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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0/28 16:39:55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새로운 전쟁 - 3.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서쪽으로는 숙천부터 평양까지, 동쪽으로는 고원부터 원산까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협소한 지역으로 약 200km 정도입니다. 방어하기에는 참 좋은 곳이고 통일신라의 영토는 대략 이 정도선에서 만들어졌죠. 반면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은 1200km에 달합니다. 때문에 역사 속에서도 북진은 신중하게 진행됐습니다. 고려는 우선 서쪽으로 차근차근 진출해 압록강에 이르렀죠. 마치 벙커 러시를 하듯 성을 계속 쌓는 형태였습니다. 동쪽으로는 여진족이 있기에 힘들었고, 한 방에 어떻게 해보려다 안 됐었죠. 북쪽부터 동쪽, 현 함경도 일대까지 진출한 것은 세종 때, 조선의 국력이 강했고 여진족이 약했을 때였습니다. 그만큼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죠.

+) 한반도의 허리라는 표현이 있던데, 사실 그보단 모가지(...)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말 해 평양-원산선까지 진출하는 것과 압록-두만강까지 진출하는 것은 격이 달랐다는 것이죠. 이 때도 그랬습니다. 북진하는 각 사단은 100km를 훌쩍 넘어 최고 180km에 달하는 정면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안 그래도 산악지대가 많은 곳이라 구멍이 숭숭 뚫렸죠.

이 문제점을 모른 건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간격을 메꾸려고 노력은 했죠. 병력이 부족했냐 하면, 많이 놀라실 것 같긴 한데 병력 자체로는 크게 안 밀렸습니다. 오히려 이때까지만 해도 숫자로는 앞서기도 했죠. 절반 이상이 국군이고 이들 대부분이 신편돼 훈련중이기 때문에 (당연히 38선 이남에 있었죠) 실전력은 안 됐습니다만... 문제는 중공군과 직접 맞서는 병력이 부족했고, 보급 수준 역시 좋지 않았다는 것이죠. 다시 말 해 이 때 청천강 선에서 멈추고 전력을 증강시켰다면 중공군을 몰아낼 수 있었거나 못 해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휴전이 됐을 겁니다.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죠.

서부전선의 주공은 2, 25사단으로 구성된 9군단, 좌측을 24사단, 국군 1사단의 1군단이 맡았고 우측은 7, 8사단으로 구성된 국군 2군단이 맡았습니다. 큰 피해를 입은 기병사단은 예비로 빠졌고, 이와 함께 예비대로 편성된 것이 터키 여단이었습니다. 24일에 시작된 공세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전황은 단 하루만에 바뀌었죠.

우선 이번 편에서는 동쪽의 상황을 얘기하겠습니다. 서쪽은 총퇴각과 연결해서 다뤄야 될 것 같네요. 동고서저의 지형으로 서쪽이 워낙에 주목받는 게 한국이라서 -_-; 동쪽은 (더 중요한 전투를 치러도) 순위가 밀립니다. 지금 당장 다시 전쟁이 벌어져도 그럴 것 같네요. 그래도 빼기에는 너무도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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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10군단이 26일에 총공격을 했다고 하지만, 딱히 어느 시점까지 준비해서 한 건 아니었습니다. 원산항을 통해 보급과 증원병력이 도착하면서 계속 진격하고 있었으니까요.

군단장 알몬드는 미 7사단에 혜산진으로의 진공을 명령합니다. 국군 1군단에게는 동해안 방면으로 북진을 맡겼고, 수도사단과 3사단이 병진했죠. 그 동안 미 1 해병사단에게는 장진호를 최대한 빨리 점령해서 군단의 좌측을 보호하게 했습니다. 그 동안 상륙하는 미 3사단은 북진하는 병력을 대신해 원산 일대의 방어를 맡겼죠.

문제는 가는 길목에 있던 황초령이었습니다. 해병대는 가는 길에 중공군과 계속 전투를 치릅니다. 중공군은 처음 투입된 4개 군 중 1개 군, 3개 사단을 여기에 투입했고 해병대는 일주일 동안 이들을 뚫으며 전진해야 했습니다.

