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11/04 22:34:22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새로운 전쟁 - 5. 중공군 3차 공세


음... 어떤 소식이라 말 해야 될 지 모르겠는데... 저 직장 그만뒀습니다. =_=a 다시 시작하려구요.

==================================================================

중공군의 2차 공세 후의 총퇴각, 맥아더가 이 때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닙니다.

청천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물러나던 12월 초, 그는 병력 증원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미 합참은 더 이상의 병력 증원은 없다고 했죠.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엔 병력과 자원이 부족해서 (...)" 일지도요.

또한 방어선은 평양-원산 선으로 합의됐지만 맥아더는 10군단이 계속 함흥에 남아 있길 원했습니다. 적의 측면을 찌를 수 있는 위치라는 거였죠. 방어선이 좁고 해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위치였고, 실제 흥남 철수 작전 때도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방어를 잘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증원이 우선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 합참이 증원을 거부한 이상 미 8군 단독으로는 막을 수 없었죠.

최우선은 UN군의 병력을 보존하는 것, 그게 안 된다면... 결론은 철수 뿐이었습니다.

12월 4일, 맥아더와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와의 전략회담이 열립니다. 여기서 콜린스는 병력 증원이 불가함을 통보했고, 맥아더는 그렇다면 해안교두보로 UN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받아들여집니다.

이어 7일에 2차 전략회담이 열렸고, 9개의 방어선을 설정해 지연전을 전개, 부산으로 철수하는 데 합의합니다. 마지막 방어선은 그 낙동강 방어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이 제대로 내려지기도 전에 워커는 평양에서 발을 빼 38선으로 달립니다.

워커가 했던 말, "미 8군을 보존하는 방법은 적과의 접적을 단절하는 것 뿐이다"의 의미는 컸습니다. 그들은 평양에서 이미 총철수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정도로 중공군에게 받은 충격이 컸던 것이죠. 한국의 생존은 둘째고 참전한 미군과 기타 UN군을 지키는 걸 우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궁금해지는 게 '워커가 계속 살아있었다면?'입니다. 이 때 그가 보여준 모습은 낙동강 방어선에서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그가 계속 UN군 철수를 주장해 부산까지 물러나고, 아예 철수했다면 지금 받는 평가가 어땠을까요? 물론 어느 정도 더 물러나더라도 다시 낙동강에서처럼 철수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까지 그가 철수 주장의 주요 인물이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어찌됐든 이건 IF로 남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그가 사고를 당했으니까요.


하필 아들 샘 워커 대위의 훈장 수상을 축하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누구의 과실이 더 컸는지는 왜 다들 말이 다른지 모르겠군요 -_-; 양 쪽 다 과속 중이었던 건 맞는 거 같은데요. 심지어 워커 쪽 운전병의 과실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더 자세히 알아보면 답이 나올 것 같은데 그러진 않겠습니다.

어이없는 사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반격과 북진을 주도했던 그는 이렇게 생을 마칩니다.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그 운전병을 처형하려 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워커의 가족들이 말리면서 징역 3년형으로 끝납니다.

패튼의 기동전을 이어받았던 그, 그만큼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아무리 맥아더의 압박이 있었다 한들 그가 한 문제 역시 작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한국을 지키려 노력했고,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습니다. 현장의 지휘관이 철수를 주장했다면 한국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쉽게 끝났을 겁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한국을 지키려 했고, 결국 지켜냈죠. 위에서 그가 살았다면을 얘기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그가 크게 부각을 나타낼 수 없었던 건 역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겠죠. 거기다 그가 영 사람을 잘 상대하지 못한 것도 클 겁니다. 기자들도 싫어했고, 심지어 이승만도 싫어했습니다. 버릇없다구요 (...) 하지만, 그만큼 순수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별명대로 굳센 불독이었죠.


그는 경전차 워커 불독으로 그 이름을 남깁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워커힐이 있죠.


그리고 그의 아들 샘 워커는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맥아더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귀국을 "명령"했지만 거부하고 끝까지 남았죠. 이후 그는 최연소 대장까지 올랐고, 대장으로 추서된 아버지와 함께 미국에서 유일한 부자가 모두 대장이 된 사례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한국 전쟁의 영웅은 세상을 뜹니다.

+) 북한에서는 이를 빨치산의 활약으로 다룹니다. 그를 포함 무려 80명이나 되는 수행원을 사살했다고 하죠. -_-a 참고로 이에 대한 북한 공식 전사의 마지막 부분을 옮깁니다.

