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저는 후배와 함게 부산 모 대학 답사팀과 요트를 타고 진해만을 출발했습니다. 만을 빠져나와서 가덕도까지 갔다가 방향을 틀어서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의 해협인 칠천량을 통과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일부러 무동력선인 요트를 선택한 이유도 당시의 정황과 최대한 가깝게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하지만 바람이 워낙 없던 탓에 엔진을 가동해야만 했습니다. 요트는 3노트에서 5노트 사이의 속력을 유지하면서 바다를 갈랐습니다. 그리고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이 왜 그렇게 형편없이 패배했는지 상상해봤습니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 나온 칠천량 전투에 관한 최초의 기록입니다. 김식이 장계를 올린 날짜가 7월 22일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와해된지 일주일만의 기록입니다. 보고를 받은 선조는 명군에게 알리라고 하는 한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합니다. 대신들이 아무말이 없자 왜 대답이 없느냐고 질타합니다. 그러자 유성룡이 대신들을 대표해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할 말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기분이 조금 누그러든 선조는 출병을 독촉하여 패배했다면서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사실 이순신 장군을 해임하면서까지 조선수군이 공세에 나서도록 얘기한건 다름 아닌 선조였죠. 최근에 유행하는 유체이탈화법이 4백년전에도 씌여진 현장입니다.
칠천량 전투에 관해서는 학계의 연구도 전무하고 논문도 별로 없는 편입니다. 당연히 그럴만도 한게 조선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손에 꼽을만한 패배에다가 제대로 싸우다가 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명량해전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한 짤막하고도 슬픈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칠천량 전투는 왜 벌어졌고, 어떻게 해서 패배하게 된 것일까요? 후배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 얘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육군이긴 하지만 현역 장교로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던 후배는 지휘통제상의 문제점을 얘기했고, 저는 조선수군이 공세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답사에서 칠천량을 관통하면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해봤습니다. 어떤 부분은 찾았고, 어떤 부분은 계속 의문입니다. 물론 제가 찾았다고 하는 부분 역시 저의 가설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얘기는 길어질 것 같습니다.
먼저 칠천량 전투가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596년 겨울 명나라와 일본의 평화협정이 깨지면서 다음해 일본의 재침공이 시작됩니다. 새로 바다를 건너간 일본군이 남해안에 주둔중인 군대와 합류한 채 북진에 나섭니다. 우리가 정유재란이라고 부르는 전쟁의 시작이죠. 흔히 임진왜란과 세트로 취급되지만 전쟁의 양상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일단 임진왜란 초기에 고수했던 '일본식 전쟁'을 포기하고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취합니다. 즉, 자국에서의 전쟁처럼 상대방 영지를 쳐들어가서 영주가 있는 본성을 함락하고 항복을 받는 방식을 버린 겁니다. 한반도에서의 진짜 전쟁은 도읍이 점령당한 다음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죠.
일본군은 두 갈래로 공세를 취합니다. 하나는 한양을 목표로 북상했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초기 점령하지 않고 지나쳤던 전라도 지역에 대한 점령작전에 나섭니다. 이때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점령보다는 남쪽 일부지역에 대한 영구점령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 같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이런 일본군의 공세가 한참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던 7월, 조선수군이 본영인 한산도에서 출정해서 견내량을 빠져나갑니다. 백척에 넘는 판옥선에 일만명이 넘는 대군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때 조선수군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을까요?
그건 당연히 선조를 비롯한 대신들의 닥달(?)때문이었습니다. 정유년 들어서면서부터 수군이 복지부동을 탓하면서 거듭 공세에 나서라고 재촉하지만 이순신장군께서는 가뿐하게 씹어주십니다. 이 와중에 요시라의 간첩사건이 터지고 이순신 장군이 해임되고 투옥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순신 장군은 출전하라는 명령에 가볍게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나가봤자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 수군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한산도해전 이후 일본수군은 바다 위에서 조선수군을 보면 교전을 회피한채 달아났습니다. 일본배가 가볍고 빠른 탓에 추격은 어려웠고, 남해안의 육지는 전부 일본군 점령지역이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추격할 수 도 없었죠.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진을 치고 부산 인근의 가덕도까지 진출하면서 일본 수군의 동진을 막았습니다. 일본군이 육지에서 공세에 나선다고 해도 해상보급이 불가능하면 멀리 진출할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선조와 대신들에게는 승리가 절실했던 시점이었습니다.
