던 시절입니다만, 선거 후 발표한 제대로 된 거의 유일한 자료인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는 시종일관 노태우 후보가 우세했다는 것입니다(그때는 업무로 여론조사를 하는 업체가 한국갤럽 외에는 사실상 없어서 사설 연구소 같은 데서 전화로 여론조사 대충대충하던 때). 물론 정승화 입당 당시에는 김영삼 후보의 상승세가 나타나긴 합니다.
※ 물론 대선 당시 김영삼 1위, 김대중 1위라는 조사결과도 있긴 했습니다(저도 그때 길에 널브러진 찌라시를 직접 봤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1위는 5대도시만 조사한 것인데 당시는 여촌야도 현상이 심할 때여서 의미가 없고, 김대중 1위는 여론조사에 전문적이라고 할 수 없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라는 재야활동단체에서 조사한 것이었으니 그 결과는 큰 의미가 없었죠. 물론, 김영삼 1위라고 표시된 것도 30% 초반대였지 40%를 넘지는 않았습니다(김대중 1위의 결과는 더 낮아서 20%대 후반).

참고로 제가 가지고 있는 한국갤럽의 자료입니다(이거 책자로 된 것인데 링크는 못 찾겠네요 -_-)
조사시기 - 결과
10/20(D-59) - 盧 38.8 / DJ 23.7 / YS 20.9 / JP 16.6
11/15(D-33) - 盧 38.2 / YS 27.7 / DJ 24.0 / JP 10.1
11/29(D-19) - 盧 35.7 / YS 28.9 / DJ 24.6 / JP 10.8
12/04(D-14) - 盧 33.7 / YS 29.2 / DJ 25.5 / JP 11.7
12/07(D-11) - 盧 35.2 / YS 27.9 / DJ 26.6 / JP 10.3
12/14(D-04) - 盧 35.3 / YS 28.4 / DJ 27.5 / JP 8.3
오차범위를 벗어난 유의한 결과는 사실상 정승화 입당밖에 보이지 않고, 나머지는 그냥 끝까지 추세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심지어 11/29의 KAL기 폭파사건도 별 영향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너무 잘 정리된 글이라 질문하기 죄송스럽습니다만, 아무래도 근거가 명확해야겠죠.
글 쓰신 분께서는 [야권이 갈라졌음에도 대선은 김영삼이 앞서고 있었는데, 대선 18일전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이 급반전 됩니다.] 부분을 어떤 자료에 의하여 작성하셨는지 궁금합니다.
12/11/23 12:58
수정 아이콘
흠... 해당 부분을 삭제하겠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쓴 글인데, 당시에 위키백과에서 보고 다시 확인해서 다른 글에서도 확인하고서 썼었는데, 그 다른 글을 찾을 수가 없네요... 저 부분을 쓴 게 반년은 지난 일이라...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지션
12/11/23 13:24
수정 아이콘
나중에 6공화국 드라마 만들면 재미있게 보겠네요.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이 군부 출신인 노태우에 그 후 3당합당이 6공화국을 요상하게 만들어 버린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나 정리 잘해주신 글 읽어서 좋네요.
lupin188
12/11/23 13:56
수정 아이콘
최근의 선거 흐름은 여촌야도에서 여노야소의 세대간 투표로 이루어지는 만큼 이 부분도 다뤄졌으면 더 좋겠네요.
12/11/23 15:04
수정 아이콘
이번 선거때 김영삼씨가 야권후보를 지지하면서 민주당에 입당하여 길고길었던 87 년 이후의 민주화 세력 분열사에 종지부를 찍는 상상을 종종 합니다만, 아마 안 될 거에요.
12/11/23 16:0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사소한 딴지를 걸면 2002년 선거에서 국민개혁정당이 아니고 개혁국민정당입니다. 이들을 4그룹으로 봐야 할지 5그룹으로 볼지도 전 좀 애매합니다만..
12/12/07 13:11
수정 아이콘
우와 자추보고 왔어요 잘 읽겠습니다 ^^
12/12/07 14:27
수정 아이콘
정말 흐름이 명확히 보여 좋네요.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치 및 역사에는 문외한이었는데 피잘에서 이것저것 많이 배우는 듯 합니다. 이리 깔끔히 정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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