"인민군 및 중공군의 대타격에 의한 승리, 특히 제 2군선부대(빨치산)의 UN군 후방에 있었던 전쟁의 승리는 김일성의 전략적인 지도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

위에서 이래저래 얘기했지만... 이 때 그의 사망과 미 8군 사령관 교체로 아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습니다. -_-; 아이러니일까요.


"저는 한국에서 철수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머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미군 최고의 인재로 꼽히던 리지웨이였습니다. 맥아더부터가 워커의 사망을 듣고 바로 리지웨이를 요구했고, 미국에서도 이의가 없었죠. 애초에 워커 유고시 후임으로 내정됐던 게 그였습니다.

공수부대 출신으로 그가 수행한 작전은 워커와 많은 점이 달랐습니다. (맥아더와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죠)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공격을 중시했다는 점이죠. 그는 언제나 일반 장교처럼 수류탄 두 개를 가슴에 달고 다녔죠. 최고사령관이 직접 전투에 참가할 일은 없었기에 쇼로 본 사람도 많았지만, 아무리 쇼라도 이걸 무시할 순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승만은 국군 지휘관들도 이를 따라하게 했구요.

그는 군단장은 연대 단위로, 사단장은 대대 단위까지 최전방에 나가 지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자신도 서울에 머무면서 대구로 철수한 미 8군 사령부가 서울로 갈 수밖에 없게 했죠.

그가 가장 돋보였던 것은 모두 후퇴는 물론 철수까지 생각한 마당에 한국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패배주의에 물든 아군의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죠.

하지만 그 혼자 빠르게 모든 걸 바꾸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자,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

UN군을 38선까지 물린 워커의 판단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공세는 강력했고, 아군의 피해가 누적돼 있었죠.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긴 했습니다. 중공군이 추격할 엄두도 안 날 정도의 빠른 철수 작전, 미국 공식 전사에서는 이를 "무질서한 군중 무리가 이동하는 모습과 같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래도 그 시간 덕분에 재정비할 시간을 벌긴 했습니다.

38선까지 후퇴한 아군은 그나마 피해가 적었던 부대를 배치합니다. 미 1군단, 25사단과 국군 1사단은 임진강에 배치됐고 미 9군단에 배속된 국군 6사단과 미 24사단은 각기 동두천과 포천에 배치됩니다. 춘천일대에는 새로 창설된 국군 3군단, 2, 5, 8사단이 배치됐고 9사단이 동해안에 배치됐죠.

큰 피해를 입었던 부대는 후방에 배치됩니다. 미 1 해병사단은 마산에, 2사단은 원주에, 기병사단은 의정부에, 3사단은 평택에, 7사단은 대구에 배치됐죠. 역시 큰 피해를 입은 국군 7사단은 원주에 배치됩니다.

문제는... 개전 초기 38선과 같았죠. 그냥 일자로 쭉 그은 선이니만큼 각 부대가 맡아야 할 공간이 너무 넓었습니다. 영연방군의 어느 장교는 "문 틈으로 찬 바람이 스며들 것 같은 전선"이었다고 보고했죠. 배치된 병력은 총 25만으로 그렇게 수가 딸린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 국군은 상당수가 새로 창설된 부대로 경험도 훈련도 부족했죠.

그 때 아군이 바란 것은 북진 때 김일성이 바란 것과 같았습니다. 중공군이 38선은 넘지 않을 거라는 기대였죠.

하지만 그 기대는 북진 때 그랬듯 산산조각 납니다. 중공군이 38선을 넘는 순간 예정된 건 방어가 아닌 후퇴였죠.

+) 사족이지만 이 때 미군 장병들은 전쟁 상황보다 본토의 미식축구 경기에 더 신경썼다고 합니다 (...)

--------------------------------------------------------------------------------------------------------------------------

UN군이 38선을 점령하고 재정비를 하는 동안 중공군도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차기 공세를 언제 할 것이냐였습니다. 팽덕회는 12월 중후반으로 생각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38선 이북에 UN군이 남아 있을 때였고, 38선을 넘는 공세는 2~3월을 생각하고 있었죠.


"조기에 38선을 돌파해 서울을 점령 후, 1~2개월 정도의 휴식시간을 부여한다."

모택동은 이를 거부합니다. 시간을 끌어봤자 UN군에 유리해질 뿐이라는 거였죠. 어쩌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죠. 이 덕분에 작전에 참가한 것은 (겨우 -.-) 6개 군 뿐, 나머지는 북한군이 맡게 됩니다. 이 중 중공군 4개 군과 북한군 1개 군단이 서부전선을, 중공군 2개 군과 북한군 2개 군이 중부전선을 맡게 됩니다.