역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정유년 초 선조와 대신들의 조급함은 그 전해에 있었던 이몽학의 난에서 열쇠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은 임금과 대신들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쌓여갔고, 그것이 이몽학이 한 때 만명이 넘는 동조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목격한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세워줄만한 승리가 목말랐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이 육지에서 일본군에게 공세를 취한다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결국 남은 건 수군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공세에 나서는 걸 거부했고, 결국 선조는 자신이라면 공세에 나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원균을 대타로 내세웁니다. 이순신 장군과의 갈등으로 충청병사로 나가있던 원균은 화려하게 컴백하게 된 뒷배경은 이런 정치적인 이해득실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원균이 선조의 이런 기대치를 채워주는 시늉이라도 했더라면 감옥에 갇혀있던 이순신 장군은 김덕령 장군의 뒤를 이어서 옥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원균은 선조의 기대를 보기좋게 배신합니다. 정유년 초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은 전임 통제사 이순신의 흔적 지우기에 나섭니다.
‘전 통제사가 부산포 앞바다로 가서 진퇴하며 병위를 과시할 때, 통제사가 탄 배가 적진(賊陣) 가까이 갔는데 조수(潮水)가 물러가 물이 얕아지면서 배 밑창이 땅에 닿아 적에게 배를 빼앗기게 되었을 적에 배 위의 전졸(戰卒)들이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하니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가 노를 빨리 저어 달려가서 이순신(李舜臣)을 등에 업어 어렵게 우수의 배로 옮겼고 이순신이 탔던 배는 선미(船尾)에 연결하여 간신히 안골포로 끌어 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대개 이번 부산의 거사(擧事)에서 우리 나라 군졸들이 바다 가득히 죽어 왜적의 비웃음만 샀을 뿐, 별로 이익이 없었으니 매우 통분할 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제장(諸將)들을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원균이 2월 28일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일부입니다. (실록에는 3월 30일날 실렸습니다) 여기서 얘기한 제장들은 전부 이순신의 부하들이자 현재 원균의 부하들입니다. 이런 리더를 둔 부하장수들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입니다.
“신이 해진(海鎭)에 부임한 이후, 가덕도(加德島)·안골포(安骨浦)·죽도(竹島)·부산(釜山)을 드나드는 적들이 서로 거리가 가까와서 성세(聲勢)는 서로 기대고 있는 것 같으나 그 수가 수만에 불과하니 병력도 외로운 듯하고 형세도 약합니다. 그중 안골포·가덕도 두 곳의 적은 3∼4천도 차지 않으니 형세가 매우 고단합니다. 만약 육군이 몰아친다면 주사(舟師)의 섬멸은 대쪽을 쪼개듯이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長藪浦) 등처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날마다 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부산포(釜山浦)에서 병위를 드날려 보인다면 회복의 계책이 거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버티며 날짜만 보낸다면 한 해를 넘어서지 못하여 우리 군사가 먼저 지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년에 더욱 심하고, 그 다음해는 더더욱 심할 것인데 군사가 쇠잔하고 군량이 고갈된 뒤에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병력을 움직이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신(愚臣)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 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 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 때는 육전(陸戰)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물며 가을이 다 지나고 난 뒤에는 바람이 점점 세지고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질 것이니 배를 부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때는 수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이른바 4∼5월 안에 거사하자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입니다."
정유년 3월 29일자 원균의 장계입니다. 요약하자면 <육군이 먼저 공격한 다음에 수군이 나서겠음>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초기부터 그렇게 부르짖었던 수륙합동작전과 비슷한 얘깁니다. 나가 싸울 수 있다고 해서 자리에 앉혀놨더니 이순신 장군과 했던 얘기가 똑같은 얘기를 한 겁니다. 거기다 너무 늦으면 안된다는 깨알같은 간섭까지 합니다. 이 장계를 처음 봤을때 조선군 정병 30만이라는 숫자를 보면서 어지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거짓말을 했다면 심각한 직무유기인 셈이죠. 어느쪽이든 조선, 그리고 조선수군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기문포의 졸전까지 더해지면서 원균에 대한 선조의 신뢰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당장 선조조차 조선군의 공세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겁니다.
