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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7/27 00:15:19
Name 자이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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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역사의 현장을 가다 - 칠천량 답사기 3탄


1597년 7월 16일 새벽, 칠천량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리나라 기록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원균과 함께 동행했던 선전관 김식이 남긴 기록입니다.

-  16일 5경 초에 적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포를 쏘며 공격해오니 아군은 창황(蒼黃)하여 닻을 올리고 재빠른 자는 먼저 온천도(칠천도)를 나오고, 둔한 자는 아직 나오지 못하였는데, 적은 이미 주위를 둘러싸 포위하였습니다. 전라 좌수영의 군량선(軍糧船)을 이미 먼저 빼앗겼는데, 주장(主將)은 조치를 잘못하여 여러 전선이 붕괴되어 절반은 북으로 진해(鎭海)로, 절반은 거제(巨濟)로 달아났습니다.

칠천량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혔던 조방장 김완의 남긴 해소실기 중 일부입니다. 두 가지 기록들을 조합하면 15일 밤부터 16일 새벽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략 추측이 가능합니다.

일단 절영도 인근에서 일본 수군과 소득없는 숨바꼭질을 벌인 조선수군이 가덕도를 거쳐 칠천량에 도착한 것은 15일 저녁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요트를 조종하시는 분에게 여쭤보니 칠천도에서 한산도까지 3에서 5노트 정도로 가면 3시간 반에서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칠천량에 진입한 건 한산도까지 가기 어려울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는 뜻입니다. 음력 7월이라 해가 떨어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저녁 7시에서 8시 무렵에는 조선수군들이 칠천량에 진입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그날 밤 2경 그러니까 9시부터 11시 사이에 일본 수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합니다. 대규모 내습이 아니라 대여섯척의 전선들이 침입해서 판옥선에 불을 지른 겁니다. 그리고 밤새 소규모 교전 내지는 대치 상태가 계속되다가 16일 5경 초 그러니까 새벽 4시 무렵 일본 수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됩니다. 어렵게 진형을 유지하던 조선 수군은 이 공격으로 붕괴됩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처럼 조선수군의 전면적인 붕괴내지는 와해, 그리고  이억기와 최호 그리고 원균의 전사와 실종입니다. 그렇다면 저 칠친량 어디에 조선수군이 정박했고, 일본수군은 어디에서부터 공격해왔을까요?

  위키에서 가져온 지도를 보면서 칠천량의 대략적인 형태가 잡히실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기록과 현장 답사를 통해 제가 세운 가설에 불과합니다.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칠천량은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의 해협을 가리킵니다. 지도상에 칠천교라고 나와있는 곳이 폭이 가장 좁은 곳으로 425미터입니다. 편의상 위쪽 진입로를 입구, 아래쪽 좌측의 진입로를 출구라고 부르겟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엽개라는 곳은 출구의 오른쪽입니다. 따라서  엽개의 맞은편, 즉 출구의 왼쪽에 조선수군이 정박했고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 통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칠천량 입구를 바라보는 순간 조선수군이 그곳에 머무를리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북쪽에서 바라본 칠천량은 깔대기 모양으로 출구쪽이 넓고 안으로 들어갈 수록 좁아지는 형태입니다. 엽개나 그 맞은편 해안은 외부에 노출되었습니다. 왜군의 기습을 걱정했다면 머물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입니다. 거기다 절영도 일대의 전투에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수군은 판옥선만 백척이 넘는 대 함대였습니다. 양쪽 해안 모두 백척이 넘는 배들이 정박할만큼 넓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칠천대교를 통과하려는데 요트의 마스트가 교각에 닿을 것 같아서 아슬아슬하게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몇십센티미터의 여유를 두고 겨우 통과하자 칠천량의 남쪽 해안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래쪽 사진이 칠천대교를 통과한 직후 찍은 사진입니다.

  칠천 대교 남쪽을 보면서 전 확신했습니다. 그날 밤 조선수군은 칠천대교 남쪽 해안가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말이죠. 폭이 좁고 물살이 강했던 칠천량 북쪽과는 달리 남쪽은 호수라고 불릴 정도로 잔잔하고 넓었습니다. 거기다 좌측으로 90도 꺽어진 지형이었기 때문에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함대를 완전히 감출 수 있었습니다.