처음에 해병대를 상대한 것은 124사단, 여기서 해병대는 전사 46명, 부상 262명 정도의 피해를 입습니다. 반면 적 124사단의 피해는 무려 7천명이었습니다. 별 피해 없이 적 사단 하나를 없애버린 것이죠. 이후 124사단은 공세에 참가하지 못 합니다. 이 때 생포된 중공군은 "경험도 상상도 못 해 본 사격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스미스 사단장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10일에 소속이 다른 중공군을 생포했기 때문이었죠. 126사단 소속이었습니다. 적이 병력을 교대했다는 증거였고, 사단 단위가 아닌 군 단위의 적이 개입했다는 증거였죠. 하지만 군단장 알몬드는 진격을 독촉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미스가 한 것은 명령불복종에 가까운 느린 진격이었습니다.

미 8군의 총공세가 예정되면서 알몬드도 애가 탔습니다. 맥아더의 심복이자 그 덕분에 미 8군과 대등한 입장이 된 그로서는 최대한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 때 그가 요구한 것은 하갈우리로 최대한 빨리 진출해 미 8군과의 간격을 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거리만 80km, 안 그래도 넓은 면적을 담당해야 했던 해병대에게 너무도 과도한 요구였습니다. 거기다 당시 북한 임시수도인 강계 쪽으로도 진출해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도 맡았죠.


"병참선 경계, 보급품의 저장, 비행장 건설, 이 세 가지 조건이 구비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스미스는 이런 문제점을 들며 특히 해병대의 전투력을 집중하지 않고는 어찌 할 수 없다며 맞섭니다. 덕분에 보급 및 부상병의 후송이 가능한 야전활주로가 만들어졌고, 하갈우리에는 충분한 탄약이 배치됩니다. 그래도 부족했지만, 이것이 해병대 자신은 물론 10군단 전체를 살립니다.

그 동안 중공군은 서쪽은 물론 동쪽에서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투입된 것은 송시륜이 이끄는 9병단이었습니다. 소속된 3개 군은 각기 한 개 사단씩을 증원받아 12개 사단 12만명으로 증강된 상태였죠.

+) 중공군의 편제는 야전군(집단군), 병단, 군, 사단순이었습니다. 야전군이야 중요도에 따라 달라졌지만 그 이하는 삼각편제입니다. 병단에 군이 세 개고, 군 밑에 사단이 세 개죠. 이 때 중공군은 각 사단당 1만명씩 배정됐으니 그걸 참고로 하면 투입된 중공군을 대충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역시 추정치라 다릅니다. 위만 해도 24만명으로 보기도 하니까요.

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의 작전계획은 간단했습니다. 9병단을 모두 집중해 장진호에서 해병대를 격파한 후 함흥으로 진출, 진격하는 10군단의 후방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포위작전을 위해 작전개시일인 26일까지는 절대 UN군과 접촉하면 안 된다고 했고, 실제 그렇게 했죠.

그 동안 미 7사단은 25일에 혜산진에 도달합니다. 맥아더부터 알몬드는 이 일을 크게 치하했고, 계속 작전을 명령했습니다. 그 동안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역시 계속 전투를 치르면서 길주, 청진, 간단히 6진이 설치된 지역까지 진출에 성공했죠. 이 이후에는 백두산으로의 북진을 미 7사단에 맡기고 이미 점령한 혜산진의 방어에 투입됩니다. 30일에 국군이 혜산진에 이릅니다.

기쁘기야 기뻤겠지만... 이 모든 것은 적의 함정에 걸린 것 뿐이었습니다. 압록강 너머의 중공군에게는 이 곳까지 진출한 아군을 최대한 묶어두는 임무를 맡았고, 승리에 취한 아군은 여기에 걸려들었죠.

26일부터 이 거대한 포위작전이 시작됩니다. 시작은 장진호였죠.

"우리 군단은 너무 분산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정이 있으리라고는 신이 아닌 이상 알 수가 없었다." - 알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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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에 이어 보급항의 역할을 맡은 함흥, 국군 수도사단은 길주-청진까지 진출해 회령으로 진격 중, 미 7사단은 백두산으로 진격 개시, 국군 3사단은 혜산진을 대신 맡은 상황... 하지만 진격이 빠르고 맡은 지역이 많은 만큼 아군은 넓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당시 해병대가 장진까지밖에 가지 않았다는 걸 보면 얼마나 천천히 진격했는지 알 수 있죠.