'원균(元均)에게도 아울러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
7월 10일 선조의 말입니다. 선조는 승리에 목말랐고, 원균이 그 갈증을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목마름만 더해주었습니다. 선조는 나를 더 이상 목마르게 하지 말라고 했고, 이런 분위기는 곧장 원균에게 이어집니다. 이제 원균도 이순신과 같은 딜레마에 처합니다. 문제는 이순신 장군은 불합리한 명령은 끝끝내 거부하는 배짱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원균은 그게 없었다는 것이죠. 7월 초에 부산을 목표로 출전합니다만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맙니다. 그 와중에 육군보러 공세에 나서라는 장계를 올렸다는 사실이 도원수 권율에게 알려지면서 갈등이 깊어집니다. 이제 든든한 후원자들은 모두 의심어린 눈초리로 실력을 입증하라며 등을 떠밀어댑니다. 그런 상황에 못 이긴 원균은 7월 14일 한산도를 떠납니다. 백여척이 넘는 배와 일만명이 넘는 조선수군을 이끌고 말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승리를 거듭했던 정예 수군의 출전이었습니다만 통제사 원균 옆에는 선조가 파견한 선전관 김식이 서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부하장수들과 병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꼴보기 싫은 무능한 지휘관과 그를 등 떠미는 윗 사람들 때문에 싸우러 나간다면 누가 싸울마음을 먹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다음날 새벽 칠천도에서 벌어진 조선수군 사상 최악의 참패입니다. 우리는 흔히 칠천량 전투라고 부르지만 당대에는 '한산이 무너졌다' 혹은 '한산의 패전'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수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칠천량 전투의 전후 과정은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납득이 안가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죠. 어쨌든 견내량을 통과한 조선 수군은 북상하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지금은 매립으로 인해 배들이 드나드는게 불가능하지만 가덕도와 육지 사이를 통과해서 부산 방향으로 항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목표는 부산 인근에 있는 일본 수군이었습니다. 칠천량에서 하룻를 머문 조선수군은 다음날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까지 진출해서 교전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은 도망치기 바빴고, 느린 판옥선은 제대로 쫓아가지 못합니다. 이러는 사이 전열은 점점 무너지고 지휘통제가 어려워집니다. 결국 해가 떨어지면서 원균은 퇴각 명령을 내립니다. 지친 조선수군은 퇴각하는 길에 가덕도에 들려서 물을 길으려고 하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당합니다. 약 사백명의 조선수군이 전사한다고 나와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그냥 뭍에 버려두고 떠난 것이죠. 남겨진 조선수군이 어떤 운명에 처해졌는지는 각자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본영인 한산도로 퇴각하던 조선수군은 해가 떨어지자 거제도 북쪽에 있는 영등포라는 곳에 머물려고 하지만 육지에서 일본군의 모습이 관측되자 서둘러 당시에는 온천도라고도 부른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의 해협인 칠천량으로 진입합니다. 칠천량의 북쪽입구에는 엽개라는 지명의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향토사학 자료에 의하면 흘러온 시체에서 나온 역겨운 냄새때문에 엽개라고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엽개 해수욕장의 맞은편 해변에 조선수군이 정박 내지는 묘박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 노출된 상태의 해변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칠천량에 진입했습니다. 420년전 지칠대로 지친 조선수군 처럼 말이죠. 나머지는 다음시간에....
첫번째 사진은 거제도의 조선소 사진입니다. 몰랐는데 거제도가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섬이라고 하네요. 두번째 사진은 거제도와 가덕도를 잇는 거가대교와 그 앞을 지나가던 대한민국해군 구축함입니다. 이순신급이라고 불리는 KDX-2 구축함이고, 헐 넘버가 975인 것으로 봐서는 네임쉽인 이순신함이었습니다. 칠천량 해전을 답사하러 가는 와중에 이순신함과 마주치다니, 묘한 인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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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글링아빠 님// 저도 칠천량 해전의 배경을 정치적으로 보는 측면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런 추정외에는 공세를 재촉할만한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저도 동행한 교수님들과 지휘 경험이 있는 후배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많이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 다음번에 마무리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