  조선수군은 이 곳에 아마 단위부대별로 나눠서 정박내지는 묘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근처 지명중에 가마골이라는 데가 있는데 동네 처녀들이 가마솥에 밥을 해서 군사들에게 먹였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지칠대로 지친 조선수군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고 뱃전에 몸을 뉘이면서 다음날 고향이나 다름없는 한산도로 돌아갈 것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일본 수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됩니다.

  전투는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을까요? 조선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15일 밤부터 일본수군의 산발적인 기습이 계속되다가 16일 동틀 무렵에 대규모 공세가 이어졌고, 간신히 버티던 조선수군의 전열이 붕괴된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일본수군 지휘관이었다면 양쪽 입구를 틀어막고 판옥선에 배를 붙여서 백병전을 벌일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조선수군의 장기인 원거리 포격전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전관 김식의 장계나 김완이 남긴 해소실기의 기록이나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끄는 12척의 판옥선이 빠져나간 것으로 봐서는 일본군의 공세 역시 치밀하게 계획되거나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원균이나 배설이 탈출에 성공했을리 없었을테니까요.

  일본측 기록은 너도나도 선봉에 서서 싸워서 큰 공을 세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불태운 배의 숫자들이 너무 많은 반면, 노획한 조선군 수급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어서 조선수군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추측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렇다면 조선수군은 왜 일본수군의 기습을 허용했을까요? 제 추측은 이 시점에서 원균의 지휘통제가 거의 붕괴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원균이 취해있었다고 나와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봐서는 성과도 없는 전투가 거듭되면서 좌절한 원균은 술로 시름을 달랬고, 지휘관들은 제각각 불만을 품은 채 야간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의의 기습을 당한 것이죠. 사실 조선수군이 칠천량에 머문 이유도 양쪽 출입구만 제대로 막으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경계선이 돌파당해서 상대방이 안으로 침입했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야간이었다면 어떤 혼란이 벌어졌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이런 좁은 곳에서 야간에 교전이 벌어졌다면 아군간의 오인사격에 의한 피해도 상당할 것 같았습니다. 이런 지옥같은 아수라장 속에서 최호와 이억기는 목숨을 잃었고, 김완은 배를 잃고 무인도로 떠밀려갔고, 원균은 추원포로 도주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조선수군들은 가까운 뭍에 배를 대고 도망쳤을 겁니다. 일본수군이 불태웠다는 대부분의 판옥선들도 아마 이렇게 버려진 것들을 태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완이 붙잡혔을 당시에도 일본수군들이 포로로 잡은 조선인들을 앞세워 빈 배를 불태우고 있는 중이었니까요.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전멸당한것이 아니라 와해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할 것 같습니다. 패배보다는 덜 쓰라리지만 잘못된 정치적인 결정과 무리한 지휘로 인해 임진년부터 승승장구하던 조선 수군이 한 순간에 증발해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조선수군은 남해안의 서쪽끝인 진도의 명량까지 밀려가야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패전 소식이 전해진 그날 백의종군중인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는 것 입니다.

  그럼, 이 패배의 책임은 누가 져야만 할까요? 첫번째는 선조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잘 싸우고 있던 조선수군을 사지로 밀어넣었고, 잘못된 지휘관을 인선했습니다. 두번째는 선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리한 출전을 해서 수군을 전멸시킨 원균입니다. 물론 원균이 처한 상황이나 압박이 상당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부임한지 반년 동안 부하 장수들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고, 전투에서는 우왕좌왕했으며, 결정적으로 야간 경계를 소홀히 함으로서 조선수군을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셈이죠. 최근 원균에 대한 재평가론이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도무지 차라리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했다면 모르겠지만 어떤 부분을 재평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재평가를 해야 한다면 휘하의 전력을 보존해서 한산도로 퇴각한 배설이나 칠천량에서 전사한 최호나 이억기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칠천량을 돌아보고 오는 요트 안에서 뜻 모를 무거움을 느꼈습니다. 부드러운 파도가 치는 칠천량에서 420년전의 어느 뜨거웠던 여름날 밤에 벌어진 일들 때문일까요?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배우는 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지표로 삼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칠천량에서 배워야할 것은 패배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보기 싫다고 외면한다면 더 큰 패배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은 지나온 역사가 증명해주는 일이니까요.