전투는 거의 장진선 철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해병대는 장진호 동쪽을 7사단에 맡긴 후 유담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진격은 신중해서 1연대는 하갈우리부터 후방을, 7연대는 하갈우리부터 유담리까지를, 5연대는 이를 초월해 진격을 맡았습니다. 여기에 영국 해병 특공대, 코만도도 유담리로 가서 좌익을 엄호하기로 돼 있었죠.

27일 당일, 전개된 중공군은 총 8개 사단이었습니다. 이 중 전면을 공격하기로 한 건 79, 89사단, 나머지 6개 사단은 해병대 전체를 포위합니다. 59사단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를 차단, 58, 76사단은 하갈우리를 공격, 60, 77사단은 후방 고토리를 공격, 80사단은 장진호 동쪽의 7사단을 격파한 후 하갈우리를 공격하는 것이었죠.


27일, 유담리를 공격하던 5, 7연대는 북서에서 중공군 2개 사단의 기습을 당합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죠. 적 59사단이 후방으로 침투하면서 유담리를 공격하던 병력이 고립돼 버립니다. 다행히 덕동고개에는 7연대 F중대가 단독으로 혈전을 벌여 겨우 막아냈죠.

28일, 스미스 소장은 진격중지 명령을 내리고 덕동고개를 지키고 있는 F중대와 연결하는 작전을 내립니다. 5시간의 격전 끝에 연결에 성공했지만 적의 위협으로 다시 철수해야 했습니다. 고립된 F중대는 이번에도 밤새도록 싸워 진지를 사수했죠.

다음 날에는 7연대 내에서 Morris 특공대를 조직해 다시 F중대와 연결작전을 벌입니다. 이번에도... 실패했죠. 그리고 F중대는 이번에도 밤새도록 싸워 진지를 지킵니다.

30일, 알몬드가 하갈우리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겨우 그를 설득할 수 있었고, 함흥, 흥남으로의 철수가 결정됐죠.

우선 5, 7연대와 영국군 코만도가 하갈우리로 가는 게 먼저였습니다. 두 연대는 합동해서 일부는 산악지대로 진출해 적을 상대하고 부상자를 포함한 차량들은 도로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너무 무거운 장비는 폐기하고, 포탄은 철수 전에 모두 소모하고 갔죠.


"악몽과 같은 곳에서 혈로(血路)를 개척하고 나온 지난 5 일간의 낮과 밤은 지금까지 해병대가 겪어 본 일이 없는 최악의 사태였다. ...특히 유담리 부근에서는 매일 밤,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 5연대장 머레이 중령

12월 1일부터 시작된 철수작전, 중공군은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이 와중에도 5일 동안이나 고립됐으면서도 진지를 사수한 F중대까지 구출에 성공했죠. 모든 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은 4일 14시였습니다.

이 작전 동안 해병대는 전사 164, 실종 55, 부상 921명 등 천 명이 넘는 피해를 입습니다. 그 중 비전투손실이 1194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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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우리에서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과 추위 속에서 첫 밤을 보냈다. 우리 중대는 전원이 경계근무에 들어갔다. 중대원들 사이에는 봉우리 위에 중공군 수천 명이 진을 치고있다는 소문이 돌고있었다. 나는 바야흐로 내 생애에 있어 가장 으스스한 밤을 맞고 있는 것이었다." - 딘 웨스틴버그 일병

문제는 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였습니다. 26일까지 간이활주로가 건설되고 있었고, 이 지역을 맡은 전투병력은 겨우 1개 중대 뿐이었습니다. 26일 야간에야 병력을 교대했고 2개 중대가 배치됐죠. 그 외에 공병대가 동쪽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해병대에 전투부대 아닌 게 어딨습니까. 이들 역시 전투공병대였죠.

