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8/21 23:36:29
Name 후추통
Subject [일반] 칠종칠금-서-
후추통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면중 제갈량을 가장 띄워주는 것 중 하나가 남만정벌의 칠종칠금이죠. 하지만 이런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남만정벌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시원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문열의 삼국지 역시 정사를 참고했다고는 하나 이에 대한 말은 그냥 훌쩍 넘어가 버리죠.

제목은 칠종칠금이지만 시작은 후한말 유언부터 시작할것 같습니다. 일단 먼저 몇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1. 유언은 왜 궁벽한 촌구석인 익주목을 스스로 맡아서 들어왔나?

2. 법정, 장송, 맹달은 왜 유비의 입촉을 전적으로 지지했을까?

3. 도대체 이엄이 누구길래 제갈량 다음으로 대우를 받았을까?

4. 이릉대전이 단순히 관우,장비의 복수전 성격만을 가지고 있었을까?

5. 가장 중요한, 제갈량은 "왜?" 저족,강족을 놓아두고 남만을 공략한 것일까?

6. 북벌전에서 군량운송문제만 있지 왜 군량의 출처나 병사들의 보충에 관한 것에 대해 어떠한 언급이 없을까?

7. 촉의 멸망 직전, 초주는 왜 촉 황실의 남만 망명을 극렬히 반대했던 것일까?

천천히 이 질문들에 대해 하나하나 풀어가고자 합니다. 미력한 글이나마 정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아야여오요우유으
12/08/21 23:44
수정 아이콘
재밌겠네요. 이런 건 왠만큼 아는 사람 아니면 글로 쓰기가 쉽지 않는 내용들 같은데... 삼국지 관련해서 일반 사람보다는 많이 알고 덕후라기엔 허접한 애매한 정도인 제 입장에서는 앞으로의 글이 상당히 궁금하네요 특히나 촉빠인 저로서는요 크
사티레브
12/08/21 23:49
수정 아이콘
이 떡밥 내가 물거야
12/08/21 23:50
수정 아이콘
덥썩 한명 더 물어봅니다
12/08/21 23:52
수정 아이콘
아우 떡밥이 풍년이네요.
토모요
12/08/21 23:54
수정 아이콘
덥썩
사티레브
12/08/21 23:56
수정 아이콘
순수 추측(삼국지는 소설 몇개 만화 몇개읽고 흥미로운부분만 정사로 발췌독했던 위빠)

1. 유언은 왜 궁벽한 촌구석인 익주목을 스스로 맡아서 들어왔나?
- 유방도 거기서 잘먹고 잘살았고 그 땅 자체는 중원에서 벗어난 논외의 지역이니 지역의 패자 군벌이 될수만 있다면
딱히 누가 넘보기는 힘든 익주가 좋지 않을까용?

2. 법정, 장송, 맹달은 왜 유비의 입촉을 전적으로 지지했을까?
-익주의 유장은 약했고 손권이든 조조든 누구에게든 먹힐 위기였으니
자신들의 입지를 그들의 세력내에서는 형성하기 어렵다고 판단
근거지가 빈약한 혹은 익주보다 더 공격의 대상이 되는 형주를 가진 유비를 데려오는 방식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함

3. 도대체 이엄이 누구길래 제갈량 다음으로 대우를 받았을까?
- 보급과 인사관리의 짱 아니었나용

4. 이릉대전이 단순히 관우,장비의 복수전 성격만을 가지고 있었을까?
-손권과 전쟁은 언제고 해야하지만 조조->조비 과정에서 위의 개입 없이 유일하게 오와 전면전이 가능한 타이밍이어서?

5. 가장 중요한, 제갈량은 "왜?" 저족,강족을 놓아두고 남만을 공략한 것일까?
-저족 강족은 마초로 억지 가능 으로알고있는데 (다른게 있나봅니다!)