  제대로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수상항주중인 214급 잠수함을 보는 희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순신급 구축함과 214급 잠수함은 현재 대한민국 해군 전력의 핵심입니다. 이들과 마주쳤다는 것은 이 일대의 전략적 가치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요트가 출발한 진해만은 백여년전 일본 해군 연합함대가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대기한 장소입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도고 헤이하치로는 출발 직전 황국의 흥망이 이 한판에 걸려있으니 사력을 다하라는 뜻으로 Z기를 게양했습니다. 우리는 칠천량에서 패배했지만 그것을 딛고 명량에서 승리했습니다. 전쟁, 그리고 바다가 줄 수 있는 운명이 이러합니다. 이러한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느껴야 할지는 각자의 몫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눈시님께서 보내주신 해소실기 번역본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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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BBver.2
12/07/27 10:03
수정 아이콘
감사히 잘 봤습니다 ^^
예전 글을 다시 디벼봤는데, 저는 역시 선조보단 원균 쪽이 더 크다고 봅니다.
보내드린 김완의 해소실기에도 초반 적의 규모가 2척이라 돼 있었고, 그 이전의 전투도 적었던 케이넨이 이 결정적인 칠천량 해전은 아예 몰랐으며 포로가 됐다 탈출한 수군도 "툭 치니 다 도망가더라~"라고 했으니까요.
이미 김완 휘하 병력들의 도주가 보이지만, 원균이 잘 했으면 한산도로 후퇴라도 잘 할 수 있었겠죠. 거기다 지휘권이 붕괴될 정도로 혼란이었다면 모르겠는데, 원균은 지휘권은 그대로 쥔 채 수군 대다수를 춘원포로 같이 끌고 간 것으로 보이거든요 =.=; 이억기, 최호가 원균 따라간 걸 보면 춘원포로 간 건 명령이었고, 원균 도망 후 한산도로 못 가고 싸우다 죽은 걸 보면 이미 그 때는 늦었고....... 이런 상황이요
참 여러 모로 최악 오브 최악이었죠.
앉은뱅이 늑대
12/07/27 11:26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긴 글인데도 참 잘 읽혀요. 부럽 ^^;

원균 재평가론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나오는 것일까요? 막연한 반항심?
어떤 자료도 원균이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기록을 못 본 것 같은데...
Je ne sais quoi
12/07/27 11:42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원균의 재평가는 이뤄져야겠죠.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더 철저하게 말이죠 -_- 선조도 마찬가지일꺼구요.
자이체프
12/07/27 12:09
수정 아이콘
선조나 원균 모두 공동책임이라고 봅니다. 다만 7월 15일의 출격 자체가 오판이었다는 쪽이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선조가 더 원망스러운 것이죠. 지휘권이 유지된 상태건, 혹은 완전히 와해된 상태건 원균의 지휘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춘원포는 현장 답사를 하면서 알아봤는데 지명이 변한 건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칠천량에 들리기 전에 머물렀던 거제도 북쪽의 영등포라는 지명도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칠천량 전투는 오판과 불확실, 잘못된 통제와 야간 경계 소홀이 낳은 비극입니다. 덕분에 잘 싸우던 병사들과 장수들만 희생된 샘이죠. 원균 재평가론은 박정희가 이순신 장군을 과도하게 띄웠다는 반감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일부 작가들이 그릇된 명성을 쫓아서 펜을 놀린것도 문제입니다. 원균 재평가론의 시작은 선무1등 공신 책정을 시작으로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선조와 원균은 악마의 투톱이나 다름 없는 샘이죠. 거기다 현실적인 문제, 그러니까 문중의 개입도 어느정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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