적이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은 28일 밤, 정확한 병력이 얼마나 됐을지는 모릅니다. 적 58사단 172연대 소속이었죠. 여기 배치된 3대대(2개 중대)는 23:30부터 4시간 동안 혈전을 벌였고, 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50명-_-;을 증원받고 06:30에 다시 몰아냈죠. 한편 비슷한 시각에 전투공병대 역시 고지 정상을 빼앗겼지만 곧 특공대를 조직해 탈환합니다.

하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이 이상을 막는다는 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스미스는 애타게 고토리에 있는 증원군을 기다리고 있었죠. 고토리에서도 급히 증원부대를 보냈지만, 중공군 60사단이 이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어 영국 코만도와 해병 1연대, 미 7사단 31연대 등이 섞인 혼성부대가 편제됩니다. 영국 코만도의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직접 이끈 이 기동부대는 곧 적의 강력한 공격에 휘말렸고, 밤이 되면서 분산돼 버립니다. 드라이스데일은 스미스에게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돌파해야 하는지 물었고, 스미스는 이렇게 대답했죠.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

전사만 162명, 부상 159명, 그 외에 항복한 부대도 있었습니다. 겨우 하갈우리에 도착한 건 400명 정도였죠. 드라이스데일 자신이 중상을 입을 정도의 혈전이었습니다. 이 고토리-하갈우리 사이의 계곡은 "불지옥의 계곡(Hellfire Vallery)"이라는 별명이 붙었구요.

이들의 희생으로 하갈우리는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29일 밤부터 30일 새벽에도 적의 공격이 가해졌지만 겨우 막아낼 수 있었죠. 이렇게 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했던 기간은 해병대가 방어에 성공하면서 끝이 납니다.

"갖가지 소문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소문도 나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가 포위망 속으로 이미 들어와 버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중공군에 둘러 싸여있다는 소리였다." - 제스틴 베어 중사, 32연대 1대대

한편 장진호 동쪽에 배치됐던 미 7사단 31연대 1대대와 32연대 1대대 역시 강력한 공격에 직면합니다. 이들은 적의 포위에 갇혀 모든 장비를 포기하고 개별로 후퇴해야 했죠. 하갈우리에서 급히 이들을 구하기 위해 수색대가 출동했습니다.

이들은 12월 2일 새벽까지 하갈우리로 들어옵니다. 2개 대대와 1개 포병대로 구성된 2500의 병력 중 탈출에 성공한 건 670, 수색대가 구출에 성공한 건 1050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전투가 가능한 건 385명 뿐이었죠. 그 외에 전사자 300명만이 확인됐을 뿐 나머지는 찾지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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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포위망을 뚫을 때였습니다. 하갈우리의 위험이 어느 정도 해소됐고, 5, 7연대도 복귀하고 있었으니까요. 이 때 좋은 소식도 나왔습니다. 아직 40%정도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C-47 수송선이 착륙가능하다는 것이었죠. 이를 통해 4312명이나 되는 부상자가 탈출할 수 있었고, 온갖 물자가 후송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으로 해병대 전체의 탈출도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해병대 역사상 그와 같은 불명예는 없었다."

하지만 스미스는 이를 거부합니다. 활주로 엄호를 위해 2개 대대가 남아야 했기 때문이었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병대도 해병대지만, 기자들도 역시 기자들이었습니다. =_=; 그 유명한 마거릿 히긴스도 직접 와서 후퇴하느냐고 물었다고 하죠. 스미스는 열 받아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리는 다른 쪽으로 공격 중이라고!"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 말장난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해병대에게는 이 말이 또 하나의 힘이 됐습니다. 살고 싶다는 본능과 함께 해병대라는 자존심, 이것이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죠.

12월 5일, 돌파 준비가 완료됐고 6일 새벽에 개시됩니다. 중공군은 이에 맞서 7개 사단을 하갈우리-고토리에 집중했죠. 그 후방에 2개 사단이 대기하고 있었구요. 어차피 길은 하나였습니다.

전투는 하루종일 계속됩니다. 5km 남쪽, 불지옥의 계곡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22시였죠. 날이 밝을 때까지 혈전이 벌어졌고 선봉을 맡은 5연대의 부연대장이 부상당하고 3대대장이 전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고도 진격을 계속해 후속부대까지 모두 고토리에 도착한 것이 7일이었습니다. 전사 103명, 실종 7명, 부상 506명이었습니다.