+) 중공군의 "군"은 북한군의 "군단"(+ 우리나 미군의 군단)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3차 공세, 혹은 정월 공세의 시작은 12월 31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사전공작이 시작됩니다. 북한군 2군단이었죠. 길원팔 유격대와 10사단을 중부전선의 후방으로 침투시킨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빨치산과 함께 이들의 침투는 성공리에 끝났고, 인제-현리는 물론 홍천까지 침투에 성공합니다.

미 공식 전사에서는 이를 "군사적 묘기이며, 북한군 2군단은 걸어다니느 공수군단"이라고 평했습니다.

목표는 개전 때와 비슷했습니다. 서부전선에서는 서울을 점령하고 중부전선에서 아군을 격파하고 배후로 진출하는 것이었죠.

----------------------------------------------------------------------------------------------------------------------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는 1차 공세부터 계획한 그대로였습니다. 약한 국군을 뚫고 아군 전체를 쌈싸먹는 것이었죠.

국군 1사단을 맡은 건 39군과 50군, 이 중 50군은 고랑포리에서 직접 1사단을 공격했고 39군은 일부는 후방으로 진출해 퇴로를 막은 후 포위공격했습니다. 국군 6사단에도 중공군 38, 40군이 포위공격을 했죠. 그 동안 북한군 1군단은 해주 등을 맡으며 아군의 상륙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 다시 말씀드리자면 중공군 각 군은 3개 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백선엽의 깔끔한 정리를 들어봅시다.

"저녁 무렵이 되자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특유의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난 뒤에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이 시작됐고, 이어 적들이 나타났다. 엄청난 수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군이 들이닥치면서 전면에 있던 12연대가 뚫리기 시작했다.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어 물밀 듯이 전진하는, 전형적인 중공군식 인해전술이었다.

우리 1사단과 인접 국군 6사단 사이의 경계인 전투지경선이 먼저 밀렸다. 우리 쪽에서는 12연대가 나가 있던 곳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15연대를 예비진지에 투입한 뒤 전황을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앞에 나가 있던 부대와는 통신도 끊겼다. 11연대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으나 12연대와 15연대는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나는 공병대와 통신대 병력까지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선전과 평양 1호 입성 등 1사단이 쌓았던 전공이 신기루처럼 여겨졌다. 역전의 1사단도 무너지다니…."

이 상황은 6사단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예 공격받지 않은 1사단 옆의 미 25사단과 달리 6사단과 같이 있던 미 24사단은 같이 공격받았죠. 중공군은 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언제나 최소 3배의 적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겨울이라서 땅이 굳었고, 강도 얼어서 방어선을 제대로 짤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공세 3일째인 1월 2일, 리지웨이는 직접 의정부로 달려가 국군 6사단과 같이 공격받은 미 24사단의 후퇴를 목격합니다. 이어 바로 철수명령을 내리죠. 서울을 포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딱히 서울의 정치적인 의미를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군의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1.4 후퇴가 시작됩니다. 그래도 개전 때에 비해서 미리 서울을 포기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갈 수 있었고, 한강이 얼면서 피난도 비교적 쉬웠습니다. 그 혹독했던 추위만 빼면요. 이 때 남쪽으로 피난간 게 서울시민과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포함해 22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참사가 있죠.


국민방위군입니다.

동기 자체는 이해할 만 했습니다. 겨우 북진통일이 되나 싶었더니만 중공군이 밀어닥치고 UN군은 철수하려 했습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 한국인의 의지를 보여주고 UN군이 철수하더라도 우리끼리라도 싸울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죠. 거기다 북한군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끌려간만큼 중공군이 다시 내려와도 이런 장정들을 뺏기지 않아야 했습니다.

이를 주도한 것은 기존의 예비군 체제를 맡았던 극우단체 대한청년단, 12월 15일에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고 다음 날 바로 발효됩니다. 영남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해 군인과 경찰을 제외한 청년들을 수용하기로 한 것이었죠.

12월 21일, 창덕궁에 소집된 1만여명의 장정들이 처음으로 남쪽으로 향합니다. 참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동기 자체는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남쪽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산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게 1월 30일이었습니다. 이 예산안 자체도 너무나도 부족했죠. 그나마 정말 정부와 군에서 최선을 다 했는데도 피해가 생겼다면 비극 정도로 치부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죠.