6. 북벌전에서 군량운송문제만 있지 왜 군량의 출처나 병사들의 보충에 관한 것에 대해 어떠한 언급이 없을까?
-음 군량의 조달은 두기의 그것을 보더라도 매우 중요한데 으 궁금하다

7. 촉의 멸망 직전, 초주는 왜 촉 황실의 남만 망명을 극렬히 반대했던 것일까?
-...모르겠다아


기대기대
一切唯心造
12/08/21 23:56
수정 아이콘
7종 7금이 뭔지 몰라도 재미있겠죠?
12/08/22 00:55
수정 아이콘
어휴 아주 그냥 떡밥이 우수수 쏟아지는데 낚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연재 기대합니다.^^

1. 한 지역의 지배자(=실질적인 왕)이 되어 떵떵거릴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외부에서의 침입이 어려운 익주가 제일 좋지 않을까요?
2. 근거따윈 전혀 없는 순수한 추측입니다마는, 법정이나 장송은 요즘으로 치면 임원 승진은 힘들고 기껏해야 부장 정도가 한계인 어정쩡한 세력의 호족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외부 인사를 초빙해서 공신이 된다면 단번에 임원 승진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3. 유비 사망시 제갈량과 함께 후사를 맡긴 탁고대신이자, 유능한 인재였다고 생각합니다.
4. 고대의 국가가, 영토의 1/3을 빼앗기고, 황제의 동생까지 죽었는데, 그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더 이상한 일이겠죠.
5. 인근 이민족 중에서도 특히 남만이 반란을 자주 일으켰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6. 그건 생각해 본 바가 없네요...
7. 차라리 위에 항복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을 것 같습니다. 가후가 장수에게 항복을 권하면서 든 이유와 같은 까닭으로요.
Cherry Blossom
12/08/22 02:51
수정 아이콘
저도 덥썩.

1. 그 당시로부터 200년 전인 후한 건국 시절에 복파장군 마원이 성도의 공손술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예전부터 익주에서 심심하면 왕 대접을 받고 왕을 자칭하던 사람은 있었을 겁니다. 겉으로는 한나라에 충성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황제 뺨치는 권력과 세도를 누리던 사람들이 주로 선택한 곳이, 다시 말해서 중원의 눈치 안 보고 떵떵거리며 잘 살 만한 곳으로 눈독을 들일 만한 곳이 익주라는 곳이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본인의 중원 제패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조건이 붙을수록 더욱요. 당장 형주의 유표도 사실상 황제 코스프레를 하고 다녔을 정도라고 하니... 게다가 타 세력으로부터의 공격을 막기가 '너무나' 용이하다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입니다. 조조가 그토록 한중에서 밥 다 차려 놓고 유비가 홀라당 한중을 먹은 이후로 정군산 전투가 219년이고 촉이 망한 게 263년이니 햇수로만 거의 40년 이상 한중은 북벌의 전초기지이자 위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으니 말입니다. 황제를 자칭했던 원술이 그토록 손쉽게 패주해서 꿀물이나 찾는 신세가 된 걸 생각해 보면, 유언이라는 사람은 중원을 제패할 생각 따위는 없고 그저 떵떵거리는 것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원술보다는 위치 선정이 훨씬 좋았죠. 수춘이요? 그 동서남북이 열린 곳에서 뭔 방어입니까(...)

2.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유비의 불가사의한 매력이 그 첫째요, 유장의 무능함이 그 둘째. 유장의 무능함이라는 건 내치, 논공행상(이게 직접 해 본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만 미칠 듯이 어렵습니다)을 포함합니다.

3. 인망이 있어 유비가 중용했다는 기록이 있군요. 주로 지방 반란을 막는 임무를 받았다고 하는데, 아직 입촉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인망과 내치의 기반이 탄탄하지 못한 유비를 이엄이라는 인물이 돕는다 하면 조야의 인망을 받아낼 수도 있거니와 반란을 줄이는 효과까지 덤으로 받았을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선전용. 물론 유비라는 인물이 인재를 보는 눈 하나만큼은 귀신같은지라 단순히 인망만 보고 등용했을 리는 없습니다마는.

4. 물론 관우, 장비의 복수도 큰 것이었겠습니다마는, 형주라는 지역의 전략적 요충성 및 그 당시 유비와 손권이 생각하고 있던 형주의 경제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떡밥이었을 겁니다. 문제요? 문제라면 형주가 계속된 전란으로 황폐화되어서 경제적 가치가 실제보다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게 문제죠.