이제 고토리를 넘어, 황초령을 넘어 함흥으로 갈 때였습니다.

8일 08시에 시작된 공격, 다행히 중공군의 공격은 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송시륜은 예비로 뒀던 병력까지 모두 보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죠. 다리가 끊기자 공중투하로 복구합니다.

마침내 선봉이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에 도달했고, 함흥으로 향합니다. 미 3사단이 이를 맞아줬죠. 모든 부대가 함흥에 진입한 것은 12월 11일 21시였습니다. 전사 75명, 실종 16명, 부상 256명이었죠.

이렇게 장진호 전투는 모두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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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감사 그 자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녁이면 그 밤이 샐 때까지 견딜 수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인생이 짧게도 또는 영원 같이도 느껴지는 세계다. 여기에서 해병대원에게 "크리스마스날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일을 달라."라고 대답하는 세계인 것이다." - 종군기자 던컨

장진호 전투의 승자는 해병대도 중공군도 아닌 동장군이었습니다. 영하 30도에서 40도까지 내려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아니 위도를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추운 개마고원이었죠. 미군은 물론 중공군도 이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미군의 경우 이런 혹한에서의 전투는 경험해 보지도 못 했고 (2차대전 때 해병대가 어디서 싸웠죠? '-') 이 전투 때문에 그런 교리를 만들게 됐죠.

추위는 모든 걸 방해했습니다. 딱딱하게 얼어붙어서 참호를 팔 수도 없었고, 불발탄이 많이 나왔죠. 수냉식 기관총을 공냉식으로 써도 될 정도의 추위였습니다. 땀을 흘리면 얼어붙기 때문에 옷을 벗고 작업해야 했습니다. 식사에서도, 생리현상(-_-)을 해결할 때도 이게 방해가 됐죠.

특히 부상병들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조금만 놔둬도 동사했죠. 미군은 이런 동상 환자들부터 동사자들까지 최대한 데려갔지만, 어쩔 수 없이 가매장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미군 역사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준이라고 하죠. 역시 미군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 이런 추위에 지친 것인지, 아니면 해병대답다고 해야 될진 모르겠지만 주변에 총알이 떨어지는데도 소대장이 깨우기 전까지는 원자탄이 떨어져도 깨우지 말라고 한 병사도 있었습니다. (...) 그 외에 지혈은 참 잘 됐다고 하네요. 피가 얼어붙어서 -_-;

이 전투에서 해병대의 피해는 전사 463명, 후송 후 사망자 98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 비전투손실 3659명이었습니다. 비전투손실의 대부분은 동상이었습니다.

그나마 피해를 이 정도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스미스 장군의 조치였습니다. 하갈우리에 대규모 보급품을 쌓아두고 활주로를 건설해서 보급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고, 부상자들을 수송기로 보낼 수 있었죠. 그리고 해병대 자신의 능력과 이 과정에서도 계속된 공군의 지원이었습니다.

1차 공세에서 중공군은 미군은 후방만 막으면 지리멸렬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공군과 포병의 화력에만 의지하는 겁쟁이라는 거였죠. 하지만 해병대는 그것을 아주 처절하게 깨뜨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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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을 갖추지 않은 중공군 약 20명이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능선 뒤쪽에는 그보다 더 많은 중공군들이 손을 머리 위에 얹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얼어있었으며 모두 감각이 마비돼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적개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곳에 있는 것이나 우리가 한국에 온 것이나 매한가지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명령 때문이니까" - 폴 마틴