한편 군의 철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미군 특유의 기동력으로 4일 13시까지 마지막 부대가 서울을 떴고, 한강의 다리들을 모두 폭파하는데도 성공했죠. 겨우 두 시간 후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옵니다.

그럼 동부전선으로 가보겠습니다.

--------------------------------------------------------------------------------------------

서부전선에서도 국군만 노렸던 공산군, 국군이 집중 투입된 동부전선에서야 더 말할 게 있었겠습니까 -_-a

동부전선의 아군은 춘천-홍천 지역에 2, 5, 8사단의 국군 2군단이, 3, 7사단으로 구성된 2군단이 춘천부터 인제에, 수도사단과 9사단이 동해안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공산군은 3군단 지역에 중공군을, 1, 2군단이 맡은 태백산맥 일대에 북한군을 배치, 공격합니다.

치명적이었던 건 유령군단이라 불린 북한군 2군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미 후방에 침투하면서 아군은 이들과 미리 전투를 치러야 했고, 후방을 공격당한만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훈련이 부족한 9사단의 경우 공세가 시작되기 전인 30일에 이미 무력화됐죠.

후방이 위험한데 정면이라고 좋았을까요. 중공군은 국군 2, 5사단을 돌파, 홍천까지 진출하면서 서부전선과의 연결을 모색합니다.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은 것은 8사단 뿐이었고 혼자서 버틸수도 없기에 다른 사단들과 함께 후퇴했죠. 정면은 막고 있던 7사단 역시 후방이 위험해지면서 후퇴하게 됩니다.

이제 중부전선에서 남은 건 원주 뿐이었습니다. 빨치산과 합류한 북한군 3개 사단이 원주로 향했고, 리지웨이는 이에 맞서 미 10군단을 다시 끌어올립니다. 큰 피해를 입은 국군 2군단은 후방으로 후퇴합니다.

리지웨이는 국군 3군단이 포함된 미 10군단을 올려 북한군을 막게 했지만 서부전선의 상황에 따라 국군 3군단은 철수, 미군은 국군의 철수를 엄호하다가 적에게 고립됩니다. 이들이 철수를 생각했을 때는 정면은 물론 좌우, 후방까지 적이 침투한 상황이었죠.


이들은 중공군 2차 공세 때 큰 피해를 입고 아직 피해를 제대로 복구하지 못 한 미 2사단이었습니다. 쉽게 철수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바꿔 말 하면 명예회복의 기회였죠. 다행히 프랑스 대대와 네덜란드 대대, 미 37야전포병대대가 배속된 상황이긴 했습니다.

이들을 노린 것은 혼성된 북한군 5군단, 군단장은 6사단을 이끌었던 방호산이었습니다.

-------------------------------------------------------------------------------------------

3차 공세에서 가장 주목해야 될 원주 전투, 시작은 철수였습니다. 당시 횡성-원주에 집결해 있던 2사단은 5일부터 원주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를 엄호하기 위해 재편된 미 7사단이 북상했죠. 하지만 북한군은 원주는 물론 아래 단양까지 침투한 상태였습니다. 그 이상의 철수는 할 수 없었습니다. 원주가 점령되면 서부와 중부의 적이 연결할 수 있었으니까요.

7일까지 공방전 끝에 원주로의 철수는 성공합니다. 하지만 사방에서 적의 공격이 계속됐죠. 공군의 도움을 받아 그 날은 막아내지만, 밤이 되면서 다시 공격이 계속됩니다. 백병전까지 벌어진 끝에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아군의 피해도 커서 다음날 원주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죠.

다음 날, 미 2사단은 역습을 시도합니다. 이 날 포병이 발사한 포탄만 1만발을 넘었다고 하죠. 하지만 북한군의 공격은 끝이 없었고, 유령군단 2군단은 안동까지 침투해 오고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도 급히 증원군을 투입합니다. 187공수연대였죠. 10군단 자체에도 안동-영주-제천의 방어를 맡겼구요. 2사단은 이를 위해 뒤로 후퇴, 원주 남쪽-제천-충주에 △ 형태의 진지를 만들어 방어했죠. 정면에서 공격해오는 적과 방어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우하는 적과의 전투가 계속 진행됐죠.

10일이 되면서 2사단에 대한 적은 약화됩니다. 국군 3군단이 재편을 위해 철수했기 때문이었죠. 북한군은 이 틈으로 파고들었고, 리지웨이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 미 1 해병사단을 투입합니다. 이렇게 전투는 절정에 이릅니다.