5. 이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단독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근처의 반란세력이나 종주국과 같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흉노족 제외). 저족의 경우는 위나라와 너무 먼데다가 성도와 가까워서 뭘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고(그리고 이게 다른 이민족과는 달리 삼국지에서 없는 놈 취급당한 이유라고 봅니다), 게다가 이엄이라는 인물이 또 평정하고 있었으니 쉽게 공략하기는 어려웠겠죠. 강족의 경우는 위나라가 인심을 얻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훗날 공명 군사가 북벌을 할 때 천수/안정/기산 일대가 삽시간에 반기를 들어버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공성이 최소 6개월에 길면 2년이라고 하는 판에 그렇게 삽시간에 그 일대가 위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인심을 장악하지 못 했다는 반증입니다. 더구나 만족을 제압하는 것은 곧 배후를 튼튼히 한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기껏 북벌하러 요시 그란도 시즌을 외치면서 진군하는데 남만에서 반란이오 이런 소리가 나온다면...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합니다.

6. 군량의 출처는 둔전이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고 봅니다. 농서 땅에서 둔전하면서 기산으로 진출한 것이라고 봅니다. 병사들의 보충이야 뭐... 한중이 없으면 익주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병사들은 뽑는 족족 한중 전선으로 보내야 할 판이었으니(게다가 그 지독하게 약한 국가의 능력까지 겹쳐서 이건 뭐 방법이 없었죠)...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문제라서 언급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7. 만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망명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건 중국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았을 테니 훗날 남만을 기반으로 다시 일어난다고 한들 그걸 뒷받침해 줄 명분이나 능력 모두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요나라가 막 일어날 때쯤 해서 석경당이 거란족에게 아버지의 예우를 한 일은 있으나, 바꿔서 말하면 야만족이 되느니 차라리 대접을 그렇게 해 주고 중화인으로서 사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Love&Hate
12/08/22 08:12
수정 아이콘
저도 덥썩.

1. 요건 중국사 초기의 트렌드인거 같습니다. 서주-진-한 모두 익주와 관중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 중원을 차지했습니다. 실패했으나 후한말기에 오래견딘 지방군벌 공손술도 있었구요. 특히 유언이 벤치마킹하고 싶었던것은 유방이었겠죠. 익주로 가서 잔도를 불태운것은 유방에 대한 오마쥬로 보일 정도입니다. 익주에서 힘을 길러서 중원을 차지할 생각이었다고 봅니다. (이후의 유비도 같은 생각)

2. 익주가 유언의 사후 매우 혼란스러웠던것으로 압니다. 알려진 오의 명장 감녕도 사실 익주에서 유장에게 반란을 일으킨뒤 유표를 거쳐 오나라로 가니까요. 사실상 외부에서 온 유언이 갑작스레 익주를 장악했는데 유언의 카리스마로 이어져오던 체제가 유언의 죽음으로 무너졌다고 봐야죠. 유언이 받아들인 외부의 세력과 토착민들의 갈등도 컸습니다. 잦은 반란과 불안한 내부정세에 원래 있던 지역 호족들이 불만이 컸습니다. 그래서 꼭 그들과 유비 조합뿐 아니라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3. 이엄은 탁고대신으로서 후사를 부탁받고나서 제갈량을 견제할 급의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죠. 이엄은 형주에서 유표 아래에서 벼슬을 하다가 유장아래로 넘어가는 인물입니다. 그 후 유비에게 항복했구요. 자신의 사후 유언이 죽은 뒤의 유장처럼 형주(유비)의 세력과 익주의 세력이 반목하는 것을 막을 적임자로 꼽고 후사를 부탁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덕에 이후로 높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죠.

4. 땅을 빼앗긴자가 수복전을 일으키는데 사실 특별한 이유가 필요없습니다. 삼국지 번역가들이 말한것처럼 의협집단이던 유비의 신하들이기에 더욱 불가피한 복수전이기도 하고 형주의 가치도 컸죠.

5. 남만이 반란을 일으킨 옹개와 연계했기 때문이죠. 옹개가 사실 남만이 문제가 아니라 손권과 내통했기에 빠른 진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6. 사실 나옵니다. 애시당초 병사는 한중에서 교대한다고 되어있죠. 그리고 익주의 물산들을 한중의 저장창고에 모아놨다고 하구요.

7. 좋을때야 몰라도 나라가 망하고 가면 가는길 혹은 가서 험한 꼴을 당할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까지는 저의 답변인데..질문을 던지신 의도를 한번 제 마음대로 읽어보자면 칠종칠금과 연관시켜야 할것 같아요. 그래서 1번부터 7번의 질문을 칠종칠금과 연관시켜서 이어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마음대로 제가 예측한 질문의 의도대로 답변을 이어본겁니다.