중공군 9병단은 원래 훈련을 받고 장비를 충분히 받은 후 전쟁에 투입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취소하고 급히 투입해야 했죠. 동계 피복도 제대로 준비돼 있지 않았고 보급 면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하루에 감자 두 알 먹고 싸우는 수준이었죠. 그래도 국공내전의 경험으로 작전을 짜기는 했지만 이를 제대로 실행하기에는 준비도 훈련도 돼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전사자는 최고 4만까지 추측합니다. (공식 전사나 기록이 없어서 전투 전반적으로 숫자가 왔다갔다하죠. 거기다 전사와 동사를 구분하기도 힘들구요) 여기다 폭격으로 인한 전사자 역시 1만 가량으로 추측하죠. 각 군은 미군을 공격하다가 밀렸고, 시간이 가면서 얼어죽어 갔습니다. 아무리 많은 병력이 투입됐다 한들 전투 한두번 후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하고 동상으로 대부분의 병력이 죽어가게 됐고, 미군이 탈출하는 걸 눈 뜨고 보내줘야 했죠. 아예 힘이 빠져서 투항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작전 자체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유담리에서 5, 7연대를 포위섬멸하는데 실패했고, 하갈우리를 점령하는데도 실패합니다. 특히 하갈우리를 점령하지 못 한 게 컸습니다. 활주로와 보급품이 쌓여있는 곳을 미리 선점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중공군의 문제점이 모조리 드러난 전투인 거죠. 지휘관이었던 송시륜은 보급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참전한 지휘관들 역시 미군의 힘을 알게 되고 38선에서의 휴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모택동은 이를 거부했지만요. 서부전선에서의 상황 및 UN군의 총퇴각이 너무 어이없이 진행돼서 장진호 전투를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이죠.

가장 큰 것은 해병대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9병단 전체를 소모한 것이었습니다. 미 7사단과 국군 1군단은 큰 피해 없이 함흥으로 후퇴할 수 있었죠. 해병대가 군단 전체를 살린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이들은 전투 이후 피해를 복구하느라 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 합니다. 3차 공세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장진호 전투는 곧 한국을 살린 전투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죠.

+) 별로 상관 없는 얘길지 모르겠는데... 북한의 공식 전사에서는 이 포위 작전을 한 걸 북한군이라 쓰고 있네요. -_-; 중공군은 거들 뿐? 지들이 뭘 했다고...

현재까지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의 자랑 중 하나이자 혹한기 전투에 대한 중요한 경험 중 하나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구축함에 장진의 지명을 넣었는데... 이름이 쵸신(chosin)이죠. 장진의 일본식 독법입니다. -_-; 그 때 일본식으로 적힌 지도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좀 바꿔주면 안 되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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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서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 김동리, 흥남 철수

서부전선에서는 11월 29일에 평양방어선으로 철수, 12월 5일에 평양에서 철수가 시작됩니다. 15일까지 이 총퇴각이 완료되죠.

문제는 동부전선의 10군단이었습니다. 이미 원산에서 함흥으로 보급항을 옮긴 상황이었고 원산에 남은 병력은 4천 정도, 이들은 아군의 퇴각과 함께 11월 9일에 해상탈출했죠.

13병단 예하 42군이 이미  남은 10군단은 흥남을 통해 해상탈출해야 했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이 적 9병단을 상대하는 동안 아군의 철수는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해병대가 함흥-흥남에 도달한 11일까지 모든 부대가 집결에 성공했고, 동북쪽은 국군이, 서쪽은 미군이 맡게 됩니다. 국군을 상대하던 북한군은 기습을 통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막을 수 없었죠. 중공군은 해병대를 따라 함흥-흥남 교두보에 도달했지만 그 때는 이미 아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짜고 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는 10만에 달하는 피난민이었습니다. 흔히 이들이 전부고 모두 데려갔다고 하지만 아군의 방어선 밖에도 비슷한 수의 피난민들이 존재했죠. 아군은 이들의 출입을 철저히 막습니다. 적이 얼마나 섞여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죠. 이건 아군의 후퇴 과정에서 계속 벌어집니다. 아군의 품 안에 들어온 이들은 같이 데려갔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최대한 거리를 두고 경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폭도 많았을 거구요.

더 이상의 피난민들을 차단한 상황이었지만, 이미 들어온 피난민들 역시 문제였습니다. 미 10군단에는 피난민들도 같이 데려간다는 계획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을 설득한 것이 한국판 쉰들러라 불리는 현봉학과


"우리 군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철수하겠지만, 더 큰 문제는 국군이 북진할 때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던 지역 주민들이 이제 반동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피난을 원하면 전부 후송시킬 작정입니다. 그러하오니 미 제10군단에 이들의 수송 지원을 협조해 주십시오."