11일, 드디어 적의 공세가 약화됩니다. 다음은 원주 탈환이었죠. 2사단은 전진, 12일에 원주를 탈환하고 이 날 닥친 적의 소규모 공격을 모두 막아냅니다.

이렇게 원주 공방전은 종료됩니다.

이 공세기간 동안 북한군이 입은 피해는 1만여 정도로 추정됩니다. 중부전선에서 적의 공세 역량이 고갈됐음을 뜻 하고, 이 곳을 지킴으로써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죠. 2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으며 해체 위기까지 몰렸던 미 2사단은 이렇게 명예회복에 성공합니다.

+) 다만 서부전선과의 균형을 위해 14일 제천-영월 선으로 철수하긴 합니다.

-----------------------------------------------------------------------------------------

후; 나머지는 다음 편에;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잿빛토끼
12/11/04 23:15
수정 아이콘
이걸... 잘 하셨다고 해야할지.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오늘도 글을 잘 보고 갑니다. 힘내세요. [m]
Je ne sais quoi
12/11/04 23:50
수정 아이콘
워커힐이 워커에게서 유래된 건 줄은 처음 알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니까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고민할 시간이 충분히 있을겁니다(아 물론 그런 생각이 잘 들지 않으실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잘 하실꺼예요~
Neandertal
12/11/04 23:54
수정 아이콘
발전의 계기가 될 거라 믿습니다...^^
12/11/05 00:41
수정 아이콘
꼭 잘 풀리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글을 꾸준히 올릴 수 있는 성실함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지식과 논리력을 갖춘 인물이라면, 무엇을 하든 원하는 바를 이루리라 믿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2887 [일반] 어느덧 예비군의 계절, 그리고 프로야구의 개막 [28] 빛고즈온5560 13/03/27 5560 2
42782 [일반] 내가 누군가한테는 필요한 한 사람이라는 것. [8] Realise4875 13/03/20 4875 2
42127 [일반] 지금까지 살면서 열심히 했다 생각되는 것들. [32] 국카스텐6170 13/02/05 6170 0
41287 [일반]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1] FlyHigh2987 12/12/26 2987 0
41216 [일반] 성장률로 정부를 평가하는 시각에 대한 단상 [37] 탑픽7441 12/12/22 7441 25
41027 [일반] 음서(淫書) 유감 (19금?) [7] 알킬칼켈콜6370 12/12/12 6370 4
40705 [일반] 전쟁 속의 한국 - 5. 차일혁, 김영옥 [8] 눈시BBbr6680 12/11/28 6680 0
40637 [일반] 전쟁 속의 한국 - 2. 노근리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8] 눈시BBbr6580 12/11/24 6580 4
40116 [일반] 새로운 전쟁 - 5. 중공군 3차 공세 [8] 눈시BBbr6549 12/11/04 6549 1
39729 [일반] 왜 노년층은 박근혜에게 끌리는가 [41] 택신의야습5937 12/10/17 5937 1
39632 [일반] 북한군 귀순 軍대응 총체적 부실..곳곳서 `구멍' [50] 오크의심장6066 12/10/11 6066 0
39583 [일반] [오늘] 한글날 [20] 눈시BBbr6374 12/10/09 6374 1
39396 [일반] 인천상륙작전 - 1. 크로마이트, 1/5000의 작전 [16] 눈시BBbr8617 12/09/27 8617 2
39339 [일반] 순둥이던 남자가 까칠해 지기까지 [27] 꼬미량6043 12/09/24 6043 3
39029 [일반] RE) 조선시대 단체스포츠 혹은 예비군 훈련? '석전' [4] happyend5269 12/09/06 5269 1
39027 [일반] (스압) 조선시대 단체스포츠 혹은 예비군 훈련? '석전' [6] sungsik6735 12/09/06 6735 0
38906 [일반] [일상] 마지막 예비군 훈련, 그리고 울음 [12] Eternity4246 12/08/29 4246 1
37833 [일반] 창군 - 폭풍 전야 1 [6] 눈시BBver.29131 12/06/23 9131 1
37806 [일반] 창군 - 38선 : 반격 작전 [7] 눈시BBver.25642 12/06/21 5642 1
37467 [일반] 기억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139] 박동현11259 12/05/30 11259 3
37300 [일반] 예비군 훈련 다녀왔습니다. [16] 로렌스5807 12/05/18 5807 0
37072 [일반] 개인적으로 유시민씨가 참 안타깝습니다. [57] 박동현6823 12/05/03 6823 0
36959 [일반] 전문 시위꾼이란 누구이며, 목적은 무엇인가. [35] 닭엘8601 12/04/26 8601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