유언의 행적은 그러했는데 외부의 인사라 익주는 크게 애시당초 익주에는 친 유언파와 반 유언파로 나뉘어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유언부자는 남만과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로 남만은 친 유언파라고 볼 수도 있을것 같네요. 그리고 장송 법정의 인물들은 대표적 반 유언파입니다. 유언의 살아생전에는 유언의 카리스마로 친유언파와 반유언파가 융합되었지만 유언의 사후 갈등이 심해져 버린거죠. 그래서 반 유언파가 유비를 끌어들인거죠. 이엄은 유장휘하에 있었으니 친유언파를 회유할수 있는 인물라고 볼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높은 지위에 오른것이고, 이릉대전의 여러이유중에 하나는 유비에 의해 형주에 봉해져서 손권의 형주침입때 손권휘하에 투항한 유장때문이라고 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이것자체도 친유장세력때문에 일부러 유장을 형주로 보냈습니다.) 손권이 실제로 익주를 흔들기위해 유장을 다시 익주목으로 봉하기도 합니다. 이미 힘없는 허수아비이지만 친유언 세력의 구심점으로 작용할수 있는 유언가를 손안에 넣고 싶으니까요. 남만을 정벌한건 그런 이유겠죠. 남만은 친유언파.(사마가를 비롯한 무릉의 만이가 손권이 형주를 장악한 뒤에도 여전히 친유비파였듯 말이죠.) 옹개는 친유언파 호족. 친유언파 호족인 옹개가 남만과 연합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손권과 내통합니다. 손권밑에는 앞서 말했듯 유장과 그의 아들이 있구요. 다시 익주를 유언가 의 천하로 만들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바로 응징하는 것이구요. 이러한 칠종칠금은 남만을 비롯한 친유언파 세력의 회유의 과정이라고 볼수도 있을것같습니다. 결국 회유로 결집하지 않으면 촉나라 국력이 줄어들뿐이니깐요. 그리고 칠종칠금으로 동맹관계과 된 촉과 남만, 촉과 친유언파 세력의 동맹군이 북벌전을 함께 수행했다고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물자와 군사의 지분의 출저중에 상당부분 남만이 있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촉나라 국력이 좋을때는 같이 합심해서 위를 쳤겠죠. 그렇지만 나라가 망해가던 시기, 국력이 약해진 시기에 남만과 남만 근처 익주 아래쪽에 영향을 끼치던 친유언파는 촉에 반목하는 잠재세력일수 있습니다.(이미 교류가 끊어졌을수도 있구요.) 그래서 남만에 투항하면 투항하러 가는길이나 가서 변을 당할수 있다고 초주가 경고한것이지요.

정도로 칠종칠금과 연결해서 질문하신 의도를 대충 제맘대로 예측해봅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8743 [일반] 칠종칠금-서- [12] 후추통5019 12/08/21 5019 1
38352 [일반] 후추알(8)-추워! 추워! 추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3] 후추통4536 12/07/27 4536 0
38337 [일반] 후추알(7)-더워!더워!더워어어어어!!! [31] 후추통5245 12/07/26 5245 1
37666 [일반] 후추알(6)-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 [17] 후추통5380 12/06/12 5380 0
37652 [일반] 특수전, 그것에 대한 이바구 [12] 후추통5426 12/06/11 5426 0
37649 [일반] 후추알(5)-배려만 바라는 이들(主人님의 요청으로 제목 수정했습니다.) [17] 후추통5099 12/06/11 5099 0
37592 [일반] 후추알(4)신뢰와 장사치(?) [3] 후추통4454 12/06/08 4454 0
37426 [일반] 오늘은 부처님이 세상에 오시다. [21] 후추통4731 12/05/28 4731 4
37380 [일반] 후추알(3)-적반하장? [18] 후추통4377 12/05/24 4377 0
37338 [일반] 순나이퍼, Lock n Load? [28] 후추통6802 12/05/22 6802 0
37288 [일반] 후추알(2)-1983년의 꼬마가 30년을 지나 쓰는 5.18 단상 [14] 후추통5154 12/05/18 5154 0
37277 [일반] [그날]5.18....후추알(1) [7] 후추통5067 12/05/16 5067 3
37271 [일반] 후추통, 인사드립니다. [20] 후추통6586 12/05/16 6586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