당시 1군단장 김백일이었죠. 이들은 알몬드에게 피난민들을 최대한 같이 데려가야 된다고 설득합니다. 우리를 믿고 왔으니 우리가 책임져야 된다는 것이었죠. 알몬드는 자리가 빈다면 피난민을 태우겠다고 약속합니다.

+) 친일 청산 문제와 함께 김백일이 흥남 철수에서 역할을 안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국군 내의 기록에서도 미군의 기록에서도 김백일이 이를 반대했거나 상관 안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현봉학의 역할이 더 컸다 해도 김백일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수 없어요. 실제 국군이 제일 먼저 철수한만큼 상관 안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구요. 친일파인 걸 문제삼다 하더라도 이 때의 공은 인정해야 됩니다.

14일부터 시작된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격, 하지만 북한군은 이제 막 재건돼 공격력이 약했고, 중공군은 해병대를 상대하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습니다. 바다와 가까웠던만큼 해공군의 지원이 계속됐고, 공간이 좁아진만큼 방어하기도 쉬웠죠. 단 이틀의 공격으로 중공군은 북한군에게 공격을 넘겼고, 북한군의 공격 역시 비교적 쉽게 막아낼 수 있었죠.

16일부터 국군의 승선이 시작됩니다. 17일까지 1군단이 모두 승선했고, 미 10군단의 엄호 속에서 흥남을 떠났죠. 이어 10군단의 철수가 계속됩니다. 덩케르크처럼 몸만 빠져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총 10만 5천명의 병력과 각종 차량 17500대, 각종 물자 35만톤을 실은 상상하기 힘든 정상적인 철수작전이었죠.

하지만 이 작전을 "기적"이라 하는 것은, 정말 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갔다는 것이겠죠.


여기에는 국군도 미군도 없었습니다. 그저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가려는 노력만 있었죠. 총 193척이 동원된 작전에서 함께 철수한 피난민들은 9만 8천명에 달합니다.

특히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주목됩니다. 애초에 항공유를 실었던 배이니만큼 안전을 이유로 그냥 철수해도 크게 상관 없는 상태였죠. 하지만 선장 라루는 최대한 피난민들을 태웠고, 무려 1만 4천의 피난민을 태우는 데 성공합니다. 가장 늦게 떠난 배 중 하나였구요. 현재도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습니다. 부산으로 가는 길에 이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죠.

+) 그리고 피난민들은 항공유가 든 드럼통 위에 불을 피워 선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죠 (...)

철수가 완료되고 미처 못 실은 보급품을 불태우고 떠난 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말 그대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죠.

뭐... 그렇다고 뒷 일이 다 행복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승선 과정에서 가족과 떨어진 이들은 이산가족이 됐죠. 북한에 가족을 남기고 간 이들은 영영 만나지 못 하게 됩니다. '굳세어라 금순아'가 이런 한을 잘 말해주죠.

이렇게 동부전선의 상황은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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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린언니
12/10/28 17:27
수정 아이콘
슬슬 김영옥대령님이 오실 차례군요!
12/10/28 17:54
수정 아이콘
리버 스캐럽이 하나씩 차 가는 상태에서 달려드는 저글링 대부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려나요...
wish buRn
12/10/28 18:52
수정 아이콘
승자의 인명 피해가 더 큰 경우는 제법 많지만
장진호 전투에서의 중국측 피해란..-_-;;

아.. 좋은 글 잘봤습니다 ^^;;;
12/10/28 19:05
수정 아이콘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 중공군의 11-12월 대공세에 대하여.
12/10/28 19:16
수정 아이콘
맥아더를 보면 국제정치적 식견이 없는 총사령관이 얼마나 무능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Je ne sais quoi
12/10/28 19:5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구출작전이 정말 굉장했군요.
12/10/28 23:11
수정 아이콘
엄청난 전투 였군요...
항공유 드럼통위에 불피웠다는 이야기가 웃기면서 무섭습니다..1만4천명이 타있는 배에서 말이죠
blue wave
12/10/29 17:48
수정 아이콘
우리가 서있는 대한민국이 정말 놀라운 우연과 기적으로 세워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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